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 3 장

 23

 

사람은 보고싶은것을 봐야 한다. 인식이 강요를 당하면 자기를 잃고 남의 머리로 사고하게 되는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리성원의 사유는 이렇게 형성되였다. 아마도 그것은 챠일드라는 회사의 주인자리에 앉은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이전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다는것을 느끼지 못했다.

오전에 진행한 조선광명기술연구소와의 1차면담은 지금까지 두 회사간에 아무런 교제나 사전파악이 없었던것을 고려하여 주로 자기 회사들의 연혁을 서로 통보하고 호상 관심사로 되는 협력문제와 관련한 의견을 교환하는것으로 끝났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리성원이 좀 휴식을 하고나자 처녀안내원 홍송미가 찾아왔다.

《선생님, 오늘 오후엔 시간이 좀 있을것 같은데 혹시 가보고싶은 곳이 없으십니까?》

리성원은 약간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막상 대답을 하자니 딱히 떠오르는것이 없었다.

《난 평양을 잘 모르는데 화보에서 보니 력사유적이 적지 않은가보던데… 가령 련광정이라는델 가보면 어떨는지…》

리성원이 주섬주섬 외워대는데 홍송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럼 련광정과 대동문을 거쳐 모란봉을 돌아보시는게 좋을것 같군요.》

리성원은 제꺽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방치기치고는 잘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러면 옛적부터 전해져온다는 곰팽이가 낀 해묵은 쪽기와장이나 량반들이 풍월을 읊조리던 루각에서까지 빨간 물이 우러나올가. 그러고보면 무슨 세뇌공작을 앵무새처럼 외우는 그 부령사도 신경과민증에 걸린것이 틀림없어.

련광정은 한적한 유적이라기보다 대중적인 유희터에 가깝다고 해야 할것 같았다.

H시에서는 늘 쓸쓸함을 자아내는 울긋불긋한 락엽들이건만 어째서인지 여기에서는 풍만하고 아름다운 가을날의 정서를 한껏 돋구어주고있었다.

도로 맞은편에 학교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주변에 있는 의자들에 앉아 공부를 하거나 뛰여다니며 오락을 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가끔 늙은이들이 산책을 하거나 장기를 두는 모습은 그런대로 볼멋이 있었다.

돌층계를 딛으며 루정으로 오르느라니 과시 유적다운 정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락에 올라서니 한끝이 대동강기슭보다 몇발이나 더 앞으로 나간 절벽우라 푸른 물결우에 온몸이 떠있는것 같은 흥치를 돋구어주었다.

홍송미가 간단히 해설을 해주었다.

《이 련광정이 서있는 자리는 고구려시기 평양성 내성의 동쪽장대터랍니다.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진 후 여러차례 고쳐지었다고 하는데 고려시기 평양성을 서경으로 삼으면서 1111년에 이 자리에 루정을 세우고 <산수정>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후 조선봉건왕조시기인 1670년에 보수개건하고 이름을 <련광정>이라고 고쳐불렀답니다. 이 련광정을 일명 <제일루대>, <만화루> 등으로 부르기도 했답니다.》

《음-》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락우를 오가던 리성원은 세련된 모루단청이며 비단무늬를 화려하게 입힌 대들보들을 눈여겨 살펴보다가 머리우에 걸려있는 현판을 발견했다.

천하제일강산》이라!

그아래에는 한편의 한시를 새긴 액자가 붙어있었다.

리성원은 흥그러운 분위기에 사로잡혀 슬그머니 외워보았다.

《장성일면용용수 대야동두점점산》

그의 속마음을 읽은듯 홍송미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손세로 가리키며 이야기를 펼쳤다.

