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회)

 제 2 장

 13

 

오늘은 일요일이다. 오후 네시쯤 되자 리성원은 혼자 조용히 집을 나섰다. 그의 집에서 소로길을 따라 5분정도 나오면 마이클거리가 나진다.

거리의 좌우로는 나지막한 5~6층짜리 주택건물들이 지붕을 맞대고 늘어져 서있는데 그 거리는 넉넉히 잡아서 한마장쯤 되였다. 그 중간쯤에 이딸리아식당이 있고 백메터쯤 더 가면 해피댄스홀이라는 무도장이 눈에 뜨인다. 리성원이 지금 찾아가는 죠이티룸이라는 차집은 거기서 오십여메터정도 떨어진 도로옆에 있었다.

이름그대로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지는 몰라도 프랑스계카나다인가정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이 차집은 리성원이 외로울 때마다 찾군 하는 일종의 안식처나 다름이 없었다. 안해나 서해수는 그것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리성원은 언제 한번 그들과 함께 와본적이 없었다.

차집안에 들어서니 5~6명의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그는 계산탁앞에 서있는 녀주인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나서 자기의 고정좌석인 7번탁으로 다가가 팔걸이의자에 앉았다.

백평방메터가 채 못되는 실내이지만 차탁이 일여덟개뿐이여서 널직해보였다. 창가림을 드리우고 붉은색에 가까운 어두운 조명빛에 서정적인 프랑스의 고전음악까지 흘러나와 그윽한 정서를 자아내고있었다.

잠시후에 녀주인이 그의 차탁으로 다가왔다. 단골손님들에게는 각별히 환대를 베푼다는 녀인이였다. 하지만 리성원은 40대라고는 해도 나이보다 퍽 젊어보이는 이 녀자가 특별히 자기한테 더 관심을 돌려주는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혹시 이것이 리성원자신의 일방적인 생각일지도 몰랐다.

확실히 이 녀주인에게는 류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것은 그자신은 두말할것도 없고 이 차집의 품격까지 더해주는 친절하고 사려깊은 지성이였다. 처녀시절에는 빠리의 루브르미술박물관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프랑스문학과 미술작품을 분석하는걸 보면 상당한 수준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는 자기 민족의 문호인 빅또르 유고를 무척 사랑했다.

언제인가 리성원은 손님들이 거의 비다싶이 한 차집에 들린 기회에 녀주인과 오랜 시간 마주앉아 한담을 나눈적이 있었다. 그때 유고의 장편소설 《노뜨르담대사원》의 독후감을 가지고 이야기가 벌어지게 되였다.

녀주인이 에스메랄드의 형상에 대한 아쉬움과 까지모도가 이루지 못한 사랑과 죽음을 두고 안타까움을 토로할 때 리성원은 틀어올린 진회색의 머리칼을 가진 그 녀자의 밤빛눈동자에 어린 눈물을 보았었다.

녀주인이 지니고있는 박식함과 그와 예술적인 조화를 이루는 감정의 섬세함에 리성원은 매혹되게 되였다.

《선생님께서 오래간만에 오셨군요.》

《친절한 <꼬제뜨>, 그새 잘 있었소?》

두사람은 마주앉을 때면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군 했다.

녀인은 가볍게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했다. 그것이 특별히 반가움을 표시하는 인사라는것을 리성원은 잘 알고있었다.

《꼬제뜨》는 이 녀자의 이름이 아니였다. 리성원은 그에게서 유고의 작품에 대한 일가견을 들은 후부터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 이름은 유고의 어느 대표작에서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이였다. 그것으로 하여 그들의 사이는 더 친밀해졌다.

녀주인이 차탁에 커피를 올려놓자 리성원은 불안해졌다. 그가 훌 가버릴것 같아서였다.

《정 바쁘지 않다면 잠시 앉아주면 고맙겠소. 당신을 보면 무엇인가 잘 떠오르군 하오. 그래주었으면 하오.》

《바라신다면 그렇게 하죠.》

그 녀자는 리성원의 청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짓고 두손으로 턱을 고인채 커피잔을 입가에 가져가는 리성원을 사려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커피잔을 내려놓던 리성원은 녀인의 눈가에 어려있는 눈물자욱을 보았다.

