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회)

 제 1 장

 7

 

한여름을 맞이한 평양의 거리들은 활력과 기운에 차넘치는듯 했다. 어디를 봐도 청신하고 약동하는 분위기를 느끼기는 어렵지 않았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은 밝고 명랑해보였으며 걸음새들에서는 한결같이 박력이 느껴졌다. 차림새는 다르고 생김새도 각이하지만 누구에게서나 비관의 흔적이란 눈을 비비고 찾아볼래야 볼수가 없었다. 마치 희망과 락관을 천품으로 지닌 사람들만 모아놓은것 같았다. 그것이 보는 사람들의 기분도 즐겁게 하였다.

조선광명기술연구소 소장 홍승혁은 벌써 한참이나 자기의 사무실 창가에서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고있었다.

언제부터 생긴 습관인지 분주한 사업의 여가나 피로가 겹칠 때면 그는 의례히 이렇게 하군 했다. 어떤 사람들은 거리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거나 서로 찾고 부르는 목소리, 차들의 경적소리가 일에 방해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는 정반대였다.

홍승혁은 가슴을 힘껏 불구었다.

얼마나 좋은가. 저것이야말로 우리들의 존재가 왜 필요한지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때없이 깨닫게 하는 소중한것이 아닐가.

창가에서 물러나 책상으로 다가간 그는 두손으로 반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70대에 이르렀어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활달한 언변과 패기있는 거동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였다. 아직도 젊은이들과 어울려 정구경기를 할 때면 볼만 했다. 경기도중에 상대가 만만치 않다고 느껴지면 어느새 채를 왼손에 옮겨쥐군 하는데 그 순간부터 형세는 역전되기가 십상이였다.

그래서 연구소안의 정구애호가들속에서는 《우리 소장동지의 왼손공격은 상대에게 치명적》이라는 말이 류행되고있었다.

사람들속에서 그저 《소장동지》라는 말보다 《우리》라는 말로 더 잘 통하는것도 책임일군이지만 격식과 틀을 좋아하지 않고 섭쓸리는 그 성미때문이였다.

그가 늙어보이지 않는 리유 또한 군사복무때와 대학시절에 권투를 했기때문이라는것은 온 연구소가 다 아는 사실이였다.

어떤 익살궂은 젊은 연구사가 사사로운 자리에서 《소장동지의 왼손곧추치기성공률은 얼마나 됩니까?》하고 물은적이 있었다.

그때 홍승혁은 별로 생각하는 기색없이 《난 상대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될 때에만 왼손을 쓰지.》하고 대답했었다.

또 언제인가 그는 자기가 젊어보이는것은 20대의 정열과 활기에 넘쳐있는 젊은 연구집단과 함께 있기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였다.

그가 거느리고있는 광명기술연구소는 여러 분야의 첨단기술설비들을 개발하고 그것을 생산실천에 도입하는것을 존재사명으로 하고있는데 최근에는 신식인쇄설비개발을 주요목표들중의 하나로 삼고 힘을 쏟아붓고있었다.

혹시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행정실무사업만이 아니라 첨단돌파를 위한 수재급의 연구개발팀을 이끄는데 대해 이상하게 생각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교수, 박사의 학위학직을 가진 전문가라는것을 안다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였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이것은 우리 과학자들의 영원한 좌우명이 되여야 하오. 과학기술적진보, 여기에 오늘 민족의 존엄과 운명이 달려있다는것을 명심해야겠소. 우리는 첨단과학기술이 특정한 나라의 독점물이 아니라는걸 인식해야 하오. 우리는 마지막 일분일초까지 상대를 완전히 꺼꾸러뜨리는 권투선수와 같은 의지를 가져야 하오.》

이것은 그가 연구개발팀의 젊은 연구사들에게 늘 강조하군 하는 말이였다.

지금 그의 책상우에는 울라지보스또크전시회진행정형과 관련한 자료가 놓여있었다.

