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 3 장

 20

 

한주일가량이나 건강을 빌미로 집에서 두문불출하던 리성원은 오래간만에 대문밖을 나섰다. 그동안 안해도 안정을 되찾고 그 역시 정상기분으로 돌아섰지만 주위환경은 여전히 불안하고 마음은 무거웠다.

그는 아침에 자기로서의 불문률을 깨뜨리고 서해수에게 죠이티룸이라는 차집에 와줄것을 부탁하고는 지금 그리로 가고있는중이였다.

밤의 도시가 한껏 취하도록 얼럭덜럭하게 장식하고있는 불야경은 번잡하다 못해 증오스러울 지경이였다. 이런 밤에는 건전한 사람들도 사치와 방종의 유혹에 빠지기가 십상일것 같았다.

나이트클럽을 지나는데 대형유리창너머로 폭포처럼 쏟아져내리는 불빛속에서 광란하는 남녀들이 보인다. 전쟁과 파괴의 20세기는 영원히 물러가고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아담과 이브의 세기가 왔다며 허리와 엉치를 비비꼬고 흥분한 말떼처럼 껑충거리며 돌아가는 저 무리들을 진정시킬 하느님은 언제 가도 강림할것 같지 않았다.

다방에 들어선 리성원은 녀주인과 인사를 나누며 말했다.

《잘 있었소, <꼬제뜨>? 언제나 밝은 웃음을 지을수 있다는것이 얼마나 좋소.》

《그렇게 보이세요? 방금전까지 전 수심에 잠겨있었는걸요.》

《아, 그렇소? 몬나리자의 눈빛에 어린 감정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이 안다는걸 내 잊었소.》

리성원은 자기의 고정좌석에 앉으며 말했다.

《선생님은 말씀이 적으신줄 알았는데 롱담도 곧잘하시는군요.》

《나는 수심에 잠겼다고 해야 할 형편이요. 모욕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혹시 실련이라도 당한게 아니요?》

《호호호, 제 나이 몇이라고… 참 우습군요.》

《그렇게 웃으니 더 보기 좋구만.》

《물론 또 커피겠지요?》

녀주인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물었다.

리성원은 미소를 짓고 고개를 젓다가 말을 건넸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잠간 앉아 나에게 가르쳐주오. 이것 보오. 당신이 숭상하는 그 빅또르 유고에게 좀 물어봐주구려. 가령 세상에 기적이라는게 있어 그가 이 땅우에 다시 환생하여 새 <노뜨르담대사원>을 쓴다면 그래도 에스메랄드와 까지모도가 기어이 만나게 하겠는가고 말이요.》

《선생님은 만나고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가보지요?》

《그것만이라도 나에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현세의 유고라고 부르고싶소.》

녀주인이 동정의 눈빛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아무리 존경받는 유고라도 그것을 가르쳐주기는 어려울거예요. 그는 예수도 모함메드도 아니거든요. 하지만 난 이렇게 말씀드리고싶군요. 인생이란 꼭 한번은 만나야 할 사람들을 기다리며 보내는 시간이라고 말이예요. 그건 피할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되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아닐가요?》

리성원은 내심 솟구치는 놀라움을 감추며 억지로 얼굴에 웃음을 그렸다.

일개의 차집주인도 알고있는 인생철학을 나는 왜 한사코 거부하려 하는가. 구경은 내 손으로 만든 기업이라는 상아탑속에서 세상을 등진것이나 다름이 없는 이 할아버지를 보다못해 손녀도 그 손길을 뿌리치고 제가 꼭 만나고싶은 사람들을 찾아 깃을 펴고 날아간것이 아닌가.

이때 차집에 들어선 서해수가 리성원을 알아보고 슬근슬근 다가왔다.

그는 맞아주는 녀주인에게는 관심이 없는듯 좀 거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거 내가 눈치없이 달콤한 분위기를 깨뜨리는게 아니요? 할수 없지요. 애초에 이 조용한 곳에 나를 초청한 사람은 형님이니까.》

서해수는 리성원과 녀주인이 점직해하는것에는 개의치 않고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뭘 마시겠나?》

《기분도 울적한데 차나 한잔 주오.》

녀주인이 가버리자 리성원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살펴보며 말을 붙였다.