련광정은 경치가 좋아 옛날부터 관서팔경의 하나로 알려졌다. 이 한시는 고려시기의 시인 김황원이 대동강기슭의 부벽루에 올라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지은것인데 《긴 성벽기슭으로는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넓은 벌 동쪽에는 점점이 산이 있네》라는 뜻을 가진 미완성작품이다. 유명하다는 그의 시재주로서도 아름다운 대동강의 풍치를 더이상 그려낼수가 없어 붓을 꺾고말았다고 한다.

바로 이 련광정에서 임진조국전쟁때 김응서와 계월향이 기묘한 계책으로 적장을 유인하여 목을 베였다고 전해오고있다.

리성원은 저도 모르게 《아, 계월향. 바로 그 의기에 대한 이야기로군.》하고 머리를 끄덕이였다.

《어렸을 때 모친께서 깊은 밤이면 등잔불밑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라오. 그 주인공들의 슬기와 무훈이 깃든 이곳에 내가 와보는구만.》

류다른 감회에 젖어든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루정의 널마루바닥을 조심스레 거닐었다. 루정의 기둥에 의지하여 두른 나무란간에 천천히 다가간 그는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이 련광정에 올라 천만뜻밖에도 어머니를 생각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던것이다.

그의 곁에 슬며시 다가온 홍송미가 발그무레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제가 본의아니게 선생님의 마음을 슬프게 한것은 아닌가요?》

리성원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이 처녀안내원은 자기의 마음속 금선까지도 얼마나 세밀하게 관찰하고있는가.

하지만 그는 오히려 처녀가 고마왔다. 그의 덕에 오래간만에 어머니에 대한 추억의 문을 열어본것이였다.

《아니, 도리여 아가씨가 고맙소. 나에게 순간이나마 모친에 대한 옛추억을 불러주었으니까. 세상에 어머니에 대한 추억보다 아름다운것이 또 어디에 있겠소.》

《그렇다면 저로서도 다행이군요.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에게 이 대동강을 주제로 창작된 옛시 한수를 읊어드릴가요?》

리성원은 머리를 가볍게 숙여 동의를 표했다.

잠시후에 홍송미의 잔잔한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비멎은 뒤 긴 방축엔 풀색이 한결 더 짙은데

    남포서 그대 떠나보내며 구슬픈 노래를 내 부른다

    대동강 흘러가는 저 물결아 어느때에 가서 마를소냐

    떠나고 보내는 리별의 눈물 해마다 흘러가는 물결을 더하거늘

 

담담한것 같으면서도 가슴을 쩡 울리는 시였다.

《<어느때에 가서 마를소냐 떠나고 보내는 리별의 눈물>이라… 시가 매우 뜻이 깊은것 같구만. 미안하지만 시를 지은이가 누구인지 가르쳐줄수 있겠소?》

리성원은 시상에서 벗어나기가 아쉬운듯 조용히 물었다.

《고려시인이였던 12세기 사람인 정지상이랍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오랜 력사와 문화, 아름다운 경치로 이름높은 평양을 노래한 우수한 시들을 많이 남겼는데 이 시외에도 <서도>, <벗을 보내며>와 같은 작품들은 민족적색채가 짙고 정서가 풍만하여 후세사람들이 두고두고 읊군 한답니다.》

《정지상이라면… 혹시 <묘청의 란>이 일어났을 때 김부식의 질투로 역적의 루명을 쓰고 처형당한 사람으로 알고있는데…》

《아이, 선생님은 력사에 아주 박식하시군요. 혹시 제가 공자님앞에서 감히 풍월을 외우는 격이 되지 않았는가요?》

송미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바빠맞은 리성원은 급히 한손을 내저었다.

《아니, 실례했소. 실은 밴쿠버에 정가성을 가진 한 교포친구가 있는데 술만 한잔 들어가면 자기는 정지상의 몇십대손이라던지 된다고 으시대면서 김부식을 죽어라고 욕을 한다오. 그걸 하도 듣다보니 정지상의 불운이요, <묘청의 란>이요 하는 옛말들이 아편처럼 내 머리에 인박힌거지. 허허허.》

《그러세요? 전 그런줄을 모르고… 호호호.》

두사람은 즐겁게 웃었다.

