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2 장

 17

 

리혜림은 머리맡에서 울리는 손전화기의 호출음을 듣고서야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 7시가 훨씬 넘었다. 동료들이 자기의 방문을 두드리기가 멋적어 생각해낸 방법이라고 혜림은 믿었다.

밤새 불길한 꿈속에서 헤매면서 잠을 설친탓인지 머리가 무거워났다.

며칠째 고정된 메마른 아침식사를 하면서 혜림은 할머니가 담그어주던 시큼한 김치며 입맛이 떨어질 때마다 어머니가 끓여주던 구수한 토장국이 눈앞에 얼른거리는것을 겨우 참아냈다.

식사를 마치자 로베르또가 조용히 혜림의 방으로 찾아왔다.

《오늘 오전에는 시통신쎈터에 손전화기 위성봉사리용금을 물어야 하오. 그리고 래일은 려관숙식비를 청산해야 하고…》

혜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돈까지 다 물고나면 저녁부터는 굶어야 할 처지였던것이다. 그렇다고 래일로 예약한 브라질행 비행기표값은 절대로 다칠수 없었다. 유일한 방도는 오늘공연을 잘해서 버는것이였다.

혜림의 심중을 헤아린듯 로베르또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마오. 내 아침식사전에 신수를 봤는데 하트 10자가 나오더군.》

혜림은 침대밑에서 트렁크를 꺼내열고 그안에 있는 돈을 세여보았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한숨을 호- 하고 내쉬고나서 필요한 액수의 돈을 갈라 로베르또에게 주었다.

로베르또는 마치 돈을 꾸어가는 사람처럼 주춤거리다가 피식 웃으며 받아들었다.

《꼭 남의 돈을 빼앗는 심정이구려. …그리구 말이요. 오늘은 우리 넷이서 준비한 공연프로를 가지고 출연하겠으니 혜림은 좀 쉬였으면 하오.》

출입문을 나서는 로베르또를 바라보며 혜림은 가슴이 찡해왔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보니 모두 눈에 피발들이 서서 이상하다 했는데 필경 밤새 공연준비를 한것이 틀림없었다.

반복은 죽음이라 했지만 혜림은 어제 실패했던 떼쥬강다리입구 공원에서 다시 공연할것을 제기했다. 그의 의도를 리해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모두가 동의했다.

점심 역시 감자 몇알씩으로 굼땐 악단은 곧 오후공연준비를 하였다. 어디서 빌려왔는지 희한한 뽀르뚜갈민족의상을 입은 그들의 모습은 혜림으로서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이 부지런히 가설무대며 음향조종설비들을 설치하고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무관심한듯 잠잠했다. 어제처럼 코가 한발이나 나온 조무래기들이 줄레줄레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입에 손가락을 물고 기신거릴뿐이였다.

혜림은 긴장한 눈길로 악단이 올라선 무대와 객석을 번갈아 살펴보며 가슴을 모아쥐였다.

로베르또의 활기띤 특색있는 몸동작에 따라 《딱, 딱, 딱, 딱!》하고 하싼이 소고채를 맞두드렸다.

그것을 신호로 서정적인 선률에 독특한 합성음이 잇달아 서서히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 나라의 전통적인 민속음악이 연주되고있는것이였다.

무대옆을 흥심없이 지나던 사람들은 물론 넓으나넓은 공원의 여기저기서 인파가 서서히 몰려드는것이 눈에 띄웠다.

(모여든다!)하고 혜림은 속으로 환성을 질렀다.

얼마 안 있어 조용하던 객석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들과 들썩거리는 모습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리노가 하늘을 향해 두손을 뻗치며 신기한 쐑소리로 선률에 따라 《아-》하고 씨내림의 청으로 울부짖었다. 전렴에 이은 알아듣지 못할 뽀르뚜갈어로 발성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객석의 앞머리에 서있던 혜림은 놀라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가 흥취가 오르자 저도 모르게 선률의 박자에 맞춰 상아로 빚은듯 눈부시고 균형미가 맵시있게 잡힌 팔과 다리로 경쾌하고 발랄한 률동을 그리며 가수앞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에 누구보다 놀라는것은 악단동료들이였다.

난데없는 동양미인의 출연으로 관객들이 열광적인 박수와 몸동작으로 교감을 이루는가싶더니 뒤이어 혜림을 따라 온몸을 비틀어대며 탁성을 질러댔다. 삽시에 객석은 그대로 춤판으로 번져졌다.

