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2 장

 14

 

잃는것이 있으면 얻는것도 있는것이 인생인가보다. 그래서 무릇 옛사람들이 이를 두고 새옹지마에 비겼는지도 모른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생활은 멈춤을 모른다.

리성원은 오늘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의 주관하에 새로 설계한 인쇄기가 귀동자처럼 태여난것이다. 울라지보스또크전시회에 출품한것보다 기능과 속도에서 다음 세대에 속하는 지능화된것임이 증명되였다.

그는 현장에서 전문가들과 함께 새로 개발한 기계의 작동상태를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는 《챠일드-6》이라는 명칭을 달아주고나서 계렬생산에 들어가며 지체하지 말고 다음 세대 설비설계에 진입할것을 지시했다. 부단한 갱신을 목표로 하지 못한다면 세계적인 경쟁에서 자기의 지위를 고수할수 없는것이다.

리성원은 남보다 언제나 앞서나가되 거부기보다 앞섰다고 경쟁도중에 잠을 자는 토끼가 되여서는 안된다고 공장 지배인과 기술팀에 강조했다.

《이소프우화를 옛말로만 생각해서는 안되오. 이소프가 저 하늘중천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새 우화거리를 찾고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단 말이요.》

그는 기술갱신에서 정보가 가지는 중요성과 따라서 정보기지를 보강하기 위한 대책을 세울것을 강조했다.

점심식사를 어느 식당에서 하려던 리성원은 치료를 떠나면서 안해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집에 김치를 담그어놓았으니 끼니때마다 들어와 잡수세요.》

나이가 들면서 관절염이 도진탓에 안해 하의영은 며칠전부터 수백마일 떨어진 곳에 가서 치료를 받고있었다. 치료자는 조선사람인데 3대로 물려받아 의술이 소문난 사람이라고 했다. 오늘 아침에도 전화로 호전소식을 알려왔던것이다. 이제 열흘정도 더 치료를 받으면 돌아갈거라고 했다.

집으로 온 리성원은 주방에 있는 랭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지도 않았는데 벌써 특유의 향취가 풍겨오며 위가 꿈틀거렸다.

《오빠, 김치를 담그는 재간은 언제 배웠어요?》

갑자기 처녀의 은방울 굴리는듯 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분명 서도이췰란드류학시절에 자기를 칭찬하던 안해 하의영의 목소리였다.

리성원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식탁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며 엷은 미소속에 김치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날 리성원은 하의영의 초청을 받고 그의 하숙방으로 찾아갔다. 필경 하의영이 아버지가 석달에 한번씩 송금해주는 돈을 전해주자고 그러는것 같았다.

총각이란게 처녀의 하숙방에 가기는 좀 멋했지만 가지 않으면 하의영이 래일 새침해서 자기의 기숙사호실로 찾아올것이 뻔하기때문에 따분해지더라도 용기를 낼수밖에 없었다.

원래 하필선은 리성원에게 자기 딸처럼 하숙생활을 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완강히 거절했다. 류학비도 전적으로 부담해주는데 돈이 많이 드는 하숙방까지 보장해달라는것은 너무 렴치없는것 같아서였다. 더구나 매일 대학까지 오가는 교통비와 등하교에 드는 시간이 아까운 그로서는 기숙사가 더 마음편하기도 했다.

하숙집에 이르니 하의영은 미리 준비하고있은듯 그에게 소박한 동석식사에 참석해줄것을 조심히 요청했다.

리성원은 순간 당황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책상이 순간에 식탁으로 변하자 그우에 여러가지 음식들이 올랐는데 계획적인듯 성의를 기울인것이 대뜸 느껴졌다.

《이거 밥값으로는 어방없이 모자라겠지만 내 마음으로 알고 받아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리성원은 빈손으로 올수가 없어 대충 꿍져가지고 온 구럭을 펼쳐놓았다.

하의영은 고맙기도 하고 호기심도 동하여 구럭을 펴고 들여다보았다. 대번에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마나!… 오빠, 이 김치는 어디서 난거예요?! 음식점들에서도 이런 김치를 보기가 힘든데… 설마 오빠가 담근건 아니겠지요?》

《만일 내가 담근것이라면 들지 않으려오?》

《그럴리야… 헌데 김치를 담그는 재간은 언제 배웠어요?》

시큼한 냄새에 한순간 미간을 모으던 하의영이 신기한듯이 물었다.

