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회)

 제 3 장

 21

 

리성원이 탄 승용차가 마당에 들어와 현관앞에서 멎었다. 차에서 내린 리성원은 어둠이 덮이기 시작한 정원과 불밝은 2층집을 올려다보았다. 안해가 홀로 기다리고있는 집이다. 손녀가 집을 나간 다음부터 이 시간이 되면 안해는 쓸쓸해나는 마음을 안고 현관으로 내려와 자기를 기다리며 서있군 했던것이다. 헌데 오늘은 리성원이 좀 빨리 들어와서인지 안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습관적으로 한숨을 내쉬였다.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래일은 평양방문을 위해 떠나야 하는것이다. 여느때 같으면 손녀와 며느리까지 포함한 온 가족의 바래움속에 례사롭게 여겼을 출장길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너무나 사정이 달랐다. 너렁청한 집에 안해를 외로이 남겨두고 가야 하는것이다. 안해에 대한 걱정과 미안함이 앞서며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난처하기만 했다. 그러지 않아도 낮에 이 넓은 집에 혼자 있기가 괴로워 며칠전에는 애완용개까지 한마리 가져다놓은 안해였다.

이때 《드르릉-》하고 미닫이식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해가 현관에 나타나 문설주에 기대서서 바라보았다. 2층창문에서 내려다보며 그를 기다린것 같았다. 깜찍하게 생긴 애완용개가 하의영의 발밑에 감겨돌아가며 끙끙거렸다. 안아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는듯 했다.

리성원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며 안해에게로 터벌터벌 다가갔다.

《이제는 아예 집안에 들어오기도 싫어지는게죠?》

순간 리성원은 그가 얼마전에 손녀와 며느리도 다 자기때문에 이 집문턱을 나갔다고 한탄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렇기로서니 이렇게까지 심사가 뒤틀릴 말이 튀여나올건 뭔가.

《그런 자해적인 피해의식은 몸에 해롭소. 혜림이를 기다리는 우리가 쓰러져서야 안되지.》

리성원은 안해의 어깨를 다독여주고는 한걸음 앞서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순간 그는 집안의 응접실쪽에서 누군가 마중나오는듯 한 환각에 휩싸였다.

(혜림아, 며늘애야…)

그러나 그를 맞이한것은 고즈넉한 정적이였다. 그는 솟구었던 어깨를 푹 떨구고말았다.

이때 뒤에서 자기 몸을 감싸는 안해의 손길과 등에 닿아지는 그의 체취를 리성원은 느꼈다.

리성원은 그냥 그 자리에 선채로 눈을 슬며시 감았다. 안해의 심정이 그 손길로 와닿는것 같았다. 자식들을 위해서 모든것을 기울여왔건만 지금은 그것을 후회하며 자기를 원망하고있는 안해를 생각하니 측은하기만 할뿐이였다.

리성원은 자기를 품고있는 안해의 손잔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리고는 누가 들을가봐 저어하듯 귀속말로 속삭였다.

《여보, 배가 고프구만.》

일부러 그런것도 아닌데 문득 젊었을 때의 자기의 억양이 되살아나는것이 저로서도 놀라왔다.

하의영은 그 말에 눈굽을 훔치며 그제서야 남편의 몸을 풀어주었다.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가벼운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하는 안해를 보며 리성원은 긴숨을 내쉬였다. 속에 없는 빈말을 던진것이 미안하기는 했어도 안해와 시름없이 마주앉을 최상의 방도란 그뿐이라고 생각되였던것이다.

손바닥만 한 휴대용소형록음기를 들고 식사실로 간 리성원은 식탁우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그건 뭘 하려고요?!》

남편의 이상한 거동에 하의영이 놀라서 물었다.

그러나 리성원은 아무 대꾸도 없이 한눈을 꿈쩍거리고는 록음기의 단추를 눌렀다. 그들부부가 즐겨하는 바이올린독주곡이 은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에스빠냐의 싸라싸데가 창작한 《집시의 노래》였다.