마리노는 무대우에서 전기기타를 휘둘러대는 동시에 머리와 몸통, 팔다리를 조화로이 움직이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사는 알수 없어도 목동이 사랑하는 처녀를 열렬히 그리는 내용임을 십분 깨달을수 있었다.

와힘이 2절에서 합세하면서 처녀의 역을 하는데 혜림자신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멋지게 차렸을뿐아니라 소리 또한 갈데 없는 뽀르뚜갈처녀의 알연스런 목청이였다.

첫 노래가 끝나자 재차 바스기타의 은은한 선률속에 무대앞의 객석으로 내려온 로베르또가 불현듯 무릎을 땅에 박는다. 소리울림은 처량한 어린이의것이 틀림없는데 어머니를 그리는 내용인것 같았다. 앞종목에 출연했던 가수라고는 전혀 생각할수 없었다.

객석만이 아니라 공원을 벗어나 먼 하늘가로 울려가는 그의 노래는 애처롭기도 하고 가슴을 사정없이 도려내는듯도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한껏 슬프게 했다. 즐거움에 들떠있던 관객들속에서 눈굽을 훔치거나 입가로 손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운다.

로베르또자신도 눈물을 쏟고있었다.

코다에서 그가 애절함과 간절함이 함축된 탁성으로 몸부림을 치며 무엇이라고 웨치자 우뢰같은 박수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이때 한 중년녀인이 가슴을 움켜쥐고 로베르또에게로 달려나왔다.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뜸해지면서 숱한 눈길들이 그 녀인에게로 쏠렸다.

녀인은 로베르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그의 발밑에 꿇어앉아 울음을 터뜨리며 무엇이라고 안타까이 중얼거렸다. 보매 자식을 잃은 녀인인것 같았다. 로베르또가 알아듣기 만무하련만 그래도 그는 마치 알아듣는 사람처럼 녀인의 표정에 맞추어 고개를 연방 끄덕이며 동정을 표시하였다.

공연은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되였다. 관객들은 굴리는 눈덩이마냥 불어만 갔다. 나중에는 경찰기동대가 출동하여 질서유지에 진입했다. …

《로베르또, 마리노, 와힘, 하싼… 정말, 정말 대단해요. 당신들은 기적을, 아니 신화를 창조했어요. 리스봉사람들은 나더러 이런 감동적인 공연은 훌륭한 배우들만이 창조할수 있다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어요. 당신들은 천재예요, 천재!…》

려관에 돌아온 혜림이 터뜨린 진심어린 찬탄이였다.

《혜림이 어제 공연때 신바르를 친 덕이요. 그것이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소. 자기를 돌이켜보게 했단 말이요.》

《민심을 담은 덕이지. 이게 성공의 묘리라는거요.》

《우리모두가 한마음으로 애쓴 결실이요.》

그들의 말에 혜림은 눈굽을 찍으며 고개로 긍정했다.

이날 저녁 혜림은 풍성한 식사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동료들을 위해서는 아까울게 없다고 생각되였다. 다행히 오늘 걷어들인 적지 않은 공연수입금이 모두에게 용기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로베르또가 만류했다. 사치와 랑비는 타락의 벗이라는것이였다. 모두가 그의 말이 옳다고 하는 바람에 혜림도 어쩔수가 없었다.

그들은 려관에서 가까운 조용한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손님들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실내조명을 록색빛으로 어둑시근히 하여 아늑한감이 들었다.

창문쪽의 식탁에 앉아있던 대여섯명의 청년들이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세히 쳐다보았다. 아마 그들도 《롱》의 공연을 본 모양이였다.

접대원이 내온 음식들을 보니 너무도 간소해보였다. 리혜림은 양고기료리와 좋은 술을 몇병 더 주문하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리스봉에서의 련이은 실패는 우리를 분발하게 했어요. 우리는 래일 이 도시를 떠나지만 심장의 한부분은 남겨둘거예요. 우리처럼 불행을 당하는 청춘들의 마음속에 남아서 말이예요. 자, 로베르또와 마리노, 하싼과 와힘 그리고 나까지 포함해서 우리모두가 애타게 찾는 봄의 고향으로 함께 날아갈 그날을 위하여!》

혜림이 잔을 내밀었다.

《멋있다! 사랑하는 우리의 혜림!》

《<롱>의 세계일주 만세!》

그들은 희열에 넘쳐 잔을 찧었다.

