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 회)

제 21 장

2

 

이 바쁘고 열광에 들뜬듯 한 날에도 리극로의 마음 한구석은 어두웠다. 거의 한생을 함께 손잡고 같은 길을 걸어온 리윤재에 대한 생각이 이 보람차고 할 일이 많은 날에 더욱 간절했기때문이다. 그의 유가족을 생각하면 죄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며칠후에 그는 만사를 제쳐놓고 광주군 중대면 방이리로 떠나갔다.

고인이 한때 여생을 보내려고 꿈꾸던 방이골과수원의 사과나무들은 임자가 없는듯 자연목처럼 되여버렸고 과수원을 널리 둘러친 찔레꽃울타리는 머루덩굴처럼 무성했다. 과수원 한복판에 있는 농막은 오래동안 손질하는 사람이 없어 버려진 페허처럼 되여버렸다. 이 으쓸하리만큼 괴괴하고 인적기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오막살이에는 머리가 하얀 두 로인만이 살고있었다. 이미 기력이 쇠진해진 김해댁과 근년에 폭삭 늙어버린 정씨였다. 나라가 해방되였다고 도처에서 만세의 환호가 터지고 사람마다 새로 태여난듯 재생의 기쁨을 나누건만 이날을 그처럼 고대하던 두 로인은 아무래도 마음속의 상복을 벗을 길이 없었고 상실의 설음과 원한이 가슴을 더 사무치게 하는것이였다.

리극로가 찾아갔을 때 두 로인은 반가움보다도 서러움이 북받쳤고 가장잃은 원한이 울음으로 터져나왔다.

김해댁은 자기앞에 꿇어앉은 리극로의 어깨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내 아들은 어찌하고 이렇게 혼자 왔소. 리박사?》

《원통합니다!》하고 리극로는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했다. 아마 그도 성장한 후 이렇게 목놓아울어보기는 처음이였을것이다.

이윽고 그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정씨를 돌아보며 물었다.

《묘지가 어딘지 가볼수 없을가요?》

김해댁이 대답했다.

《묘지가 어디 있겠소. 종갑이 함흥감옥에 아버지 면회갔다가 죽은 아버지의 시신이 아니라 화장한 유골만을 안고 돌아왔다오. 왜놈경찰이 와서 그나마도 장사를 지내지 못하게 해서 뒤동산에 봉분도 없이 묻고말았지. 살아서 지지리도 고생만 하던 사람이 죽어서도 한뙈기 무덤 하나 쓸수 없었다오.》

고개를 푹 숙이고있던 리극로가 이윽고 물었다.

《그런데 식구들은 다 어디 가고 이 외진 곳에 두분만이 사십니까?》

정씨가 대답했다.

《종갑은 상제의 몸으로 장례도 못 치른채 왜놈의 징병을 피해 어디 갔는지 아직까지 소식이 없군요. 영애는 공장에서 여전히 무슨 운동인가 하는 모양입디다. 종주는 중학교를 나온 후 대학에 갈 준비를 하느라 공부하러 나갔지요.》하고 그는 옷고름으로 눈굽을 닦았다.

《그동안 누구 찾아온 사람이 없었는가요?》

《일전에 최기봉선생이 왔다갔습니다. 자동차에다 쌀 한가마니를 싣고왔더군요. 신수가 달라져도 우리를 잊지 않고있으니 참 의리가 있는분입니다. 가장이 없으니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는데…》하고 정씨가 또다시 눈굽을 닦았다.

리극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윽토록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이제라도 환산선생의 장례식을 세상이 떠들썩하게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분도 곧 서울로 이사하셔야 하겠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생을 바친 애국자에게 나라가 그만한것도 못해주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일어섰다.

과연 리극로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는 환산 리윤재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신이 위원장이 되여 신문방송을 통하여 전국에 장례에 관하여 알리고 이에 모두 함께 참가할것을 호소했다. 전국각지에서 부조가 모였다. 김구가 만원, 김해국민학교 교직원일동 백원, 이런 식으로 전국각지 각계층의 사람들이 보내온 돈이 20만원이라는 거액에 달했다.

리극로는 이 돈의 절반을 떼여 장례비용으로 쓰고 절반의 돈으로는 비석을 만들었다. 보통사람의 키 한길길이에 3면을 비석임자의 업적에 관한 글로 꽉 채운 이례적인 비석이였다.

비문은 김윤경이 우리 말로 짓고 글씨는 명필인 리각경(조선어학회 리만규의 쌍둥이딸의 언니)이 궁체로 썼다.

그 비문의 한 대목에 이렇게 씌여있다.

《공의 인격은 지극히 청렴하고 결백하였다. 지극히 인자하고 겸손하였다. 지극히 평화스러워 성내는 일이 없었다. 일생의 사업으로는 혀와 붓을 통하여서의 교육이였다. …

국사를 통하여 조선의 넋을 살리기 위하여서는 진단학회(조선의 력사, 언어, 문학 등을 조선학자의 손으로 연구하자는 뜻으로 조직출발한 력사연구단체)를 일으키고… 우리 말과 글을 바로잡기 위하여서는 조선어학회의 중진이 되였다.》

해방후 남조선의 어느 한 출판물에는 이렇게 썼다.

《주시경은 민족혼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우리 말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였고 많은 후배들을 깨우쳐 오늘날 국어학의 바탕을 이루어놓았다. 신채호 역시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는 힘을 기르고저 피로써 국사를 엮었고 민족정신을 웨쳤다.

가난과 탄압의 도가니속에서 오직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싸운 한글학자 리윤재는 왜경의 모진 매에 견디다 못해 감옥의 이슬로 사라진 진리의 사도였다.》

그후 그의 유고저서인 《표준한글사전》이 1947년 12월에 출판되여 사람들은 리윤재를 더욱 깊이 추억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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