《사실 나는 서방세계의 력사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아는것이 좀 있지만 우리 민족의 력사는 이런 옛이야기정도로나 알고있는 사람이요. 그러다보니 이런게 현실생활에 무슨 필요가 있을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소.》

리성원은 솔직한 심정으로 말했다.

《물론 자기 민족의 력사를 다 안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 력사를 통해 우리 후대들은 선조들의 숭고한 애국심과 찬란한 문화, 뛰여난 슬기와 창조적재능, 계승해야 할 경륜과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을 터득하는게 아닐가요. 실례를 든다면 <묘청의 란>도 얼핏 보면 피로 얼룩진 봉건지배층의 권력다툼 같지만 사대와 억압을 일삼는 부패타락한 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굳센 항전의지를 시위한 긍정적측면도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자그마한 력사이야기라고 해도 이런 립장과 관점에서 보면 그속에서 금강석에도 비길수 없는 고귀한 진리를 찾을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홍송미의 이 말은 리성원에게 새로운 의미를 새겨주는듯싶었다.

리성원은 안내원이 비록 나이는 어리고 순진무구해보이는 처녀이지만 제딴의 확고한 지론을 가지고있는것이 놀라왔다.

그들은 대동문을 돌아보고나서 산책삼아 걸어서 모란봉에 올랐다.

을밀대에 오른 리성원은 점입가경이라는 말의 뜻을 이제야 터득하는가 느껴졌다. 봄이 오면 대동강물결우에 실실이 휘늘어진 능수버들이 마치도 구슬같은 맑은 물우에 비단필을 늘여놓은듯 하여 그렇게 이름지어 부른다는 릉라도며 왜정시기에는 큰 비행장이 있었다는 옛 문수벌자리에 꽉 들어찬 우아하고 독특한 멋을 풍기는 웅장화려한 유희복지시설들과 고층주택지구들을 보느라니 옛 동화에 나오는 무릉도원이 예 아닌가 느껴질 정도였다. 제아무리 명성이 자자한 화가라도 저런 명풍경은 그려낼것 같지 못했다.

눈뿌리가 시도록 하염없이 바라보며 서있느라니 그는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도 알수 없었다. 송미가 시간이 너무 갔다고 몇번이나 재우쳐서야 아쉬움을 금치 못해하며 을밀대를 내려서는데 갑자기 장단을 치는 북소리와 꽹과리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이 동한 그는 아까부터 콩알같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안절부절하는 홍송미에게 량해를 구하지 않을수 없었다.

《잠간 들려보고싶구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금시 피여오르는 모란꽃을 방불케 한다는 말이 그대로 실감되여왔다.

신묘함을 자랑하는 기암괴석들과 황금빛을 발산하는듯 한 해묵은 로송들과 갖가지 수목들이 오묘한 조화를 이룬 이 풍치앞에는 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것 같았다.

신들린것처럼 정신없이 소로길을 따라 얼마간 내려가니 사방이 휑 뚫린 정각이 하나 나졌다. 풍악은 거기에서 울리고있는데 사람들이 그에 맞춰 흥취가 나게 춤을 추고있었다.

《오늘이 무슨 명절이라도 되는가?》

눈이 둥그래진 리성원은 미소를 머금고 구경하는 홍송미에게 조용히 물었다.

《명절이라니요? 여긴 <애련정>이라고 부르는데 매일처럼 이런 춤판이 벌어진답니다. 선생님도 보시는것처럼 대체로는 직장생활을 마친 년로한분들인데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출 때도 많지요.》

리성원은 이채로운 풍경에 놀라 춤판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멋들어진 북장단에 장고가락도 흥겨운데 남녀로소가 뒤섞여 돌아가는 춤군들의 동작은 조상대대로 전해져오는 춤가락이여서 절로 흥이 나고 어깨가 들썩거리게 했다.