이때 의자들이 밀리는 아츠러운 소리가 들렸다. 창문쪽의 젊은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들의 옆을 지나 출입문을 향하고있었다. 그중의 한 청년이 씨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일이 잘될거야.》

그들이 사라지자 로베르또가 고개를 돌리고 그들을 흘겨보다 무엇인가 생각난듯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하네. 잠간 전화를 걸어야 할 일이 생겨서 그러네.》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던 혜림은 랑비를 충고하던 말이 떠오르면서 어딘가 할아버지의 생활방식을 재현해보는듯 한 느낌을 어쩔수가 없었다.

(근검절약… 그래, 할아버지도 이렇게 한생을 살아오셨지.)

혜림은 어머니가 갓 시집왔을 때 할아버지가 들려주었다던 이야기가 불쑥 떠올랐다.

…리성원이 하늘같이 믿고 살던 어머니마저 잃고 여기저기로 흘러다니다가 대구에 가서 류랑아들로 무어진 신문패에 몸을 담그었던 때였다. 신문패란 신문팔이를 해서 벌어먹는 패거리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였다.

그때 그의 머리에는 오직 어머니의 유언대로 기어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만이 꽉 차있었다. 신문팔이에서 요령이 트기 시작하자 그는 주머니에 구두약과 구두솔, 닦개천과 밀랍을 넣고 다니면서 짬짬이 구두닦기도 하였다. 그렇게 버는 돈은 몰래 딴 주머니에 꼬깃꼬깃 채워졌다.

삼복이 기승을 부리던 무더운 어느날이였다. 리성원은 짝패들과 함께 강물에 뛰여들어 미역을 감았다.

《너 이 돈 어디서 났지? 그리구 이 구두솔따위는 뭐냐?》

저녁에 하루수입을 따지는 자리에서 《두령》이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리성원은 제꺽 안쪽의 주머니를 훑었다. 비여있었다. 《두령》이 자기의 거동을 살피다가 미역감을 때 뒤진것이 분명했다. 사실을 설명할수밖에 없었다.

《그건 네 말이구. 보증할만 한 애를 대봐.》

리성원은 곁의 애들을 바라보다 머리를 무겁게 숙이고말았다. 할 말이 없었다. 입패때 《두령》은 이러저러한 경로로 들어오는 돈이라도 숨기는것이 없어야 한다고 그루를 박았던것이다.

《딴꿈을 꾼다?! 리성원! 각오는 돼있겠지?》

《규정》에 따르면 죽도록 매를 맞고 쫓겨나야 했다. 사정을 해볼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지금까지의 경우를 보면 공연한짓 같았다. 하지만 몇달동안이나 애써 번 돈을 생눈 떼우듯 하고싶지 않았다.

《매는 두배, 세배로 맞겠어요. 하지만 돈만은 돌려주어요. 내 피땀으로 번것이예요.》

《하, 그럼 넌 지금까지 네가 벌어먹었어? 네 신문을 팔았어?》

리성원은 매를 맞으면서도 이를 사려물고 한마디의 신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회초리를 맞은 잔등과 엉치는 칼로 에이는듯 했다. 《집장사령》역을 맡은 애들까지도 끔찍한듯 머리를 돌렸다. 아직 두배까지는 맞았어도 세배로 맞은 애는 없었던것이다.

비칠거리며 일어난 리성원은 《두령》을 쏘아보았다.

《정확히 세배인 삼십대를 맞았어요. 그러니 돈을 돌려줘요!》

《두령》은 코웃음을 치고는 아직 맛을 덜 보았다며 더 조겨대라고 을러멨다. 하지만 누구도 더는 회초리를 들념을 못했다.

막무가내로 문밖으로 내쫓기운 그는 너무도 억울하여 문을 두드리다가 나중에는 발로 차고 행악질을 해대며 물러서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언이 어려있고 자기의 피땀이 스며있는, 누구에게 줄수도, 떼울수도 없는 당당한 자기 돈이였다. 이 패와의 싸움에서, 아니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이 저주로운 사회에서 버텨낼수 있는것이다.

몇십번을 밀리우고 발길에 채우며 흙탕물속에 휘뿌려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지탱했고 나중에는 따닥따닥 신문쪼박을 오려붙인 조그마한 창문까지 주저없이 박산냈다. 그리고는 량손에 제 손보다 더 큰돌을 움켜쥐고 누구든지 나서기만 해봐라 하고 노려보았다.

저런 악질은 보다 처음이라며 치를 떤 《두령》은 마침내 그에게 돈과 구두닦기도구까지 도로 가져다주게 했다.

