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제 2 장

 12

 

구름 한점 없는 맑고 개인 날씨였다. 은행나무와 전나무, 너도밤나무, 소나무들로 울창한 숲속으로 난 도로를 따라 승용차가 쾌속으로 질주하고있었다. 가을날씨라 비록 잎들은 많이 성글어졌을지언정 아직 보기에 청아한 기운을 주었다.

리성원은 지금 남조선령사관으로 가고있었다. 어제 저녁에 그는 그들로부터 난데없는 초청장을 받았다. 정오에 령사관에서 동포기업가초청연회가 있다는것이였다.

그는 한동안 망설이지 않을수 없었다. 그쪽과는 원래 접촉이 별로 없고 크리스마스나 설을 맞을 때마다 전화로 안부인사나 나누는것이 고작이였던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요즘 꼬여드는 집안일로 사람대상이 부담스러워진 그였다.

그러나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H시의 동포사회에서 손꼽히는 우수기업가인 그가 뚜렷한 리유가 없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여론의 불필요한 초점이 될수 있었다. 흔히 령사관측에서 이런 행사를 준비할 때에는 요란한 보도소개가 곁들어지는 법이다. 자칫하다가는 불미스러운 가정사를 스스로 드러내는 결과를 빚어낼수 있었다.

흥미있는것은 서해수도 초청장을 받은것이였다.

《나는 그렇다치고 자네야 그 사람들한테 미운 눈도장이 찍혔을텐데… 어째서 자네에게까지 초청장을 보냈을가?》

오늘 아침 서해수가 연회초청문제로 전화를 걸어왔을 때 리성원은 눈을 잔조롬히 가로 뜨고 롱조로 물었다.

《허, 그네들이 나를 그만큼 중시한다는 뜻이겠지요. 이런걸 보고 가는 방망이 오는 홍두깨라고 해야 하지 않을가요.》

두사람은 허거픈 웃음을 터뜨렸다. …

동쪽교외의 조용하면서도 경치좋은 곳에 위치한 3층짜리 흰색건물이 앞시창너머로 다가왔다. 2년전에 개축하는것을 본적이 있는데 그후에도 별로 올 일이 없다보니 차를 타고 지나다니면서 바라보는것으로 그쳤던것이다.

정문앞에 차가 이르자 육중한 자동차단물이 소리없이 열렸다. 그만하면 품개나 들어보이는 한적한 정원을 가로질러 곧추 뻗은 길을 따라 얼마쯤 가니 2층 외랑밑에 펼쳐진 공지에 서있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눈에 띄웠다. 모두 알만 한 동포기업가들이였다.

리성원이 차에서 내리자 키가 그와 엇비슷하고 체격이 다부진 40대 중반의 인상좋은 사나이가 사람들속에서 빠져나와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살이 오른 둥그런 두볼, 화가가 그린듯이 매력있는 눈섭, 번듯한 이마, 정기가 넘치는 눈… 세련된 서양신사를 방불케 하는 미남형의 인물이였다.

《안녕하십니까? 리성원사장선생이 저희들의 초청에 응해주신데 대해 감사히 생각합니다.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있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되여 기쁩니다. 제 부령사 한시명입니다. 지난해에 발탁되여오다나니 이렇게 뒤늦게 인사를 나누게 된것을 량해해주십시오.》

《저 역시 반갑습니다.》

《령사님이 어제 저녁 갑자기 대사의 호출을 받고 떠나다보니 제가 이 연회를 주관하게 되였습니다. 사실 연회라기보다 령사관개설을 기념하여 차린 오찬회로 알아주십시오. …아, 시간이 이렇게… 자, 어서 들어가십시다.》

부령사가 앞서서 화려한 대형유리로 장식된 출입문으로 향했다. 리성원은 낯익은 동업자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며 그의 뒤를 따라 현관홀로 들어섰다.

대낮인데도 현란한 무리등이 반가운 손님들을 유혹하려는듯 은은히 명멸하고있었다. 무척 화려하면서도 은근한 친화력이 풍기는것이 기분을 느긋하게 해주었다.

《오셨소?》하는 말소리에 돌아보니 서해수가 아리숭한 미소를 짓고 서있었다.

리성원은 그와 함께 2층계단을 올라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서너개의 원형식탁들이 정연하게 놓여있는데 식탁마다 갖가지 술병들과 풍성한 료리들로 장식되여있었다.

돈많은 동포기업가들을 상대로 호화급의 수준으로 차린것이 대뜸 알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것을 암시하려는것인지 서울에서 궁중료리로 손꼽힌다는 이름이 희한한 값진 료리들도 얼핏얼핏 보였다.

꼬리치마차림의 젊은 녀접대원들이 분주히 오가며 잔들에 술을 부어주었다.

손님들이 자리에 앉자 주탁의 중심에 앉아있던 부령사가 일어섰다.