《혹시 방금전까지 에스메랄드와 까지모도를 생각한게 아니요?》

《물론이지요. 왜 그뿐이겠어요. 빠리를 그려보았지요. 몽마르뜨언덕과 샹젤리제거리도 걸어보고요.》

《난 당신을 보며 살아있는 몬나리자부인이 아닌가고 생각해본적이 있었소.》

녀주인은 눈가를 손수건으로 훔치고는 활짝 웃었다.

《선생님은 년세에 어울리지 않게 아첨을 곧잘하세요. 하지만 그 몬나리자부인도 지금은 빠리의 루브르박물관에 있지요. 비록 그림속의 인물이라도 나는 그가 나보다는 행복하다고 생각돼요.》

리성원은 동정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프랑스가 그렇게도 그립소?》

《그럼 선생님은 조국이 그립지 않은가요?》

녀주인은 악의없는 미소를 머금고 되물었다.

《?!》

리성원은 한방망이 얻어맞은듯 했다.

어디선가 거치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기의 조상이 있고 태를 묻은 조상의 땅까지도 영원히 잊어버리고 살 작정이시우?》

그렇지, 서해수가 나를 질타하던 말이였지.

《선생님, 미안합니다.》

녀주인이 새 손님이 들어오자 두손을 가볍게 펼쳐보이며 일어섰다.

《괜찮소, <꼬제뜨>. 어서 가보오.》

그 녀자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리성원은 한손으로 이마를 싸쥐였다.

《여기에 누가 고국땅을 웃으며 하직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한편 이렇게도 생각해볼수 있지 않을가요. 그래도 그때 고국을 떠나 이렇게 이민을 오셨기에 오늘 이런 인생의 성공을 거둘수 있지 않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고국을 탓하기만 할것이 아니라 고맙게 여길수도 있지 않을가요?》

서해수의 석쉼한 목소리가 어느덧 한시명부령사의 경쾌해진 목소리로 바뀌여 그의 뇌리를 울리고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고국이 있단 말이지. 그럼, 그 말이 옳기야 옳지. 내가 그때 그 땅을 떠나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살아서 이렇게 숨이나 쉬고있을가. 고향인 인천의 그 어느 주변에선가 뜨내기어부가 되여 페선이나 다름없는 목선을 타고 풍랑세찬 바다에 나갔다가 벌써 오래전에 물고기밥이 되였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누구도 들어가기 끔찍해하는 삼척이나 녕월탄전의 어느 탄갱에 들어갔다가 탄층이 무너져내려 순장이 되고마는 신세를 면치 못했을테지. 물론 가정도 이루지 못한 처지라 내 주검앞에 술 부어줄 자식이나 마누라도 있을리 만무하고 외토리까마귀 한마리가 묘비도 없는 무덤가옆에서 구슬프게 장송곡을 불러주었을테지. 그래, 난 그 땅을 저주만 할것이 아니라 고맙게도 여겨야 한다. 그 땅이 나를 수륙만리 파도너머로 죽든살든 아랑곳없이 제때에 내던져주었기에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이렇게 가정도 이룰수 있었고 이름도 자자한 챠일드의 주인이 될수 있은것이 아닌가. 하다면 내가 떠나온 후 고국이라는 말로밖에 달리 부를수 없는 그 땅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가.

리성원은 유럽의 류학시절과 H시에서 기업활동을 하면서도 자기가 태를 묻은 고향이 있고 부모들의 유골이 묻힌 그 땅이 그리워 신문과 통신, 인편을 통해 이와 관련된 소식들을 손에 잡히는대로 보고 들었다. 하지만 나날이 보이고 들려오는것은 참담한 비극들뿐이였다.

