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회)

 제 3 장

 26

 

항구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아메리카의 빠리》로 통하는 관광지로서 이름이 나있다. 대서양을 항행하는 대형무역선들이 수십척이나 매일 상하선작업을 마치군 하는 이곳에서는 밤이 오면 국적이 없는 선원들의 노래가 울려나오는 속에 창파우에서 시달린 인생들의 춤이 펼쳐지는것이다. 정중한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폭발적인 리듬의 변화로 독특한 개성을 과시하는 탕고춤이 이 항구도시에서 태여났다는 사실은 혜림에게 무척 흥미있는것이였다.

리악셀로강기슭의 한 공원에서 《롱》악단은 기본공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준비공연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교예사를 릉가하는 와힘은 재치있는 공중전회와 높이뛰기, 옆으로 돌기를 진행하여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마리노는 흥취나는 인디안의 노래를 부르고 열정적으로 기타를 타며 관객들을 불렀다.

혜림은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풀밭에 앉아 자기 생각에 잠겨있었다.

머지않아 그들은 대서양을 건너 아시아대륙에 이를것이다. 일본이란 어떤 나라일가. 그곳에서 작은 해협을 건너가면 고국인 조선이 있다.

그는 마음속으로 할아버지에게 속삭였다.

(우린 일본이라는 나라에도 가볼 예정이예요. 결국 이 손녀는 제발로 고국이라고 불러야 할 조선이 지척인 그곳에 이르는겁니다. 하지만 전 그곳에는 가지 않겠어요. 할아버지를 버리지 않았나요. 우린 고국으로부터 추방된 불행한 가정이고 그 후예들이 옳지요?…)

열댓걸음 떨어진 저쪽에서 와힘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공연은 괜찮을것 같구만. 모여드는 관객들이 벌써부터 기뻐하는것이 알리는데.》

《수입도 괜찮을거야. 혜림, 오늘공연이 끝나면 여기 애들과 한번 축구경기를 해보지 않겠소? 여기 날씨는 따스한게 정말 좋구만.》

곁에 다가온 로베르또의 말에 혜림은 그가 가리키는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어린 소년들이 공을 차고있었다.

혜림은 그들을 바라보며 동의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무엇인가 허공중으로 날아온것이 그의 머리에 맞고 퉁 튕겨났다. 뜻밖의 타격에 혜림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난데없는 축구공이 바닥에서 딩굴고있었다. 저쯤에서 열댓살쯤 나보이는 백인소년이 흐물거리며 다가오는것이 보였다.

축구공을 주어든 혜림은 그 소년에게로 던져주며 에스빠냐어로 다정히 귀띔해주었다.

《여기선 이제 공연을 해야 해. 저쯤에 가서 공을 차렴.》

《노우!》하는 영어발음의 목소리가 기교있게 공을 받아드는 소년의 입에서 튀여나왔다.

《너, 외국인이구나?!》

소년의 얼굴에는 이상야릇한 비웃음이 한껏 어려있었다.

《그래, 우린 미국에서 왔어. 미국의 힘을 아직 모르는 이 아르헨띠나의 무지렁이들을 아예 묵사발을 만들어놓으려구 돈을 걸구 원정경기를 왔거던. 이젠 알만 해?》

소년은 여전히 느물거리는 투로 말했다.

혜림은 기분이 몹시 흐려졌으나 철부지애녀석과 마주서기가 지긋지긋해 그만 돌아서고말았다.

《가만, 내 말은 채 안 끝났어!》하는 거센 목소리가 들리며 녀석이 혜림의 어깨를 드세게 잡아 돌려세웠다.

저쯤에서 소년의 동료들이 다가오는것이 심상치 않았다.

《흥, 그래두 어른들이랍시구… 자, 동양의 미인아가씨! 오늘은 우리와 즐기지 않겠어? 비록 나이는 어려 좀 비린맛이 날수 있겠지만 우리 미국축구천사들의 억세고 황홀한 맛은 아가씨네 날라리패의 오빠들과는 대비도 안될거야. 키익-》

곁에 다달은 졸망스런 애녀석들이 흐흐거렸다.

