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제 1 장

 5

 

집에 돌아온 하의영은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남편이 오는 도중에 회사에 볼일이 있다며 내리는 바람에 며느리와 단 둘이 텅 빈 집에 들어선 그였다.

어째서인지 혜림이는 몇번이나 신호를 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하긴 손녀에게 지금 그럴 정신적여유가 없을것이였다.

하의영은 지금도 방금전에 겪은 일이 눈앞에 방불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가.

그는 오늘의 불행을 손녀가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이 당한것처럼 느껴졌다. 수치와 모멸감에 얼굴을 들지 못하던 손녀가 지금도 눈앞에 생생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자기 집안에 생겨났는지 알수 없었다.

한참 생각에 골몰하고있던 하의영은 서해수의 손전화번호를 눌렀다. 통화중이였다.

아마 적은이는 지금쯤 사태를 해명하고 뒤수습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을테지. 그 사람도 혜림이의 공연준비를 돕느라고 여기저기로 분주히 뛰여다니며 많은 돈을 쓰지 않았던가. 정말 고마운 사람이지. 하지만 결과가…

하의영은 아까 극장에서 방정맞게 호들갑을 떨던 지배인을 되게 다몰아대던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기 같으면 심장이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했을것이였다. 그런데 남편은 마치 연극의 대사라도 외우듯이 침착하면서도 사리를 따져가며 일을 바로잡지 않았던가. 역시 남자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혹시 남편이 이 모든것을 미리 예견하고있은것 같은 생각이 스치는것이였다.

하의영은 며느리를 찾았다.

《혜림이한테 전화를 해봐라.》

안희경은 아직도 축축히 젖어있는 눈굽을 손수건으로 훔치고나서 전화기를 들었다.

《혜림이냐? 왜 집에 들어오지 않니? 다들 걱정을 하는데 빨리 오너라. 할머니랑 얼마나 속상해하시는지 아느냐?》

역시 제 어미가 어미인 모양이다. 하의영은 손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싶어 귀를 기울였다. 안희경이 눈치채고 전화기의 증폭단추를 눌렀다.

혜림이의 울먹이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오늘일은 내가 빚어놓은것이나 같아요. 악단의 친구들은 모두 락심해서 말이 아니예요. 그러니 내가 무슨 체면에 혼자 집으로 들어가겠나요. 우린 고락을 같이하기로 했어요. 난 친구들을 그냥 내버려둘수 없어요.》

묵묵히 듣고만 있는 하의영은 저도 모르게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어이구!》

제 엄마가 무조건 밤늦게라도 들어오라고 지청구를 하는것을 들으며 하의영은 탄식조로 울부짖었다.

《어째서 우리 집안에 이런 괴변만 찾아든다더냐! 관람권은 팔렸는데 구경군들이 오지 않았다는게 이게 괴이한 일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 대체 이런걸 뭐라고 하느냐?!》

안희경은 그러는 시어머니를 부축하고 안락의자에서 일으켜세웠다. 침실로 데려가려는것이였다.

침실쪽으로 몇걸음 옮기던 그들은 현관문옆에 까딱않고 서있는 리성원을 보았다.

자기들의 이야기를 다 들은것 같았다.

안희경은 면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이나 다 들으라는듯 말했다.

《진정하세요, 어머니. 달리는 될수 없는 그런 일도 있을수 있지 않나요.》

안해와 며느리가 침실로 들어가자 리성원은 머리를 쳐들고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잠시후 그는 나른해진 몸을 겨우 끌고 안락의자곁으로 터벌터벌 다가가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저녁식사고 뭐고 이대로 온몸이 땅속으로 잦아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혜림이의 일로 상처입은 자존심과 자선가마냥 뿌려던진 막대한 돈에 대한 미련 같은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후날 오늘 있은 희비극의 진면모가 드러나 온 가족의 저주와 원망을 받는것도 두렵지 않았다. 래일이라도 엇비슷한 정황이 조성된다면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단호히 행동할 그였다. 하지만 지금 그를 괴롭히는것은 다른것이였다.

그의 입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만이 형언할수 있는 처량한 어조의 말이 새여나왔다.

《정석아, 나를 용서해라. 우리 가문의 래일을 위해 네 딸을 모질게도 괴롭힌 이 무정한 아비를 말이다. …》

리성원은 만취한 사람마냥 몇번이나 같은 말을 곱씹었다.

