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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회)

 제 1 장

 2

 

대형려객기가 태평양상의 하늘을 날고있다. 기안 좌석의 중간쯤 창문쪽에 앉은 70객의 로인이 등받이에 기댄채 창문쪽에 시선을 주고 끝이 없을 대양을 바라보고있었다.

반백의 총이 센 머리카락, 안경으로 굴절되는 조용하나 예리한 눈빛, 입귀에 생긴 굵은 주름살, 헝클지 않는 자세로 하여 범접하기 어려운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곁에 자리를 잡은 코수염쟁이서기도 처음부터 고개를 수굿한채 조는듯 눈감고 앉아있다.

창문에서 눈을 떼고 등받이에 젖힐듯 뒤머리를 박은 로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카나다 H시의 챠일드인쇄공업회사 사장인 리성원이다. 지금 그는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진행된 국제인쇄기술전시회에 참가하고 회사일행과 함께 귀국하는 길이였다.

그의 귀전에서는 언제부터인지 그 누군가의 웨침이 반복적으로 공명되고있었다.

《할아버지의 요구는 부당한거예요! 진저리가 나요! 진저리가… 진저리가…》

그 앙칼진 잔향은 집요하게 리성원의 뇌리를 휘잡으며 아츠럽게 자극했다. 손녀 리혜림의 목소리였다.

《으음-》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가는 신음소리가 새여나갔다.

갑자기 옆에서 귀속말로 묻는다. 돌아보니 푸른 눈동자가 둥그래진 서기가 코수염을 쓸며 뭐라고 중얼거린다. 어디 편치않은가고 물은것 같았다.

리성원은 일없다는듯 평온한 기색을 지어보이고는 머리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잠시 어디로 사라진듯싶던 손녀가 계속 눈앞에 얼른거린다. 집요하였고 물고늘어질 잡도리다. 피하고싶지만 그럴수도 없는 처지가 마음을 쓸쓸하고 괴롭게 했다.

처음부터 손녀의 음악공부를 반대해왔고 또 지금도 그것을 완강히 주장해오고있는 리성원이였다. 찬성할수가 없었다. 좋으나싫으나 손녀 혜림이는 자기의 기업을 물려받아야만 하는것이다.

리성원은 자기가 바라지 않는 길로 한사코 줄달음치는 손녀의 행동을 돌려세워보려고 은근히 왼심을 썼다. 하지만 자기의 영향력이 별로 맥을 추지 못하는것이 저으기 불만스럽기만 할뿐이였다.

손녀의 주위에는 가장인 자기의 말을 감히 거역하지는 못하면서도 눈먼 인정에 곧잘 빠져버리군 하는 안해와 며느리가 언제나 맴돌고있었다. 지어 자기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리해해주군 하는 오랜 친구인 서해수까지도 약을 올리듯 손녀애를 정열적으로 지지해주는 형편이였다. 마치도 할아버지가 손녀를 독점이라도 할가봐 두려워하는것 같이. 괴이한것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손녀에게 기울이지 못해 안달아하는 그들의 야릇한 사랑이 리성원의 유일한 꿈을 사정없이 짓뭉개버리는것이였다.

물론 손녀가 천성적으로 음악적기질을 타고난 사실만은 할아버지로서 부인하고싶지 않았다. 손녀가 피아노전문가인 할머니를 닮아서인지도 모른다. 걸음마를 뗄적부터 손녀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피아노앞에 앉군 하였는데 리성원의 눈에 그런 안해의 모습은 실로 매혹적으로 안겨들었다.

아, 음악이란 얼마나 좋은것인가. 이 파란만장한 세상살이에 찌들고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이 심신을 다문 얼마만이라도 위로해주고 어루만져주는 유일무이한 진정제가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선률뿐일지도 모른다.

점차 자라면서 손녀는 생김새도 안해의 처녀때 모습을 련상케 했다.

열네돐 생일날에 예상치 않았던 불상사를 겪은 뒤 손녀의 심기는 한동안 저조했다. 리성원은 굳이 그런 손녀를 더 건드리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춘기에는 누구나 예민해지는 법인가본다.

