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 회)

 제 1 장

 10

 

세상만물이 변하듯이 그 만물의 령장인 사람도 변하기마련이다. 아니, 그 모든 변화를 조종하는것이, 또 그 변화의 선두주자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람만이 사유기관을 가지고있고 환경에 대한 적응력에 있어서 사람을 따를 개체가 없기때문이 아닐가.

리성원은 요즘에 와서 이런 생각에 자주 잠기군 한다. 손녀 혜림이의 모습에서 자기를 찾아보고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하여 고심하기때문인듯 느껴졌다. 이전에는 손녀가 그려내는 자기의 모습을 종종 보군 하던 그였다.

인간세상의 뒤골목에 버려졌던 소년, 낳아준 부모들은 있었건만 너무도 일찌기 그 사랑을 잃었기에 그는 철부지나이에 살아남기 위한 길을 혼자서 걸어야 했다. 빌어먹으며 방랑살이를 하거나 도적이나 강도가 되여 감옥귀신이 될지도 모를 팔자였건만 그에게는 행운이 차례졌다. 그 행운을 안겨준 은인이 장인 하필선이고 안해 하의영이라는것을 부정할수 없는 리성원인것이다. 불우한 인생이 돈많은 기업가라는 나무에 접목된것은 사실 특이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사실상 리성원이라는 인간은 이 과정에 장인의 돈과 아름다운 안해의 애정으로 면모를 바꾸었으며 자기의 과거와 작별하였다. 이것은 명백히 리성원이 새로운 인간으로 변하였음을 말해주는것이였다.

오늘날의 만족은 추억으로나마 간직하였던 어머니의 모습을 망각속에 몰아넣었으며 더구나 너무도 어렸을 때 본 아버지는 까맣게 잊어버리게 하였다.

그렇지만 리성원은 장인이라는 나무에 의지한 더부살이식물이 되고싶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상 놀라운 변화이지만 그가 조금도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다는것이 더욱 놀라운것이다.

그가 이런 잠재의식에 빠져들게 된것은 손녀 혜림이때문이였다. 혈통의 갈래로 보면 분명 자기네 혈통이 분명한데 그 손녀가 돌연히 갑작변이를 일으키고있는것이다. 과연 유전자의 이와 같은 변이를 막을수 있는가. 인간세상에는 불가항력이 존재하는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수 없는것이 얼마나 많은가.

리성원은 손녀로 하여 지친 자기의 원기를 회복하려고 애썼다. 자기가 만들어낸 조롱의 문을 지키는 파수병노릇에 이제는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였다. 그같은 심리에서 출발하여 그는 하나밖에 없는 친손녀이지만 가차없이 혹독한 처사도 서슴지 않았던것이다.

락엽이 떨어지는 너도밤나무수림속에 자리잡은 회사건물앞에 승용차가 멎을 때까지 리성원은 이런 사색에 잠겨있었다.

날씨는 음산했고 그를 맞아주는 건물과 주위환경도 음침하였다. 그래도 어느 나무가지에선가 이름모를 새가 은은한 노래를 불러주었다. 마치 손녀 혜림이가 할아버지에게 바라는 한가닥의 희망의 호소처럼 들렸다.

청사에 들어선 그는 층계를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잃은것이라면 미련을 가지지 말라, 이것이 일에서 실패할 때면 리성원이 다지군 하는 신조이다. 그것은 생존이 경쟁이 아니라 전쟁으로 되여버린 이 사회풍토에서 형성되고 공고화된 그의 성격적기질이였으며 요새화되여버린 의지였다.

《사장선생! 오늘일이 당신의 일생에 후회로 남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난데없는 목소리가 귀전을 두드리는 바람에 그는 층계를 오르다말고 굳어지고말았다.

누구던가? 언제, 어디에서던가?

리성원은 뛰여난 기억력을 가지고있었다.