남편의 마음을 알아차린 하의영이 당신의 수는 못 당해내겠다는듯 고개를 흔들며 빙긋이 웃었다. 오랜만에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하의영은 이내 젊은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잰걸음으로 주방 한쪽에 서있는 마호가니나무로 호화롭게 장식한 벽장으로 다가간 그가 포도주병과 술잔 두개를 가지고 왔다.

리성원은 밝게 웃으며 안해의 잔과 자기의 잔에 술을 부었다.

《정말 희한한 일이군요. 이런 일이 한 십년전에나 있었던가싶군요.》

《당신의 건강과 아름다움을 위해 들고싶소.》

《난 온 집안이 다시 모여 화목하게 지내기를 빌겠어요.》

《!…》

서로 잔을 찧은 그들은 시름을 잊고 포도주를 마셨다.

《매일 저녁마다 소원을 한가지씩 빌면서 잔을 나누었으면 해요. 그리고 오늘처럼 음악도 듣고요. …》

어린애마냥 기뻐하는 안해를 보며 리성원은 기분이 뜨는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래일 출장때문에 안해를 달래자면 이런 분위기가 좋을것 같았다.

록음기에서는 고전명곡들이 흘러나왔다. 혜림이가 이딸리아류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윈에 들려 특별히 마련해가지고온 왈쯔곡들도 들어있었다.

리성원은 자기가 음악을 남들 못지 않게 사랑하고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전쟁터나 다름없는 기업환경에서는 도저히 그런 섬세한 랑만이나 풍부한 감성이 허용되지 않기에 금물로 여겨왔었다. 헌데 역시 피줄은 피줄이였다. 격세유전이라더니 손녀애가 또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릉가하는 음악광인것이다.

혜림이의 해맑은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어디에 있느냐. 혜림아?

주방에서 설겆이를 마친 하의영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리성원은 그러는 안해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며느리가 탈가한 후 늘그막에 주방일까지 돌봐야 하는 그의 정상이 처량하여 음식솜씨가 있고 마음씨도 착한 가정부를 데려오자고 했을 때 하의영은 이런 말로 반대를 했었다.

《그래야 당신과 나 둘뿐인데 누구를 데려온다는거예요? 당신의 식사는 그 누구에게도 맡기고싶지 않아요.》

리성원은 안해가 곁에 와앉자 이렇게 물었다.

《기분도 호젓한데 우리 정원을 좀 거닐가?》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린듯 안해가 그를 마주보며 볼웃음을 지었다.

리성원은 안해가 오늘따라 무척 젊어보이는것 같아 못내 즐거웠다. 하긴 반백일망정 아직도 날씬한 몸매와 청아한 목소리, 부드러운 살결을 유지하고있는 안해였다.

《난 왜서인지 당신이 어디론가 혼자 훌 날아갈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대체로 이전에 먼길을 떠날 일이 있을 때마다 늘 당신은 이러했으니까요.》

《?!…》

엷은 미소가 리성원의 얼굴에 비꼈다. 역시 촉기가 빠른 안해라 벌써 남편인 자기의 내심을 읽고있는것이였다.

잠시후 그들은 정원으로 나섰다. 아무말없이 안해의 팔을 끼고 걸음을 옮기던 리성원은 황혼이 깃드는 저쪽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아득히 흘러가버린 세월의 옛 기슭을 보는것 같았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라인강의 물결, 한 처녀와 거닐던 그 강기슭이 슬그머니 다가오고있었다. …

그렇게 길어보이던 뮨헨종합대학의 류학시절도 이제는 두달정도 남았다. 리성원은 최우수학생의 지위를 확고히 고수한것으로 하여 류학생들만이 아니라 대학의 많은 교수들속에서도 인기를 모으고있었다.

대학당국은 졸업을 앞둔 류학생들중에서 수재로 인정되는 대상들을 장악하고 적극적인 귀화공작을 벌렸다. 곧 석사의 학위를 받게 되는 리성원은 당연히 그들이 일부류로 지목하는 대상이였다.

대학리사회가 내건 우대조건은 그로서도 눈이 확 뒤집힐 정도였다. 게다가 곁에서는 동료류학생들이 그를 부러워하며 열심히 풍구질을 해대고있었다.