전시회에 참가하기 위한 준비사업은 이미전부터 빈틈없이 진행되였었다. 세계적인 인쇄공업발전의 최신동향을 파악하고 첨단기술을 획득하는데서 전시회가 가지는 의의를 중시한 총국에서는 그들에게 요구되는 충분한 방조를 주었다.

홍승혁은 연구개발팀을 발동하여 과학기술전당과 과학기술통보사를 비롯한 련관단위들에서 필요한 자료들을 최대한 확보하도록 했다. 그리고 전시회조직위원회측과 부단히 련계를 취하면서 참가대상들과 참가자들에 대한 료해도 심화시켰다.

70여개의 나라들에서 120여개에 달하는 출판사, 신문사, 화보사, 인쇄회사들과 인쇄설비공장 등 많은 기업체들이 참가하게 되여있는 전시회의 기간은 10일간이였다.

그는 그중 앞섰다는 몇개 단위들을 중점적으로 연구할것을 개발팀에 지시했다. 그속에는 카나다의 챠일드인쇄공업회사도 들어있었다.

때마침 전시회조직위원회측에서 전시회에 참가하는 대상들과 인물들에 대한 통보자료를 보내왔다.

카나다 챠일드회사와 관련한 자료에는 사장 리성원의 인물자료도 포함되여있었다. 처음에는 무심히 그의 문건을 들여다보던 홍승혁은 저으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름 리성원, 72살, 고향은 남조선 경기도 인천시, 전후 고아로서 카나다로 이주, 1960년대 서도이췰란드 뮨헨종합대학에서 류학, 가족관계는…

이름이 무척 귀에 익었다.

그의 눈앞에는 수십년전 찌뿌둥하니 흐려있는 가을날에 베를린중심부의 어느 한 공원에서 만났던 한 동포청년의 모습이 안겨왔다.

혹시 그가 아닐가. …

울라지보스또크 한 문화전당에서 전시회는 성황리에 막을 올렸다.

대표단을 이끌고 전시회에 참가한 홍승혁은 매일과 같이 긴장한 일정을 이어나갔다.

사전료해를 할 때에는 별치않게 생각했던 단위들에서 의외로 기발한 착상에 토대한 제품들이 출품되였는가 하면 기대를 품었던 어떤 회사들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명색이 국제전시회이니 모두 점잖고 인격자답게 처신하면서 교류와 협조를 표방하는듯 하지만 저마다 상대방을 누르고 올라서려는 야심과 승벽심만은 감출수 없었다. 상품시장을 겸한 전시회여서 이 공간을 리용하여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호상간의 열띤 광고선전으로 분주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 혼잡한 속에서도 수면밑에서는 첨단기술을 노린 정보내탐의 각축전들이 치렬하게 벌어지고있었다.

홍승혁은 조국을 떠나오기 전에 연구개발팀에서 협의확정한 몇가지 주요목표들과 관련한 기술정보들을 위주로 하면서 다양한 측면에서 자료들을 수집하도록 했다.

그중의 하나가 량면색인쇄설비의 자연색선명도와 인쇄속도를 높이는데 필요한 기술이였는데 이 분야에서는 챠일드회사가 일정한 수준에 있었다.

전시회의 페막을 이틀 앞두고 그 회사와의 면담이 진행되였다.

홍승혁은 사전에 챠일드회사에서 출품한 설비들과 프로그람들, 각종 기술봉사와 관련한 안내서들을 충분히 료해하였었다.

호텔 면담실에서 자기만큼이나 키가 크고 점잖은 표정을 짓고 서있는 나많은 사람과 마주서는 순간 홍승혁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던것이다.

좀 다른것이 있다면 한 50년전의 젊음과 함께 고지식함을 느끼게 하던 그 얼굴에 로회함과 오만감이 차넘치는것이였다.

홍승혁은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인차 면담의제토의에 들어가기로 했다.

《해외에서 동포를 만나니 반갑습니다.》

그는 평시에 사람들을 대하듯 푸접좋게 인사말을 했다.

상대는 습관적으로 느껴지는 딱딱하고 공식적인 어조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 역시 같은 심정입니다. 챠일드인쇄공업회사 사장 리성원이라고 합니다.》

리성원의 목소리는 마치 자기의 존재를 대방에게 재삼 강조하려는것같았다.