가령 아들 정석이가 자기의 대를 떳떳이 이었다면 오늘의 이런 일은 작가들이나 상상해보라고 내버려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애끊는 정과 무섭게 갈마드는 죄의식속에 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석이가 태여났을 때 온 집안은 경사로 하여 희열에 들떴었다. 리성원의 장인 하필선은 줄곧 벙글거리다보니 유별나게 누런 이를 감출새가 없었다. 그는 애기방의 문돌쩌귀가 닳아먹을 지경으로 드나들며 정상인것도 공연히 걸고들면서 옆사람들을 성가시게 굴었다. 나중에는 외손자를 거두는 일을 직접 도맡아했다. 애가 젖먹을 때와 잠들 때를 내놓고는 독차지하다싶이 품에 안고는 눈은 누구를, 코는 누구를, 입은 또 누구를 닮았다면서 거쉰소리를 내지르군 하였다. 회사일은 부사장인 사위 리성원에게 떠넘기다싶이 하고 제대로 출근도 하지 않았다.

집안의 경제권과 회사의 절대리권을 틀어쥔 외할아버지의 편애속에 정석이는 그야말로 집안의 귀공자로 자라게 되였다.

정석이가 유년시절을 마치고 학교에 다니면서 점차 그 편애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소하고 초보적인것도 제힘으로 할줄 몰랐고 학교에서는 천성적으로 매집좋은 학생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 말을 리성원이 장인과 안해에게 전하자 그들부녀는 공부만 잘하고 건강하면 그만이라고 하면서 정석의 손에 더 많은 돈을 쥐여주었다.

보다못해 리성원은 친구를 통해 정석을 과외권투구락부에 넣어 주먹단련을 하도록 했다. 몇달쯤 지나자 정석은 공부는 아예 걷어치우고 권투에만 미쳐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정석은 같은 구락부의 동료를 사정없이 들이조겨 반병신으로 만들어놓았다. 한학급의 인물고운 녀학생을 놓고 서로 무섭게 짝사랑하던 나머지 중세기 유럽의 무사들을 모방하여 결투까지 벌린것이였다.

피해를 입은 학생의 부모들이 학교에 신소를 한다, 법에 고소를 한다 하고 돌아다녔지만 장인과 안해는 정석이가 룡이 되였다고 박장대소할뿐이였다.

결국 대방이 요구하는 치료비의 배나 되는 돈뭉치를 던져주는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되였다.

그후 어느날 리성원은 우연히 정석이의 책가방을 열어보다가 담배갑과 자그마한 술병을 발견하게 되였다.

아연해진 그는 안해와 함께 정석이네 학교를 찾아갔다.

담임교원과 함께 교장을 만난 리성원은 학교측에서 아들애의 그릇된 품행을 바로잡아줄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교장은 난감해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물론 부모님의 요구를 리해하지 못하는바는 아니지만 우리로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 헌법에도 있듯이 인간의 자유와 개성은 신성불가침입니다. 이건 어느 나라 법이나 마찬가지일겁니다. 만일 교권이나 부모의 권한으로 이것을 침해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위법행위로 될것입니다.》

계속하여 그는 아무리 자식이 미성년이라고 해도 인권은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현대교육과 문명의 최고가치가 아니겠는가고 너스레를 떨었다.

대경실색한 리성원은 아무 말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고말았다.

문제의 해결방도는 찾을수 없지만 아들애가 왜 저 꼴이 되여가는가 하는데 대한 해답은 차츰 선명해지는것 같았다. 정신적인 매, 강한 통제가 필요했다.

하지만 장인과 안해의 검질긴 설복이 리성원을 괴롭혔다.

《너무 걱정말게. 정석이도 똑똑한 애니 인차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겠지. 다른 애들도 다 같고같지 않나.》

《요즘 당신의 신경이 너무 예민해진것 같애요. 뭐가 못미더워서 걱정이예요. 제 자식을 믿어야죠.》

정석이의 미국류학문제가 나섰을 때 리성원은 반대했다. 아무래도 자기옆에 끼고있어야 마음을 놓을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장인과 안해는 그의 견해를 무시해버렸다.