《오늘 저명한 동포기업가선생들과 이렇게 뜻깊은 자리를 함께 하고보니 고국을 멀리 떠나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에서 민족의 재능과 근면성을 과시하며 고군분투하고계시는 여러분들에 대한 경탄과 감사의 정을 금할수가 없습니다.》

부령사는 자기의 감개무량함을 더 절절히 표현할 길이 없는것이 안타까운듯 고개를 숙이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수륙만리 떨어져있는 고국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충의심을 품고 민족의 중흥과 발전을 도모하는 헌신과 쇄신에 전념하시는 여러분들의 건강과 사업에서의 성공을 위해 이 잔을 들것을 제의합니다. 건배!》

여기저기에서 박수소리들이 울렸다. 이어 기업가들이 잔을 저저마다 내밀었다.

리성원은 박수를 치며 부령사의 언변술이 괜찮다고 속으로 감탄했다.

저 부령사가 만일 광고대행사 같은것을 운영하면 멋지게 잘해낼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리성원은 절로 웃음이 나갔다.

《아, 리성원사장선생이 웃으시는걸 보니 제 기분이 즐거워지는군요.》

어느새 주탁을 한바퀴 돈 부령사가 술잔을 든채로 다가왔다.

《전 부령사님의 건배사에 이미 취해버렸습니다. 혹시 관직을 마치시면 우리 회사에서 일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리성원은 롱담인지 진담인지 알수 없는 화법으로 말을 던졌다.

《사장선생의 호의가 참 감사합니다. 역시 사장선생은 듣던바대로 배려감각이 뛰여나시군요. 지금처럼 가정이 불행을 겪는 심란한 속에서도 유모아를 즐기시니 말입니다. 허허허.》

자연스러우면서도 로숙하게 말머리를 돌리며 상대를 슬그머니 압박해오는 부령사앞에서 리성원은 저으기 당황해지고말았다.

절친한 몇몇 사람밖에 알지 못하는 자기 가정의 내면을 이 부령사가 손금보듯 하고있는것이 아닌가.

《하지만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생활이란 행복과 불행의 교차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전 사장선생의 손녀와 며느리가 언제인가는 꼭 돌아오리라고 믿고싶습니다. 척 보건대 인정이 넘치신 사장님을 멀리할 까닭이 도대체 있을상싶지 않으니까요. 만일 저의 방조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이야기하십시오. 가령 생활상 불편하여 가정부가 요구되신다면 인물곱고 마음씨도 선량한 알맞춤한 적임자를 소개해드릴수 있죠. 아무러면 고국이 제 자식들의 불행을 외면할수야 있겠습니까.》

부령사는 각근하게 말을 섬겼다.

《말씀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나때문에 마음쓰지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만이 아니라 다른분들에게도 관심해주셔야지 이러다간 내가 부덕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리성원은 미안하다는듯 한 표정으로 다른 식탁들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허허, 역시 선생님은… 그럼 잠간 실례하겠습니다.》

리성원의 기분을 알아차린듯 부령사는 친절하게 량해를 구하고 자리를 옮겨갔다.

그를 바라보던 리성원은 맥없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자식들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는 고국이라…

느닷없는 박수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어느새 주탁뒤에 무대 같은것이 펼쳐지고 요염하게 생긴 녀가수가 마이크를 쥐고 나와 잇달아 울리는 반주선률에 따라 이리저리 몸을 밸밸 비틀기 시작했다.

연회장의 창가림이 서서히 드리워지고 천정의 무리등이 차츰 희미해지다가 완전히 꺼져버렸다. 무대쪽만 어둑시근한 조명빛이 명멸하는데 그 녀자의 간드러진 노래소리가 연회장을 뒤흔들었다.

 

    달빛어린 허허바다 파도만 치고

    부산항 간 곳 없는 검은 수평선

    리별만은 무정터라 리별만은 야속터라

    더구나 못 잊을 사람끼리 음 음

 

귀에 익은 노래인 《울며 헤진 부산항》이였다. 참가자들속에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일부러 선정한듯 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화사하게 차려입은 미모의 녀성들이 참가자들에게 다가가 춤을 청했다. 취흥이 오른 사람들이 하나둘 응하더니 함께 어우러지며 몸들을 흐느적인다. 이미 이런 초청연에 익숙해진듯 몸에 푹 배인 동작들이였다.

리성원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프렸다.

하필이면 왜 저 노래를 부른담?

어른키의 두길이나 되는 높은 철조망으로 휘감은 부산피난민수용소, 창자를 훑어내리는듯 아츠럽게 울어대던 외국선박의 고동소리, 스무평짜리 감방같은 선창에 콩나물시루처럼 들어찬 올망졸망한 어린이들속에서 주먹으로 눈물을 씻던 열네살의 고아소년, 손바닥만 한 살창너머로 까마득히 멀어져가던 컴컴한 부산항…

아무리 주리고 매를 맞아도 부모의 유골이 묻힌 땅만은 떠날수 없어 몸부림치며 피울음을 터쳤건만 무정하게, 원망스럽게 자기를 창파너머로 한사코 떠밀어보내던 땅이 아니던가.