리성원은 이제 시간이 흐르느라면 손녀애도 자기의 심정을 리해할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몇해가 흐르자 손녀의 대학입학문제가 리성원을 당황하게 했다. 혜림이가 서유럽의 어느 음악대학에 류학을 가겠다고 하는것이였다. 이상한것은 손녀애의 사전공작이 있은듯 할머니나 제 에미도 별로 놀라지 않는것이였다.

리성원은 자기의 념원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손녀를 설복하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안해와 며느리가 괘씸했지만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음악을 전공했다고 기업을 계승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음악을 잘 아는 아름다운 녀성이 기업가로 나선다면 그것만으로도 실업계에 대파문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것은 경제인으로서 벌써 한절반 성공한것이나 다름이 없는것이라고 생각된때문이였다.

리성원은 자기의 속생각을 감추고 무척 괴로운 표정속에 심각히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였다. 그리고는 며칠후에 온 가족이 모여앉은 속에 비장한 어조로 손녀의 류학을 승인했다.

《그래, 가야지.》

《?!…》

혜림이를 포함하여 온 가족이 놀랐다. 할아버지와 손녀간에 또 무서운 대결이 일어나고 이번에는 집안의 대들보가 뒤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들을 조이고있던 그들이였던것이다.

손녀는 물론 안해와 며느리까지도 떨리는 목소리로 가장인 자기에게 감사를 표시하는것을 보며 리성원은 속으로 흐뭇한 심정을 금치 못했다.

혜림이가 그렇게 류학을 떠나간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몇해가 흘러 얼마 있으면 졸업인것이다.

그렇다. 그는 손녀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있었다. 혜림이는 리성원자신의 운명이였고 가정의 미래였다.

아, 제발 나의 이 마음을 그애가 조금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안내원이 나타나 이제 30분후에 H국제비행장에 도착하게 된다고 알려주었다.

정숙하던 승객들이 가벼운 움직임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성원은 여전히 눈을 감은채 한모양으로 까딱하지 않았다.

어느덧 그는 머리속에서 혜림의 모습이 아쉽도록 사라지며 다가오는 망막속의 한 사나이를 보고있었다.

키는 자기와 비슷하지만 걸을 때마다 약간 굽을사 한 량어깨가 앞뒤로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것이 첫눈에 스포츠형이라는 인상을 느끼게 한다. 유표한것은 그가 왼손잡이라는것이였다. 친절한 웃음을 짓고있는 얼굴이지만 눈빛은 예리했고 록록치 않은 기품이 엿보였다.

리성원이 그를 만난것은 울라지보스또크의 중심부에 있는 어느 한 호텔의 면담실이였다.

이국의 낯선 도시에 온 이방인이기는 호상 다를바없건만 그의 행동에서는 사소한 주눅이나 부자연스러움을 느낄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리성원은 마주앉기는 했어도 자기는 손님이고 주인은 자기를 평양에 있는 조선광명기술연구소 소장 홍승혁이라고 소개한 그 사람인듯이 여겨질 지경이였다.

분명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이기라도 한듯 그는 스스럼없이 인사말을 건넸었다.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리성원은 이러루한 푸접좋은 사람들을 종종 만나보는지라 무심히 고개만 끄덕여보였다.

《챠일드회사가 전시한 인쇄설비들이 인기를 끄는것은 정확도, 색채결합과 선명성, 조종속도가 잘 보장된데 있다고 보는데요.》

추어주는 말에 익숙된 리성원은 역시 익숙된 언사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우리 거래를 해보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좋습니다. 그것이 이 면담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리성원사장선생과 우리와의 협력이 순수 기업활동의 측면에서뿐만이 아니라 동포애적정의 의의있는 사업으로도 되였으면 합니다.》

상대는 기대어린 어조로 친근감을 표시했다.

《신뢰는 말이 아니라 실천행동이라는 말이 있지요.》

《하하하, 동감입니다. 앞으로 믿어보십시오. 우리 역시 사장선생을 믿고 챠일드회사와 기술교류 및 협력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기술교류와 협력도 리윤을 보고 하는 일이다. 필요하다면 광고투자인셈치고 덤핑도 할수 있지만 대방의 구매의지가 확고할 때에는 상승기류를 타야 하는것이다. 대방이 요구하는 통합조종계통의 프로그람들은 인쇄공업이 가장 발전했다는 서유럽나라들에서도 절실한 필요를 느끼는것들이였다.