《우리 어머니한테서. 이런 김치는 배추와 무우, 소금에다 고추가루만 조금 곁들이면 얼마든지 담글수 있지요. 아마 김치를 담글줄 모르는 조선녀성은 없을거요.》

리성원은 하의영을 골려주려고 딴전을 부리며 목을 길게 뽑았다.

《날 들으라는 소린데요… 좋아요. 좀 배워주지 않겠어요?》

《아가씨한테야 어울리지 않지요.》

《그건 무슨 의미예요? 난 조선녀성이 아니라는건가요?》

반발조로 대드는 하의영의 눈이 순간에 올롱해졌다.

리성원은 누가 엿들을가봐 처녀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만일 의영씨한테 김치만드는 법을 배워준걸 사장님이 아신다면 내 볼기를 치자고 할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되세요?!》

토라진 하의영을 보는것이 무척 즐거운듯 리성원은 벙글벙글 웃기만 했다. …

벌써 수십년전의 일이였다.

리성원은 추억의 그 먼 기슭을 그려보며 조용히 응접실의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의 눈길이 방안의 구석구석을 눈여겨 훑었다.

한쪽벽을 통채로 차지하고있는 화려한 장식장에는 흑단나무로 조각한 베토벤이 있었고 자못 엄숙하게 자리를 잡고있는 성모의 석상도 보이였다. 고대 싹소니아의 유리공예품으로부터 인디아의 상아도자기, 중국 당나라시기의 꽃병, 일본의 녀자인형… 나라별로 혹은 시기별로 조화를 이루는 장식품들에는 안해의 섬세한 손길이 슴배여있었다.

리성원은 그속에서 고인이 된지 오랜 장인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사진속의 하필선은 퍼그나 정정한데 어딘가 쓸쓸한 미소를 짓고있다.

《사람이 늙으면 생각이 많아진다기에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내가 꼭 그렇구만. 우린 어데서 사는건가. 정녕 살아서는 고향을 못 보는가 말일세. 사후 귀환향이라더니 그 말이 옳은가보네. 이 나이에 이르니… 아- 죽어서도 고향에 가볼수 있다면 좋으련만…》

고령에 이르면서 장인은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늙은이의 하소연으로만 여겨왔었는데 어느덧 자기도 그때 장인의 나이에 이른것이다. 뭔가 새롭게 새겨지는것이였다.

리성원은 장인의 슬하에서 로동생활을 시작했고 류학까지 하였으며 마침내는 챠일드회사 사장의 가족일원이 되였다. 그는 인생이라는 말로 이어지는 그 계단의 매개 단을 무심히 올랐지만 그속에 한 기업가의 계략이 있었다는것만은 후에야 알게 되였다.

《의영씨, 난 의문스러운게 한가지 있습니다.》

《뭔데요?》

《사장님이 나를 공부시키자고 많은 돈을 쓰는것 말입니다.》

《기업에도 전략이라는게 있지 않나요. 두뇌진을 가지지 못하면 안된다더군요.》

《두뇌라면… 원, 나보다 더 좋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텐데요.》

《오빤 조선사람이 아닌가요.》

류학을 시작한 초기에 리성원이 의혹을 품고 물었을 때 하의영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세월이 흘러 류학을 마치고 카나다로 돌아온 그는 다른 녀성을 생각할 사이도 없이 이미 결정된듯 하의영과 결혼하였다. 거역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었다.

세월이 흘러 그들부부는 웃음속에 회억을 더듬었다.

《여보, 류학시절이 생각나오?》

《그러문요. 내가 졸졸 따라다닌게 싫었지요?》

《뭐요, 이건? 대답전에 공격부터 하누만.》

《헛눈 팔지 못하게 해야 했으니까요. 당신의 눈앞에 얼마나 많은 미녀들이 있었던가요. 다행히도 당신은 그 분야에서만은 둔재였어요.》

《혹시 아버님한테서 나를 고수하라는 지령이라도 받은건 아니였소?》

《웬걸요. 그보다 더한 임무를 받았었지요.》

《그게 뭐였던지… 이제야 말해줄수 있겠지?》

《안돼요. 그건 나의 자존심과 관련되는 문제이기때문이예요.》

《이상한걸… 동상이몽인가.》

《호호, 의심할게 아니라 그 좋은 두뇌로 수수께끼를 풀어봐요.》

리성원은 안해가 제시하는 그 수수께끼를 풀기가 두려워났다. 그래서 그는 장식장의 장인곁에 자리잡은 안해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를 암시하듯 한 눈빛이였다.