품을 들여 배운 숙련된 춤동작을 펼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구잡이로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장돌뱅이처럼 돌아가는 축들도 뒤섞여있었다. 그래도 나무랄데 없이 서로 잘 어울리고 천성적이라고 할만큼 안삼블을 이루며 융합되는것이 신기할뿐이였다.

별안간 리성원의 눈동자가 커졌다. 춤판 한가운데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두명의 젊은 서양녀자들이 보였던것이다. 아마도 외국관광객들인 모양인데 자기처럼 산책을 나왔다가 참지 못하고 뛰여든 모양이였다. 그들은 제각기 조선남자들과 짝을 맞추었어도 상대의 춤동작에는 아직 익숙되지 못한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노래가락은 흥타령조로 울리는데 춤동작은 제멋대로 팔다리가 놀아대는 서양춤이라 보는 사람마다 우스워 배를 그러안고 돌아가는 판이였다. 하지만 부쩍 성수가 오른 녀자들은 탄성까지 지르며 저들을 열심히 록화촬영하고있는 동료인듯 한 서양남자들에게 손짓까지 했다.

흥에 겨워 저도 모르게 춤판가까이에 다가들었던 리성원은 하마트면 졸경을 치를번 했다. 나이지숙한 한 녀인이 대뜸 그의 손을 잡고는 다짜고짜로 춤판으로 끌어들인것이였다.

《신참》을 맞이한 춤군들은 더욱 사기가 충천해졌다. 그들에게 붙잡혀 한참이나 시달리던 리성원은 송미까지 뛰여들어 사정을 해서야 겨우 빠져나올수 있었다.

혼쭐이 나기는 했어도 리성원은 마냥 아쉽기만 했다. 이렇게 마음을 쭉 풀어놓고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려본적이 까마득해보이는 그였다. 그는 바쁜 시간을 턱대고 자기를 구원해준 《은인》이 은근히 원망스러워졌다. 하지만 체면을 잃지 말아야 했다.

《아가씨가 아니였더라면 온종일 붙잡혀있을번 했구만. … 가만, 이 주젤 좀 보오.》

리성원은 허리를 숙이고 자기의 구두를 가리켰다. 춤을 추다가 그랬는지, 아니면 춤판을 빠져나오다가 그랬는지 신코에 신발바닥무늬가 살짝 찍혀있는것이였다.

송미가 걱정하며 메고있던 자그마한 가방안에서 새하얀 부드러운 종이를 꺼내주자 리성원이 두손을 내흔들었다.

《아니, 이게 더 좋구만. 이것이야말로 추억에 남을… 난생처음 모란봉을 구경한 뜻깊은 기념이지. 안 그렇소?》

두사람은 다시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후 그들은 모란봉을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생각되는게 많구만.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수수천년 고이 간직해온다는것이 말처럼 쉽진 않았을텐데…》

리성원은 감동어린 눈길을 계속 뒤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웬걸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여기 모란봉은 미제의 야만적인 폭격에 무참히 파괴되였었답니다. 아까 보신 련광정과 대동문도 다를바가 없었구요. 전후에 나라에서는 힘겨운 복구건설과 령락된 인민생활을 추켜세우는데 투자가 귀중했지만 막대한 자금을 돌려 민족문화유산을 되살리고 보존하도록 했답니다. 이 모란봉도 그래서 자기의 옛 모습을 되찾게 되였구요.》

리성원은 종시 걸음을 멈추고말았다. 새들이 각이한 목청을 뽑으며 우짖는 소리들이 쉬임없이 들려왔다. 저음으로부터 최고음에 이르는 음계들을 조화롭게 뒤섞으며 매혹적인 선률을 뽑아내고있었다.

이런걸 보고 대자연의 음악세계라고 하는것일가.