리성원은 애초 작정된것보다 5프로나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 좀 야박한감은 들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나가는것이고 또 대방의 구매력도 판단해보기 위해서였다.

대방은 전시회에 참가한 다른 나라 인쇄공업회사들에서 개발한 프로그람들의 우단점들과 가격들을 일일이 렬거하면서 집요하게 반박했다.

리성원은 그의 다문박식함에 놀라면서도 요지부동의 자세를 허물지 않았다. 대방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마음에 들면서도 어쩐지 그에 대한 반발심 비슷한것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것이였다.

일단 고자세를 취한 이상 그 어떤 타협과 절충도 허용할수가 없었다. 이런 면에서 리성원은 타고난 천성을 지닌듯 했다.

마침내 실망한 조선광명기술연구소 소장은 알릴듯말듯 한 한숨속에 허리를 펴며 이렇게 말했다.

《사장선생, 오늘일이 당신의 일생에 후회로 남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부디 잘 가십시오.》

랭랭한 눈길이였고 경멸적인 말투였다.

왼손으로 악수를 청하다 흥분된 심정의 실수를 느끼고 다시 오른손을 내미는 평양사람의 나이는 자기와 엇비슷해보였다. 그러나 리성원은 그의 열정적이고 활기에 넘쳐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안겨왔고 또 마음에 들었다.

10여일이나 흘러간 전시회의 나날에 만나본 사람들은 수백명이 되는듯 하였지만 그의 얼굴만이 뚜렷하게 안겨오는것이 이상스러웠다. 마치도 이미전에 어디선가 만나본듯 한 감도 들었다.

어디서 꼭 본것 같은데…

사람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리성원은 눈을 번쩍 떴다. 비행기의 착륙을 앞두고 안전띠를 매라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잠시후 비행기는 H국제비행장에 내려앉았다.

리성원이 필요한 수속절차를 마치고 손님대기실로 나왔을 때였다.

《할아버지!》

리성원은 허둥대듯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

분명 혜림이의 목소린데…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귀여운 한마리의 제비같이 자기에게 와락 안겨드는 처녀를 보는 순간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부둥켜안았다.

옳았다. 손녀 리혜림이였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곱기에 눈에 넣고 다니고싶은, 자기 삶의 전부인 손녀였다.

《어떻게… 어떻게 벌써 돌아왔느냐?!》

《참 할아버지도… 벌써가 뭐예요, 정확히 제 날자에 졸업식까지 마치고 왔는데요 뭐.》

아차, 이런 건망증이라구야.

리성원은 그제야 울라지보스또크전시회가 끝날무렵이면 손녀도 류학을 마치고 돌아올지 모른다던 안해의 말이 떠올랐다.

어쨌든 기쁘기만 한 일이였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혜림이로 하여 리성원은 마음속을 짓누르고있던 울적함도 씻은듯이 가셔진것 같았다.

리성원은 자기의 품에 안긴것이 과연 손녀가 옳은지 확인해보려는듯 두손으로 혜림의 얼굴을 몇번이나 쓰다듬었다.

《종일 그러고계실 심산이세요? 이쪽도 좀 보시구려.》

귀에 익은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래서야 리성원은 몇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있는 안해 하의영을 띄여보았다.

비록 머리가 좀 희슥해보이기는 해도 목이 길쑴하고 살결이 부드러운 얼굴이다. 금년에 나이가 일흔이라지만 나이에 비해 퍽 젊어보인다.

그뒤로 키는 좀 작을사 하나 눈매가 어질고 착해보이는 며느리 안희경이 인사를 했다. 40대 중반의 얼굴에서 웃을 때마다 늘 그러하듯 보조개가 움푹 패여들어간다.

《먼길에 별고가 없으셨소, 형님?》하고 벙글거리며 손을 내미는 사람은 리성원의 오랜 친구 서해수였다. H시에서 그리 크지 않은 완구회사를 운영하는데 리성원이 마음속을 터놓군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마중나온 회사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눈 리성원은 손녀의 손을 꼭 잡고 차에 올랐다.

집에 도착한 리성원은 피곤을 느꼈던지 응접실의 안락의자에 몸을 묻었다. 안해와 며느리, 혜림이도 그의 주위에 둘러앉았다.

리성원이 역시 제일 궁금한것은 혜림이 문제였다.