그들의 사랑은 필연처럼 찾아들었다. 그것은 놀라운것이였다. 리성원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생활앞에서 현훈증을 느끼던 순간을 잊을수 없다. 하의영이 자기의 품에 안겨들 때, 그의 타는듯 한 입술이 다가들던 그때의 그 몇초가 생생한 기억속에 남아있는것이였다.

안해는 자기가 내놓은 수수께끼를 스스로 풀어주었다. 그것은 아들애가 다섯살이 되던 해였다.

《저앨 보세요. 당신처럼 자랄거예요.》

공원의 숲속에서 나비를 따라다니는 아들 정석이를 바라보며 하의영은 행복에 겨워 말했다.

《너무 어루만지지 마오. 자립성을 키워주어야 해.》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요? <난 이녀석을 기다렸거던. 내 일생에 성공중의 성공은 이 손자녀석을 받아낸거야.>라고 하셨단 말이예요. 호호호.》

《손자를 받아… 헛 참, 거 듣고도 모를 소린데…》

《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풀어드릴가요? 당신은 깜짝 놀랄거예요. 견우는 직녀의 부림소가 되였어요. 호호호.》

하의영은 그제야 모든것을 이야기하였다.

…류학을 떠나기 전날 저녁이였다. 하필선은 딸을 불러앉혔다.

《저 성원이는 보기 드문 수재다. 하늘이 내게 내려보내준 천자같은 녀석이란 말이다. 많이 알려는것보다 반드시 필요한것을 알려는 청년이니 꼭 성공할거다. 그래서 성원이를 남다르게 여기고싶다. 이 아버지의 말을 깊이 새겨두고 정확히 리해하기를 바란다.》

하의영은 그 어딘가를 점도록 주시하며 눈길을 흐트리지 않고 말했다.

《아버지 말씀의 뜻을 알만 해요. 저 오빤 고생을 많이 해봐 그런지 때가 묻지 않고 성실한것 같아요.》

《용타. 내 딸이 몰라보게 컸구나. 아버질 리해하니 고맙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성원이의 두뇌와 인간됨에 나는 두려워날 때가 많다. 남자들이란 마지막까지 믿기 어려운 존재들이란다. 확신이라는것도 의심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잊지 말아라. 더우기 너희들끼리 객지생활을 해야 하는 조건이니 네가 성원이의 일을 잘 보살펴야겠다. 내 말의 뜻을 알겠느냐?》

《내가 보살펴주어야 한다는건… 그건… 무슨 뜻인가요?》

《그건 네가 성원일 제 사람처럼 생각하고 위해주라는거다.》

《아버지, 그것만은 자신이 없어요. 사랑이란 일방적인 노력으로만은 이룩될수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버지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노력은 해보지요.》

하의영은 그러고서도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류학생활을 시작한 처음부터 리성원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주시했다.

정말 아버지의 말대로 리성원은 대학 2학년때부터는 수재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러나 리성원은 동료들의 부러움과 교수들의 칭찬에도 자만하지 않았으며 공부에만 열중했다. 남들이 주말휴식을 특색있게 조직하느라 분주탕을 피울 때에도 그는 기숙사호실에 꾹 들어박혀 외국어공부나 전공학습에 몰두하군 했다. 가끔 하의영이 찾아와 팔을 잡아끌어서야 할수없이 근처의 음악당에 가서 교향악이나 독창회 같은것을 감상했다.

하의영은 저런 형의 수재는 머리는 좋을지언정 생활상에서 감성적인 측면에서는 목석과 다름없을것이라고 단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버지 같은 기업가들에겐 복덩이일거야. 허지만 난 전혀 모르겠는걸.)