《재수없이 놀지 말아! 너희 양키족속들은 정말 갈데가 없는 망나니종자들이구나!》

혜림은 혐오의 빛이 어린 눈길로 노려보며 내뱉었다. 그의 행동에 놀란듯 한걸음 물러섰던 녀석이 다시 히히덕거리며 혜림의 머리채를 감아쥐려 했다.

한달음에 달려온 로베르또가 녀석의 팔을 비틀어잡고 질타했다.

《너희 미국녀석들은 쌍안경을 항상 거꾸로 돌려보기 좋아하더라. 그렇게 보면 지구도 개미만 하게 보여. 바로 쥐고 봐야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게 돼. 그래도 모르겠다면 내가 돌려줄가?》

아까부터 축구공을 가지고 혜림이를 시까스르는 녀석을 수상쩍게 지켜보던 로베르또였다.

로베르또의 억센 손탁에 동료가 옴짝달싹 못하는것을 본 여라문명이나 되는 패거리들이 거의 동시에 《야앗!》하며 있는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공연관람을 하려고 모여들던 사람들이 와와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누구 하나 도와주려고 나설념을 못했다.

로베르또는 침착하게 기회를 엿보다가 《오호!》하는 상쾌한 소리를 지르며 녀석의 팔을 힘껏 잡아당겨 순식간에 제앞에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그 순간에 패거리들의 주먹과 발타격이 일제히 녀석에게 가해졌다. 눈깜짝할 사이에 녀석은 얼굴이며 운동복이 피칠갑이 된채로 물채운 고무주머니마냥 너부러졌다.

어느새 달려온 와힘이 팔굽을 걷어올리며 한발 나섰다.

《지구의 절반길을 편답하면서 못 겪어본 일이 없다! 너희 미국놈 땅엔 안 가도 되겠구나. 여기서 다 밟아보고말지!》

외형과는 달리 사막의 모래언덕처럼 움씰 솟아나는 그의 억센 팔근육을 본 녀석들이 꼭 두억시니나 본듯 넋을 잃고 뒤걸음질했다. 그러더니 어느 한 자식이 《뛰자!》 하고 소리를 치자 너부러진 동료를 돌볼새도 없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나버렸다.

《이 비겁한 놈들아! 이 뻘건 누데기넝마는 안 가지고 가?! 허 참, 미국이라는게 바로 저런 겁많은 허풍쟁이인줄은 몰랐구나.》

와힘이 코방귀를 뀌고 돌아섰다.

구경군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들을 지켜보고있었다.

《일이 시끄럽게 됐어요. 아무래도 우리가 구급차를 불러야 할것 같군요.》

혜림이가 《넝마》를 내려다보며 한 말이였다.

《그래야지. 에에, 저 미국놈의 새끼들은 어데 가나 부담스럽고 시끄러운 존재거던.》하며 와힘이 마리노에게 눈짓을 했다.

두 청년이 《넝마》의 팔과 다리를 맞잡고 허리를 펴려던 때였다.

도망쳤던 녀석들이 경찰 두명을 꽁무니에 달고 사람들을 헤치며 다가오고있었다.

《허, 정말 더러운 녀석들이군.》

와힘이 《넝마》를 내려놓고는 손등으로 코밑을 비벼댔다.

《거만하면서도 약삭바른 DNA를 고스란히 받은 개자식들일세.》

마리노도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수굿한채 경찰들을 치떠보며 말했다.

경찰들을 휘동해가지고 온 녀석이 혜림을 가리키며 이 녀자가 자기들을 유혹했다고 망발을 늘어놓았다.

와힘이 분을 삭일수 없어 아니라고 볼멘 소리를 내질렀다.

경찰들은 혜림과 그의 동료들의 신분만을 확인하고나서 현장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채 덮어놓고 경찰서로 동행할것을 요구했다.

《롱》악단 성원들과 미국측 축구선수단의 감독 및 선수녀석 몇명 그리고 여러명의 현지목격자들이 그리 멀지 않은 경찰서로 가지 않을수 없었다.

경찰서 조사실에서 쌍방간에 열띤 론전이 벌어졌다. 목격자들까지도 피대를 돋구어가며 미국소년들의 불량행위를 고발했지만 경찰서측은 짜증을 부리며 질서문란과 미성년구타죄에 걸어 《롱》측에서 해당한 벌금과 미국 부상아의 치료비를 전액 지불할것을 요구했다.