류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무엇을 하는가고 물으니 손녀는 벌써 시내에 있는 넬슨극장에 출근을 한댄다.

《음-》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할아버지를 보며 리혜림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의미를 종잡을수 없는 이상야릇한 웃음이였다.

《아니, 형님은 반갑지 않으시우?》

뒤따라 방에 들어온 서해수가 리성원의 곁에 와앉으며 건넸다.

리성원은 그를 바라보며 어정쩡한 어조로 대꾸했다.

《기쁘지… 기쁘지 않구.》

그리고는 혜림이에게 얼굴을 돌리고 다소 공식적인 말투로 선언하듯 말했다.

《류학을 마치고 돌아온 너를 축하한다.》

리혜림은 미묘한 웃음을 걷지 않은채 그저 약간 고개를 끄덕이는것으로 답례했다. 예술을 배워서인지 그 모양 역시 률동적이고 매혹적이다.

이때 서해수가 허허 웃더니 누구에게라 없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혜림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순식간에 방문가로 사라졌다. 이어 서해수와 며느리가 약속이라도 한듯 하의영에게로 다가가더니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세운다. 그리고는 응접실 창문쪽에 놓여있는 피아노곁으로 잡아끈다.

리성원은 그 어떤 극을 보는듯 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흠, 이건 무슨 경축음악회를 열 잡도리인가. 이제 혜림이까지 등장하겠지. 보나마나 감독은 저 해수일거고. 관객이 너무 적은게 흠이기는 하지만…

리성원이 속으로 빈정대듯 중얼거리는데 아닐세라 문가에 화려한 무대복을 걸친 손녀가 나타났다.

어디서 생겼는지 알리 없지만 옷을 바꾸어입으니 스물두살을 바라보는 나이보다 훨씬 더 숙성하고 세련되여보인다. 못해도 저 무대복의 가격은 수백딸라는 잘될것이였다. 물어보나마나 혜림이가 할머니에게 졸랐을것이고 안해는 남편과의 격돌을 각오하고 사주었을것이였다.

리성원은 순간 미간을 세웠으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피아노앞에 마주앉은 안해를 보느라니 어느새 꾸중은 잦아들고 손녀앞에 꼼짝달싹 못하는 그에 대한 련민이 솟구쳤던것이다.

혜림이가 《무대》에 나서서 정중히 인사를 하자 서해수가 화답하듯 바스기타를 넘겨주었다. 동시에 박수소리가 울렸다. 세사람이 치는 박수치고는 열렬한편이였다. 그중에서도 리성원의 박수소리가 제일 컸다.

사실 그것은 손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대한 찬사의 표시였다.

길게 등까지 드리운 함치르르한 머리채, 초생달같이 그어진 두눈섭, 빛을 발산하는 옥인듯 한 큰 눈, 휘늘어진 치마속에서도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날렵한 몸매…

안해의 피아노반주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혜림이의 손가락들이 기타의 음들을 짚는데 순간 저력적인 선률이 울려나왔다. 무게가 실리고 박력있게 울리던 리듬이 점차 연연해진다.

《알로하 오에》였다.

혜림의 매력적인 저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구름너머 멀리 있는 곳 언제나 그리운 고향

    봄도 가고 가을도 가고 이해도 꿈같이 지났네

    언제 가나 언제 가나 내 정든 고향으로 언제 가나

    꿈에라도 꿈에라도 내 고향 가고싶어

 

혜림의 세련된 기악연주에 특유의 목소리와 유혹적인 률동이 배합된데다가 반복되는 후렴부분에서 류별나게 박력이 가해지는 마지막소절은 가히 매력적이 아닐수 없었다.

비록 증폭이나 잔향의 효과는 없어도 여운이 짙게 안겨오는 형상이였다. 아까보다 더 큰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처음부터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리성원을 주시하고있던 서해수는 의아쩍은 생각이 들었다. 손녀의 음악공부를 시답지 않게 여기는 리성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그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리성원의 표정은 얼마나 진지하고 감동적인가. 정녕 혜림이의 《공연》이 저 엉큼한 령감의 마음을 울린것일가.

실은 《음악회》를 발기한 서해수까지도 이러한 성공은 예견 못한것이였다.

혜림이가 곧장 할아버지의 곁으로 다가왔다.