하의영은 가끔 일이 있어 리성원의 기숙사호실에 찾아가군 했는데 그때마다 얼굴이 시뻘개져 부랴부랴 침대며 책상정돈을 하는 그를 보기가 즐거웠다.

하지만 창턱에 놓여있는 빵쪼각이나 우유고뿌 같은것을 보면 그런것으로 대충 끼니를 에우는것 같아 기분이 잡쳐졌다. 한구석에 세탁물건조대까지 들여다놓은거랑, 거기에 걸려있는 옷가지들이랑 봐도 제손으로 빨래를 하는것이 헨둥했다. 한편으로는 혹시 이 사람이 아버지나 자기 몰래 딴 돈주머니를 채워두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없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아버지더러 돈을 더 보내달라고 할가요?》

하의영은 슬그머니 이런 말을 던지고나서 리성원의 낯색을 살펴보았다. 이제 대답을 들어보면 그의 마음속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볼수 있을것 같았던것이다.

《돈을 절약하고싶어서요. 나도 계산은 할줄 알지요. 돈을 어디에 써야 하며 또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그래서 지출항목을 정하고 지출내역을 꼬박꼬박 밝혀두군 하지요.》

흥미가 동한 하의영은 반명령조로 물었다.

《그걸 제가 볼수 있겠지요?》

《사생활에 속하는 비밀인데도 말입니까?》

《그런 비밀이라면 더구나 봐야겠어요. 혹시 나도 뭔가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라도 적혀있을수 있지 않아요.》

리성원은 거절할수 없다는것을 깨달은듯 입술을 비쭉거리고는 책상서랍을 열고 엷은 책자를 하나 꺼내주었다.

하의영은 놀랐다. 지출항목이 대부분 책구입이였던것이다. 그러고보니 처음 호실에 찾아왔던 2년전에 비해 키높은 서가가 두개나 더 늘어났고 각종 도서들이 빼곡이 꽂혀있는것이 보였다.

이 굉장한 책부자의 현재 잔고를 보니 거의나 령상태였다.

하의영은 자기의 오판을 깨달았으나 처녀로서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공연히 한마디 내뱉았다.

《물론… 공부는 중요해요. 하지만 건강은 귀중한거예요.》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두툼한 돈봉투를 꺼내 책상우에 놓고는 돌아섰다. 그랬으나 곧 비웃음같은 리성원의 코바람소리를 듣고 쏘아보듯 바라보았다.

《내 말이 잘못되였는가요?》

리성원은 주저없이 어깨를 솟구며 응대했다.

《오해마십시오. 그 말이 하도 고맙고 신통해서요.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없었지요.》

모욕이 아님을 깨달은 하의영은 할 말을 찾지 못한채 붉어진 얼굴을 돌려 훌 나가버리고말았다.

그로부터 한달가량 더 지난 어느날 저녁녘이였다.

하의영은 저녁식사후 하숙집을 나섰다. 오전에 아버지가 리성원에게 오래간만에 보내온 돈과 편지를 감감 잊고있었던것이다.

대학의 남자기숙청사 정문앞에 이르러 시계를 보니 벌써 8시가 지난 뒤였다. 구내의 정원에는 류학생들 몇이 앉아있는데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받는가 하면 가로등밑에서 책을 보고있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래일 찾아올걸 하는 후회와 동시에 이왕 온 길이니 꼭 전달하려는 이중심리에서 오락가락하였다.

이때 어디선가 난데없이 손풍금소리가 들려왔다. 처량하다 해야 할지 은은하다 해야 할지 분간하기 어려운 곡조였다. 전주에 이어 듣기 좋은 남자의 바스음성이 손풍금반주에 곁들여 울리였다.

놀라운것은 《가수》가 노래를 조선말로 부르고있는것이였다.

《어마나?!…》

하의영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리성원임을 대번에 직감하였다.

(저 오빠가 손풍금을… 거기에 노래까지… 저런줄은 또 몰랐는데… 참, 듣기가 좋은데?!)

그는 선뜻 믿을수가 없었다. 리성원에게 저런 풍만한 감정과 예술적기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것이다.

밤마다 어머니가 그립다며 바라신 그 소원을 풀어드리겠다는 내용의 은은한 노래였다.

