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1 장

 6

 

침대옆의 상두대에 놓인 탁상등빛이 희미해서인지 방천정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리혜림은 아직도 어질증으로 하여 그 뿌연 천정이 빙글빙글 도는듯 했다.

생각만 해도 미칠것만 같았다. 천명의 관람객들이 자기네 악단을 향해 저마끔 종주먹들을 내흔들고있었다. 혜림이와 동료들이 아무리 열성스레 노래를 부르고 기악을 연주해도 그들의 격분은 사그라지기는 고사하고 더 가증될뿐이다.

종시 더 참을수 없는지 하나, 둘 나비처럼 붕 뜨더니 객석의 출입구쪽으로 두팔을 날개처럼 휘저으며 날아간다. 삽시에 객석은 텅 비였다. 악청을 돋구는 극장 지배인의 흉상이 확대되여온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나타나더니 자기를 한팔로 휘감고 훌쩍 몸을 솟구친다.

아, 나는 어디로 끌려 날아가는것일가?! 할아버지, 날 놔주세요!

혜림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얘, 혜림아, 혜림아! 정신을 차려라!》

옆에서 누가 어깨를 흔든다. 이건 누구인가? 가만, 어머니목소리 같은데…

혜림은 감고있던 눈을 흡떴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지금 어디에 와있나?

《정신이 좀 드냐?》

그제서야 혜림은 자기가 환각에 빠져있었음을 깨달았다. 어머니 안희경이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고있었다.

《엄마, 내가 언제부터 누워있었어요?》

《언제긴?! 작은할아버지의 손에 끌려 밤늦게 들어오지 않았니. 그때까지 할아버지, 할머니도 식사를 못하시구 너를 기다렸고… 그래, 할머니가 억지로 떠주는 밥 몇술 뜨고 이 침실로 들어오던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느냐?》

혜림은 어머니의 이야기가 눈앞으로 흘러가는듯 했다.

분명 그랬다. 그때 어머니는 울먹이는 소리로 자기를 질책했었다.

갑자기 설음이 북받쳤다.

《엄마, 정말 그 천명이나 되는 관객들이 어디로 갔을가?》

《벌써 몇번째 묻는거냐? 됐다. 이젠 생각을 돌려라. 할아버지도 말씀하시지 않던, 그까짓 생각 다 잊어버리라구 말이다.》

《난 우리 친구들에게 빚을 졌어. 세상에 재간둥이면 그런 재간둥이들이 또 있을가. 우린 정의와 진리, 사랑과 꿈을 찾자는 한목적으로 마음을 합치고 운명도 합쳤어. 그런데 첫 기슭에서부터 좌초가 되였어. 정말 누가 그랬을가? 혹시 어떤 장난꾸러기가 그랬을수도 있지 않을가, 우릴 골탕 먹이려구?》

안희경은 희미한 속에서 딸의 얼굴을 여겨보았다.

눈을 감은 딸의 말은 잠꼬대같기도 하고 무슨 푸념같기도 했다. 이런때는 방해하지 말고 제스스로 잦아들기를 기다리는것이 상수라고 생각된 안희경은 딸이 잠결에 차던진 이불을 어깨우로 덮어주고 천천히 반대켠에 있는 자기의 침대로 다가가 누웠다.

그 역시 딸과 마찬가지로 잠들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머리속으로 극장에서 있은 일을 돌이켜보았다. 그는 예민한 감각으로 이 비극의 막후조종자가 시아버지라는것을 확신하고있었다.

하지만 그는 시아버지의 행동을 지지하고싶었다. 결과는 어떠하든 그것이 손녀에게 반드시 기업을 물려주려는 의도에서 출발한것이라는것만은 불보듯 명백했기때문이였다. 그것은 손녀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이자 어머니인 자기의 리해관계에도 전적으로 부합되는것이였다.

문득 그의 뇌리에는 아득히 지나간 옛시절이 감겨들었다.

이 나라 북단인 필립스만의 어촌마을에서 그가 태여났을 때 그의 집은 무던히 쪼들리던 집이였다. 이미 지난 세기초에 한뙈기의 땅도 없어 지지리 고생을 하던 그의 조상들은 저 멀리 바다건너에 주인이 없는 넓은 땅들이 많다는 말을 곧이듣고 파도사나운 태평양을 건너왔다.