《자네 같은 락천가도 상심할 때가 있나?》

《어찌겠소, 로친네는 텅 빈 광실 같은 집에서 혼자 외로움을 달래고있는데 령감은 눈이 새파란 서양녀자와 정담이나 나누고있으니 말이요.》

《속단말게. 자네가 여기에 언제 와보았다고 녀주인을 그렇게 모욕할수 있나.》

리성원은 자기가 모욕을 받은듯 화증이 치밀었으나 누가 들을가싶어 가느다란 소리로 질책했다.

《남들한테 떳떳하다면서 목소리는 왜 그렇게 기여들어가오? 됐수다. 롱담이요. 헌데 만날 일이 있으면 여느때처럼 집으로 부를것이지 오해까지 뒤집어쓰며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겠소?》

서해수가 성미그대로 직판 물었다.

리성원은 아무 말이 없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여 넘겨주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던 서해수가 히쭉 웃더니 도로 내밀었다.

《참 좋수다. 형님의 몸값이 그렇게 올라가다니. 그 평양손님들이 형님의 금새를 너무 높이 쳐주는게 아니요? 나 같으면 당장 퇴박을 놓고말겠는데.》

《자넨 때와 장소를 가림없이 빈정대는게 흠이야. 내가 이걸 가지고 자넬 찾았을 때야 그 리유를 모르지 않을텐데…》

리성원은 나무라면서도 구조를 바라는 심정이였다.

《나를 찾아선 뭘 한단 말이요. 일단 초청을 받았으니 이젠 날아가는 일만 남았겠는데.》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릴 하나? 자넨 내 심정을 그렇게도 모른단 말인가. 태여난 고향땅도 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나에게 평양이 뭐란 말인가. 더구나 전번에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나한테 후회를 말라고 엄포를 놓던 그 평양의 소장인지 하는 사람이 나를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게 께름직하단 말일세.》

녀주인이 차를 가져다놓고 가버릴 때까지 천정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던 서해수가 돌연 격해서 말을 걸었다.

《그러니 호랑이꼬리를 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있다는건데… 산전수전을 다 겪은 형님 같지 않수다. 세상을 다 산 나이에 아직도 누구의 눈치를 보는거요? 그래 북쪽이 무섭소, 남쪽이 무섭소? 대체 형님은 그들에게 무슨 죄라도 지었다구 재고 앉아있는거요?》

《나야 불과 한주일전에 서울행을 포기한 사람이 아닌가. 내가 이제 평양에 가겠다면 그들이 좋아할가?》

《그들이란건요, 서울사람들 말이요? 어이구, 그 량반들 얘기는 듣기두 싫소. … 참, 거 전번에 만났던 그 부령사란 작자말이요.》

서해수가 길게도 숨을 뽑고 리성원쪽으로 의자를 당겼다.

《얼마전에 오타와에 있는 내 친구 하나가 날 만나러 여기에 왔댔지요. 그가 길가에서 우연히 그 부령사를 알아보고는 치를 떱디다. <저 작자가 예까지 흘러왔구려. 겉보기와는 달리 음모의 왕초, 무서운 놈이요. 제 동포들을 위하는척 하면서 홀려서 서울로 끌어가서는 자기들이 시키는 일을 하라고 강박하고 말을 안 들으면 터무니없는 모략날조로 완전히 매장해버린다오. 나와 거래하던 토론토의 한 동포기업가도 등치고 간빼는데 이골이 난 저자에게 속아 이남에 갔다가 졸딱 망하고 나중에는 분통이 터져 자살까지 하고말았다오.> 하면서 말이요.》

서해수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났던지 어깨를 솟구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자가 오찬회때 넘겨준 자료철들을 본 생각이 나시우? 말로는 동포끼리 호상 래왕해야 한다,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헤여진 혈육들이 지체하지 말고 만나야 한다 하면서 요사를 떨지만 동족을 헐뜯고 모해하지 못해 지랄발광하는게 그네들이 아니요. 형님도 본 생각이 날거요. 거 작년인가 서울당국이 의지가지없는 류랑고아라고 하면서 부모형제들이 멀쩡하게 살아있는 이북의 소년, 소녀들을 거의 열명씩이나 강제로 남쪽으로 유괴해오다가 들짱이 나서 개망신을 당한 꼴을 말이요.》

리성원은 흠칫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나어린 순진한 애들을 제3국까지 거쳐 서울로 끌어가려던 랍치미수극의 진상이 피해당사자들의 입으로 폭로되는 기자회견을 인터네트를 통해서 목격하던 그날 리성원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제 눈과 귀를 오래도록 의심해야 했다.