하의영은 귀를 기울이며 구내정원의 빈자리를 찾아가 조용히 앉았다. 저희들끼리 말을 주고받던 류학생들도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있는듯 했다. 사위가 쥐죽은듯 고요한데 노래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노래는 한번 더 반복되더니 여운을 남기며 서서히 끊겼다. 그래도 여전히 주위는 정적속에 묻혀있었다.

한참후에야 하의영으로부터 몇보쯤 떨어진 의자에서 백인학생 하나가 일어나더니 쐑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탄성을 터쳤다.

《멋있어, 그 곡과 가수의 음성이! 사람의 감정을 불러낼줄 알거던. 틀림없이 무언가를, 누구인가를 그리는 노래일거야. 역시 동양음악은 정서가 독특해. 조선인이구만… 저쯤이면 513호실이겠군. 사귀고픈 생각이 드는구만. 성악전공일가?》

《요세프, 자넨 공작기계가 아니라 차라리 음악을 전공할걸 그러지 않았나?》

옆에서 누군가 롱을 던졌다. 요세프라는 학생은 재치있게 그 롱을 받았다.

《비슷한 말이야. 아니, 옳은 소리야. 류학을 마치면 난 꼭 동양음악을 배우기 위해 또다시 아시아로 류학갈테요. 내 우리 아버지한테서 들은 소린데… 참, 우리 아버진 조선전쟁참전자인데 인민군에 포로가 되였다가 전후에야 포로송환으로 돌아왔소. 그때 아버진 포로생활기간 주변마을 사람들에게서 배웠다는 노래들을 나한테 들려주군 했소. 지금 내 기억속엔 노래 두곡만이 남아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봉선화>라는 노래요. 난 지금도 조선말로 부르라면 부를수 있소. 어릴 때 배운 노래여선지 입에 오르고 성장해가면서 점점 감정이 고조되여가더란 말이야.》

요세프의 목소리는 무슨 연설처럼 점점 높아지고있었다.

《우리 아버지 말이 포로생활을 하면서 목격한건대 조선인민군은 노래를 부르면서 원자탄을 휘두르는 미국과 싸웠다는구만. 그만큼 그 사람들의 정신이 강했다는거요. 아버진 이태동안 그곳에 살면서 북조선사람들에게는 잘못이 없고 미국이 침략자라는걸 알게 됐다는거요. 조선사람이 직접 부르는 노래를 들으니 감흥이 새로운걸…》

하의영은 전혀 생각지 않던 장소에서 생각지 않았던 말을 듣고보니 기분이 떴다. 언어나 피부색이 다른 이들을 한순간에 격동시킨 리성원이 매력있게 느껴졌다.

《동양미인아가씨, 외람된지는 모르겠지만 혹 국적을 알려줄수 없겠습니까? 조선? 중국? 아니면 일본?… 아 참, 죄송합니다. 제 브라질에서 온 공작기계학과 3학년 요세프 다운이라고 합니다.》

《어디일것 같아요?》

《조선, 조선! 그렇지요? 그렇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가만, 헌데 어느 조선…》

순간 하의영의 눈살이 꼿꼿해졌다.

《뭐예요, 조선이면 조선이지 어느 조선이란것도 있어요?!》

하의영의 열띤 소리에 요세프의 동료들이 긴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사람이 사죄하라고 속삭이는듯 했다.

《아, 미안합니다. 진정하십시오. 난 이 도이췰란드도 동부와 서부로 갈라서 부르기에… 모욕이 되였다면 용서하십시오.》

진심어린 사과에 할 말을 잃은 하의영은 후닥닥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됐어요. 당신이 조선노래를 좋아한다니 그것으로 용서를 하죠.》

《이거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절한 청이 있는데 들어주실수 없겠습니까? 제가 아는 <봉선화>라는 노래를 한번 불러주실수 없을가요?》

졸경을 치렀던 요세프는 이번엔 머리까지 깊이 숙였다.

하의영은 잠시 생각을 굴려보았다. 리성원이 들으라는듯이 한번 멋지게 부르고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때아닌 장소와 때아닌 시간에 그의 노래를 듣고 심장이 와뜰 놀랐으니 그 《보복》을 할 권리가 응당 있다고 생각된것이였다.