어떻게 되여 그 사람이 착잡한 내 심중의 장막을 헤치는것인가. 울라지보스또크에서였지. 그래, 북에서 왔다는 나이지숙해보이는 어느 기술연구소의 소장이다. 생면부지였건만 뇌리에서 무수한 의문표를 그려내며 그가 맴도는 까닭은 무엇인가.

안개속에서 자기를 바라보는듯 한 그 사람에 대한 생각에 쫓기우며 리성원이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인차 서기가 공손한 자세로 따라들어왔다.

《사장님, 오늘일정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리성원은 키높은 회전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프레이저인쇄공장을 오전에 돌아보겠소. 차를 10시경에 대기시키면 되겠소. 부사장에게 말해서 설계실에서 울라지보스또크전시회에 출품했던 미국, 도이췰란드, 네데를란드, 단마르크회사들의 제품과 관련한 기술정보자료들을 최종적으로 검토, 종합하라고 하오. 그 결과를 래일 오후에 협의하겠다고 알려주오.》

서기가 방에서 나가자 리성원은 버릇대로 조용히 그가 사라진 문가를 주시했다.

챠일드인쇄공업회사는 주로 아동들과 학생들을 위한 인쇄물생산을 기본으로 하면서 그와 관련한 각종 인쇄설비제작과 기술봉사까지 진행하는 종합적인 기업체였다.

본래는 장인인 하필선이 50년대말부터 한 현지인으로부터 파산에 직면한 인쇄소를 넘겨받아 운영해왔는데 그때는 골드인쇄회사라고 불렀다. 그러던것을 리성원이 장인으로부터 사장자리를 인계받으면서 지금의 명칭으로 고쳤다.

해당 명칭에는 기업체의 사명이나 기업주의 목적 또는 지향이 반영되기마련이다.

리성원은 일찌기 부모를 잃고 고생스레 성장해온 자기의 불행했던 인생로정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것을 바라는 심정과 어린이들에 대한 애정을 회사명칭에 담고싶었던것이다.

처음에는 아동들의 신문, 잡지인쇄를 주문받아오다가 차츰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의 교재인쇄도 받아물었다. 의례히 발행부수가 늘어가면서 소극적인 인쇄소형식이 아니라 공업화의 방향을 지향하여 프레이저의 인쇄소를 인쇄공장으로 확장하고 브로드에 전문화되고 공업화된 인쇄설비공장과 그리고 독자적인 설계실을 새로 더 내왔다. 장인이 초기부터 가지고있던 자그마한 인쇄소형식의 이 건물도 몇배로 확대하고 시내의 여러군데 공장들과 판매점들을 전개하였다. 국내외의 이름있는 인쇄회사들과의 교류, 협력도 실현하고있었다.

프레이저인쇄공장 지배인은 남산만 한 배를 건사하지 못해 쩔쩔매는 사나이였다.

리성원은 초, 중, 고등학교 교재들의 인쇄정형을 알아보고는 기일을 앞당기고있는 사실에 흡족해졌다.

《지금 제기되고있는 문제들은 어떤거요?》

《시안의 일부 판매점들에서 교재들의 가격을 0. 1%만 낮추었으면 하는 의견들이 제기됩니다.》

《0. 1%라?! 그건 어째서?》

《지금 다른 인쇄공장들에서 극심한 불경기때문에 판매가격조절을 예견하고있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만 손해를 볼수 있다는겁니다. 그래서 회사판매부에도 이 문제를 상정시켰다고 합니다.》

리성원은 울라지보스또크전시회에 떠나기 전에 판매부장이 찾아와 우는 소리를 하던것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묵살해버렸다.