정말 옛말에 나오는것처럼 무연한 대지가 눈뿌리 아득히 펼쳐져있었지만 말하는 짐승, 노예의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들은 끝내 정든 고국땅을 눈물로 하직할 때 품었던 행복이라는 소원을 대대로 유언으로 남기고말았다.

칠성판을 잔등에 지고다니는 어부였던 그의 아버지와 삯일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모진 가난속에서도 불쌍한 딸이 봉선화처럼 활짝 피여나는것을 유일한 기쁨으로 삼았다.

자기때문에 가정에 무거운 부담의 그림자가 드리우는것을 바라지 않았던 안희경은 집에서 가까운 공예사양성소로 발걸음을 내짚었다. 선천적으로 눈썰미가 있고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탓에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양성소를 나온 후 H시에 있는 왈터완구회사에 취직하게 되였다.

시간과 재간은 곧 돈이고 자기의 앞길은 제힘으로 개척해야 한다는것이 그의 신조였다. 그는 짧은 휴식시간도 아까와 도안을 그렸고 그것이 우수작이 되도록 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런 노력으로 하여 도안가들중에서 단연 손꼽혔고 수입도 제일 높았다. 그는 힘들게 번 로임중에서 많은 액수를 집에 부치고 자기는 얼마 안되는 푼돈을 쪼개가며 소박하게 생활을 꾸려나갔다.

어느날 사장의 부름을 받고 방에 가니 서해수가 그를 맞아주었다.

《안희경이라고 했지?… 이름이 참 좋구만. 그래, 일은 힘들지 않나?》

그는 우선우선한 목소리로 여담삼아 몇마디 말을 건네고는 말이 없고 일을 착실하게 한다고 칭찬을 했다. 그러더니 련인이 있는가고 살뜰히 물었다.

안희경이 아직 정한 대상자가 없다고 하자 그는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자기가 소개하는 대상을 만나보지 않겠는가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남자는 건강이 그리 좋지는 못해. 차사고를 치고 한동안 치료를 받았지. 그러나 가정의 재정적토대가 그쯘하고 부모님들도 괜찮은분들이야. 그 집에 들어가면 희경이에게 안팎으로 큰 도움이 되고 생활도 안착되리라고 생각해. 잘 생각해보라구. 강요는 아니니 거절해도 좋아.》

기업가이기는 해도 아래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외면하지 않고 동정해줄줄 아는 서해수의 사람됨을 어느 정도 알고있는 안희경은 오래 생각지 않고 결심을 내렸다.

이렇게 되여 그는 얼마 안 있어 명망높은 챠일드회사 사장의 며느리, 그 승계자의 안해로 운명을 바꾸게 되였다.

이 집안에 들어서던 날 시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며늘애야, 너는 이 집안을 지켜줄 수호신이다.》

많은 의미로 새겨진 말이였다. 결혼한지 얼마 안되여 남편을 잃고 현대녀성들은 리해하기 어려운 괴이한 시집살이로 40대 중반에 이른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 말이였다.

그 말은 신비스런 계시처럼 때없이 가슴을 부풀게 했고 힘들 때마다 용기를 안겨주었다. 마약기운이 다 빠진 남편의 동공이 확 풀려있을 때에도, 그가 마지막운명의 길을 가는 시각에도 옆사람들이 혀를 찰 정도로 각근히 돌보아주었다. 명색뿐이였지만 어쨌든 남편은 남편이였고 딸의 아버지인것이였다.

그러나 일단 남편이 세상을 떠난 순간부터 그는 시아버지의 말을 두고 고민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고민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 깊어졌다.

무엇이든 시효가 있는 법이다. 남편이 없는 시집에서 며느리의 존재란 어떤것일가. 경제권도 가지지 못하고 아무런 결정권, 앞날의 미래도 없는 한갖 하녀의 위치가 아닐가.

사실 남편 리정석의 얼굴도 이제는 희미해진 상태다. 결혼하여 누린 행복은 극상해야 2~3년이나 될지. 그것도 과연 행복이라고 할수 있겠는지 아리숭했다. 그후로는 시부모에게도, 어린 딸에게도 말 못할 눈물과 고통속에 모지름을 쓰며 살아온 삶이였다. 딸 혜림이만 아니였다면 아마도 이 집안을 뛰쳐나간지도 오랬을것이다.