《부르겠어요, 이자 당신이 부친에게서 배웠다는 <봉선화>를!》

《아, 정말입니까?! 오케이! 이보시오, 제씨들! 조선아가씨가 노래를 부르겠다오. 자, 다들 모이시오. 기숙청사! 밖을 내다들 보시오!-》

조용하던 정원이 발칵 뒤집혔다. 여기저기서 환성을 올리며 모여드는데 어디에 그 많은 사람들이 숨어있었는지 놀랄 정도였다. 정원을 사이로 량쪽으로 갈라져있는 남녀기숙사 창문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열리고 각이한 사람형체들이 나타났다.

요란한 박수를 의식하며 하의영은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다 문득 5층 중간쯤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밖에서 떠드는 소리에 머리를 내민 사람의 형체는 리성원이 분명했다.

하의영은 기뻤다. 하지만 내심을 감추고 머리를 돌려 말했다.

《요세프씨, 미안하지만 당신이 조직자로서 저 남자기숙사 513호실에 노래반주를 요청해주세요.》

요세프는 벌씬 웃고는 두손을 입에 모으고 그의 요구를 듣자 입나팔을 하고 조선말로 입에 힘주어 왜가리청으로 질러댔다.

《봉-선-화!-》

그것이 접수된듯 리성원의 호실창가에서 그림자가 인차 사라졌다. 얼마쯤 있어 청사 1층 현관쪽에서 나지막한 《봉선화》의 전주선률이 흘러나오더니 이어 리성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의영은 눈치빠른 한 녀학생의 손에 이끌려 가로등밑 밝은 곳으로 나섰다. 그의 신경은 리성원에게만 쏠려있었다. 그가 보건대 리성원의 음악적감각은 의외로 매우 예민하고 정확했던것이다. 여러 층계를 급히 뛰여내려온탓에 가슴을 헐썩이면서도 선률과 호흡이 신비한 조화를 이루게 하는것만 봐도 알수 있었다.

하의영은 무대를 초월하여 세계앞에 선듯 한 감정에 이미 잠겨들었다. 리성원과 자기들앞에 수십여명의 대학생들만이 아니라 무연하고 아득한 밤하늘의 별세계가 펼쳐져있는것이였다. 그는 이 순간이 저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반짝이는 별들과의 거리처럼 끝없이 길었으면싶었다. 그래서 리성원의 전주가 끝나려는 한박자전 순간에 후렴부분을 이으며 허밍을 울렸다.

그의 심중을 한순간에 깨달은 리성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주었다.

하의영은 그 순간 리성원에게서 이상야릇함을 느꼈다.

그를 왜 랭대했을가. 헌데도 저 사람은 언제 한번 그에 대한 자그마한 내색도 없이…

하의영은 리성원이 그럴수록 자기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찔렸다. 가만히 보면 리성원은 결코 자존심과 승벽심이 약한 사람은 아니였다.

아, 저 사람의 생활에서나 예술에서의 림기응변은 얼마나 놀라울 정도인가.

하의영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숙였다. 그 모양이 꽃의 꺾임처럼 보인다. 관중들이 숨을 죽였다. 《공연》이 시작된것이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밤의 정서는 류달랐다. 소리와 감명도 깊이가 있는데다가 울림과 전달도 매혹적이였다. 타령조의 목소리 같았으나 그 소리가 오히려 심금들에 닿는 쩌릿함을 더욱 자극했다.

요세프는 파악이 있는 노래인지라 《배우》들의 뒤에서 소리없는 조선말로 따라부르기도 하고 하의영의 노래곡조에 맞추어 격동된 몸을 무용가처럼 전후좌우로 세차게 흔들어댔다.

어떤 녀학생들은 비록 가사의 뜻은 모르지만 애달픈 선률과 《배우》들의 정열과 률동에 심취되여 눈물까지 흘리고있었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락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락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리성원은 마지막소절을 반복연주하여 야음을 타고 울려가는 노래의 여운을 더 멋있게 장식해주었다.

하의영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 사람은 천재야. 사람들이 몰라서 그러지. 음악의 귀신이란게 별다른걸가. 지금까지는 목석같은 글뒤주인줄로만 알았댔는데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까지 지니고있지 않아…

노래를 마친 두사람은 마치 조각상처럼 굳어져있었다. 그들의 눈가에는 이슬이 반짝이였다. 관중들 역시 그림속의 등장인물들처럼 움직일줄 모른다.

