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회)

제 12 장

2

 

정인선은 창신동하숙집에 돌아와서 아래채에 외따로 있는 자기 방에 들어가 걸치고있던 라사직만또와 백선모를 벗어 옷걸개에 걸었다. 이 만또와 백선모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대예과생의 자랑이라 할만 한것이다.

그는 올해 스무살이다. 귀공자처럼 해말쑥한 얼굴을 받치고있는 가늘고 긴 목의 울대뼈는 류달리 툭 삐여져나와 목소리가 남달리 굵은데다가 말수가 적고 행동거지가 점잖아서 하숙집주인도 동급생들도 그를 한몫 놓고 대하는것이였다.

그가 이 하숙에 온것은 달포전에 고모네가 화동에서 서울의 변두리인 신당리로 이사하여 더는 고모집에 있을 형편이 되지 못했기때문이다.

그때 마음이 다심한 고모는 거의 5년동안이나 데리고있으면서 친자식 못지 않게 정이 든 조카를 영리별이나 하듯 눈물이 글썽해서 짐을 꾸려주었으며 어린아이를 우물가에 내보내기라도 하듯 불안해했었다. 하숙은 아무리 자유로운데는 있어도 역시 영업을 위주로 하는것이니 이 썰렁한 방에 고모의 인정이 있을리 없다.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시절을 고모부의 영향밑에서 지냈다. 그는 처음에는 고모부를 어려워했지만 중등학교 상급반에 올라가고 철이 들면서 너무도 세속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을 느낌과 동시에 왜놈의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며 어떠한 박해에도, 가난에도 굴할줄 모르는 민족의 얼의 화신같은 고모부를 몹시 존경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가 민족주의자인 고모부와는 다른 사상의 길을 걷고있었다. 그 당시 젊은 학생들속에서 사회주의는 하나의 시대적풍조처럼 되여있었고 친구들과 책은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수 없었다.

가정이나 주위환경에서 사회주의에 접근할 아무런 조건도 없는 그에게 사회주의를 알게 한것은 우선 책이였다.

리윤재의 집에는 오랜 신문, 잡지들을 무져놓은 골방에 오랜 세월 누구도 열어보지 않은 조그마한 나무상자가 하나 전해오고있었다. 그것을 《정선생의 상자》라고들 불렀고 이것은 남의 물건이니 손대지 말라고 어른들이 주의를 주어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도 이것을 건드리지 않았다.

정선생이란 정병순이였다. 그는 리윤재가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을 때 가르친 제자였다. 리윤재의 조선어강의(한글의 력사)에 심취되고 그의 애국적인 정열에 감화되여 정병순은 그를 존경하고 따랐으며 조선어연구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었다. 리윤재가 불온교사로서 당국의 지시로 오산학교에서 쫓겨나 서울에 온 후 얼마 안 있어 정병순도 서울에 왔고 옛스승을 찾아왔다.

이틀을 묵은 후 그는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오산에서 적색비밀결사에 관계했다가 이것이 경찰에 적발되여 저는 지명수배를 받고 추적을 받고있는 몸입니다. 제가 이댁에서 체포라도 되는 날이면 선생님에게 큰 화를 입힐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건가?》라고 리윤재가 그의 말을 중둥무이했다.

《내 걱정은 말고 이 집에 꾹 숨어있게. 왜놈과의 싸움에서 우리의 운명은 이렇건저렇건 련결되여있는거야.》

고개를 숙이고있는 정병순의 눈등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는 며칠후에 끝내 외출을 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신 형사들이 불의에 들이닥쳐 리윤재를 종로경찰서로 잡아갔다. 그는 경찰서에 잡혀가서야 비로소 정병순이 체포되였다는것을 알았고 그와의 관계를 따지는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둘이 사제관계 이외에는 아무 다른 관계가 없다는것이 판명되여 리윤재는 한달만에 경찰서에서 놓여나왔다. 안할 고생을 하고도 그의 입에서는 정병순을 원망하는 말이 단 한마디도 나온 일이 없었다.