리성원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부령사가 사람들과 친절하게 대화를 나누고있었다.

《여기에 누가 고국땅을 웃으며 하직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편 이렇게도 생각해볼수 있지 않을가요. 그래도 그때 고국을 떠나 이렇게 이민을 오셨기에 오늘 이런 인생의 성공을 거둘수 있지 않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고국을 탓하기만 할것이 아니라 고맙게 여길수도 있지 않을가요. 물론 이건 저 개인의 생각입니다만…》

마치 리성원의 심정을 엿보고 그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인듯 생각되였다.

리성원이 속으로 코웃음을 치는데 다른 식탁에 앉아있던 서해수가 조용히 옆에 다가와 앉았다.

《형님, 이젠 기분이 좀 안정되셨소? 아까 저 부령사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는것이 참 자연스럽더군요.》

《그렇게 보이던가? 아마 래일쯤이면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이 여기 교포일간지들을 채울걸세. 그래도 가정이 파산되여 울상을 한 모습보다야 나을테지.》

리성원이 빈정거리자 서해수가 혀를 털었다.

《허허 참, 뭘 그리 이죽거리시우. 하여튼 형님의 입심이 변하지 않은걸 봐서두 그 강인함에 탄복할 지경이우다. 허허허.》

쓴웃음을 나누는 두사람에게로 부령사가 미끄러지듯 소리없이 접근해왔다.

《소문을 들으니 두 사장님들의 사이가 자별하시다던데 그렇게 다정히 앉아계시는것을 보니 마치 의형제 같군요. 참, 서사장님은 여기에 무슨 동포전국련합회라든지 하는 교포조직의 지부를 내오는 일에도 관여하신다던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국땅에서 동포들끼리 서로 도와주고 협력하는거야 누구의 견지에서 보아도 찬사를 받을만 한 일이지요. 우린 앞으로 지금 우리의 후원을 받고있는 카나다<한인협회>뿐아니라 그 조직에도 방조를 드릴가 하는데… 어떻습니까?》

뜻밖의 제의에 서해수는 입을 하 벌리고있다가 넉살좋게 대답했다.

《부령사님이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격하여 몸둘바를 모르겠군요. 정 그러시다면 머지않아 결성되는 우리 지부의 후원단체명단에 령사관과 부령사님의 명함도 적어넣도록 하지요. 이건 실로 예상치 못했던 영광이로소이다.》

부령사는 여전히 웃음이 실린 얼굴로 그 평가가 과분하다는듯 두팔을 쩍 벌려보였다.

《천만에요. 그건 우리들의 의무이기도 하지요. 때문에 우린 얼마전에 울라지보스또크전시회에서 사장님이 북의 대표들과 만난 일에 대해서도 기쁘게 생각한답니다. 경제협력이든 문화협력이든 상관할바가 아니지요. 요는 동포들끼리 만난다는데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전 리성원사장님이 북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을 보장해드리는것이 나의 응당한 본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바람같이 나타난 묘령의 녀인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두툼한 문서철 같은것을 식탁우에 놓고 사라졌다.

《감사는 합니다만 이거 공연한 수고를 끼치는것 같습니다. 이런건 내 서기한테 과업을 주어도 되는건데…》

지나친 호의에 거북해진 리성원이 짐짓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저 성의로 아시면 됩니다.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사장님을 위해 이런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결심입니다. 그럼 이젠 그만 이야기들을 나누시고 술을 듭시다. 두 사장님들의 건강과 기업에서의 성공을 위하여!》

부령사가 자기가 이 연회장의 주인이라는것을 과시하려는듯 호기있게 말했다.

세사람은 나름대로의 궁냥이 어린 미소를 지으며 술잔들을 들었다. …

《형님, 기분이 어떠시우?》

승용차의 운전대를 쥔 서해수가 후사경으로 뒤좌석에 앉은 리성원을 넘보며 물었다.

리성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속엔 연회가 끝난 뒤 밖에까지 따라나와 그들을 바래우며 하던 부령사의 의미심장한 말이 지꿎게 맴돌고있었다.

《앞으로 자주 만났으면 합니다. 오늘이 우리들 호상간에 뜻있고 의의있는 계기가 되였다고 생각됩니다.》

부령사의 성의에 못이겨 포도주를 여러잔 마신 리성원은 취기가 몰리는지 정신이 얼떨떨해보였다.

보다못해 서해수가 그의 차를 돌려보내고 자기의 차에 오르게 했던것이다.