이윽고 하의영이 천천히 리성원의 옆으로 다가가 관중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그의 손을 잡고 높이 쳐들었다. 두개 호동의 기숙사와 정원을 뒤흔드는 열렬한 박수갈채가 터졌다. 7층짜리 기숙사의 매 창문들에 학생들이 빼곡이 달라붙어있었는데 그들은 휘파람을 불고 손을 흔들며 발광적으로 소리쳤다.

《조선노래 멋있다!》

《한번 더 부르라!》

열광이 비발치듯 란무하는 속으로 요세프가 다가와 인사를 깍듯이 했다.

《정말 훌륭합니다! 난… 아니, 온 기숙사가 감동되였습니다. 그러구보니 미인아가씨도 정 면식이 없지는 않군요. 종종 여기로 오는걸 보았지요. 기분에 거슬리는 말일지 모르지만 저 사람들의 요구를 다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우선 한번에 종목을 다 보일 필요가 없고 다음으론 이런 기회는 자주 있어야 하기때문입니다. 이것으로 마쳐야 한다는걸 조용히 건의하는바입니다. 말하자면 예술이란 관객이 더 듣고싶고 보고싶을 때 중단해버려야 감흥이 더 크다는 묘리를 실감하게 하자는거지요. …제 의견에 동의하시는지요?》

리성원은 하의영을 쳐다보았다. 하의영이 요세프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연을 알리 없는 관중들은 목이 쉬도록 재청을 요구하고있었다.

요세프는 두사람의 한쪽손들을 잡고 동서남북으로 돌아가며 인사를 하게 하고는 대학청사쪽을 향해 뒤걸음치다 달리기 시작하였다. 한참이나 달렸는데도 박수소리, 휘파람소리, 고함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한참후에 달음질을 멈춘 요세프는 자기는 조선사람을 좋아한다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리성원의 어깨에서 손풍금을 벗겨들며 자기가 건사하겠으니 걱정말라고 했다.

요세프가 사라지자 두사람은 가까운 주변의 한적한 공원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그제서야 하의영이 참아온 탄성을 터뜨렸다.

《오빠, 정말 대단해요! 언제 그런걸 다 배웠나요? 노래는 언제 짓구요?》

리성원은 당황해났다.

《이러지 마십시오. 의영씨가 정말 배우도 울고 갈 정도로 멋지게 했지요. 나도 깜짝 놀랐는데요.》

《오빠의 감동적인 그 자작노래가 발단이 되였어요. 노래는 오빠가 지은건가요?》

《난 그런 재목은 못되는걸요. 그저 이 세상에 없는 어머니가 그리워 류학초기에 자작한 가사에 곡을 붙여본겁니다. 그것도 완성작이라고 할수 없는 단절짜리인데요.》

《그러니 더욱 놀라게 되는군요.》

하의영은 진심으로 사죄의 심정까지 담아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얼굴이 별스레 붉어지는것을 느꼈다. 불과 몇시간전까지 품고있던 그에 대한 련민이 이상한 감정으로 번져지는것을 감촉했던것이다. 그 이상한 감정을 분명 련정이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수 없을것 같았다.

어쨌든 리성원은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의 사원, 아버지의 돈으로 공부하는 청년, 후날 자기밑에서 일하게 될지도 모를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처지에서 껑충 뛰여올라 이제는 그가 갑자기 자기우에 우뚝 솟은 거인처럼 안겨왔던것이다.

불쑥 넓고 쩍 버그러진 그의 어깨며 가슴이 당장이라도 제 가슴에 닿아지는것만 같았고 저 멋진 남자의 품에 무작정 뛰여들고싶은 충동으로 숨을 고룰수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리성원은 그의 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듯 중얼거렸다.

《우리가 오늘… 조선사람에 대해 알린건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의영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지도 않고 다짜고짜로 긍정해버릴판으로 속삭였다.

《오… 옳은 말이예요. 하지만 오빠앞에선 나도 아… 안되겠어요. 이건 솔직한 심정이예요. 한생 오… 오빠에게서 배우고싶고 우리 함께 이런 공연을… 계속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어요. 어떤 형식으로라도 좋을것 같아요.》

평소의 침착성을 잃고 더듬어대는 그 말이 우스웠던지 리성원이 하의영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환히 웃었다.

