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제 2 장

 15

 

과학기술전당의 3층홀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있었다. 머리에 백발을 인 로학자들이 보이는가 하면 새파란 나이의 남녀대학생들도 끊길새없이 오간다.

홍승혁은 지금 홀의 한켠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미 여러번 와본 곳이지만 올적마다 새로운 감회에 젖어들군 하는 그였다.

과학기술전당이 문을 연지는 한해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태여나면서 세상을 놀래운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그 잠재력과 견인력은 더욱 만사람을 놀래우고있었다.

지난 시기에 출판된 과학기술도서들은 물론 국내외의 첨단과학기술성과들을 전면적으로, 체계적으로 전자도서화한것으로 하여 임의로 요구되는 기술자료들을 즉시에 빨아들일수 있는 종합적인 전자도서관으로서의 가치는 결코 그 어떤 수자적개념으로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오늘도 홍승혁은 영수를 비롯한 여러명의 연구사들과 함께 이곳에서 인쇄정보기술과 관련한 다른 나라들의 최신동향자료들을 료해했다.

부소장은 년로한 그를 걱정하여 기술정보장악은 자기가 맡겠으니 조직사업만 하면 되지 않는가고 여러번 만류했었다.

그러나 홍승혁은 중요한 료해연구에는 늘 자기가 직접 뛰여들군 했다. 워낙 인쇄기술이란 까다롭고 매우 섬세한것이라 사소한것 같지만 큰것을 놓칠수 있는 경우가 드문했던것이다. 장시간에 걸친 연구과정에 좀 지치기는 했어도 적지 않은 소득을 얻었다는 기쁨에 피로는 말끔히 가셔진듯 했다.

방금전에 부소장이 보낸 승용차가 전당앞에서 기다린다는 전화가 왔다.

그런데 아까부터 함께 온 영수가 보이지 않았다. 홍승혁은 연구사들을 먼저 차에로 떠밀어보내고 홀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조금 더 기다려볼 생각이였다.

이윽고 귀에 익은 영수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보름달처럼 환하게 생긴 한 처녀와 함께 웃으며 4층에서 내려오는 영수의 알밤이마가 보였다. 그런데 왜서인지 처녀의 모습이 너무 낯이 익은것이 이상하여 홍승혁은 안경을 추스르며 눈을 쪼프렸다.

《아니, 저애가 어떻게 여길?!》

틀림없는 손녀 송미였다.

불러 찾으려던 홍승혁은 자신을 억제했다. 몹시 다정한 분위기 같은데 자기가 불쑥 뛰여들어 잡쳐주고싶지 않았다.

잠시후 송미와 헤여진 영수가 사람들을 찾는듯 두리번거리며 다가왔다.

《영수동무, 어딜 갔댔소?》

《미안합니다, 소장동지. 웃층의 전자열람실에 올라갔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좀 지체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홍승혁은 우정 눈을 가로 뜨고 질책하듯 말했다.

《시간이 바쁜데 공과 사를 뒤섞으면 되나. 그래, 방금 헤여진 그 처녀는 애인인가?》

영수는 두눈이 데꾼해지더니 씩 하고 웃었다.

《소장동지가 벌써 보셨군요. 하긴 소장동지의 시야에서 벗어난다는 말이야 어불성설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딴전은 그만 부리고 그 애인처녀에 대해서나 말해보라구.》

홍승혁은 제잡담하고 공세에로 넘어갔다.

《또 애인입니까. 그런게 아닙니다. 그 동문 나보다 일곱살이나 아래인 동생벌인데요 뭐.》

영수가 볼멘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사실 그 동무는 제가 평양학생소년궁전 성악소조를 졸업하기 한해전에 소조에 들어왔답니다. 성격이 활달하고 례의가 밝은데다가 총명해서 우리 상급생들이 얼마나 귀여워하고 사랑해주었는지 모르지요.》

《그런가.》

홍승혁은 마음이 놓이는 한편 흥미가 동했다.