돈이 없는것도 아닌데 가문의 인쇄업을 이을 정석이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최고급의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렇게 미국 뉴욕에 있는 종합대학으로 류학을 간 정석은 처음 몇달동안은 자주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는 지금 세계의 중심에 와있다고, 《세계화》야말로 인류의 리상과 행복을 실현할수 있는 최상의 방도이자 선택이라고, 오늘 전세계가 《세계화》를 향해 질주하고있는데 그에 뒤떨어지지 않게 우리자신부터 《세계화》해야 한다는 소리를 늘어놓군 했다. 그리고는 짬시간만 있으면 송금을 요구해왔다. 마치 하루 세끼 밥이 아니라 돈을 먹고사는가 의심될 정도였다.

그래도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는 그것마저 기특하고 대견한지 아낌없이 돈을 보내주군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일단 《세계화》에 발벗고 나선 정석이니 이제 좀 있으면 세계적인 수준에 이른 권위자가 되여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있는것 같았다.

리성원은 철부지아들애의 환각에 오염되여가는 장인과 안해를 속으로 언짢아했다.

그는 정석이가 류학을 떠난 직후 자기가 만난적 있는 한 미국인을 떠올렸다.

제이코브슨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그는 미국의 인쇄공업을 대표한다고 할수 있는 몇몇 대기업체들중의 하나인 X그룹의 상무취체역이였다. 그의 말이 브라질의 수도에 X그룹이 대규모급의 인쇄공장을 설립하려고 하는데 공동으로 투자하여 합영하자는것이였다.

그 나라는 령토도 크고 인구도 많아 출판인쇄와 관련한 수요가 높을수 있었다. 더 흥미있는것은 그가 내놓은 합영조건이였다. 공장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모든 설비와 기술은 미국측이 전적으로 부담하고 필요한 류통자금의 40%를 리성원의 회사에서 투자하면 된다고 했다.

《아마 이 정도면 챠일드회사로서는 큰 경제적리익으로 될겁니다. 또 우리 미국의 X그룹과 함께 <세계화>를 향해 질주하는 첨단기업으로서의 명예도 얻게 될것입니다.》

제이코브슨은 호들갑을 떨며 미사려구를 늘어놓았다.

리성원은 심사숙고하던 끝에 동의하기로 했다. 장인으로부터 회사의 경영권을 갓 넘겨받은 그로서는 다른것보다도 미국이 자랑하는 고도의 인쇄설비와 기술에 더 큰 매력을 느꼈던것이다. 그것은 회사의 장래발전을 위한 큰 밑천이 될수 있었다.

그는 회사실무진을 미국에 보내여 X그룹의 실태를 료해하고 발전전망을 확인한 후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리고는 위험한 모험을 피하는 관행으로부터 출발하여 적당한 액수로 1차투자를 하도록 했다.

그런데 몇달이 지나도록 브라질에 파견된 실무진으로부터는 공사가 전혀 진척되지 않는다는 소식만이 올뿐이였다. 께름한 생각이 든 리성원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구체적인 실태를 파악했다.

사태를 깨닫게 된 리성원은 눈앞이 캄캄해왔다. 놀랍게도 X그룹은 막대한 채무를 지고 파산직전에 이른 상태였던것이다. 은행대부는 이미 끊긴지 오랬고 수십개나 되는 해내외의 새끼회사들은 매일과 같이 줄지어 파산을 선고하는 판이였다. 오로지 지난날 유명기업체로서의 명색만이 남아있을뿐이였다.

기가 막힌것은 이에 대한 비밀봉쇄작전에 워싱톤당국이 직접 관여하고있는 사실이였다.

정신을 차린 리성원은 즉시 합의내용을 취소한다는 확스를 보냈다.

그런데 한달쯤 지나자 미련방사법재판소에서 판결문이라는것을 보내여왔다.

리성원은 가슴을 움켜쥐고 이를 윽물었다.

거기에는 미국의 명성높은 X그룹의 명예를 훼손시킨 리유로 챠일드회사가 100만딸라를 배상하라고 씌여있었다. 국제적인 성격을 띠는 사기협잡행위를 처벌할 대신 뻔뻔스럽게도 적반하장격으로 미국자체내의 국내법에 따라 일방적으로 판결해버린 날강도적인 행위에 리성원은 격분하지 않을수 없었다.

맞소송을 걸고 몇달동안이나 법정싸움을 벌리던 끝에 챠일드회사는 끝내 20만딸라의 벌금을 물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은행들과는 물론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은행들과의 거래를 절대로 할수 없는것이였다.