리성원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가까스로 옮기지 않을수 없었다. 송미의 말대로 시간이 퍼그나 흐른것이다.

그들이 《평화정》이라는 현판이 붙은 정각옆을 지나 경사가 심한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데 앞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것이 보이였다.

무슨 일인가 하여 다가가보니 열살쯤 나보이는 한 소년이 보기에 깜찍한 얼굴을 아깝게도 찡그리고 누워있었다.

사연을 물으니 평화정이 멋지게 보이는 곳에 올라가 그림을 그리려고 자그마한 바위우에 오르려다 자칫 실수로 떨어졌다는것이였다. 소년의 할머니가 어쩔바를 모르고 허둥대고있었다.

한 청년이 닁큼 소년을 둘쳐업었다. 업고서라도 가까운 병원으로 가려는것 같았다.

《가만, 그렇게 해서는 늦을수 있어요.》하는 챙챙한 녀자의 목소리가 총알같이 울렸다.

리성원은 깜짝 놀랐다. 그 목소리의 임자는 다름아닌 홍송미였던것이다.

처녀는 침착하게 손전화로 운전사를 호출하는것 같더니 이내 리성원에게로 돌아섰다.

《선생님, 실례이지만 잠간 기다려주실수 없겠습니까?》

그의 말뜻을 제꺽 알아차린 리성원은 즉시 머리를 끄덕였다.

《빨리 가보오. … 아니아니, 여기서 기다릴것 없이 나도 같이 가면 좋겠소.》

《선생님, 정말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홍송미는 어느새 다시 온순해진 목소리로 되돌아가있었다.

원 처녀두, 여기에 무엇이 미안하고 무엇이 고맙다는건가.

그들은 다친 총각애와 그의 할머니를 차에 태웠다.

《옥류아동병원으로요!》

홍송미의 말에 운전사가 경적을 길게 울리더니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사전에 무슨 약속된 신호가 있는지 지나가던 차들은 속도를 늦추는데 승용차는 넓은 차도의 중앙선을 타고 바람처럼 내달렸다. …

리성원은 점심식사를 마치자 대동강유보도로 나섰다. 평소보다 많이 걸은데다가 모란봉의 경사지를 오르다보니 다리도 뻣뻣해오고 피곤한것은 사실이였다. 하지만 오늘 오전 한나절동안에 받은 깊은 인상이 그를 호실의 푹신한 침대가 아니라 이 유보도기슭으로 불러낸것이였다.

더군다나 아동병원에 가서 그가 겪은 현실은 지금도 머리속에 화면처럼 흐르고있었다.

…구급소생실이라는 명패가 붙은 방으로 들어가자 곧 여러명의 의사들이 소년에게 달라붙었다. 이내 렌트겐촬영이 조직되더니 협의회가 열리고 진단이 내려졌다. 오른쪽다리골절에 뇌타박을 받았으므로 한달정도의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즉시 입원수속을 하기 위해 담당의사와 홍송미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성원은 부득불 소년의 할머니와 함께 복도 의자에 앉아 구경하고있을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안절부절하던 로파가 갑자기 지나가는 중년의 녀의사를 붙잡고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이구, 과장선생님. 이걸 어쩌면 좋소. 한달후엔 저애가 전국아동소묘축전에 참가해야 하겠기에 지금 한창 실기교육중인데 저리 되였으니…》

리성원은 아연해지고말았다. 방금전까지 손자의 위급한 상태를 걱정하던 로파가 배부른 흥정을 하는것이 어이가 없어서였다.

《할머니두 참, 공연한 걱정을 하세요. 손자애의 뇌타박증세가 완화되면 우리 병원에 있는 미술선생한테서 배워서 얼마든지 참가할수 있을거예요.》

과장이라는 녀의사의 대답은 의외로 더 충격적이였다.

병원에서도 공부를 가르쳐준다?! 그렇다면 치료비에 학비까지 포함해서 그 액수가 약차할것이 분명한데…

리성원은 로파를 동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차림새를 보아서는 그리 부유한 집안 같지 않아서였다.