《마지막으로 그 동물 만난게 제가 대학 박사원을 마칠 때였는데 인민대학습당에서였습니다. 저 동무가 평양외국어대학에 다니고있던중이였지요. 그런데 방금 들으니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동포사업국에 배치되였다는게 아니겠습니까.》

이크, 그애가 이녀석에게 이 할아버지에 대해서도 다 고자질했겠구나.

홍승혁의 심중에선 흥미가 싹 사라지고 대신 조바심이 끓기 시작했다.

《저 동무네 가정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가정이랍니다. 학위학직을…》

홍승혁은 얼굴이 따끈따끈해지는것을 참으며 그의 말허리를 끊고 느슨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래, 그 처녀의 할아버진 어느 연구기관에서 일 본다던가?》

《그걸 말해줄게 뭡니까? 가만, 헌데 소장동진 왜 저 동무에 대해서 관심을 두십니까?》

갑자기 녀석이 역공세로 나오는것이 심상치 않았다.

원 녀석두, 촉기도 빠르군.

《우리 영수동무가 똘똘한 처녀와 사귀는지 이 소장이 물어볼수도 있는거지 뭘 그래.》

그래도 영수는 여전히 이상하다는듯 머리를 기웃거린다.

홍승혁은 서서히 기분이 즐거워졌다. 이런것을 보고 세상이 좁다 하겠지.

아직은 초저녁이지만 소리없이 짙어가는 어스름때문인지 전당앞의 태양빛전지판이 붙은 가로등들이 환하게 켜져있었다.

《내 동무한테 일러두겠소. 이 동무들을 책임적으로 집에까지 태워다주오. 절대로 본인들이 요구한다고 해서 소에 데려가는 일이 없어야겠소. 그리고 래일 아침 그 결과를 나한테 보고하오.》

홍승혁은 운전사에게 단단히 일렀다.

《소장동진 왜… 안 타십니까?》

영수가 눈이 확 커졌다.

《나야 집이 고대인데 뭘 타구 가겠나. 실은 나도 동무들 덕분에 오늘은 일찍 퇴근해서 쉬여보자는거야.》

홍승혁의 말이 미덥지 않은듯 모두 머리들을 기웃거렸다.

승용차가 떠나자 홍승혁은 손전화로 손녀를 찾았다. 송미는 아직 전당안에 있었다.

《일을 다 봤으면 전당 주차장앞으로 나오거라. 내 기다리마.》

전화기에서 기뻐 어쩔줄 몰라하는 송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승혁은 손녀를 기다리는 동안에 전당의 밤전경을 돌아보고싶었다.

가을밤이라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와 정서의 여운을 보태주는듯 했다. 대동강의 검푸른 물결우에 그대로 비껴서인듯 두개의 화폭으로 펼쳐진것이 참말 매혹적이였다.

언젠가 강건너편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거대한 배가 대양을 향해 파도를 헤가르며 질풍쳐나아가는듯 한 모습앞에 세차게 흥분되던 일이 되새겨졌다.

조금 걷노라니 철필촉을 형상한 과학기술상징탑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탑의 우아한 자태를 넋잃은듯 점도록 바라보고있는데 저쪽에서 굽높은 녀자의 구두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할아버지!》하는 부름소리가 울리더니 날씬한 키에 짙은 재색코트를 걸치고 머리를 꽁진 처녀가 저쯤에서 바삐 다가오는것이 보였다.

송미였다. 제 손녀래도 멋쟁이처녀라는 생각이 든 홍승혁은 함뿍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무 늦장을 부리지 않았나요? 빨리 나오느라고 했는데 이렇게 늦었어요.》

송미는 미안한 기색으로 할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일없다. 그런데 해외동포사업국에서 어떻게 인연이 먼 과학기술전당에까지 다 오셨는가?》

홍승혁은 슬쩍 말투를 바꾸며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숙제를 하느라고 그러지요 뭐.》

《숙제라니?!》

《실은 우리 처장동지한테서 최근 몇해동안 전국에 새로 생겨난 과학, 교육, 문화기지들의 대상수와 그 연혁내용을 료해, 작성하라는 첫 과업을 받았거든요. 이제 조국을 방문하는 해외동포들의 참관대상들이 그만큼 보충, 확장되여야 하니까요. 그런데 열흘이 넘도록 아직 평양시의 내용도 다 파악하지 못했어요.》

《그러면 거 야단이구나. 그건 이 할아버지가 도와주기도 어려운 숙제로구나.》

《숙제야 제힘으로 해야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내 잘못을 깨닫게 되였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홍승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송미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해쭉 웃었다.