혜림은 혀를 깨물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법률의 공정성은 둘째치고라도 인간의 량심과 도덕이란 허울만으로 남게 될것이였다.

《아니요, 우린 전면 부정해요!》

이를 사려문 혜림은 수표를 요구하는 사건조서용지를 걷어쥐고 서장의 방으로 찾아갔다. 동료들과 현장립회인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 방에서 혜림은 조서용지를 보란듯이 갈가리 찢어버리고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까밝혔다. 만일 경찰서측이 자기들의 부당한 요구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깽소년들에게까지 비굴하게 놀아대는 그들의 태도를 만천하에 폭로하겠다고 단언했다.

이때 경찰서밖에서는 예견하지 못한 소요가 벌어지고있었다.

《롱》악단의 공연을 관람하러 모여들었던 수십명의 시민들이 몰려와 혜림이네를 지지하는 련대시위에로 넘어간것이였다. 그들은 공연을 파탄시키고 녀성을 희롱한 미국선수단측이 사과와 함께 응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감하기 그지없는 신문기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급해맞은 경찰서에서는 량측에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는 훈시를 외우고 쫓다싶이 돌려보내는것으로 사건을 종결짓고말았다.

혜림은 분격에 치가 떨렸다.

정녕 인류의 정의와 량심이 이렇게도 짓밟혀야 한단 말인가. 이 세상의 법과 질서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인간의 도덕과 륜리는 어디로 피난갔단 말인가.

호텔에 돌아온 그와 동료들은 오래동안 분기를 삭이지 못했다.

《아까 미국 애녀석들이 노는 꼴을 봤지? 거기에 무슨 건전한 체육정신이 있겠나. 머리꼭뒤에 부은 물이 발꿈치까지 흐른다더니 백악관의 당국자들로부터 체육을 한다는 애녀석들까지 어쩌면 그처럼 양키식교만성을 철저히 체질화하고있는지… 정말 개탄할 지경이야.》

여간해서는 흥분할줄 모르는 로베르또까지도 분을 참지 못해했다.

하싼이 그 무엇을 발견하기라도 한듯 탄성을 질렀다.

《난 오늘에야 자폭공격테로라는게 왜 자꾸 일어나는지 그 원인을 찾아냈어. 바로 저거야. 아무리 정의와 량심을 호소해도 꿈쩍을 안하니 별수가 있나. 테로에는 테로로 맞서는거지. 경찰서에서 실랑이질을 벌릴 때 난 이렇게 생각해봤지. 오늘 저녁쯤에 누가 자폭용폭탄조끼를 빌려주면 그걸 허리에 걸치고 미국축구망나니들인지, 소년깽들인지 하는 녀석들이 들어있는 숙소에 뛰여들면 어떨가 하고 말이야. 그러면 미국을 징벌한 나는 세계적인 인물이 될지도 몰라.》

《두말하면 잔소리. 정 없으면 가짜폭탄조끼라도 걸치고 실행해보지. 틀림없이 저녀석들은 황겁한 나머지 모두 정신병자가 될걸세. 하하하!》

와힘이 사발눈을 뜨고 맞장구를 쳤다.

랑만가들의 분노심은 삽시에 웃음을 배태한 유모아로 번져갔다.

《방금 우리가 호텔에 들어올 때 접대원이 어제까지로 기한이 돼있다면서 숙식비청산을 해달라더군.》

로베르또가 동료들의 화기를 깨치는것이 미안한듯 조용하면서도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혜림의 얼굴에서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오늘공연은 비록 파탄되였어도 예약했던 공원리용료는 물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수중에 한두끼정도의 식사비밖에 남지 않는다.

혜림은 막 목놓아울고싶었다.

《혜림, 너무 상심마오. 여기서 한 30분정도 가면 내 친구네 집이 있소. 거기서 하루이틀 숙식하면서 이후의 행동방향을 론의해보는게 어떻겠소? 그 친구를 만나본지도 한 삼사년은 되여오는데 운명의 신이 우릴 저버리지 않았다면 용빼는 수는 생길거요.》

마리노가 무너져내릴듯 한 혜림의 어깨를 잡아흔들며 한 말이였다.

동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용빼는 수의 정도가 아니라 천만다행이라는 안도의 눈빛들이 얼기설기 뒤얽히는듯 했다.