《챠일드인쇄공업회사의 명성은 우리도 잘 알고있습니다. 물론 사장선생과는 초면이지만 같은 동포로서 이렇게 마주앉은것만으로도 정이 통하고 가슴이 확 열리는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사이의 일도 잘되리라는 확신이 갑니다.》

홍승혁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글쎄요. 만사는 불여튼튼이라 모든 일은 두고봐야 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리성원은 무엇인가 경계하는 투로 대꾸했다.

이렇게 시작된 면담은 거의 두시간가량 진행되였다.

홍승혁은 챠일드회사의 최신인쇄설비들을 구입하거나 혹은 기술을 이전받는것과 관련한 실무적인 문제들을 중심으로 하여 진지하게 협의를 이어갔다.

리성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랭담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상대방의 성의에 감사를 표시하면서도 무례할 정도로 자기회사가 보유하고있는 특허기술의 우월성에 대해 력설하였다. 그리고는 그 어떤 흥정도 접수하지 않는다는 완고한 투로 자기가 설정한 높은 가격을 고집했다.

홍승혁은 가슴이 답답해왔다. 아무리 초면이라도 상대가 이렇게까지 고압적으로 나올줄은 예견하지 못했던것이다.

무엇때문인가. 우리가 본의아니게 그를 노엽힌것은 없는가. 차라리 수십년전의 일을 상기시키고 속을 터놓아볼가. 그러면 혹시 정황이 달라지지 않을가.

머리속으로 여러가지 생각들이 련이어 꼬리를 물었다.

그가 침묵하는 사이에 곁에서 광명기술연구소의 젊은 부소장이 세계적으로 손꼽힌다는 인쇄공업회사들에서 개발한 기술제품들의 성능상 우결함들과 가격실태를 일목료연하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챠일드측이 제안한 가격의 부당함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리성원은 바위처럼 굳은 표정과 자세로 묵묵부답이였다.

면담이 실패로 끝날수 있다는 우려감에 홍승혁은 한걸음 양보할것을 결심했다.

리성원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한것은 아니지만 상대가 얼마든지 접수할수 있다고 보아지는 가격을 제시한것이였다. 부소장도 아쉬운대로 합의가 성사되리라고 생각하는지 군말이 없었다.

그러나 리성원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한동안 격렬한 공방전이나 다름이 없는 론쟁이 벌어졌다. 주로 부소장과 리성원이 어성을 높이다가 나중에는 둘 다 얼굴이 붉어져 입을 다물고말았다.

홍승혁은 생각이 복잡해졌다. 어차피 이룰수 없는 합의라는것을 간파했던것이다.

첫 대면이여서 호상 상대에 대한 파악이 부족해서인가. 혹시 우리가 상대를 무시한것은 아닌지.

잠시 휴식하는 틈에 홍승혁은 부소장에게 우리가 실수한것은 없는가고 물어보았다.

《실수가 뭡니까. 난 우리가 너무 양보하지 않았는가 생각되는데요. 가만 보니 동포의 정은 둘째치고라도 면담에서 지켜야 할 초보적인 례의도 모르는 사람 같습니다. 덮어놓고 제것만 고집하는것을 보십시오. 이런 면담은 난생처음입니다.》

평소에 침착하다는 말을 듣군 하던 부소장이였지만 몹시 분격했는지 입에서 쏟아져나오는대로 내뱉았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상대의 완강한 태도는 리해할수가 없었다.

이윽고 면담탁에 다시 마주앉자 홍승혁이 말했다.