《거 부령사가 형님한테 관심이 높던데요.》

서해수가 슬그머니 리성원의 마음을 부채질해보려는듯 말을 걸었다.

《자네 역시 그의 관심사속에 있더구만 뭐. 그만하면 그 량반도 꽤 사귈만 하더군. 인사성도 있구. 그리구 사교성두 나무랄데가 없는데다가 인정이 폭폭 넘쳐나지 않나. 아무러면 무뚝뚝한 자네 같을라구.》

《하하하, 형님이 정에 주리긴 주렸구려. 헌데 그 알랑쇠같은 량반이 며칠전에 있은 동포교인들의 추수감사례배때 뭐라고 했는지 아시우?》

《필경 하나님을 잘 모시라고 했겠지.》

《거 비슷하게 맞혔수다. 실로 하나님같이 인자하고 너그러워보이는 그 량반이 지금 동포사회에서 동포전국련합회 지부결성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있는데 이것은 평양의 통일전선전략에 놀아나는 망동이라고 했다질 않소. 그러니 아까 연회장에서 그가 한 극진한 발언과 대비해보매 그 량반 얼굴이 둘로 보이지 않소?》

리성원은 감고있던 눈을 떴다.

《자네 뭘 말하자는건가?》

《자칫하다가는 형님이 그자의 촉수에 걸려들것 같아 그러우다. 아마 그자가 형님한테 소개하겠다는 가정부라는것도 틀림없이 형님을 감시하는 정보선일지 알게 뭐요. 앞으로 형님이나 나를 잘 돌봐주겠다구 하던것도 말이요. 장차 우리 일에 부지런히 끼여들겠다는 의미일거요.》

서해수는 의심할바가 없다는듯 자신있게 말했다.

리성원은 다시 눈을 감았다.

대체 그네들에게 내가 무엇때문에 필요하단 말인가.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기업밖에 모르는 이 늙은이가 어째서 관심사가 된단 말인가. 아니, 이건 필경 서해수의 신경과민이 틀림없어. 요즘 이 친구가 기업보다 정치라는 수렁판에 한걸음한걸음 깊이 빠져드는것 같단 말이야.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별나게 변해가거던. 혹시 이 친구가 나까지 자기들의 조직이라는데 끌어들이려는건 아닐가. 아니야, 설마 해수가…

리성원의 생각은 향방을 잃고 다시 좌왕우왕하기 시작했다.

가만, 그러고 생각해보면 해수의 말도 정 부정하기 어려운것은 사실이다. 부령사가 우리 집안일도 그렇고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나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빤드름히 알고있다는것도 스칠 일은 아니다. 그네들의 말을 빈다면 60년가까이 이국살이에 정신도 육체도 다 삭아버린 이 로구에게 비쳐드는 고국의 속죄이며 혜택이란 말인가. 흥, 고국이라?!

리성원은 정신을 가다듬느라 둬번이나 눈을 감았다떴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태평조의 가락 같은것이 새여나왔다.

《신경이 예민해진걸 보니 자네도 이젠 늙었나보네. 걱정할게 뭐가 있겠나. 우린 그저 제 기업을 잘해나가면 그만이 아니겠나. 자네도 알겠지만 난 남쪽이든 북쪽이든 상관을 하지 않고 한생 내 기업만을 위해 살아온 몸이야. 일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보고 이제는 생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나를 고국이니 뭐니 하면서 꼬드긴다면 그야말로 거부기의 잔등에 면도질하는 격이 될걸세.》

서해수의 볼편이 푸들쩍거리는것이 보였다.

《형님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우? 그럼 자기의 조상이 있고 태를 묻은 조상의 땅까지도 영원히 잊어버리고 살 작정이시우?》

리성원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도대체 자네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건가, 나에게서 무얼 바라는가 말일세?! 지금 난 모든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란 말이야. 그래, 내게 뭐가 남아있나? 회사, 돈, 공장들? 자식…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없네, 없어! 재산이 만족이고 풍족이 아니였어. 허울뿐이란 말이야. 이 공허를 자네가 메꾸어줄수 있어? 천만에!》

서해수는 말없이 앞시창만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가정이 없는 사람인것이다. 그는 리성원에게 자제하라고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실로 오래간만에 진속을 터놓는 리성원을 보느라니 그럴 생각이 잦아들고만것이였다.

《자네나 나나 모두 빈털터리야. 그러구두 뭐라구, 조국?! 제 가족 하나 지탱 못하는 불행한 내 처지에 조국타령이라. 이보게, 해수! 그럼 나한테 가르쳐주게. 민족의 파편으로 이 세상 한끝에 내뿌려진 나한테 조국은 어디인가? 남인가, 북인가?》

눈을 감고 뒤좌석등받이에 몸을 의지한채 푸념을 늘어놓는 리성원은 실성한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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