부모형제들이 있는 집으로 보내달라고 안타깝게 사정을 하다가 같은 동포라던 사나이들 아니, 그나마 하느님의 사도라는 《목사》의 감투를 쓴 악한들이 마구 휘두르는 철퇴에 죽도록 얻어맞고 실신했던 소년, 더이상 말을 듣지 않으면 저 먼 아프리카에 성노예로 팔아먹겠다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위협앞에 기절했던 소녀, 강압에 못이겨 혈육들과 영영 생리별을 당하고도 도리여 랍치자들이 써준대로 북의 아동《인권》이 어떻고 주민생활형편이 어떻고 하며 자기들을 낳아준 부모형제들과 나서자란 정다운 요람을 무차별적으로 헐뜯는 《탈북성명문》을 사나운 매질속에서 기계적으로 외워야만 했던 그들의 처절한 절규…

과연 창세기도 아니고 자유와 인권, 문명과 복지를 서로마다 목터지게 제창하는 이 대명천지에 저런 현대판노예밀수범죄와 같은 패륜행위들이 당국의 조종하에 아무 거리낌없이 펼쳐지고있다는 사실앞에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그의 심중을 꿰뚫어보는듯 잠시 말을 끊었던 서해수가 입을 열었다.

《지금 부령사나리가 뭐 형님이나 내가 고와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며 귀간지럽게 연회상에 불러내고 호들갑을 떠는줄 아시우? 기업계도 그렇고 동포사회계에도 널리 알려져있는 형님 같은분들이 북으로 마음이 쏠리고 그것이 동포들의 전반적민심으로 되여버릴가봐 선수를 쓰는거라오.》

《?!》

《그럼 그자들이 왜 정녕코 그짓을 하자고 하겠소? 형님도 모르진 않을거요. 10여년전에 북남수뇌상봉이 진행되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6. 15공동선언이 태여난 곳도 바로 평양이 아니요. 그것이 현실로 펼쳐져서 북과 남은 물론이고 해외에서까지 온 겨레가 얼마나 떠들썩했소. 이 사실만 봐도 민족의 대단합이라는 큰 밑그림이 거기에 그려져있다는거야 명백하지 않소.》

리성원은 자기의 속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제 말만 말이라고 몰부어대는 서해수에게 저으기 화가 났다.

《그러니 자넨 나더러 북의 초청에 응하라는건데 그래, 기업가인 내가 생면부지의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자네도 모르지는 않겠지. 지금 서방에서 말하듯이 북의 사정이 지금 어떤가 말일세.》

《형님은 또 서방언론들이 떠드는 나발이 떠오르는 모양이구려. 거짓말을 백번 해서 진실로 둔갑시키고 그래야만 생존할수 있는 그네들의 생리를 형님이 과연 모른단 말이요?》

서해수가 정곡을 찌르며 들어오자 리성원은 마침내 눈을 떴다. 하지만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차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도리머리를 쳤다.

마냥 안타까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서해수가 처연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지금도 정석이가 세상을 떠난 후 심한 우울증에 빠져있던 형님의 장인이 말끝마다 외우던 말이 잊혀지지 않소. <우리 정석인 내가 죽음의 길로 떠나보낸거나 같애. 내가 왜 그랬을가. 차라리 나를 대신해서 내 고향으로나 보낼걸. 그애가 거기에 갔더라면 설마 이렇게 비참한 꼴을 당했을라구. 내 고향은 얼마나 살기 좋고 사람들이 좋은 곳이라구.> 하던… 참, 형님도 생각나겠구려. 장인이 이승을 하직하면서 남긴 말 말이요.》

갑자기 리성원은 눈앞이 뿌옇게 가리워지며 목이 꺽 메는것 같았다.

…의식을 잃었던 하필선이 정신을 차리기 바쁘게 사위인 리성원을 찾았다. 그와 하의영은 지체없이 그의 곁으로 갔다.