정병순이 서울에 와서 리윤재에게 준 원고 《조선문의 변천》은 그가 체포된 후 《동광》잡지 1925년 12월호에 실렸고 그후 그가 중국에 망명한 후에도 그의 유일한 소지품이였던 《정선생의 상자》만은 리윤재의 집에 유물처럼 남아서 10여년이나 임자를 기다렸지만 그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정인선은 《정선생의 상자》에 호기심이 동할대로 동하여 하루는 몰래 그것을 뜯어보았다. 그안에는 책이 가득차있었다. 그 책들은 그 당시 조선에서는 읽는것이 엄중히 금지된 사회주의에 관한 책들이였다. 정인선은 이 책들을 몰래 읽기 시작했다. 그가 제일먼저 읽은 책은 고리끼의 장편소설 《어머니》였다. 가혹한 탄압과 극단한 빈궁속에서 사회주의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수 없는 인간의 형상은 그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는 이 책을 한학급에서 가장 친한 친구 허월에게 몰래 빌려주었다. 그대신 허월은 그에게 좌익잡지 《개조》 최근호를 보라고 주었다. 그후 《개조》를 매달 구독하게 된 그는 시야가 넓어지면서 더욱더 현실비판적으로 되였고 사회주의사상에 더욱 접근하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허월이 정인선에게 뚝섬유원지에 놀러 가자고 권했다. 그들이 유원지모래불에 가보니 거기에는 성대예과생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성대예과 독서회 성원들이였다.

그들은 들놀이형식으로 우이동으로, 정릉으로 명소들을 찾아다니며 모이기도 했고 회원들의 집에서 돌려가며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이 모임은 예과생이 아닌 30대의 젊은이가 지도했는데 그는 그저 단심이라고 불리웠고 예과생들의 선배로 알려져있었다. 그러나 정인선은 무명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빡빡 깎은 그를 보는 순간 고모부를 찾아오군 하던 동냥중을 곧 상기했다. 사실 그는 최기봉이였다.

열명의 학생이 모여앉으니 벌써 떠들썩해졌다. 모두가 내노라 하는 수재들이고 20대의 한창나이들이다. 맑스의 저서 한두권을 읽고도 맑스주의에 정통한듯 자부하는치도 있고 통속적인 사회주의서적이나 《개조》잡지에서 읽은 잡다한 지식을 읽는족족 통채로 뱉아놓는치도 있어 그들이 모여앉기만 하면 수닭들이 겨루듯 론쟁이 붙군 하지만 거기에 일정한 방향이 있을리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공통적인것은 반일사상이였다.

누군지 에스빠냐에서 또다시 세계전쟁이 터지는게 아니냐고 한마디 던지는 바람에 화제는 에스빠냐문제로 열기를 띠였다.

그것이 공연한 걱정은 아니였다. 이딸리아에서 파시즘이 대두하고 에티오피아를 침략하자 도이췰란드에서는 정권을 탈취한 히틀러의 나치스당이 베르사이유강화조약을 파기하고 대대적인 군비확장에 나섰다. 파시즘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세력으로 나타난것이다. 파시즘의 확산을 막으려고 프랑스에서 인민전선운동이 일어나고 반파쑈정부까지 구성했으나 불철저한 정책으로 붕괴되고말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인민전선운동이 반파쑈투쟁으로 세계에 준 영향은 컸고 그 결과 올해 2월에 에스빠냐에서 아싸니아인민전선정부가 수립되게 되였다.

그러자 파시스트 프랑꼬의 반란이 일어나고 도이췰란드와 이딸리아의 군사적개입으로 에스빠냐의 인민전선정부는 위기를 겪게 되였다. 그러나 미영프는 불간섭정책으로 도리여 프랑꼬반란군을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드디여 쏘련이 인민전선정부에 군사적지원을 하게 되고 세계의 진보적인 지식인과 근로자들이 인민전선을 구원하려고 의용군으로 에스빠냐에 달려가게 되였다. 그래서 에스빠냐국내전쟁은 세계적인 관심의 초점으로 되였다.

《꼭 에스빠냐에서 적대되는 두 세계가 격투하는 꼴이군.》하고 누군지 그럴듯한 말로 결론을 짓듯 말했다.

《하지만 그건 먼 유럽의 일이고 지금 일본의 파쑈화는 당장 우리의 생활을 위협하고있네. 2. 26사건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나?》하고 다른 학생이 한마디 던지자 에스빠냐문제로 한창 열이 올랐던 화제가 순간에 일본으로 날아갔다.