이때만이 아니라 그후에도 리성원은 미국의 실업가들과 무수히 교제해오는 과정에 그들의 기업생리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미국이라는 악의 제국의 실체와 존재방식을 몸서리치게 체험할수 있었다.

《세계화》란 뭐가 말라빠진거냐. 그건 미국의 《절대적우위》를 세계도처에 력설하고 온 세상을 《미국화》하자는거지. 그러고보면 미국이란 얼마나 교활하고 파렴치한가. 남을 구슬리고 얼려넘겨 속을 뽑아먹으려다가 그것이 잘 안되면 양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승냥이의 이발을 드러내는것이 바로 미국이야. 이것을 뻔히 알면서도 감히 거역할수 없는것이 이 세상의 가장 큰 비극이지. 그런데 아직도 미국이 제창하는 《세계화》를 앵무새처럼 졸졸 받아외우고있으니…

그는 장인과 안해가 자기들의 개인예금구좌를 털어가며 정석에게 돈을 몰붓는것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외면해버리고말았다.

그 대가가 어떤것인가 하는것을 뼈아프게 확인하던 순간을 리성원은 아직도 잊을수가 없었다.

…이태도 못되여 아무런 기별도 없이 땅속에서 불쑥 솟아나듯 나타난 아들의 자태란 해괴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였다.

수닭머리에 불색물감을 들인 머리카락, 당장 앞뒤로 터져나갈듯 한 모양새의 진바지, 려송연을 물고 장한듯이 문가에 척 기대고 서있는 꼴이란 분명 얼간망둥이였다.

가관은 그것만이 아니였다. 노랑머리에 해골마냥 푹 꺼져들어간 눈확, 젓갈색의 재빛눈에 당장 쏟아질것만 같이 부풀은 풍선같은 젖가슴을 반나마 드러내고 푸들대는 살집이 좋은, 처녀인지 부인인지 가늠이 안 가는 서양녀자 하나가 정석의 등뒤에서 엉치를 흔들어대며 앞에 나서서 괴상망측한 자세로 무릎을 살짝 꺾었다놓았다. 그리고는 정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의 팔을 감아쥐는것으로 자기들이 그런 사이임을 암시하는것이였다.

그런데 정석이는 헤벌쭉하여 녀인의 어깨를 감싸안고 입까지 맞추는것이 아닌가.

그토록 정석이의 미국류학을 념불처럼 웨쳐댔던 리성원의 장인과 안해는 억이 막혀 졸도할 지경이였다. 가업을 이어갈 인재가 되라 보낸 손자가, 천만금도 아낌없이 퍼부은 아들이 천하의 속물꼴로 되여버렸으니 그럴만도 했다.

외형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비정상이라는것을 깨닫게 한것은 정석이가 내뱉은 말이였다.

《난 근간에 와서야 생의 진가를 깨치고있어요. 지금껏 눈을 뜬 소경으로 살았다는 후회가 생겨요. 길지 않은 한생을 무엇때문에 량심이니, 피줄이니 하는 알쑹달쑹하고 따분한 론리에 얽매여 살겠어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 현재의 쾌락과 만족, 그런것들이 모여 즐거운 인생이 이루어지는게 아니겠나요. 량심이란건 스스로 만든 감옥이나 같은거지요.》

리성원은 물론 장인과 안해도 꿈을 꾸는듯 한 표정으로 정석이를 지켜볼뿐이였다.

《앤니와 난 결심했어요. 량심이다, 가풍이다 하는것들이 대체 무슨 의의가 있어요. 나이가 무슨 관계예요. 비록 앤니가 나보다 네살우예요. 그리고 미국인이고… 좋아요. 난 우릴 축복해주려니 생각지는 않아요. 하지만 리해하시게 될거예요. … 글쎄, 혹 영원히 리해 못할수도 있구요.》

《당장 나가라, 이놈! 쓸개빠진 놈!》

리성원은 자기를 잃고 질러댔다. 그의 눈 흰자위에서 붉은 실오리들이 꿈틀거렸다.

《흥, 세상을 전연 들여다보려고도 안하니 고리타분하기란…》

정석이 술을 마셨는지 고개를 가로젓다 뻘건 눈을 끔벅이며 대꾸했다.