《정석이 에미야. 거 내 트렁크를 좀…》

숨이 차서 간신히 말을 잇는 하필선에게 안해대신 리성원이 재빨리 트렁크를 가져다 주었다. 하필선은 졸아들대로 졸아들어 쇄골만 드러나보이는 목에서 실오리같은 사슬을 벗겨달래더니 그끝에 붙어있는 열쇠를 사위의 손에 쥐여주었다.

리성원은 바싹 긴장해졌다. 장인령감이 저 트렁크를 얼마나 애지중지해왔는가는 온 집안식구들이 다 아는 사실이였다.

열쇠로 트렁크를 여니 그안에서 그리 크지 않은 네모반듯한 자개박이칠함이 나타났다.

금붙이나 보석들을 담기에는 좀 촌티가 나는 옛 물건이였다.

《내가 죽으면 저기에다 내 유골재를 담아주게. … 사후귀환향이라구 죽어서도 고향에 가고싶어하는게 우리 조선사람 누구나의 심정이 아니겠나. 만일… 자네 손으로 저 유골함을 내 고향 선산에 묻을수 없게 되면… 손녀나 그 후손들의 손을 빌어도 좋으니 어느때건 그렇게 하도록 해주게. … 그것마저 안된다면… 서부 한끝에 있는 브리티쉬콜럼비아주에 가서… 태평양 서쪽방향으로 바람이 불 때… 파도에 띄워보내주게. 그러면… 1년이 걸리더라도 아니, 10년이 걸려서라도 내 고향땅으로 가닿겠지.》

하필선은 그 말을 종시 유언으로 남기고말았다. …

속이 울컥해진 리성원은 입술을 떨다가 겨우 열었다.

《그러니 자네 생각엔 내가 평양으로 가야 한단 말이지.》

《언제 내 말을 듣고 결심을 내린적이나 있는 형님이요? 됐소. 내 말에 대답이나 해보시오. 여기에 뭐가 있소?》

서해수가 느닷없이 장난꾸러기소년이라도 된듯 리성원의 가슴을 툭 건드렸다.

《심장?》

《옳소. 그리고 여기엔?》

이번엔 서해수가 자기의 이마를 두드린다.

《에익, 자네 날 그만 놀리게!》

리성원의 어성이 별안간 높아졌다.

《내 말을 듣소. 형님의 심정을 모르지 않는 내가 무슨 경황에 장난을 치겠소. 형님도 모르지 않을거요. 미국 뉴욕에 사는 인기있는 동포음악가나 저명한 인터네트신문주필도 계속 평양을 방문하고있는걸 말이요. 그 사람들은 미국 한복판에서 소리치며 북을 찬양하고있지 않소. 하물며 형님이야 제 말대로 정치와 담을 쌓은 기업가인데 뭘 그리 걱정이시오?》

서해수는 제사 안타깝다는듯 주먹으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지금 형님의 머리는 타산과 의혹, 불신으로 꽉 차있고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에선 그 어떤 지향과 의지, 용기가 불길처럼 타오르고있소. 형님의 이번 걸음은 머리가 아니라 심장으로 가야 할거요. 알만 하오? 바로 그 심장으로 말이요.》

서해수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평양으로 안전하게 갈수 있는 방법도 귀띔해주었다.

차라리 방문지를 평양과 그리 멀지 않은 동남아시아의 어느 나라로 정했다가 현지에 가서 그 나라에 있는 북의 대사관을 통해 입국신청을 하고 사증을 받으면 된다는것이였다.

리성원이 듣기에도 그 궁냥이 그럴듯하다고 느껴졌다.

서해수가 물었다.

《그래, 이젠 뭐가 더 필요하오?》

《없네. … 좋네. 난 결심을 내렸네.》

두사람은 의미심장한 눈길로 서로 마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주인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선생님이 찾는 현세의 유고선생은 나타나지 않는가 보죠?》

리성원은 미소속에 대답했다.

《아니, 그 유고선생은 벌써 나한테 다녀갔다오.》

호기심으로 눈들이 커지는 그 녀자와 서해수를 번갈아 보며 리성원은 빙그레 웃었다.

다행히도 눈치가 빠른 녀주인이 그 웃음을 받아주었다.

《선생님이 결심을 내리신걸 보니 기쁘군요. 그 결심을 아마 유고선생이 축복해주실거예요. 물론 이 <꼬제뜨>도 말이예요.》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9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