2. 26사건이란 올해 2월에 있은 일본력사상 최대의 《황도파》군인들의 반란이였다. 지난 2월 26일 새벽 도꾜에 주둔하고있는 륙군 제1사단 1련대와 3련대를 중심으로 장교 24명, 하사관 64명, 병사 1 358명이 봉기하여 수상 오까다, 조선총독과 총리대신을 력임한 내무대신 사이또, 와다나베교육총감을 각각 저택에서 사살하고 중신 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반란군은 정부와 군부의 기관들을 장악하고 가와지마륙군대신에게 요구조건을 들이댔다. 요컨대 아라끼와 마자끼 두 대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황도파》군사정권을 세워 소화유신을 실현하자는것이였다.

물론 반란은 진압되였지만 이 《황도파》군인들의 반란은 일본의 파쑈화를 가속화하는 전주곡으로 되였다.

이 심각한 문제를 놓고 이야기는 또다시 열기를 띠였다.

《2. 26사건이후 인사이동은 많은것을 시사해주네. 우가끼는 총리대신으로 올라가고 그 후임으로는 륙군대장 미나미가, 조선주둔군사령관으로는 관동군사령관을 하던 요령의 능수 고이소가 부임하게 됐다네. 미나미는 반란을 일으킨 <황도파>군인들조차 일본륙군의 암적존재라고 로골적으로 배척한 인물이라네. 이자는 조선주둔군사령관을 할 때도 사이또총독과 대립하여 무단통치를 주장하던 놈이였지.》

《파쑈화로 내달리는 일본이 중국침략을 확대할것은 시간문제이고 병참기지로서의 조선에 대한 수탈과 억압이 더해질것은 명약관화하네. 거기에 적합한 인물이 미나미겠지.》

이렇게 앞으로의 조선의 운명을 놓고 중구난방으로 론의가 벌어졌다.

줄곧 입을 다물고있던 단심이 불현듯 말했다.

《옳습니다. 파쑈일본은 침략전쟁을 확대해나갈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의 자멸의 길이고 우리의 혁명에는 유리한것입니다. 이 유리한 정세에서 우리가 왜적과 싸우는 유일한 길은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힘있게 벌려 전민족이 단합하여 항쟁을 벌리는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난 5월에 만주 무송현 동강에서 열린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에서 조국광복회가 창립되였습니다. 조국광복회는 친일주구를 제외한 모든 조선사람들을 계급, 신앙, 직업, 년령에 관계없이 반일항쟁에 묶어세우기 위한 민족통일전선체입니다.》

그리고 그는 동강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창립선언을 간단히 설명하고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한조항한조항 해설했다.

학생들은 평생 처음 듣는 말에 어안이 벙벙하여 잠자코 있었다. 침묵을 깨뜨리고 한 학생이 물었다.

《조국광복회 회장은 누굽니까?》

김일성장군님이십니다.》

이 단마디 대답에 좌중이 또 한번 놀랐다.

김일성장군님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십니까?》

《진정한 공산주의자이십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의 강령에 공산주의에 관한 내용이 어째 없습니까?》

단심이 한마디한마디를 쪼아박듯 말하기 시작했다.

《현 단계의 조선혁명의 성격에 의하여 그러한 강령이 요구되였던겁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현 단계의 조선혁명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시였습니다. 이로부터 일본제국주의를 격멸하고 민족해방을 성취할 과업과 봉건적토지소유관계를 비롯한 온갖 봉건적잔재를 청산하고 사회를 민주화할데 대한 과업이 나서는것입니다. 이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과업을 수행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혁명이란 제기할수도 없습니다. 혁명의 성격을 옳게 규정하고 그에 따라 수행할 혁명과업을 정확히 제시했다는데 이 강령의 정당성과 생활력이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령은 친일주구를 제외한 각계층의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수 있는것입니다.》

단심의 설명은 조리가 있고 간단명료했다. 더는 아무도 딴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나는 이 독서회에서 여러분이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더 깊이 연구토의하고 앞으로의 투쟁방향을 결정하기 바랍니다.》

그제서야 학생들은 그저 단심이라고만 불리우는 이 선배가 어떠한 인물인가 하는것을 비로소 짐작하고 그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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