물론 당장이라도 시아버지가 자기를 불러 다른 인생길을 걸을것을 권고한다면 안희경은 조금도 마다하지 않을것이다. 딸 혜림이는 시집의 피줄을 이었지만 자기는 아닌것이다. 그는 은근히 시아버지가 한 말의 시효가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 시각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언제인가 안희경이 중학교시절의 딸을 위해 크리스마스기념으로 고운 흰색도레스와 손목시계, 멋진 머리핀장식품을 사가지고 온적이 있었다.

혜림은 너무도 좋아 어머니를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옷을 입혀보니 혜림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아 보였다.

때마침 회사일을 마치고 들어서던 리성원이 화색을 띤 얼굴로 말했다.

《오, 옷이 잘 어울린다. 백설공주가 왔다가 울고 가겠다. 참 보기 좋다.》

안희경은 살짝 웃는 눈길로 시아버지를 곁눈질해보았다. 정말로 기뻐하는것 같았다.

《가만… 이 옷이 요전날 네 할머니가 사준 옷과 비슷하지 않느냐.》

옷만이 아니라 응접탁우에 놓여있는 손목시계와 머리핀장식묶음을 두루 일별하고난 리성원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물었다.

혜림이 제꺽 그건 그것대로, 이건 이것대로 좋은 옷이라고 우겨댔다.

《허허, 그러니 이런걸 뭐라고 하던가? 랑비, 말하자면 2중지출이라는거다. 수입과 지출, 소비가 전혀 맞지 않거던. 불필요한 소비야.》

리성원은 더 시비를 가를것도 없다는듯 잘라말했다.

《잘못 샀다고는 말할수 없어요.》

혜림이는 자기때문에 어머니가 난처해지는것 같아 지지 않고 반박했다.

《요 깜찍한것, 이제부터는 너도 할아버지에게서 배워야겠다. 기업경영이라는것도 따지고보면 가정을 운영하는것과 원리는 같은거다.》

할아버지의 말에 혜림은 얼굴이 빨개졌다.

귀를 강구고있던 안희경은 저도 모르게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언제나 나무랄데 없고 그른데 없는 시아버지의 처사때문이 아니였다. 시아버지가 바로 손녀인 자기 딸에게 기업을 물려주려 한다는것을 깨달은것이였다. 이것은 자기에게 부여된 이 가문의 수호신으로서의 사명에 시효가 없음을 의미하는것이였다.

이때부터 안희경은 시아버지가 하느님처럼 여겨졌고 딸이 할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하려고 노력했다.

안희경은 시아버지가 손녀에게서 바라는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절망으로 뒤바뀔 기로에 놓였다.

딸 혜림이가 음악병이라는 괴이한 병에 걸린것이다. 이렇게 된데는 손녀에 대한 할머니의 맹목적인 애정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할수 있었다. 하의영은 손녀에게 천성적인 음악적기질이 있는것은 자기를 닮았기때문이라고 하면서 말끝마다 그애를 두둔해주군 했다. 남편에게서 자주 꾸중을 듣고 마음을 다잡았다가도 혜림이가 아부재기를 좀 치면 언제 그랬던가 싶게 손녀의 편역을 들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희망대로 해야 성공할수 있고 행복을 맛볼수 있다, 꼭 그애가 할아버지의 기업을 직접 승계해야 하는것은 아니다, 그애의 남편을 똑똑한 사람으로 골라 넘겨줄수도 있지 않느냐, 바로 자기의 아버지가 사위에게 회사를 물려주었듯이…

목소리는 달라도 한결같이 제 딸의 행복을 위한것인지라 안희경의 마음은 흡족했다.

헌데 딸이 금낟가리를 벼짚낟가리만큼이나 여기며 고생을 사서 하겠다니 이런 어리석은 망동이 또 어디 있으랴. 딸이 없는 집안에 자기의 존재란 허울뿐일것이였다.

안희경은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가 간절히 바라는건 첫째도 둘째도 딸의 기업상속이였다. 그것이 실현될 때만이 자기가 이 집안에 서있을 명분이 존재하는것이다. …

한편 혜림이도 자기의 세계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하고있었다.