《기회란 언제나 있는게 아니거던. 자네야 카나다가 나서자란 조국도 아닌데 뭘 고민할게 있나.》

《자유란 하느님이 인간세상에 하사해준 값비싼 선물인데 자넨 왜 그걸 마다하는건가? 은인에 대한 의리도 중요하지만 자유와는 대비할수 없지. 부디 후회가 없기를 바라네.》

그들의 권고가 악의에서 출발한것이 아니라 호의와 진정에서 우러나온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리성원은 하필선에게서 입은 은공을 저버릴수 없었고 또 자기의 땀이 스며있는 챠일드에서 반드시 성공하고싶었다.

학위수여식을 마치고 나오는 리성원을 대학정문에서 기다리고있던 하의영이 반기며 축하해주었다. 2년전에 졸업한 하의영은 아버지 하필선의 바래움속에 어제 도착했던것이다. 그것은 의영자신의 심정이기도 하였다.

《석사학위를 받은 오빠를 축하해요. 아버지도 기뻐하실거예요.》

《고마워. 나도 방금 하사장님을 생각했어. 나의 재능과 정열은 의영이 아버님과 챠일드를 위한것이야.》

리성원은 흥분을 억제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의영은 다소곳이 숙인 눈길로 그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공연히 귀방울만 매만졌다.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고 환성을 올리고싶은 하의영이였다.

무뚝뚝하고 책밖에 모르던 샌님, 아버지와 자기가 하라는대로만 순종하던 무의무탁자총각이 유명한 인재로 떠오른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가 보건대 진짜인재는 자기의 아버지 같았다. 아버지의 안목이 얼마나 비상한가 한것은 멀리 내다보았을뿐아니라 정확했다는것만으로도 충분한것이였다.

아버지가 말한것처럼 리성원은 결코 남의 사람이 될수 없으며 또 그리 되여서도 안되는 사람이였다. 그것은 하필선뿐만아니라 하의영자신도 절대로 용납할수 없었다.

하기에 그는 졸업을 앞둔 리성원을 둘러싼 특수한 환경에 대하여 아버지에게 제때에 알려주었고 필요한 해결책까지 이미 합의해두었던것이다.

《의영아, 아버진 너만 믿는다. 이건 너의 운명도 결정지을수 있는 선택이라는것을 잠시도 잊지 말아라.》

하필선은 떠나는 딸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했었다.

하의영은 아버지의 뜻까지 합쳐 리성원에게 말했다.

《오빠의 졸업과 석사학위를 받은것을 축하해서 내가 한턱 내겠어요. 반대하진 않겠지요?》

리성원은 감지덕지해하는 표정으로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나를 믿어주고 키워준 하사장님을 위해서, 류학 전기간 나를 적극 떠밀어주고 보살펴준 의영이를 위해서 내가 인사를 차리는게 도리라고 생각해. 제발 나의 결심을 막지 말아줘. 그래, 어디로 갈가?》

《음, 소원이 정 그렇다면 좋아요. 오늘이야 오빠를 위한 날이 아닌가요. 헌데 먼저 사진부터 찍었으면 해요. 라인강을 배경으로 해서요.》

사진을 찍은 후 그들은 식당을 찾아갔다. 리성원은 자기가 자주 찾군 하는 동포가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했다.

그를 바라보며 하의영은 이름할수 없는 행복감이 온몸을 휘감는것을 어쩌지 못했다.

(한생 오빠에게 조선음식을 내 손으로 정성을 다해 해드릴테야.)

얼벌벌한 고추양념을 곁들인 매운탕을 들고난 리성원의 이마에 땀이 한발이나 내돋은것을 본 하의영은 재빨리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 가져다댔다.

《아니, 사람들이 보는데…》하며 황급히 이마에 올리던 리성원의 손에 하의영의 손목이 잡혔다.