《당신은 그런 손쉽고 낡아빠진 방식으로 회사의 제품판로가 유지될수 있다고 생각하오? 남들과 꼭같이 행동하는것은 공멸의 길이란걸 명심해두오. 우리는 얼마든지 가격경쟁에서 이길수 있단 말이요. 무엇으로? 바로 우리 챠일드회사만이 가지고있는 특허권으로, 담보된 고도적기술로 말이요. 당신도 자기 회사 제품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것이 좋겠소. 그러니 가격조절은 절대로 안되오. 0. 1%가 아니라 0. 01%도 말이요.》

목소리는 그렇게 높였지만 리성원은 자신으로서도 자기의 말에 확신을 못 가지고있었다. 요즘의 경기불황이 심상치 않다는것을 직감하고있었던것이다. 화페가치가 요동치는데다가 전반적으로 소비가 심히 위축되여 자금류통이 줄어들다보니 은행들의 대부조건도 전에없이 더 가혹해지고있었다.

이 나라만이 아니라 미국은 두말할것 없고 서유럽나라들도 형편은 매일반이라는것을 그는 울라지보스또크전시회에 참가하여 절실히 느끼게 되였다.

리성원이 그곳에서 만난 조선광명기술연구소 소장앞에서 허세와 고집을 부린것도 실은 한발 물러서고싶어도 그럴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때문이기도 하였던것이다.

물론 챠일드회사의 첨단기술이나 제품들이 현재로서 우월한 축이라고는 할수 있지만 결코 만족하고만 있을수 없음을 그자신도 잘 알고있었다.

과연 출로가 판매부장이 제기한 그 길밖에 없단 말인가.

리성원은 속이 언짢았다.

《가격인하는 절대로 안되오. 당신도 운영자의 립장, 회사의 립장에서 머리를 쓰고 노력해보란 말이요. 알겠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배인은 숨을 헐썩이며 간신히 대답했다. 공연히 의견을 말했다고 후회하는 빛이 력력했다.

《참, 당신네 공장에서 생산공정에 대한 정보화체계를 갱신하려고 한다던데…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오.》

한참이나 씩씩거리며 대답하는 지배인의 설명이 그리 시원치 않은지 리성원은 중도에서 중둥무이해치우고말았다.

《아니, 더 신통한 방도가 없을가?… 가만, 이번에 울라지보스또크전시회에 참가했던 네데를란드 칼쏜회사의 정보화체계가 그럴듯해보이던데 오후에 설계실장에게 가서 료해해보오. 내가 지시를 주겠소. 그 다음에 다시 결심하기요.》

땀개나 흘린듯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훔치는 지배인을 바라보며 리성원은 속으로 웃음을 쳤다.

지배인의 바래움을 받으며 차에 오른 리성원은 달아오른 기분을 차분히 식혔다.

아마 저 량반은 내가 아동들의 교육에 무관심하고 몰인정하다 하겠지. 하지만 난 교재가격이나 좀 낮추는것으로 리윤은 리윤대로 고수하면서 마치도 아동교육에 관심이나 있는듯이 낯을 내는 그런 약은 수엔 침을 뱉은지가 오래다. 어림도 없다.

사무실로 돌아온 리성원은 잠시 머리쉼을 할겸 책상우에 놓여있는 신문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불쑥 의자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한 기사의 제목이 그의 눈에 예리하게 비껴들었던것이다.

《인생초엽에 당하는 수난》이라?!

이윽토록 기사를 들여다본 그는 안경을 벗어놓고 의자등받이에 몸을 실었다. 마음이 울적해졌다.

기사에는 아프리카와 중동의 전란지역들에서 어린이들이 당하는 참상들을 싣고있었다.

지역간, 종족간, 종교간의 분쟁과 정쟁의 여파로 인한 장기적인 무장충돌이라는 비극의 가장 큰 희생물은 어린이들이였다. 10대의 어린 소년병들과 소녀애들이 대리전쟁의 돌격대로, 희생물로, 어른들의 성욕충족의 대상으로 무참히 짓밟히고있는것이다.