벌써 어둑침침해지는 저녁거리로 나선 혜림과 그의 동료들은 희망을 안고 부지런히 걸었다.

어디가 어딘지 알수 없는 미궁과도 같이 끝간데 없이 뻗어있는 골목길을 따라가느라니 이 나라의 특산식물이라고 하는 남방삼나무들이 드문드문 서있는 후미진 구석이 나졌다.

외진 곳인데도 비좁은 나무문짝들이 여기저기에 붙어있는것을 보면 여러 세대들이 살고있는것 같았다. 량켠으로 갈라지는 문짝들을 여러개나 지난 마리노가 제일 마지막문앞에 이르자 소리를 치며 두드렸다.

《떼론, 떼론! 있나? 날세, 마리노야!》

키낮은 단층집은 쥐죽은듯 고요했다.

응답이 없자 마리노는 불안스러운듯 어성을 높였다.

《떼론! 싸비아! 안에 있으면 문을 좀 열어줘! 나 마리노라니까!》

싸비아란 떼론이라는 친구의 녀동생인것 같았다.

잠시후에 창문으로 불이 켜졌다.

마리노가 씨익 웃으며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이젠 어지간히 마음이 놓이는듯 한 기색이였다.

《누구세요?!》

녀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비아, 싸비아로구나! 나야, 마리노야!》

《아니, 마리노오빠가?!》

대문을 열어준 사람은 스무살쯤 나보이는 처녀였다. 필경 그가 싸비아인듯 했다.

마리노가 처녀의 볼에 키스를 하고 그의 어깨를 끼며 앞서 들어갔다. 키큰 마리노에게 매달린듯 한 싸비아는 어둠속에서도 그를 넋을 잃고 올려다보고있었다.

《떼론은… 오빤 어디 갔니? 어째서 혼자 있어?》

했으나 싸비아는 마리노의 허리를 감은채 묵묵부답이였다.

방에 들어서니 담배냄새와 연기가 꽉 차있었다. 남자의 체취가 헨둥하게 풍겼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싸비아는 대답은 없이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오빤 나미비아에 가있어요. 돈벌이하러 갔는데 3년째 아무 소식도 없어요.》

《어머닌 왜 안 보이니?》

《어머닌 지난해 돌아가셨어요. 콜레라가 돌았거든요. 그때…》

《그러니 혼자 있겠구나. 그거 참… 고독하겠구나. 그래서 담배를 배웠니?》

《예? 예에… 이따금…》

싸비아의 대답은 어정쩡했다.

《우선 뭐 요기할게 없니? 우린 아직 저녁식사전이다.》

마리노가 어줍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좀 난색을 짓던 싸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친구의 녀동생인데 이젠 스무살이 되였을거야. 그새 몰라보게 핀것 같군.》

마리노의 말이 끝나는것과 동시에 복도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혹시 우리때문에 저 처녀가 이밤에 뭘 사러 나가는게 아닌가?! 이러면 참 딱한걸.》

로베르또가 일어나서 창가로 다가가더니 창가림을 살짝 제끼고 밖을 내다보았다.

《엉?!》

불현듯 그가 못 볼것을 본 사람처럼 창가림을 급히 내렸다.

《왜 그래?!》

마리노가 물었으나 로베르또는 별일없다는듯 제자리에 와앉았다. 그의 거동이 심상치 않게 보였는지 마리노가 급히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마리노!》하고 로베르또가 소리쳤지만 이미 그는 창가림을 제낀 뒤였다.

밖을 내다보던 마리노의 숨결이 거세졌다. 흥분을 억제하는듯 그리 넓지 못한 방안을 씩씩거리며 오가는 그는 꼭 불맞은 황소같아 보였다.

《싸비아, 네가 어쩌면…》하고 중얼거리던 그가 끝내 방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모두 어리둥절해서 어쩔바를 몰라하는데 복도에서 마리노의 높은 어성이 들려왔다.

《이자 바깥으로 나간 그 사내는 누구냐?!》

처녀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자 이어 《찰싹!》하는 뺨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앞장에 선 로베르또를 따라 혜림이까지도 복도로 나가보았다.

마리노가 허리에 손을 얹고 버티고 서있었고 싸비아는 얼굴을 싸쥔채 무릎을 꿇고있었다.