《보면 뭐래요?》

부끄러움도 두려워하지 않는 처녀의 언행을 대하는 순간 리성원은 온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심장의 맥박이 급격히 높아지고 가슴속에서 뛰놀던 감성의 망아지가 풀판으로 나오려고 투레질을 해대는것만 같았다. 이어 눈앞이 흐려오면서 언젠가 밤에 대학곁의 공원의자에서 하의영을 품에 안았을 때의 무기력상태에로 온몸이 잦아드는듯싶었다.

《이젠 가야지.》

이렇게 중얼거렸어도 리성원은 자기가 어데로 가자는것인지 알수 없었다. 마주보는 처녀의 눈빛은 야릇한 불꽃을 튕겼는데 그 눈은 난 오빠의 심정을 알아요 하고 말하는것 같았다.

리성원은 숨을 크게 톺으며 더이상 깊이 빠져들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내 정신도 참, 잊었댔군. 난 곧 론문지도를 해준 교수선생을 만나야 해. 그에게 아직 인사도 차리지 못했는데… 미안해. 래일 다시 만나지.》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하의영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지요 뭐. 어서 가보세요.》

리성원은 비록 하의영의 눈길에서 벗어났지만 육체는 송두리채 그에게 맡긴 기분을 털어버릴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숙사에 돌아오자 옷을 벗어버리고 욕탕에 몸을 잠그었다.

샤와를 하고있는데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욕망의 날개는 여전히 퍼덕였다.

(내가 그에게 너무한건 아닐가. 처녀가 자존심과 명예까지 고스란히 다 바친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이러는건 도리여 그에 대한 모욕으로 될거야. 아마 의영인 사내답지 못한 나의 처사에 몹시 실망했을테지. 에익!)

리성원은 내리꽂히는 샤와물줄기를 맞받아 머리를 쳐들었다. 분명 하의영이 자기를 일생의 반려자로 가슴에 묻어두고있는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고 쌔물거리군 하는 그 처녀의 생각으로 저도 모르게 알지 못할 울분 같은것이 꿈틀거렸다.

까짓 처녀가 자존심을 희생하는것쯤에 이다지 골머리를 앓는담. 하지만… 아니야. 그래도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거야 사실이 아닌가. 이제라도 의영이를 찾아가자. 가서 그의 마음을 속시원히 풀어주어야겠어. 얼마나 실망을 했을가.

몇분후 리성원은 기숙사정문을 나섰다. 하의영이 든 호텔로 향했다.

《아니, 오빠가… 이 밤중에 웬 일이예요?! 교수선생은…》

방금 목욕을 했는지 머리카락이 아직 젖어있는 하의영이 잠옷차림으로 문가에서 그를 맞아주며 놀란다.

하의영에게서 몸샴프내가 기분좋게 물씬 풍겼다. 하지만 다음 순간 리성원은 처녀의 얼굴에 떠오르는 불만의 원인을 가늠해보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렇게 저녁늦게 찾아온 무례한 행동을 탓하는것인가. 아니면 점심식사후에 혼자 달아나다싶이 한 내 행동의 진속을 꿰뚫어보고 조소하는것인가.

급기야 후회막심한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그래, 그 교수선생이 뭐라던가요? 혹시 여기에 남으라고 설교한것은 아닌가요? 오빠가 말하는 의리나 보답 같은건 대체 어떤거예요?》

공격적인 하의영의 총알같은 질문에 리성원은 얼친 사람처럼 곰상해질수밖에 없었다. 속이고싶은 생각도 없었다.

《아니, 난 교수선생을 만나러 가지 않았댔어. 다만 갑자기 혼자 있고싶어져서…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하지만 지금은 뭐예요? 내가 가련해보여서요? 자비로 내 상상속에 들려는 어리석은 생각일랑 말아요. 할수 없군요. 유감스럽지만 나도 지금 혼자 있고싶군요. 안됐어요. 잘 가요.》

하의영은 잔뜩 토라진 기색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무엇을 설명할 사이도 없었다.

이런 랭대를 받을줄 알았더라면 오지나 말았을걸. 하지만 이젠 후회도 필요없다. 이렇게 그냥 선자리에서 돌아선다는것은 더 큰 수치로 될것이다. 그럼 어떻게 한다?