지어 어떤 곳에서는 그것이 법제화되기도 한다. 간혹 비법적으로 강요된것이라도 피해당사자인 본인들은 말할것도 없고 그들의 부모들자체도 그것을 어쩔수 없는 신의 령으로, 숙명적본분으로 여기고 산다.

리성원은 심장의 동통이 느껴져 더 읽을 생각을 버리고 신문의 다음면을 펼쳤다.

미국에서 날로 범람하는 각종 아동학대행위들에 대한 기사내용들이 실려있었다.

시카고에서는 애비라는 놈이 어린애가 자꾸 우는것이 귀찮다고 쥐들이 활개치는 개우리같은 창고에 가두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젊은 녀자가 태여난지 며칠밖에 안되는 자기 애를 위생실 욕조에 담그고 수중호흡시간을 측정하는 실험까지 했다고 한다.

하긴 별로 새롭지는 않았다. 남도 아닌 친부모라는 인간들이 저들이 낳은 자식들까지 쾌락과 변태의 희생물로 삼고있는 이런 잔악과 말세의 극치는 오히려 인기뉴스로 되고있는 판이였다.

끝내 자리에서 일어난 리성원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힘껏 밀어제꼈다.

아, 하느님이시여. 이 세상에서 아무런 죄도 없이 태여난 그것만으로 고통을 당하는 저 어린 양들을 굽어보시고 보호하여주시오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너무도 높으시여 저 가엾은 생들이 안 보이는건 아닌지. 혹은 창세기이전의 퍽 오래전부터 너무도 오랜 세월 세상을 굽어살피시느라 이제는 황혼기의 로안을 맞으셨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새로운 노아의 홍수를 애타게 찾는 현대의 중생들의 소원대로 이 세상을 콰악 수장해주시던지!

하느님을 믿지 않는 그였지만 정말로 하늘에 대고 빌고 또 빌었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서기가 조용히 들어와 손녀가 찾아왔다고 알려주었다.

《그애가 어떻게?!》

그러는 사이에 혜림이가 도고한 걸음으로 방안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 저의 방문이 뜻밖이실테죠?》

리성원은 두손을 쩍 벌려보이며 안색을 바꾸었다.

《원, 우리 공주님이 오셨는데 그럴리야 있나. 더우기 유명한 <롱>로크악단을 대표하는분이신데…》

《역시 챠일드회사의 고명한 사장님다운 분석과 판단이세요. 어때요, 할아버지? 면담상대역이 비슷한가요?》

짐짓 실무적인 표정을 짓고있던 혜림이의 표정이 느닷없이 확 밝아졌다. 예술을 전공해서인지 감정변화도 과히 예술적이라 하지 않을수 없었다.

《괜찮긴 한데 원래 일정에 없던 면담에서는 신청자가 불리해지는 법이지.》

리성원은 아직 손녀의 벼락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석연치 않아 슬쩍 역습으로 찔러보았다.

아닐세라 혜림은 금시 풀이 죽더니 태도를 바꾸었다.

《용서하세요. 할아버지, 실은 정말로 면담을 하려고 왔어요. 절 탓하지 않으시겠죠?》

《내가 언제 널 탓하더냐. 어서 앉아서 말해라.》

혜림이는 사뿐사뿐 안락의자에로 다가와 앉았다.

그 모습을 보자 리성원은 손녀가 찾아온 목적에 대체로 가늠이 생겼다.

《할아버지, 전에도 말씀드린것처럼 난 우리 악단과 함께 세계일주공연을 떠나려 해요. 당장 래일이라도 말이예요.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단기대부 다시말해서 할아버지가 그리 놀라지 않을 정도의 재정지출을 부탁하려고 해요. 챠일드회사가 당장 위험에 처하지는 않을거예요. 6개월안으로 챠일드구좌에 대부자금의 50%를 반드시 입금하겠다는것을 악단과 손녀의 명예를 걸고 담보해요. 이쯤한 방조는 주실수 있겠지요?》

혜림은 마치 연극대본을 외우듯이 침착하게 말을 엮어갔다.