자유와 정의에 피끓는 대학생들이 선봉에 서자 그의 뒤를 따라 전체 민중이 들고일어난 의로운 4월봉기로 리승만이 하와이로 쫓겨간지 불과 1년만에 미국제총검을 거머쥔 군부깡패들이 5. 16이라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세상에 미친놈 칼을 쥔것처럼 무서운것이 없다더니 무지막지한 폭압으로 민주화의 요구를 짓밟아버리고 권력을 찬탈한 새 《정권》의 시국책이란 더욱 가관이였다. 《산업화》, 《고도성장경제》를 운운하며 지금도 식민지통치시절을 그리워하는 일본과의 매국협정을 체결하고 전대미문의 인력수출과 매춘관광의 활성화로 민족의 존엄을 시궁창속에 처박았다. 지어 동족과 민중에 대한 선전포고와도 같은 숨막히는 독재통치로 온 이남땅을 암흑의 무법천지로 만들며 종신집권을 꿈꾸다가 동맹자라던 미국의 검은손에 의해 종말을 고하고말았다.

그 이후에 역시 미국의 지지와 뒤받침속에 군림한 신군부세력은 민주와 통일을 웨치는 민중을 가차없이 도륙을 낸 피의 목욕탕이라는 야수화된 대명사로 출범을 선언했고 군사독재의 바통을 충실히 이어 반민주, 반민중이라는 궤도를 따라 미친듯이 질주하다가 파멸의 운명을 면치 못했다.

또 군사독재를 완전히 청산했다는 《문민정권》하에서 파쑈의 망령인백골단이 다시 등장했고 민중을 통채로 외국자본의 빚더미우에 올려앉힌 통화위기가 불어닥쳐 기승을 부렸다.

그후에 생겨난 《정권》이라고 해서 별로 달라진것이 있었던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뒤흔든 초불항쟁을 불러온 미국산 수입소고기파동과 굴종적인 일본군성노예문제《합의》, 전직 및 현직《대통령》들까지도 줄줄이 련루되여있는 세계를 뒤흔든 초대형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추문들…

가장 가까운 혈맹이라는 미국과 서방의 언론들조차 이남의 사회정치적악페들과 부조리들을 사정없이 낱낱이 까밝힐 때 리성원은 모닥불을 뒤집어쓴것처럼 모멸감을 느끼군 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앞에서 자기는 고향을 모른다고, 서울이며 부산이 있는 태평양건너의 저 반도땅은 자기의 고국이 아니라고 한두번만 말하지 않았었다.

하다면 그 반도의 절반땅인 북은 어떠한가.

리성원은 이에 대해서도 뭐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쪽은 그에게 너무도 생소하고 낯이 선 곳이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가 상대한 북쪽사람들이란 두세명뿐이였는데 그중의 한사람이 바로 장인 하필선이였다.

…1960년이라는 한해가 저물어가던 초겨울 어느날 H시 어느 중등학교운동장을 지나던 한 동양신사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은 운동장에서 뛰노는 학생들에게 넋을 잃은듯 부러움의 눈길을 보내고있는 한 소년에게서 떠날줄 몰랐다.

신사는 천천히 소년의 곁으로 다가갔으나 그애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얘, 너 조선아이냐?》

오래간만에 듣는 귀에 익은 조선말에 깜짝 놀랐던 소년의 얼굴에는 반가운 빛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어디서 주어입었는지 물날고 허름한 양복저고리, 때국물이 다닥다닥 말라붙은 얼굴, 언제 깎았는지 모를 더부룩한 수밤송이머리…

신사는 많은것을 물어보았고 소년은 자기를 숨김없이 터놓았다.

이름은 리성원, 나이는 열다섯살, 한해전에 해외입양아로 카나다로 입국, 늙은 양부모의 집에서 고역을 겪다가 가스폭발사고로 그들이 사망하여 또다시 고아로 됨, 현재 집이 없이 류랑중…

처량한 눈길로 소년을 바라보던 신사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갈데가 없겠구나. 음… 너 일이란걸 해봤니?》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키면 잘해보겠어요.》

소년은 신사를 따라 그리 크지 않은 어느 인쇄소로 갔다. 이십여명정도의 로동자들이 긴장하게 일하고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카나다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상품광고며 상표들을 부지런히 찍어내고있었다.

리성원은 자기를 데리고 온 신사의 이름이 하필선이며 그가 이 인쇄소의 사장이라는것을 알았다.