《아유, 정석씨! 이쯤 인사를 올렸으니 이젠 그만 가지 않겠어요? 더 있어야 공연히 즐길 시간이나…》

노랑머리계집이 들으라는듯이 주절거렸다.

《하긴 그래.》

고개를 끄덕인 정석은 팔을 휘저으며 장한듯이 년의 어깨를 끼고 나가버렸다.

그날 밤 정석이는 차사고를 일으키고 병원에 실려갔다.

(아, 자식복은 없는가보구나!)

리성원내외는 타드는 가슴을 식힐 사이도 없이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구급소생실에는 의사들이 모여있었다. 시경찰국에서 나왔다는 나이가 지긋한 경관도 보이였다.

리성원은 그들을 헤치고 침대에 다가갔다.

온몸이 붕대투성이인 아들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두팔을 벌리고 허우적이며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리성원은 입을 다셨다. 정석이 그 노랑머리계집을 찾고있었던것이다.

리성원은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고말았다. 하지만 안해는 곡성이다.

이때 그들을 지켜보던 경관이 천천히 리성원에게로 다가왔다.

《환자의 부모님들이신가요?》

리성원은 아무 반응도 없이 코김만 내불었다.

《그렇군요. 아들의 신분을 확인할수가 없었습니다. 한 금발머리녀자가 함께 타고있었다고 하던데 사고후 어디론가 도망쳤는지 그 녀자를 찾을 방도가 없더군요. 운전사쪽이 받기우고 그 옆자리는 안전했으니… 이제 나타나겠지요.》

경관은 사고의 대체적인 전말을 전해주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다행히 그리 큰 충격은 아니니 인츰 깰수도 있겠다고 봐집니다. 차와 부딪치며 입은 뇌타박도 그렇지만 술에서 아직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이지요. 사고원인은 제 보기엔…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술에 만취한데다가 글쎄 녀자와 입을 맞추면서… 이건 현장체험자의 증언입니다.》

그는 명백하다는듯이 마지막말을 잘라말했다.

다음날 아침 정신을 차린 정석의 말을 들으며 리성원은 그 노랑머리계집이 의식을 잃은 아들의 몸에서 돈을 몽땅 훔쳐가지고 미국으로 달아난 사실을 알게 되였다.

리성원은 서해수의 권고대로 정석이의 미국류학을 중지시키고 여러달에 걸쳐 충분한 안정치료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는 자기네 회사에 취직시켰다.

그리고 2년후 정석은 서해수가 소개해준 안희경과 결혼도 하게 되였다.

다행히도 안희경은 착실하고 단정한 녀자였다.

결혼식날에 리성원은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며늘애야, 너는 이 집안을 지켜줄 수호신이다.》

1년후 손녀 혜림이가 태여났을 때 리성원부부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동안 가정에 정을 붙이는가싶던 정석은 미국에 있는 앤니라는 계집과 다시 련계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후로 그가 보내주는 마약까지 몰래 사용하다가 심한 중독에 빠지게 되였다.

더는 헤여나올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정석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때늦은것이였다.

눈에 곱이 가득 끼고 침을 질질 흘리며 마지막숨을 몰아가던 그는 림종을 앞두고 이런 회심의 말을 남겼다.

《난 어쩔수가 없었어요. 오늘까지 난 내 의지로 산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요. 아버지, 난 나 같은 젊은이들이 이 세상에 너무도 많다는걸 잘 알아요. 그리고 내가 살아온 이 땅이 너무도 돈과 향락에 찌들고 부패해졌다는것도. 이 땅에서는 인간의 최고가치라는 자유와 개성이라는것도 그것을 가리우는 치장품, 면사포에 불과하지요. 나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속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것이 비극이겠지요. 정말 이 땅엔 래세에도 다시 오고싶은 생각이 꼬물도 없어요. 아, 내 딸 혜림이는 어찌될는지. 그애한테 벌써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드는군요. 모두에게 용서를 빌어요.》

유언이기 전에 가슴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절규였다.

아들 리정석은 그렇게 갔다. 그런데 오늘은 그처럼 기대를 안고 산 손녀도 지금 이 시각에 와서는 제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의 곁을 떠나가려 한다.

리성원의 얼굴은 무섭게 이그러지고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이제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리성원은 미궁속을 정처없이 헤매이며 끝없는 고독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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