《할아버지, 마음에 드세요?》

자못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있던 리성원은 마치 그 질문에 정신을 차린듯 눈길을 들었다. 안해도 며느리도 서해수도 자기를 주시하고있었던것이다.

리성원은 손녀의 어깨를 감싸며 입을 열었다.

《역시 교육은 필요한것이구나. 넌 공부를 헛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공부가 끝난것은 아니다. 사람은 일생을 배워야 하느니라.》

혜림은 의아한 눈길로 할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며 아래입술을 감빨았다.

리성원은 혜림이가 자기의 말뜻을 리해하든 못하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앞으로는 자기의 의도대로 만사가 흘러가야 할테니까.

리성원은 손녀의 눈빛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한다는것을 직감했지만 모르는체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 려행을 해서인지 피곤하구나. 자, 이젠 식사들이나 하자.》

그가 식사칸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할아버지.》하고 찾는 손녀의 목소리에 리성원은 속이 띠끔했다.

(틀림없이 돈소리가 나올것이다. 이를테면 관람료격이 될테지.)

성원은 짐짓 모르쇠를 하며 혜림에게로 돌아섰다. 하지만 손녀는 선뜻 말을 떼지 못하고 잠시 갑자른다.

갑자기 정적이 깃든 속에 방안에 있는 사람들모두가 두사람을 지켜보고있다.

《무슨 일이냐? 말을 해라.》

한참이나 망설이던 혜림이가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마세요, 할아버지. 난 류학을 마치면서 몇몇 사람들과 로크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롱>이라는 악단을 조직했어요. 그 악단과 함께 음악공연을 하면서 세계일주를 해볼 결심이예요. …아까 넬슨극장이라고 한건 할아버지가 놀라실가봐 일부러 거짓말을 한거예요.》

《?!…》

리성원은 손녀의 입만 바라보았다. 혜림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혹시 자기의 귀가 잘못된것은 아닌지 분간을 할수 없었다. 그는 미간을 모았다.

로크음악이라고 하면 리성원의 세대로서는 아무리 좋게 리해해보자고 해도 음악이라기보다 소음공해라고 하지 않을수 없는 광란적이고 말세적인 장난질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또 그 악단이라는것은 어떠한가. 마치 주정뱅이, 마약중독자를 련상시키는 괴이한 몸짓을 해대며 거센 악청으로 세상이 떠나가도록 질러대는 꼴들이 꼭 무슨 정신병자들처럼 보일뿐이다. 음악과 악단이란 용어가 애당초 가당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승세를 타고 이 세상 그 어디나 홍수마냥 무섭게 범람하는 그것이야말로 가뜩이나 빈약한 사람들의 정신을 파먹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타락에로 이끌어가는 사탄의 괴성이요, 변태적인 몸부림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순진한 손녀, 앞으로 집안의 운명을 걸머져야 할 혜림이가 그 무리속에 끼였다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인가.

《혜림아,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냐?!…》

리성원은 불안에 찬 그 목소리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돌아보니 며느리 안희경이 두손을 가슴에 포갠채 숨을 톺고있었다.

리성원은 자기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한듯싶은 며느리의 목소리에 저으기 안심이 가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자기의 의사와 맞아떨어지는 며느리다. 며느리 안희경의 소원 역시 딸 혜림이가 이 가문의 기업을 물려받는것이였다.

하기에 안희경은 지금껏 늘 공손히 시아버지의 의사에 손을 들어주면서 추종해왔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이 가정안에서 안희경에게는 아무런 재산권도, 결정권도 없기때문이였다.

한편 리성원에게 있어서 안희경은 더없이 고마운 존재가 아닐수 없었다. 며느리로서 시아버지의 의견을 잘 따라서만이 아니였다. 일찌기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었어도 지금껏 혜림이를 안고 이 집을 떠나지 않은것만도 현대녀성들치고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였기때문이다. 남들이 보면 시집에 얹혀사는 더부살이군일지 몰라도 리성원에게는 며느리가 진정 하늘이 준 복이라 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리성원은 며느리가 일일천추로 고대하는대로 혜림에게 자기의 기업을 넘겨주는것으로 보답을 해줄 심사였다.

《어머닌 좀 가만계셔요.》하고 제 어머니를 제지시킨 혜림이가 할아버지에게 바싹 다가들었다.