《그걸 내가 왜 모르겠수. 하지만 병원의 모든 애들을 그렇게 하나하나… 정말 꿈같은 세상이지. 꿈같은…》

로파가 말을 맺지 못하는데 구급실문이 열리며 밀차가 나왔다. 응급치료를 받은 소년을 입원실로 데려가는것이였다.

로파가 밀차우에 누워있는 소년에게 다가가 말했다.

《공부때문에 걱정을 말아. 여기서도 얼마든지 그림공부를 할수 있다는구나. 세월이 하도 좋으니… 세상은 좋은 세상이다.》

그의 주름진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송미가 곁에 와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호텔로 돌아가자고 했다.

리성원은 감동깊은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 혈붙이도 아닌 판판 남인데 마치 친동생처럼 안타까와하며 뛰여다니던 처녀의 모습은 나이팅게일을 무색할 지경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천사같은 나이팅게일이라도 그에게 기부금이 없었더라면 간호학교를 내올수 없었을것이고 적십자운동에 더 큰 기여를 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홍송미의 노력도 돈이 없이는 헛된것으로 될것은 뻔했다.

《그래, 그 소년의 치료비와 병원에서의 학비를 다 합하면 얼마나 될가? 그 액수가 분명 방대할텐데… 그의 가족수입은 또 어떠한지?》

호텔로 돌아오는 승용차안에서 리성원은 진심어린 동정을 담아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글쎄요. 그걸 계산해보는 사람이 있을가요. 그리고 계산해본댔자 정확한 액수를 알수 있을가요.》

홍송미는 심상하게 말했다.

《?!》

《우리는 퍼그나 오래전부터 치료비나 학비라는 말자체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랍니다.》

《그런 말을 들은적은 있다만 그게 나로서도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중의 하나요. 어쨌든 그 소년은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것 같소. 요행 안내양을 만났으니 말이요. 아마 그애 부모들은 수입이 좀 있는가 본데. 미술공부를 시키는걸 보면…》

리성원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홍송미의 수고를 위로해주었다.

그런데 그 말에 처녀는 입가를 가리우며 웃었다.

칭찬을 이렇게 좋아하는줄 알았더라면 좀더 화끈하게 해줄걸 하고 리성원은 생각하였다.

《누구나 보았다면 그랬을거예요. 저애 부모들은 평양화력발전련합기업소에서 일하는 평범한 로동자들이랍니다. 저도 입원수속을 하면서 알게 되였어요.》

리성원은 귀가 번쩍 틔는것 같았다.

《그러니 로동자의 자식이 미술공부도… 그리구 축전에도 참가한단 말이요?! 그런 애를 위해 지금껏 안내양이…》

《아이참, 우리가 오늘 소년을 위해 뛰여다닌것처럼 그애의 부모들도 지금 나라와 인민을 위해 분투하고있을게 아닙니까.》

리성원은 놀랐다.

남을 위해 자기를 바치고도 무슨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 게다가 그것을 응당한것으로 생각하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들을 대체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돈맛을 아직 모르는 순진하다는 말은 모욕으로 될수도 있었고 극락세계에 가서나 찾아볼수 있는 아미타불이나 리상적인 세계의 사람들이라는 평가도 잘 어울리지 않아보인다.

그러함에도 자기가 사는 세상,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하여 한없는 긍지와 행복을 느끼는것이 정말 희한하고 신기해보였다.

내가 떠나온 저 멀리 떨어져있는 땅에서 살고있는 사람들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틀림없이 이들에게는 세상이 모르는 자기나름의 수지타산공식이 있는것이 분명하다. 그건 대체 어떤것일가.

리성원은 그 대답을 찾을 때까지 발목이 시도록 걷고 또 걷고싶었다.

대동강의 신선한 물비린내가 페부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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