이를 굳게 사려문 리성원은 승리의 쾌감을 맛보았다. 난생처음 부려본 배짱이였고 이긴 첫 싸움인것이였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고 법칙이구나 하고 그는 깊이깊이 새겨두었다. …

《뭘 그리 생각하오?》

전화가 끝났는지 로베르또가 들어와 앉으며 혜림에게 물었다.

《애인에게 전화를 한게죠?》

혜림은 살풋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잔에 술을 부었다.

로베르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혜림이가 또 술을 부으려 하자 그는 제꺽 잔을 한쪽으로 치웠다.

《술을 그렇게 즐겨하면서 오늘은 왜 이리 사양하는거예요?》

《사양하긴… 하지만 래일은 또 떠나야 하니 이젠 식사나 하고 일찍 쉬기요.》

《혹시 애인에게서 결별선언이라도 들었는가요?》하고 혜림이 물었다.

그러자 로베르또는 아무런 대답이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식사는 밤이 퍼그나 깊어서야 끝났다.

려관방으로 돌아온 혜림은 창가림을 하고 실내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좀 늦은감은 있으나 샤와를 하고 건발을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공연의 성공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지만 래일은 장거리려행을 해야 하겠기에 의식적으로 잠을 청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다만 얼결에 눈에 비쳐오는 밝은 광각을 느낀 혜림은 무의식중에 놀라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앗!》소리와 함께 다시 베개에 풀썩 뒤머리를 박았다. 예리한 칼날이 목에 닿았던것이다.

《아가씨, 놀라지 마오. 우린 나쁜 사람들이 아니요. 글쎄, 그렇다고 좋은 사람은 아니구. 하지만 소리치면 그땐 무슨 일을 칠지 모르오.》

어디서 들은것 같은 웅글은 젊은 사내의 목소리였다.

《어쩌자는거예요?!》

《우리 요구를 들어주면 되오.》

《뭔데요?》

《돈, 그것만 내놓으면 조용히 물러가겠소.》

《무슨 돈 말인가요? 난 길가에서 노래를 팔아 살아가는 신세예요.》

《알지, 알구말구. 오늘은 비행기를 타고 브라질로 날아가려구 한다는것두…》

이 순간 혜림은 할아버지의 옛이야기가 생각났다. 신문팔이로 피나게 번 돈을 매까지 맞아가며 그악스럽게 찾고야만 할아버지였다. 하물며 이 녀석들이 노리는 돈은 그만이 아닌 《롱》악단의 목숨이나 같은것이다.

(죽어도 내놓아서는 안된다.)

《돈은 나한테 없어요.》

《곱게 생긴 아가씨가 거짓말을 하면 쓰나. 그래, 살고싶지 않소?》

《죽고싶지는 않군요.》

《그럴테지. 내가 쥔 이 칼은 사정을 봐준 일이 없소.》

혜림은 목의 살갗을 살짝 할퀴는 칼날의 감촉에 머리칼이 곤두서는것을 느꼈다.

《우리가 뒤져봤는데 재간스레 감췄더군. 자, 더 늦기 전에 꺼내놓지. 그러면 모든 일이 무난히 될거요.》

그제서야 혜림은 침입한 녀석이 식당 창문쪽에 앉아있다가 밖으로 나가며 말을 내뱉던자라는것을 깨달았다.

(우릴 노렸댔구나. 그렇던들 이젠 다른 방도가 없지 않는가.)

자기에게 할아버지와 같은 강의한 의지가 없다는것을 가슴아프게 깨달은 혜림은 한숨섞인 어조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잠시 돌아서세요. 트렁크열쇠를 꺼내야겠어요.》

《진작 그랬어야지.》

혜림은 실내옷의 가슴부위에서 트렁크열쇠를 벗겨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트렁크를 놓아둔 벽장쪽으로 향하던 그는 어둠속에서 발을 헛디디는척 하면서 원탁을 그러안고 나자빠졌다.

와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원탁우에 있던 꽃병이며 물건따위들이 바닥에 떨어져 박산이 났다. 전지불들이 잠간 허둥댔다. 가만 보니 불청객은 서너명쯤 되는것 같았다.

《이년이?!》하며 한 녀석이 혜림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켜세웠다.

동료들이 술까지 마셨기에 저 소리를 듣지 못했을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너무도 안타까와 소리내여 울고싶었다.

목에 칼이 닿은채로 벽장까지 다가간 혜림은 문을 제꼈다.

《?!》

트렁크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가?

식당에서 돌아온 후 방에 들어와 여기에 넣는것을 로베르또도 분명 보았던것이다. 그때 로베르또가 왜서인지 일시 우물쭈물하는 기색이였다고 상기되는것이였다.