오늘, 아니 이제는 어제가 되였는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소스라칠 악단의 공연실패는 파멸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였다. 원통하도록 지금도 가슴을 벅벅 긁어대는것 같았다.

여기에는 분명 원인이 있을것이다. 우리의 공연을 달가와하지 않는 어떤 음모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이제 할아버지나 작은할아버지가 해명하라지. 그런 비렬한 작당에 물러앉을 내가 아니다. 앞으로 그 어떤 도전이 닥쳐올지라도 맞받아나갈테다. 할아버지한테는 미안할지 몰라도 난 내 길을 끝까지 갈테야.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마음이 좀 진정되여서인지 아쉬움이나 좌절감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대신 더 강렬해진 결단과 배심이 가슴을 후덥게 했다.

지금까지 존재해온 진부하고 라태한 로크형식에 종지부를 찍고 보다 특색있고 미래지향적인 새형의 로크형식을 창조해보고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반복은 죽음이라 했다. 새로움은 청춘의 상징이다. 일어나자. 일어나서 세상에 없는 독특한 로크형식을 창조하리라. 그것을 위해 전 지구를 편답하며 우리의 《롱》악단을 온 세상이 알게 하리라. 청춘들이 갈망하는 희망과 사랑의 새 세계를 기어이 찾아내리라.

리혜림은 주먹을 불끈 쥐였다. 하지만 자기가 선택한 그 길은 순탄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되였다.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칠것만은 명백했다. 그러니 조용히 사라지는것이 상책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서글퍼졌다. 가뜩이나 외롭고 불우한 어머니를 혼자 조롱속에 남겨두고 자기만 훨훨 날아가버린다고 생각하니 코마루가 쩡해왔다. 엄마를 도울수 없는 자신이 무척 무맥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때 어머니 안희경의 침대쪽에서 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엄마도 나처럼 잠 못 들고있는게 아닐가.

혜림은 침대에서 내려 살금살금 맨발로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엄마, 잠들었어?》

안희경은 잠든척 하려다가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딸의 마음이 좀 진정된것 같아서였다. 차라리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싶었다.

잠시후 모녀는 나란히 한침대에 걸터앉았다.

《네 일을 생각하니 지금도 속이 좋질 않구나.》

먼저 안희경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혜림은 기다렸다는듯 자리에서 몸을 솟구었다. 그리고는 천진스런 어조로 말했다.

《엄마, 내가 오늘 무얼 생각했는지 알아?》

딸의 말에 안희경은 속이 덜컥 했다. 혹시 자기네 공연을 파탄시킨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라는 말이 튀여나올것 같아서였다.

《글쎄, 내가 어떻게 알겠니?》

《세계일주예요. 우리가 처음부터 목적했던 악단의 순회공연! 이까짓 좁은 도시의 한적한 유적같은 극장이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해서 한바탕 울려보자는거예요. 그러면 내가 그리는 리상향과도 같은 유토피아를 찾게 될지도 몰라요.》

안희경은 왕청같은 딸의 말에 크게 놀랐다. 그는 얘가 아직도 꿈에 취해있지 않은가 하고 딸의 얼굴을 주시했다. 어두운 속에서도 혜림의 눈빛은 별처럼 총총했다.

《한창때 꿈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을거예요. 하지만 두고봐요. 난 무조건 찾고야말겠어요. 그러면 제비처럼 날아와 엄마를 데려갈테예요.》

안희경은 저도 모르게 기분이 붕 뜨는것 같았다. 꿈이지만 환상이라도 해보고싶었다. 조금도 희망을 잃지 않은 딸이 어찌 보면 부럽기도 하였다.

《넌 속도 편한게구나. 그 가슴아픈 일을 다 잊은 모양이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딸의 입에서 《흥!》하는 코방귀소리가 울려나왔다.

《?!》

《난 고민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요. 그건 나약성의 표시거든요. 난 우리 악단의 공연이 실패했다고 보지 않아요.》

이것 봐라. 지금 이애가 무슨 말을 하는걸가?