《할아버지, 그러니 새로 조직한 우리 악단에 투자를 좀 해주세요.》

《응? 뭐… 뭘 말이냐?!》

《아이참, 내 말 들으셔요? 자금… 돈 말이예요. 지금은 작은할아버지의 방조로 무대복이랑 악기들을 림시로 임대하고있는데 이젠 완전한 자기의것으로 갖추어야 하니까요. 음향조종설비랑 조명기구들도 있어야겠고… 난 지금 일시적인 흥분이나 들뜬 기분에 그러는게 결코 아니예요. 그러니 손녀의 <기업>에 투자하는셈치고 융자를 해주어요.》

이상하게도 혜림의 요구가 당당하게 들리는 까닭에 리성원은 약간 미소까지 띠우고 손녀의 력설에 귀를 기울이였다.

나도 이제는 어린애가 아니다, 악단과 함께 공연으로 자금을 마련하면서 세상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싶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세대가 포기해버린 꿈과 희망을 나의 눈으로 기어이 찾고야말겠다. …

다음 순간 리성원은 눈앞이 아찔했다. 심한 현훈증이 밀려들었다.

《얘, 혜림아!》하고 안희경이 참다못해 소리쳤다. 그리고는 저로서도 놀란듯 무춤했다가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너를 위해 얼마나 고심하시는줄 그래 네가 모른단 말이냐. 네가 자꾸 그러면… 할아버지의 기대를 정말 네가…》

그는 억이 막혀서인지 아니면 시부모앞에서 무례했다고 생각되여서인지 입을 봉하고말았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리성원은 그때에야 《음-》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이때 서해수가 리성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 시내에서 혜림이네 악단에 대한 소문이 자자합디다. 모레 넬슨극장에서 첫 공연을 한다는데 형님이랑 모두 직접 가보는것이 어떻겠소? 나도 우리 회사 사원들더러 가서 구경을 하라고 시간을 줄 생각이요. 흥행도 되고 악단의 인기도 높여주고… 이모저모로 좋을게 아니겠소.》

아까부터 말없이 눈치만 살피던 하의영이 그게 좋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팽배해진 분위기를 눅잦히려는듯 했다.

《형님, 어떠시우?》

리성원은 다그어대는 서해수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서 광채가 번뜩였다.

옳지, 이 흉칙한이라구. 서해수, 자네가 혜림이뒤에서 부추기고있는줄 내 안다. 그러는 목적은 뭔가? 나의 생각을 너무도 잘 아는 자네가 한사코 나의 뜻을 거역하는 혜림이와 짝자꿍이를 벌리는 의도가 뭔가 말일세.

서해수의 능글맞은 웃음이 오늘따라 비위에 거슬렸다.

《흐음-》하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불며 리성원은 친구를 엷은 미소속에 주시했다.

적어도 이 친구가 혜림이의 동조자, 방조자인것만은 명백하다.

어릴적부터 혜림이는 서해수를 작은할아버지라 부르며 무척 따랐다. 돈벌이밖에 모르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다정다감한 서해수는 리성원의 집에 들릴 때마다 혜림에게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놀이감도 안겨주면서 각근한 정을 기울이군 했다. 혜림이가 학교에 다닐 때부터는 그의 지능계발에 도움이 되는 좋은 책들도 가져다 주고 친자식마냥 데리고 여기저기로 다니면서 의식성장에 여러모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손녀가 자기의 의도에 자주 엇서나가는것을 보며 리성원은 뭐가 뭔지 분간할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착잡해지군 했다.

하다면 래일모레 연다는 로크악단의 공연이라는것도 그렇고 뜬금없이 울려나온 해괴망측한 그놈의 세계일주라는것도 저 서해수가 혜림이의 담을 키워준 《덕》일수도 있는것이였다.

잠시 못마땅한 시선으로 서해수를 흘겨보던 리성원은 혜림에게 뭐라든 답변을 주어야 한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래야만 당장은 지금의 처지에서 모면할수 있는것이다.

그는 다정하게 혜림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서 너희 악단의 공연을 보겠다. 그리고 그 결과를 놓고 결심을 해야겠다. 다른 의견이 없겠지?》

《아이, 할아버지말씀대로 하겠어요!》

《좋다. 그렇게 약속했다.》

희열스런 손녀의 목소리에 비해 리성원의 목소리는 자못 진중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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