《충분히 잡아서 한주일이면 숙제를 해내리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여기 과학기술전당만 해도 며칠이 걸릴지 알수 없군요. 더구나 내가 료해하는 내용들이 너무 벅찬것이여서…》

그제서야 홍승혁은 손녀의 심정이 리해되여 머리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이 조용하고 풍치좋은 쑥섬이 어떻게 오늘과 같은 세계의 과학, 인류의 과학기술문명이 집대성되고 수자화된 과학의 섬으로 될수 있었는지 말이예요.》

송미는 격정을 누르는듯 동안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도 생각나요. 중학교때 학생소년궁전 건너편에 자리잡고있는 인민대학습당을 보면서 난 언제면 할아버지나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저 큰집에 들어가 공부할수 있을가 하고 속타하던 일 말이예요. 하지만 보세요. 지금 우리 어린애들은 얼마나 행복한가요. 이 과학기술전당에 척척 들어와 미래의 꿈을 키워가고있거든요.》

송미가 손가방에서 손바닥만 한 수자식사진기를 꺼내들었다.

홍승혁은 손녀가 펼쳐보이는 사진기의 매 화면들을 신기한듯 들여다보았다.

불쑥 몇층인지 어느 호실문가로 렌즈가 다가가는데 큼직한 안내소개문이 확대되여온다. 전당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는 어린이꿈관이다.

그안은 통채로 아빠, 엄마들의 손을 잡은 유치원꼬마들과 극상해서 붉은넥타이를 두른 소년단원들이 독차지한 세상이다. 아동열람실, 과학활동무대, 지혜의 샘구역, 지능계발교실구역, 과학의 동산구역, 자연탐험구역 등이 차례로 화면안에서 흘러간다.

갓 소학교에 입학했음직한 철부지소년들이 콤퓨터를 마주하고 코를 훌쩍이며 상상도형을 그리는가 하면 머리를 긁적이면서 무슨 모의프로그람을 작성하는 동영상들이 지나간다.

자연계의 동식물들과 지구의 환경변화, 우주천체의 신기한 현상들이 실물처럼 펼쳐져있고 그 원리가 통속적으로 안겨오는가 하면 여기저기에 설치된 전광판들에서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화면들이 구름처럼 지나간다.

모의해저유람선에 올라 마치 눈앞의 현실처럼 생동하게 펼쳐지는 바다속의 비밀세계에 환성을 지르는 학생들이 나타난다.

《나도 과학기술전당을 소개하는 텔레비죤소개편집물을 보았다만 이렇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화폭들은 처음 보는구나.》

홍승혁은 마치 자기가 사진화면속의 주인공이기라도 한듯 감동을 금치 못했다.

《나를 감동시킨것은 이 화폭뿐만이 아니예요. 난 오늘 여기서 소년궁전 성악소조를 함께 다닌 한 상급생오빠를 만났어요. 그가 들려준 말이 지금도 귀전에 들려오는것만 같아요.》

송미가 격정이 북받쳐오르는듯 말을 끊고 저 멀리 주체사상탑봉화의 불길이 세차게 타래쳐오르는 밤하늘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하던 시기의 어느해 봄인가 자기들이 뻐스를 타고 소년단야영소로 간적이 있었대요. 그런데 자기들이 탄 뻐스가 시내를 갓 벗어나자마자 교외의 어느 갈림길에서 여러대의 승용차행렬과 어기게 되였다는거예요. 놀라운것은 그 승용차들이 운행을 멈추고 오빠네 뻐스행렬이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는것이 아니겠어요. 자기들이 탄 뻐스가 승용차들의 곁을 지날 때 어느분이신지 차창가에서 손을 흔들어주셨다는거예요. 그후 즐거운 야영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후에야 그때 승용차안에서 자기들을 향해 손저어주신분이 바로 전선시찰의 길에 오르신 아버지장군님이시라는것을 알게 되였다는거예요.》

《!…》

홍승혁은 걸음을 멈추고 손녀를 바라보았다.