《오늘은 초면인데다가 호상 깊은 리해가 부족하여 시간을 많이 보냈군요. 제 생각엔 오늘면담은 그만하고 서로의 제안을 깊이 연구한 다음 래일 다시 마주앉았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순간 리성원의 얼굴에 심술기가 피뜩 피여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럴것없이 저는 우리의 면담을 이것으로 마쳤으면 합니다. 제 건강상 래일면담에는 참가하지 못할것 같으니 혹시 다른 생각이 있다면 카나다에 있는 우리 챠일드회사로 확스를 보내주어도 될것입니다. …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홍승혁의 이마에 피줄이 살아났다. 더이상의 호의는 무의미했다. 빌붙는 태도는 그의 성격에도 맞지 않는것이였다. 차라리 상대가 우리 동포가 아니라 외국사람이라면 이처럼 실망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홍승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왼손 지시손가락을 가볍게 펴들고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장선생! 오늘일이 당신의 일생에 후회로 남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디 잘 가시오.》

홍승혁은 더는 미련이 없는듯 돌아서서는 씨엉씨엉 걸어나갔다. 그뒤로 부소장이 리성원의쪽을 흘겨보며 따랐다. …

울라지보스또크전시회에 참가했던 개발팀성원들이 줄레줄레 방안에 들어섰다. 대다수가 20대 중반이거나 기껏해야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홍승혁이다.

무슨 말부터 어떻게 해야 할가?

드디여 결심이 선듯 선채로 책상우에 두팔을 벌려짚은 그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동무들은 내가 왜 다시 모이라고 했는지 예감이 들거요. 어떻소, 챠일드회사와의 협력교류는 정녕 가능성이 없겠는가?》

홍승혁은 그들 매 사람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머리를 숙이고 발밑을 내려다보는 사람, 창밖으로 어디 먼곳을 응시하는 사람, 소장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는 사람 등 각이한 모양새들이였다.

몸을 궁싯거리던 부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로서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저도 직접 면담에 참가해서 목격한 사실이지만 우리로서는 최대의 성의와 아량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더이상의 양보는 대방에게 거만함만 더해줄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나라의 귀중한 한푼의 자금도 그렇게 망탕 허비할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저마다 머리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했다.

한 젊은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정보분석처리를 맡고있는 김영수였다. 그는 20대에 벌써 박사의 학위를 지닌 전도양양하고 기대가 촉망되는 수재형의 청년이였다.

《소장동지, 제가 한마디 해도 좋겠습니까?》

홍승혁은 두눈을 한번 껌벅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번 전시회때에 료해한바와 같이 역시 챠일드인쇄공업회사가 소유한 특허기술은 괜찮은 수준이였습니다. 하지만 우린 우리와 이미 거래가 있는 여러 나라 인쇄회사들의 수준도 그에 못지 않다는것도 최근에 확증하였습니다. 알다싶이 그 회사들은 지금 경영난에 처하다보니 저렴한 가격으로 우리에게 기술봉사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해오고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홍승혁은 말을 자르며 따져물었다.

《한마디로 제 생각도 부소장동지의 의견과 같다는겁니다. 지금 시간도 자금도 부족한 우리로서는 이미 파악도 있고 호의적으로 나오는 회사들과 거래하는것이 보다 실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이마가 알밤모양으로 도드라져나온 영수는 눈을 깜박거리며 일사천리로 제 주장을 엮어나갔다.

《영수동무의 말이 옳습니다.》

《교만한 챠일드회사에 빌붙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각이한 얼굴들에서 일치한 목소리들이 울려나왔다.

홍승혁은 아무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머리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이들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이번 전시회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의 이번 출장길은 결코 무익한것이 아니였다. 전시회를 통해서 우리가 내세운 첨단인쇄설비개발방향이 옳고 정확하다는것을 다시금 확신했다. 물론 아직은 우리에게 경험이 없고 우리의 인쇄설비개발과 관련한 기술적토대가 미약한것은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인쇄설비자체가 까다롭고 예민한데다가 더우기 우리가 목표로 정한것은 첨단형의 설비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챠일드회사의 선진인쇄설비나 기술은 이 첨단설비개발에 드는 시간과 연구로력을 단축하며 보다 완성된 우리 식의 인쇄기계를 창조하기 위한 표본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요한 첨단돌파전에서 챠일드회사와의 거래 같은것에 기대를 걸고 시간을 랑비하는것은 백해무익으로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미 채택한 결심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좋소. 일단 챠일드회사와의 거래는 포기하는것으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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