《저 일은 조판이라는거다. 저걸 하자면 빠른 일솜씨와 언어소유력을 지녀야 한다. 헌데 외국어를 꽤 할수 있을가?》

하필선은 걱정스러운듯 물었다.

리성원은 영어는 양부모와 살면서 좀 익혔고 다른 어종들은 일하면서 배우겠다고 공손히 대답했다. 사실 그는 영어문자는 잘 몰라도 어지간한 뜯개말정도의 회화는 번질수 있었다.

《좋다, 그렇게 하자.》하고 하필선은 선선히 응낙했다.

조판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나이와 육체적조건으로 봐도 그렇고 기능과 실력의 측면에서도 따라가기가 헐치 않았다. 게다가 초긴장성을 요구하는 일이여서 잠간이라도 헛눈을 팔거나 딴 생각을 하면 돌이킬수 없는 인쇄사고를 일으킬수 있었다.

리성원은 이를 악물고 이악하게 일했고 짬시간과 밤시간을 리용하여 열심히 외국어를 공부했다. 힘에 부치고 너무도 피곤하여 코피를 흘릴 때마다 그는 어떻게 하나 공부만은 하라던 어머니의 말을 생각하며 힘을 냈다.

이렇게 이를 사려물고 이악하게 노력하여 리성원은 2년동안에 영어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번질 정도에까지 이르게 되였다.

함께 일하는 로동자들은 그의 무서운 학구심과 정열, 남다른 회화구사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드디여 실적과 실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것이다.

그의 이러한 재능과 열정, 이악성을 누구보다 눈여겨보며 대견해한것은 하필선이였다.

어느해 가을날 사장의 부름을 받고 집을 찾아갔던 리성원은 방안에 차려놓은 음식상앞에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

리성원은 집주인의 물음에 얼떠름해지고말았다.

《추석날이다. 우리 조선사람들의 민속명절이지. 한가위라고도 한다. 우리 조상들앞에 햇곡식으로 식사를 차려놓고 제를 지내는 날이란 말이다. 하긴 어려서 부모를 잃고 방랑생활을 해온 네가 그걸 알리는 없겠지만.》

그때까지 리성원은 술을 마시는 법을 몰랐다. 그러나 그날만은 사장의 술동무를 해야 했다.

그 과정에 그는 사장의 고향이 이북인 평남도 성천이며 그곳에서 6. 25전쟁전까지 작은 철공소를 경영해왔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전쟁의 참화는 단란하던 하필선의 가정에도 엄청난 비극을 몰아왔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안해를 잃은 설음이 채 가셔지기도 전에 그는 미군의 원자탄소동에 속아 하나밖에 없는 다섯살잡이 외동딸을 등에 업고 월남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나의 눈앞엔 지금도 정든 고향의 풍경이 삼삼하다. 예로부터 성천밤이라고 하면 약밤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성천초는 또 어떻구. 잎이 둥글고 잎꼭지가 목기처럼 생겼다고 해서 목기초라고도 불렀지. 십리밖에서도 그 독특한 향기가 진동해서 남정네들의 간개나 말렸지. 우리 성천온천은 못 고치는 질병이 없어. 하지만 해방전엔 그때문에 왜놈들에게 더 뜯기우고 닥달질을 당해야 했어. 나도 부모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조그마한 철공소를 가지고있었지만 쪽발이들의 멸시와 천대에 허리를 펼새가 없었단다. 해방이 되자 나라에서는 땅없는 농민들에게는 땅을 주고 우리 같은 중소기업가들에게는 융자를 해주어 마음편히 기업을 펼칠수 있게 해주었었다. 우리 고향땅은 참 살기 좋은 곳이야.