《그 오빤 말했어요. 흔히 노래 <장군님과 아이들>을 즐겁고 경쾌하게 부르는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들만은 절대로 그렇게 부를수 없다고요. 그래서 자기들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모두 피터지는 심장으로 부르군 한다고…》

끝내 말끝을 맺지 못하는 송미에게 다가간 홍승혁은 손녀의 어깨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오빠가 말하기를 자기는 중학을 졸업하면서 자기들에게 손저어주시며 전선으로 떠나시던 아버지장군님을 잊지 못해 인민군대입대를 청원했었대요. 헌데 나라에서는 그를 대학에 보내주었거든요. 본래 전 과목이 최우등생이였으니까요. 조국보위도, 과학의 발전도 다 청년들의 임무이다, 문제는 조국보위초소에 선다는 정신으로 나라의 과학발전을 추동하는것도 중요한 사업이라면서 그를 대학으로 떠밀어주었대요. 그러니 그 오빤 정열적으로 공부를 했고 오늘은 청년박사로까지 자라난게 아니겠나요.》

홍승혁은 무슨 말로도 손녀애를 위로할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아마 이 세상에 그것처럼 불가능한 일은 없을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아, 이 땅은 어떤 땅인가. 이 땅에서 자라는 세대들은 정녕 얼마나 행복하고 높은 경지에 올라서있는가.

홍승혁은 자기로서는 이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하리라는것을 잘알고있었다. 다만 명백한것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이런 세대를 당해낼수 없으리라는 그것이였다.

그렇다. 달리될래야 될수 없는 세대인것이다.

손녀가 조금 진정되는듯 하자 홍승혁은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 회사의 영수가 바로 그런 영광의 체험자란 말이지.》

《아니,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걸 아세요?!》

흠칠 놀란 송미가 다급히 물었다.

《망할 녀석, 내 용서치 않을테다. 그렇게 자라난 녀석이 어쩌면 그렇게 무맥하단 말이냐. 내 당장 그녀석을 다불러야지.》

《아니?!…》

《그래서, 넌 그녀석에게 내가 네 할아버지라구 말해주었을테지.》

홍승혁이 우둘렁대는척 하자 바빠난것은 송미였다.

《할아버진 이 손녀를 어떻게 보세요?》

허허 웃는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마음을 늦춘 송미가 곁에 다가섰다.

《하지만 할아버지, 내 부탁이예요. 그 오빠를 잘 도와주세요.》

《?》

《그는 유명한 성악배우인 부모의 뒤를 따르면 더 크게 성공할수도 있었을거예요. 그러나 그는 아버지장군님께서 모든것이 부족하고 어려웠던 그 시기에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시며 귀중한 자금을 CNC공업발전을 위해 돌리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음악대학이 아니라 기계대학을 지망했어요. 부모가 예술로 당을 받들었다면 자기는 과학기술로 나라를 받드는 주추돌이 되겠다는거지요. 나라의 부름에 서슴없이 뛰여들려는 그 정신이 인간을 어떤 경지에 올려세우는가를 난 오늘 새삼스레 그리고 직관적으로 느꼈어요. 이런 정신의 소유자인 오빠이니 할아버지가 잘 도와주시면 아마 꼭 성공할거예요.》

홍승혁은 가슴이 뭉클해왔다.

내가 오늘 이애에게서 많은걸 배우고있구나.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들을 가르쳤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이제 보니 오히려 너희들이…

다음 순간에는 가슴이 쩌릿해옴을 홍승혁은 느끼고있었다.

할아버지와 손녀는 그리 멀지 않은 무궤도정류소로 다정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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