한편 리성원은 랭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고있었다. 자금지출과 관련한 요구가 부담스러워서가 아니였다. 할아버지의 의사를 한사코 따르지 않으려는 손녀의 결심이 확고하다는것을 인정해야 하는 이것이 더 괴로웠다.

리성원은 자제력을 유지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고는 저력있는 어조로 뜨직이 말했다.

《첫째로, 회사는 은행이 아니고 자선단체도 아니므로 이 사장의 권한으로 너의 요구를 받아들일수 없다. 둘째로, 만일 특례로 대부를 준다고 하더라도 지출의 합리성에 대한 동의와 함께 대방의 상환능력에 대한 보증이 있어야 한다. 셋째로…》

리성원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는 자기가 지금껏 마음속에 묻어두고 꿈꾸어온 유일한 리상을 손녀가 아직도 리해하지 못하고있는듯 한 생각을 털어버릴수가 없었다. 이제 이 할아버지가 내놓을 마지막조건앞에 혹시 손녀의 결심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일루의 희망감이 머리를 쳐들었다.

《셋째로… 이건 아마 가능이 있는 일일수도 있겠다. 그… 셋째로는 말이다. 만일 네가 나의 뜻대로 내 기업을 물려받는다면 아마 너의 투자요구는 자동적으로 실현될수도 있을게다. 하지만 네가… 네가 그걸 완강히 거부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것이다.

이 세가지 론거에 근거하여 이 할아버지는 챠일드회사를 대표하여 나의 손녀와 손녀가 대표하는 <롱>악단에 한푼의 자금도 대부할수 없음을 알리게 되는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혜림은 무대에 나설 때보다 더 맵시있고 경쾌한 동작으로 일어섰다. 하지만 률동과는 달리 얼굴에는 그늘이 비껴있었고 눈빛은 파들파들 떨렸다.

《알았어요. 솔직히 말씀해주어 고마워요. 그럼 내가 찾아온 두번째용건을 말씀드리죠. 물론 첫번째 용건처럼 부정하셔도 괜찮아요. 우리 악단의 초대공연이 성사되지 못한데 할아버지가 직접 관여한것이 사실인가하는 질문에 대답해주세요.》

리성원은 태연자약하게 의자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아무때건 혜림이가 알아차릴것이라고 생각해왔던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더냐?》

《아니요. 내 륙감이지요. 그날 극장객석에서 뜻밖의 실패를 당하고 졸도직전에 이른 날 위로해줄 때 난 내심 만족을 느끼는 할아버지를 보았어요. 물론 저를 사랑하는 할아버지이기에 난 그것을 부정했었어요. 세상에 이런 경악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생각하면서 말이예요. 그러나 방금 내 요구를 거절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그것을 확신했어요.》

《난 자기의 처신에 대해 언제나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거야 너도 알지 않느냐.》

《물론이지요. 할아버지의 수완은 경탄할만 한것임은 틀림없어요. 우리 <롱>로크악단의 참패만 놓고보더라도 그렇지요. 하지만 난 리해하고싶어요. 할아버지가 나를 증오해서가 아니라 무한히 사랑하기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마음의 안정이 됐어요. 할아버지가 힘들여 만들어놓은 조롱에서 기어이 탈출해야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진것은 이때문이기도 해요.》

리성원은 손녀가 모든 내막을 알고있다는 사실앞에서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놀라운것은 자기에게 손녀를 붙들어둘 명분도 힘도 이제 더는 없다는 그것이였다. 그것은 어떤 유혹이나 돈으로도 해결할수 없는것이라는걸 똑똑히 느끼는 순간이였다.