왜놈들이 쫓겨간 비류강기슭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 사람들은 또… 인물도 마음씨도 한결같이 고왔지. 그래서 나도 쟤 에미를 맞아 인생의 꿀같은 행복도 맛보았구…》

취기가 오른 하필선은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한정없는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그와 마주하여 쭈그리고 앉은 리성원은 먼 달나라이야기를 듣는듯 한 심정이였다. 마치 어렸을 때 어머니가 들려주던 행복의 꽃동산에 대한 옛말과 비슷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놈의 전쟁이… 사람도 재산도, 아니 나의 귀중한 모든것을 다 날려보냈지. 월남을 했어도 이북출신이라고 따돌림을 받고 쩍하면 경찰서에 불리워다니며 이남 각지를 전전하다가 이왕 고향을 버리고 온 몸이 세상 그 어디인들 못 가랴 하는 심정으로 여기까지 흘러온거야. 난 그렇다치고 어려서 제 에미를 잃은 쟤는 얼마나 불쌍하냐. 그래서 난 여기 정착한 후에도 재취를 하라는 이웃들의 권고도 다 뿌리쳤다. 저애만 아니였던들…》

리성원은 방 한끝에 차린 제상앞에 하염없이 오도카니 쪼그리고 앉아있는 사장의 딸을 바라보며 목구멍으로 불덩어리같은것을 삼켰다.

이심전심이라고 절로 마음이 처량해진 그는 사장을 위로할 생각도 다 잊고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사장은 리성원이 남같이 여겨지지 않았는지 더 잘 대해주었다. 항상 책에 파묻혀있는 그에게 공부할 시간도 주었고 건강을 혹사하지 말라며 로임외에 용돈도 가끔 쥐여주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어. 언제나 정신을 바싹 차리고 앞을 내다봐야 해. 희망은 사람에게 있어서 지팽이나 같은거야. 꿈은 키울수록 좋은거다. 닭의 소원은 기껏 쌀겨라지만 우린 사람이거던. 맘껏 꿈을 펴봐라.》

작업도중의 휴식시간에 하필선이 리성원에게 한 말이였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의지가지할데 없던 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제 힘자라는껏 노력하겠습니다. 공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짬짬이 이것저것 생각되는것도 없지는 않습니다. 공상과 나이는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공부하면서 보니 그 꿈이란것도 본인의 결심과 의지, 실현방식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성원의 이 말은 사장을 만족시킨듯싶었다.

《바로 그게 중요한거다. 인생의 목표를 큼직이 세우는게 좋아. 내 생각엔 지금 맡은 일을 하면서 인쇄설비들을 깊이 파악해보는것이 좋을것 같다. 평판과 제판, 제책 등 인쇄공정들도 말이야. 특히 설계부분을 중시해야 해.》

《사장님의 분부라면 무슨 일이든 다하겠습니다.》

그후 리성원은 자기의 말대로 인쇄설비들을 깊이 연구하고 인쇄소의 설비갱신을 위한 방도를 제나름으로 구상해보았다.

오랜 고심끝에 어느날 리성원이 자기 생각을 제기하자 하필선은 크게 놀라며 대견해했다.

그를 놀래운것은 그것만이 아니였다. 키도 늘씬해지고 어깨며 가슴이랑 서양인들 못지 않게 름름해진 리성원의 외형은 하필선에게 또 다른 생각과 기대를 품게 해주었다.

어느날 그가 자기 방에 리성원을 불러 회사의 발전방향에 대한 의견을 듣고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희맑은 살색의 처녀애가 들어섰다.

《아버지! 저예요. …어마나, 이야기를 나누시던중이군요.》

《오, 일없다. 참, 인사를 해라. 정 초면은 아닐테지?》하고 하필선은 딸과 리성원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리성원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하의영이라고 불러주세요.》

총각과 처녀는 서로 점직해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리성원은 눈앞의 상대에게 무한정 이끌려드는 자신을 주체할수 없었다.

추석날에 본 처량한 모습의 소녀가 아니라 활짝 피여난 흰 장미같은 숙성한 처녀가 서있었던것이다.

리성원은 차츰 높아지는 숨결을 억제하느라 공연히 헛기침을 했다.

그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하필선이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어떻게 왔느냐?》

《아침에 아버지가 하교길에 들리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하의영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귀여우면서도 아릿다운 그 표정과 자태는 다시한번 리성원의 심장을 세차게 압박하는듯 했다.