안희경은 의문을 품으면서 딸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쳐다봤다. 자기로서는 상상해보지 못한 성격이고 사고였다. 그런 면에서 자기를 닮지 않은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뭔가 이상한 감촉을 못 받았어요? 표는 팔렸는데 관람자는 오지 않았다, 그자체가 성공이라는거지요 뭐. 세상에 표를 사고 오지 않을 바보가 어디 있겠나요. 분명 우리 <롱>의 출현에 겁을 먹은 작자들의 작간일거예요. 오히려 그것이 내 꿈을 더 부채질했단 말이예요.》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게 편할수 있어.》

《엄만 아직도 제 딸에 대해서 잘 모르고있는게 아니예요? 난 뒤를 보며 콜짝거리는건 질색이예요. 우리 공연의 실패는 앞으로의 대성공을 예고해준다고 봐요. 두고보세요. 내 말이 옳은가 그른가.》

딸의 얼굴에는 생기만이 아니라 자신심도 넘치고있었다.

안희경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물었다.

《넌 네가 없는 이 집안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봤니? 나아가서는 이 에미운명에 대해서까지 말이다.》

말이 없는 딸을 대하는 순간 안희경은 어둠속에서도 자식의 얼굴이 어두워짐을 느꼈다. 아래입술을 잴근거리는게 아무리 딸이래도 잘못 건드리지 않았나 더럭 긴장해지기까지 하였다.

《할아버지는 가정과 기업만을 보려 하지만 난 세상을 보고싶어요. 세상이 다 우리 집 같을가? 다 우리 할아버지 같을가? 엄마나 나는 지출대상이 아니라 인간이란 말이예요.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자기가 걸어갈 길이 있는거예요. 남에 의해 선택되고 남이 바라는 길이 아니라 자기의 길을 걸어가야 한단 말이예요. 난 할아버지를 존경하지만 할아버지가 강요하는 기업승계의 그 길만은 싫어.》

안희경은 소스라치듯 놀랐다. 딸의 눈빛에서 무서운 섬광을 보았던것이다. 그는 마음을 애써 진정하며 딸을 진정시켰다.

《혜림아,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냐? 엄마와 넌 달라. 할아버지가 요구하는 길은 너를 위한 길이고 생활의 법칙을 따라가는 길이야. 내가 오늘까지 품어오는 생각이 있다. 들어보렴.

랭정한 세상에서 내가 누려온 안정된 생활이 바로 오늘의 생활이다. 난 네 아버지를 잃고 오늘까지 너를 기둥으로 믿고 살아왔어. 이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생각이기도 하다. 우린 너를 앞세우고 맘편히 살아갈 앞일을 꿈꿔왔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내가 이이상 바랄게 뭐겠니. 네가 할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집을 뛰쳐나간다면 이 가정안에서의 나라는 존재의 명분도 상실하게 될거다. 네가 이런걸 알수도 없지. 그저 다 자랐다고 네 생각만 한다면 그건 이 엄마에 대한 부정이자 배신과도 같다는것을 생각이나 해보았니? 못했을거야. 못할거야. 네가 있어 난 이 집에서 며느리로 불리우지만 너까지 없다면 난 무엇이 되지? 너는 이 세상을 노래를 부르며 살테지만 난… 어데로 가라느냐, 무엇으로, 어디로?!》

딸을 진정시킨다는노릇이 한탄과 원망으로 번져지는데 화가 난 안희경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어느새 눈굽이 축축히 젖어왔다.

혜림은 놀랐다. 그는 어머니가 울고있다는것을 깨달았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는 어머니에게 와락 안기며 흐느꼈다.

아, 불쌍한 내 엄마.

어머니의 애달픈 하소는 혜림에게 형언할수 없는 심리적인 중압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하게도 다시 어깨가 펴지는것을 느꼈다.

그러니 더욱 어머니처럼 살수 없어. 아무리 물질적으로 부유해도 정신적으로는 빈곤을 느끼게 하는 현실, 원하건 원치 않건 악의 섭리를 꼭 답습해야 하는 이 불공정한 세계, 감옥밖의 감옥같은 이 울타리속의 병든 삶들… 아, 이 세상에는 우리처럼 행복하면서도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가!

혜림은 엷은 창가림너머로 어둠에 잠긴 창밖을 바라보았다. 청춘의 깃을 편 그의 마음은 세계일주라는 창공을 날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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