(제 3 회)

제 1 장

3

 

그는 남대문에서 광화문을 지나 종로쪽으로 가면서 사람들에게 조선어연구회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기관이 있다는것조차 사람들은 알지도 못했다. 하는수없이 그는 종로에서 우편국에 들어가 연구회에 전화를 걸어 있는 곳을 알아보려 하였으나 연구회에는 전화도 없다는것이였다. 마침 친절한 사람이 있어서 수표동 교육협회에 찾아가보라고 대주었다. 그리하여 수표동에 있는 교육협회에 찾아가보니 조선어연구회는 교육협회 회관의 방 하나를 얻어 곁방살이를 하고있었다. 그러니 간판이 걸려있을리가 없고 사람들이 그런 연구회가 있다는것을 모르는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될 당시에는 그가 평양감옥에 갇혀있었고 그후 중국에 있을 때에는 연구회의 활동소식을 듣고 권위있는 조선어학자들이 거의 망라하고있는 이 민간학술단체를 대단히 돋보았고 하루빨리 연구회와 관계를 갖게 되기를 갈망했었다.

그런데 막상 찾아와보니 연구회는 역시 가난한 조선사람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그 방에는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중년사나이가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고있었다.

이렇게 한산한 조선어연구회는 상상도 해본 일이 없는 리윤재가 도리여 놀라서 어정쩡해 서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사나이가 물었다.

《여기가 조선어연구회입니까?》

《그렇습니다. 누구를 찾으시는지?》

리윤재는 딱히 누구를 만나러 온것도 아니고 무슨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 온것도 아니여서 점직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나는 조선어를 연구하는 한개 학도로서 그저 연구회에 들리고싶어 왔습니다.》

《누구신지?》

《리윤재올시다.》

《아, 그렇습니까. 나는 신명균입니다. 우리는 초면이지만 지상으로는 이미 구면이군요.》

《나도 역시 선생의 선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신명균은 의자를 끄당겨서 리윤재에게 앉기를 권하고 자기도 그옆에 앉았다. 둘이 나란히 앉으니 아주 대조적이였다. 얼굴이 희멀겋고 시원하게 잘 생긴 신명균은 두루마기를 걸치고있어도 도회지풍이고 얼굴이 검고 입술이 류달리 두툼하며 말도 진한 경상도사투리로 투박한 리윤재는 양복을 입은 촌사람 같았다. 나이는 둘 다 30대 후반이였다.

신명균이 리윤재의 류다른 행색을 살펴보다가 물었다.

《어디 먼데서 오시는 길인것 같군요.》

《예, 중국에서 귀국한 길입니다.》

《아, 그래요. 중국에 오래 계셨습니까?》

《한 4년 가있었습니다.》

그리고 리윤재는 신명균이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듯 잠자코 있는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오래전에 중국으로 가려고 나섰다가 국경을 넘지 못하고 녕변에 떨어져 숭덕학교 교원을 한 2년 했습니다. 거기서 3. 1운동에 관계했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여 평양감옥에서 2년 남짓하게 징역을 살았습니다. 출옥후 고향인 경남 김해로 돌아갈것인가, 처음 마음먹은대로 중국으로 갈것인가 하고 망설이다 집에 잠간 들린 후 인차 중국으로 가고말았습니다. 살길없는 가족을 버리고 이렇게 떠돌아다니는게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신명균이 자못 감심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중국에서 풍파를 많이 겪었겠지요?》

《나라없는 조선사람이 어디 있건 풍파를 겪지 않겠어요.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자들의 구차함은 이루 말할수 없지요.

내가 제일먼저 찾아간 곳이 상해림시정부였는데 가보니 기대와는 너무나 어긋났습니다. 리승만이 림시대통령으로 뽑히고도 미국에 앉아서 조선의 완전독립이 아니라 미국의 위임통치를 주장하여 국무총리 리동휘와 정면충돌을 일으켰고 격분한 신채호는 림정과 결별하고 반리승만투쟁을 벌렸습니다.

나는 이런 파쟁에나 가담하자고 고국을 버리고 왔는가고 한탄했고 죽을 때까지 파쟁에는 관계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대학 사학과에 입학하고말았습니다.》

《그렇게 하기 잘했습니다. 속은 텅텅 비여있으면서도 그것을 채울 생각은 안하고 허세만 부리는 <우국지사>처럼 보기 싫은게 어디 있어요.》

《예, 우리는 조선에 관한 학문을 하는것만 해도 그자체가 왜적에 대한 저항이지요. 그런데 안되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대학졸업 1년을 앞두고 <부친사망>이라는 전보가 날아오지 않았겠어요. 그거야 어떻게 외면합니까. 할수없이 돌아왔지요. 그래서 1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중국에 다시 가시겠나요?》

《베이징에 다시 돌아가리라 생각은 하지만 그것이 보나마나 불가능할겁니다. 10년동안 버렸던 가족을 어떻게 또 버린단 말인가요. 이제는 가족에게 발목을 묶여 농촌에 파묻히는 길밖에 없을것 같군요. 초면에 이런 신세타령을 해서 대단히 미안합니다.》하고 리윤재가 열적게 웃었다.

《아닙니다.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하고 신명균은 진지한 눈빛을 하고 리윤재를 응시하며 말했다.

《리선생의 이야기를 듣고보니 느껴지는바가 많습니다. 자신도 가정도 희생시키면서 학문에 투신하는 리선생의 무쇠같은 의지가 부럽습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 조선어연구회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습니까?》

《모든 일이 바로되지 않는 내게서 그런 행운이 차례지겠습니까.》

《고향에 가셔서 가정을 돌봐주고 될수록 속히 서울에 오십시오. 조선어연구회는 리선생 같은분을 쌍수를 들어 환영할거예요.

보다싶이 우리 연구회는 이렇게 가난하고 초라합니다. 그래서 연구회가 자기 성원들의 생활을 보장해주지 못하니 그들에게 겸직은 불가피하지요. 그러나 나라의 말과 글자를 정리통일하고 고수하는것을 천분으로 여기는 우리는 겸무에 시달리면서도 없는 시간을 짜내여 철자법을 연구하고 한달에 한번 또는 두번 모여서 연구결과를 서로 발표하고 토론하여 신철자법을 만들어가고있어요.

물론 연구회가 세운 기본목표는 조선어사전편찬이지요. 말과 글자가 있는 나라에서 사전 한권 만들지 못했다는건 수치가 아닐수 없어요. 더우기 왜놈의 조선어말살정책에 저항하여 우리 말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전이라는 그릇에 모아라도 놓아야 하겠다는것이 우리의 절실한 소원이지요. 사전을 만들자면 철자법의 통일과 표준어의 확정이 선행되여야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선 철자법을 바로잡기 위해서 힘을 기울이고있지요.

그런데 갑오경장후 국문운동이 일어나고 주시경선생에 의하여 이것이 크게 앙양되던것이 선생이 작고한 후 국문운동도 차차 저조해지고 오늘은 조선어연구회에 의하여 그 명맥이 겨우 유지되고있는 형편이예요.》

리윤재는 밥먹고 이런 일만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생각하며 신명균의 긴 이야기를 꿈을 꾸듯 듣고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조선어연구가 일생의 포부였고 생의 목표로 되여있었다. 그래서 이날을 계기로 그는 조선어연구회(후에는 조선어학회)와 운명적으로 련결되게 되였고 그후 일생 변함없이 조선어학회와 더불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갔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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