《용서해줘요. 나에겐… 다른 길이 정말 없었어요.》

혜림이 다가가 싸비아의 어깨를 감싸 일으키며 로베르또에게 눈짓을 하였다.

로베르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료들을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싸비아, 진정해.》

혜림이 위로해주자 싸비아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오열을 터뜨렸다. 이윽해서 좀 진정이 되였는지 그가 눈물을 훔치며 떨리는 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사실 오빤 2년전에 마약중독으로 돌아갔어요. 아까는 마리노오빠가 걱정을 할가봐 거짓말을 했더랬어요. 난 오빠가 사망한 후 심장질환을 앓고있어 직업을 구할수도 없어요.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그래서 사내를 끌어들였다는거냐? 에익!…》

혜림은 싸비아의 어깨를 쓸어주며 풀풀거리는 마리노에게 엄한 눈짓을 했다.

《그러면 안된다는걸 나도 알아요. 하지만 어떻게 살아갈 방도가 있어야죠. 난 마리노오빠라도 돌아오면 의지하려고 했댔어요. 헌데 생사를 알수 없고 아무런 기별도 없지 않았나요. 난 더는 기다려낼 기운이 없었어요. 흐윽.》

눈물에 젖은 그의 목소리를 더는 들을수 없었는지 마리노가 바깥문을 차고 나가버렸다.

《저 마리노오빤 우리 오빠와 제일 친했어요. 사실 저 오빠에겐 좋은애인이 있었는데 어느 호색한에게 유혹을 당해 그에 미쳐 돌아가는 바람에 결별했어요. 그후 마리노오빠는 <이 세상의 녀자들을 증오하지만 너, 싸비아만은 안 그럴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는 떠나갔지요. 헌데 이렇게 불쑥 나타날줄은… 난 오늘 벌이감을 놓쳐버렸어요. 언니네를 탓하는건 아니예요. 살아보려고 별의별 궁리, 별의별 일을 다해봤어요. 식당의 세척공, 공동변소청소부, 병원 사체실, 심부름군… 에이, 더 말해 뭘 하겠어요. 이렇게 사는게 죽은것이나 뭐가 다른가요!》

혜림은 눈을 감았다.

눈앞에 보이는것이 화창하다고 마음도 일시 화창해질줄 알았던 자신과 동료들이였다. 하지만 역시 여기도 인간의 정이라는 따뜻한 샘은 리기와 압제의 폭염에 메마를대로 메말라있었고 빈터뿐이였다. 이제는 그 빈터를 찾아보려는것마저 공중루각에 지나지 않을지 몰랐다. 오직 존재하는건 《너》 아니면 《나》!

혜림은 부엌의 살림형편을 살펴보았다.

허울같은 찬장안은 횅댕그렁했고 가시대옆에 빈그릇 서너개에 고뿌와 포크, 나이프 두조, 삶은 감자 몇알과 한접시의 알소금뿐이였다.

길게 한숨을 뽑은 혜림은 천천히 동료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로베르또, 아무래도 우리가 가서 싸비아가 먹을걸 좀 사와야겠어요.》

혜림의 말을 듣자 로베르또가 제꺽 와힘을 데리고 나갔다.

고개를 푹 떨군 마리노가 말했다.

《혜림, 이걸 어쩌면 좋소? 동료들을 위한다던게…》

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리혜림은 말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마리노, 싸비아가 얼마나 불쌍한가요. 연약한 그가 살아나가자니 별수 없지 않아요. 이건 그의 잘못이 아니란 말이예요. 알겠어요, 마리노?》

무릎우에 팔을 고인채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있던 마리노가 혜림의 손을 잡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로베르또네가 돌아왔다. 그들이 가져온것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나자 혜림은 말했다.

《우리한텐 돈이 남은게 얼마 없어요. 하지만 우린 살수 있어요. 내 의견은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그걸 싸비아에게 주자는거예요. <롱>의 이름으로.》

싸비아는 얼굴을 들지 못한채 슬피 울었다.

동료들은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는것으로 혜림의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마리노가 울부짖듯 소리쳤다.

《싸비아, 굶어죽을지언정 몸은 팔지 말아!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라!… 죽음은 륜락보다 아름다운것이야, 떳떳한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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