그러니 로베르또가 혹시?!

매사에 신중하고 믿음직한 로베르또의 모습이 얼핏 스쳤다.

《노래와 춤만 괜찮게 하는가 했더니 요술도 곧잘한단 말이지. 좋아, 네년을 인질로 가져다 놓으면 어떻게 될가? 이 불쌍한 가수야, 우리와 함께 살면서 목이 쉬도록 지르고 그 몸뚱아리를 흔들어볼테야?》

트렁크가 보이지 않는데도 혜림의 마음은 이상할만큼 안정되여갔다. 돈을 빼앗기지 않으면 자기는 어떻게 된다 해도 《롱》은 살아서 세계일주를 예정대로 이어갈것이기때문이였다.

《그래요. 우리는 노래와 춤을 팔며 살아가요. 이런 불쌍한 사람들을 털어내려는 당신들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지요?》

《우리가 이렇게 된건 우리탓이 아니야. 모두가 우릴 차버렸거던. 국가와 정부라는것은 우리를 시끄러워하고 사회라는것은 우리를 배척하며 낳아준 부모도 우리를 외면하는 세상이라는것을 아직 몰라? 그러니 우리들자신이 우리를 어떻게 불러야 하겠어, 응? 그 귀여운 꾀꼴새입으로 말해봐. 모르면 내가 대줄가? 현대정치의 불순물! 인류공동의 사생아! 세계가 절망할 암적존재! 흐흐, 어때? 이런 고귀한 이름은 못 들어봤을테지.》

《고마워요. 그리고 기쁘군요. 요행 우린 서로 통하는데가 있는가봐요.》

《고맙다, 그리고 기쁘다?! 제법 시까스르는군. 돈을 내놓지 않으면 그대신 네가 우리의 소유물이 되는데두 기쁘단 말이지?》

《그 칼을 거둬요. 이 작은 몸뚱이가 뭐 그리 비싼건가요. 이 려관방에서 사방으로 십분쯤만 걸어가도 맨 륜락가인데 거기엔 나 같은 처녀들이 많지요. 그들모두도 당신네처럼 버림받은 인생들이예요. 권력이 짓밟고 돈이 짓밟고 당신들까지 짓밟으니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구들이예요?》

《하, 이건 방향이 아예 달라지는걸. 그건 지극히 옳은 말이야. 내 녀동생도 천파운드도 못되는 빚에 팔려 지금은 바이루트의 나이트클럽에서 갈가리 찢기우고있어. 그래서 우리는 이놈의 세상을 증오하게 됐다!》

녀석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방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이어 방문이 벌컥 열렸다. 문가에는 로베르또가 서있는데 그의 손에는 트렁크가 쥐여져있었다.

혜림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트렁크를 넘겨줘요.》

《그럼 우린?》하고 로베르또가 숨을 죽이고 물었다.

《여기서 노래를 더 불러야지요. <롱>의 리념이 뭔가요? 이들은 칼을 들었을뿐 우리와 다름이 없는 버림받은 인간들이예요.》

로베르또는 혜림의 놀라운 심리변화를 선률처럼 파악하고있었다. 하지만 악이 선의 자비를 알아줄텐가. 악은 악으로써 자기의 종말을 맞이하는 법이다.

《이것들은 속죄란걸 모르오.》

그는 혜림으로서도 갓 배우기 시작한 까딸로니야말로 낮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야 선량한 노래만을 불러야지요.》

마침내 로베르또가 트렁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 어서 가져가오. 좀 있으면 야간순찰대가 들이닥칠거요. 내가 방금 신고하고 오는 길이요.》

침입한 세명의 무리속에서 제일 어려보이는 놈이 트렁크를 들려 했다. 순간 칼을 든 녀석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만둬!》

녀석은 칼을 옆구리에 질러넣고는 혜림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가씨! 무례하게 밤에 뛰여든것을 량해하오. 하지만 이제 다시 이렇게 만나면 그때는 사정을 봐주지 않겠소. 우리도 살아야 할게 아니요.》

그리고나서 저희 패거리들에게 소리쳤다.

《자, 우린 가자!》

다른 두명의 침입자는 두목의 결심에 놀라왔던지 아니면 트렁크를 두고 가기가 아쉬웠던지 한동안 어리벙벙해있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창문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혜림이 두손을 모아 가슴에 얹으며 휘청거리자 로베르또가 부축했다.

혜림의 입술사이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여나왔다.

《저주를 받으라, 젊음을 짓밟는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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