《참, 내 정신 봐라. 너의 학교 졸업기념음악회가 래일모레라고 했었지. 언제부터 너의 학교 교장선생이 나한테 기부금을 청탁해왔는데… 음악회에 가는 기회에 기부하려고 한다. 그러면 되겠느냐?》

《고마워요, 아버지. 그럼 난 그렇게 알고 먼저 집으로 가겠어요.》

하의영은 방안에 눈부시게 밝은 웃음을 뿌리고는 사라져버렸다.

두사람은 그가 사라진 문쪽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니 참 좋겠습니다.》

말꼭지를 먼저 뗀것은 리성원이였다. 그 말속에는 정말로 걱정없이 배우는 하의영에 대한 부러움이 짙었다.

《난 저애를 서도이췰란드에 음악을 배우도록 류학보낼 생각이네.》

《류학이요?… 따님은 참 행복자입니다.》

리성원은 진정으로 부러움을 표시했다.

그의 눈빛을 예리하게 곁눈질해보던 하필선이 허허거리며 다가갔다.

《자넨 류학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없나?》

사장의 말에 리성원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기를 놀린다는 생각이 갈마들어서였다.

《만일 자네만 반대가 없다면 난 쟤 보호자겸 함께 보낼 결심이네. 어떤가? 자네도 공부를 하고싶다고 했지?》

리성원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편 사장이 자기를 놀린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한번 크게 뜬눈으로 바라보았다.

《예?! 제… 제가 말입니까?!… 원, 사장님은 그런 롱담을 다하십니까.》

《롱담이 아니야. 자네도 류학을 가란 말일세.》

그의 두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저에게 무슨 큰돈이 있어 류학이란 말씀입니까.》

하필선은 리성원에게로 다가가 그의 량어깨를 눌러앉혀주며 말했다.

《자네와 나, 내 딸과 회사를 위한 일인데 그만한 돈이 대수겠나. 그런 걱정은 아예 말게. 자네도 알겠지만 인쇄공업기술에선 도이췰란드를 견줄만 한 나라가 없지. 돈걱정은 말고 우리 딸애와 함께 류학을 가게. 난 자네를 믿고싶네.》

《?!》

이렇게 되여 리성원은 그로부터 얼마후 하의영과 나란히 서도이췰란드류학의 길에 오르게 되였던것이다. …

리성원은 천천히 커피를 한모금 들이켰다.

장인은 생각할수록 잊을수 없는 은인이였다. 하지만 리성원은 고향을 그토록 그리워하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준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리성원의 심중에 기억되여있는 장인의 고향에 대한 표상이란 막연하기 그지없는것이였다.

한숨을 길게 뽑고난 리성원은 책상의 한켠구석에 놓여있는 문서가 눈에 띄우자 입을 다셨다. 《한국》령사관에서 차린 오찬회때 부령사가 친절하게 넘겨준 문서철이였다. 그속에는 북과 관련된 자료들이 적지 않았다. 자료들은 판에 박은듯이 북이 지금 극심한 식량난속에서 간신히 지탱해내고있지만 유엔이라는 국제사회의 가증되는 제재와 봉쇄속에서 견디여내지 못할것이라고 떠들고있었다. 혹심한 가물속에 메말라가는 북의 농경지며 전대미문의 태풍피해를 입고 교각은 간데없이 레루만 걸려있는 철교를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헛 참…》하고 리성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족이 당한 참혹한 재난을 동정하지는 못할망정 무슨 자랑거리처럼 다시 상기시켜주는 부령사의 《친절》과 《호의》속에 비낀 의도를 가늠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서울은 왜 그다지도 평양을 헐뜯지 못해 몸살인가. 어쨌든 피를 나눈 한겨레가 아닌가.

살뜰한 녀주인 《꼬제뜨》가 다가와 필요되는것이 더 없는가고 물었다.

리성원은 머리를 가로젓고 아까 한 그 녀자의 말을 다시 곰곰히 되새겨보았다.

진정 내 마음속에 그리운 조국이란 있어봤던가.

리성원은 서글퍼지는 마음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도 이 차집의 녀주인과 그가 존경해마지 않는 유고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것을 가르쳐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되였다.

정신적으로 지칠대로 지친 리성원은 터벌터벌 죠이티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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