주밋거리며 서있던 리성원은 문의 손잡이를 슬며시 잡았다. 하의영의 숨소리가 들려오는것만 같았다. 잊을수 없는 《공연》을 한 그날 밤처럼 열정적인 속삭임을 하는듯 하여 은근히 힘을 주어 문을 밀었다.

《어마나?!》

하의영의 놀라는 목소리와 함께 둘의 몸이 합쳐졌다. 문은 걸려있지 않았거니와 리성원과 같이 처녀도 문가에 붙어서있었던것이다.

아득한 세월의 저쪽기슭을 되새기며 리성원은 혼자말처럼 속삭였다.

《당신은 갈데 없는 쥴리에트요.》

《그렇다면 난 당신을 로미오씨라고 불러야겠죠? 정말 미안해요, 로미오씨. 난 당신에게 행복만을 주고싶었는데… 그렇게 안되는군요.》

리성원은 리해가 간다는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눈치가 여간이 아닌 안해였다.

무엇이라고 설명을 해줘야 무난할가.

이때 귀청을 찢는 손전화기의 호출소리가 울렸다.

《예, 옳습니다. 내가 리성원입니다. … 뉘시라구요?…》

《한국》령사관의 한시명이 걸어온 전화였다.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하기야… 헌데 이 세퍼드같은 인간이 벌써 냄새를 맡았는가?!

《며칠전에 있은 삼로그룹건은 정말 미안하게 되였습니다. 무슨 오해가 생긴것 같은데 인차 다시 만나는 기회에 죄다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다 리해가 되실겁니다. … 그건 그렇고… 듣자니 사장님이 곧 동남아를 려행하신다더군요. 먼길을 떠나시는데 안부 겸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드리는것이 례의일것 같아서요. 그리고 동남아방향에 제 친지들이 많은데 혹시 방조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십시오. 그래, 기일은 얼마쯤 예견하고계십니까?》

리성원은 미간을 굵직이 세웠다. 하지만 분별을 잃지 말아야 했다.

《관심해주어 감사하오. 내가 부령사어른께 미리 선통을 드려야 하는건데… 다망한 부령사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게 해서 미안하오. 뭐, 에두를것 없이 직방 얘기를 해두기요. 난 인생말년이라 부러운것도, 필요되는것도, 신세질것도, 또 누구를 도울 생각도, 그럴 힘도 없는 사람이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고 마지막까지도 그렇게 살 결심이요. 그러니 성의는 감사하나 나한테 그 무슨 기대를 가지지 않는편이 현명할거요. 실례했소.》

《하아, 사장님께서 뭔가 단단히 오해를 가지고계시는 모양이군요. 제 전번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실 사장님 같은 명망높은 동포들을 잘 돌봐드리는건 우리의 의무라고요. 더이상 불편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려행기간 건강에 류의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잘 다녀오십시오.》

《예, 감사하오. 잘 계시오.》

손전화기를 내려놓은 리성원에게 안해가 조용히 물었다.

《이번 길은 당신이 꼭 가야만 하는가요?》

리성원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당신이 그걸 벌써…》

《낮에 <한국> 부령사가 집으로 전화를 걸어와서 알게 되였지요. 그래서 적은이에게 전화를 거니 당신의 이번 출장길이 괜찮을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도 그 정도밖에는 모르겠다며 너무 걱정을 말랍디다.》

리성원은 머리를 끄덕였다. 부령사의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마치 배암 한마리를 겨드랑이에 낀듯 온몸이 오싹해났던 그였다. 하지만 서해수의 말을 듣고 안해가 그리 놀라지 않는걸 보니 마음이 한결 풀리는것 같았다. 서해수가 고마왔다.

리성원은 어줍게 웃으며 안해에게 말했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줄 아오?》

《?!》

《뮨헨류학의 마지막시절을 생각했소. 하하하!》

깜짝 놀란듯 하던 하의영의 두눈이 이내 곱게 치떠졌다.

짙어가는 어둠속으로 불안감을 밀어내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울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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