(저 웃음은 또 얼마나 멋져…) 하고 황홀한 눈길로 리성원을 바라보던 하의영은 재빠른 말투로 자기의 속생각을 엮어나갔다.

《그렇게 웃어요. 웃음과 힘은 형제라더군요. 오빠가 웃었으면 해요. 그리구 이젠 우린 20대예요. 어린애도 아닌데 제발 나한테 간격을 두지 말아줘요. 부탁이예요.》

《그야 어떻게…》

《왜요, 처녀가 이런 말을 먼저 꺼내게 한것이 큰 결례라고 생각되지 않는가요? 지금까지 함께 류학을 와서 3년동안이나 이렇게 서먹서먹하게 지내려는가요? 지독한데가 있어요. 방금전에 대학기숙사를 뒤흔든 그 열정과 담기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요? 매정하군요. 어쩔래요? 다른건 그만두고라도 우선 나를 그 무슨 아가씨처럼 부르는것은 용서하지 않겠어요. 난 계속 오빠라고 부르는데 동생한테 아가씨라고 불러대니 이런 모순이 어디에 또 있어요? 그래… 접수하겠어요?》

줄폭탄처럼 들씌워지는 하의영의 질타에 얼이 나간듯 리성원은 무표정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불러봐요.》

《…》

《어서요.》하며 하의영은 지그시 행복스런 모습을 하고 눈을 살며시 감았다.

《도… 동생아!》

《이건 뭐 놀리는거예요?! 동생을 그렇게 부르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럼 어떻게…》

《또… 그저 이름을 부르면 되잖아요!》

《그렇게야… 아니, 그렇게는 못 부르겠소.》

하의영은 그제야 눈을 뜨고는 어이가 없는듯 호호호 하고 소리내여 웃었다.

너무 크게, 한참이나 웃는 그를 바라보던 리성원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하의영의 그 웃음이 모욕감으로 느껴졌던것이다.

웃다못해 하의영은 자기 눈에서 눈물이 찔금 솟는것을 느꼈다. 땅바닥에 주저앉고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면 이 오빠가 금시 나를 안아일으켜주겠지 생각하니 가슴이 짜릿짜릿해났다.

《왜… 왜 그러오?!》

모욕감이 미안함으로 바뀐 리성원은 불쑥 하의영을 부축했다.

《기뻐서 그래요. 정말로 난 고독하고 까닭없이 슬펐어요. 지금에야 내가 왜 그랬었는지 좀 알것 같아요. 날 리해해주세요.》

리성원은 하의영의 말에 저도 모르게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때 하의영이 무작정 그의 두손을 모아잡고 끌어당겨서는 제 얼굴의 눈물을 닦는것이였다.

리성원은 《아니?!》하고 덴겁한 소리를 냈다.

《호호호. 놀라긴요?… 난 오빠한테서 더 바라는게 없어요. 이젠… 됐어요. 오빠, 내 눈물이 스민 이 손을 오늘중에 씻으면 안돼요. 밤새 오빠의 심장에까지 배여들게 말이예요. 그렇지 않으면 다신 오빠와 상종 않겠어요. 들었지요?》

리성원은 마치 코를 꿰운 송아지처럼 곰상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이참, 이 정신 봐.》

하의영은 옷의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여 내밀었다.

《자요, 이건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와 돈이예요.》

리성원은 멀끄러미 생글대는 하의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째서요? 회사를 위한, 아버지를 위한 돈이니 어서 받아요, 어서요. … 당당한거예요. 그리구 들어둬요. 앞으로 내앞에서 공식적이고 딱딱한 말투는 삼가해달라는거예요. 남자답게요. 알겠지요?》

하의영은 대답 같은건 기대하지도 않은듯 잽싸게 봉투를 쥔 리성원의 손을 힘주어 모아잡고서는 전류에라도 닿은듯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폭 수그린채 움직일념을 안했다. …

리성원은 두 사진을 번갈아 보며 허거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는 내가 돈의 노예였다. 그러나 지금은 돈의 주인으로 되였다. 하지만 의영은 그때도 지금도 또 하나의 나인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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