《알아두어라. 너의 <롱>인지 뭔지 한게 내 조롱보다는 편하지 못할게다. 이 도시에서처럼 너희들의 예술이 아닌 그 만용으로 얻고저 하는 세계는 이 세상천하에 그 어디에도 없을테니까. 오히려 가는 곳마다에서 너희들의 꿈과 리상이 얼마나 공허하고 헛된것인가를 깨닫게 될게다. 이 할아버진 그걸 집약적으로 보여주려고 했을뿐이다.》

《할아버지의 집념과 인내성에 감탄하게 돼요. 하지만 난 나대로 여쭈고싶군요. 헛된 노력을 계속하지는 마시라고요.》

리성원은 감출수 없는 서글픔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 내 일생 너를 위해 헛된 노력을 했을뿐이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노력해주실수 없을가요?》

알지 못할 미련이 다시금 머리를 쳐들자 리성원은 미소를 지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마다하지 않으련다.》

혜림이는 잠시 그 어떤 감정을 자제하는듯 했다.

《아니, 다시는 그런 노력을 바라지 않겠어요. 우린 할아버지와 같이 이 세상의 온갖 불의와 부정앞에 순종하지 않을거예요. 아직은 우리가 가는 길이 막연하고 절망적일수도 있어요. 그래도 우리는 온 세상을 일주해서라도 밝고 휘황한 우리들의 희망과 미래를 찾고야말겠어요. 아마도 이 욕망과 갈망이 경제적으로 빈약하기 그지없는 우리 악단의 정신적밑천이 될지도 몰라요. 할아버지는 필경 마음에 들지 않으시겠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손녀의 노래를 듣게 될거예요. 우리는 기어이 리상향을 찾아내겠어요.》

리성원은 손녀의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이슬을 보았다. 별안간 가슴이 쓰려와 그는 머리를 돌려버렸다.

손녀가 방에서 어떻게 나갔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얼없이 앉아서 천정만 바라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에는 벌써 어스름이 비껴들고있었다.

《혜림아…》

조용히 불러보는 리성원의 주름진 량볼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의 인생에 단 한푼밖에 남지 않은 정신적동전이였던 손녀마저 떠나간것이였다.

때가 되면 다 자란 새가 제 둥지를 떠나가는것은 생리학적인 현상일뿐더러 발전이라고 해야 하겠지. 그것은 새라는 생명체에 있어서는 자연의 생리로서 일종의 도전이기도 하거니와 새로운 운명의 시작이기도 하기때문일것이다. 그렇다면 저애의 탈가는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하겠는가. 물질적풍요속에서 더 큰 만족과 행운이 기다리고있는 인생가도를 벗어나 굳이 가파르고 지어 위험까지 동반하는 고행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저애의 앞길을 나는 왜 한사코 가로막지 못하는건가. 어째서 숱한 재산을 소유하고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명줄을 쥐고 흔드는 내가 연약한 손녀애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것인가. 나는 알고있다. 이제 저애앞에 덮쳐들 그 모진 세상풍파와 불행의 천만고비들을, 저애가 헤쳐넘어야 할 피와 눈물의 소용돌이들과 범의 아가리와도 같은 무시무시한 함정들을. 하지만 나는 그 길을 아득바득 찾아가는 손녀애의 앞을 막아서지 못할만큼 지금 너무도 무맥하고 나약하다. 그렇다. 저애는 이 할아버지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우점만이 아니라 치명적인 약점까지도. 내가 저애를 위해 할수 있고 또 하고싶은 모든 일은 손녀에게 있어서 나의 이 모든 약점들을 가리우려는 시도로밖에 달리 보이지 않을것이다. 결국 온 가정을 위해 허위단심 애를 쓰고 버텨보고 모지름을 써온 모든것이 무의미하고 헛된것으로 되여버리고말았다. 자식들이 흘릴 눈물까지 내자신이 다 걷어안고 흘리고싶었건만 이제는 그것이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렸다. 아, 가련쿠나! 부와 성공, 명예는 있으되 극단한 정신적주림속에 헤매야만 하는 이 불우한 삶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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