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 3 장

 29

 

승용차는 거의 점심무렵이 되여 호텔에 도착했다. 일요일이라 더 다른 일정이 없었으나 리성원의 요구로 가까운 과학기술전당외부를 산책하고 점심시간을 맞춰오는 길이였다.

《사장선생님, 누가 찾아왔다기에 제 먼저 좀…》하고 차가 멎자마자 홍송미가 말하고는 차에서 내려 잰걸음으로 호텔 출입문을 향해 달려갔다.

리성원은 《허허, 어서.》하며 말하고는 잡지들을 걷어쥐고 천천히 차에서 내리려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다 그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호텔옆쪽 주차장 그늘진 곳에 서성거리고있는 한 녀인의 얼굴이 매우 낯이 익어서였다.

설마 그 녀인이?!

두눈을 의심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예감이 들어맞았다. 며칠전 강냉이전문식당에서 만났던 녀성연구사였던것이다.

리성원은 더 주저하지 않고 다급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이게 누굽니까? 식료연구사선생님을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요?!》

리성원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김춘조의 얼굴에 곧 반가와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아니, 식당에서 만났던 동포선생… 어이구, 정말 반갑습니다.》

《그런데 여길 어떻게 오셨습니까?》

《예에, 우리 손녀애를 만나려고 왔습니다.》

《손녀요? 손녀가 예서 일합니까?! 대체 이름이 뭔데요?》

리성원은 호기심이 동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접수에서 애가 도착하면 알려주겠다고 했으니 곧 올겁니다.》

녀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할머니!》하는 청고운 목소리가 들리며 홍송미가 달려온다. 들어가다 접수에서 전달받고 되돌아나온 모양이였다.

《그럼?!…》

리성원이 어리벙벙해있는 사이에 두사람은 손을 잡고 엉켜돌아갔다.

그럼 이 녀성이 우리 안내양의 할머니?! 세상에 우연이 있다쳐도 이런 기이한 인연도 있단 말인가!

《사장선생님, 우리 할머니랍니다.》

《허, 하하… 난 이미 연구사… 안내양의 할머니와 구면이요.》

이번엔 홍송미의 눈이 올롱해졌다.

리성원은 그날 저녁에 있은 일을 대충 들려주었다.

홍송미가 허리를 그러쥐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김춘조 역시 구체적인 내막을 알자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런데 할머닌 오늘 바쁘실텐데 어떻게 오셨어요?》

웃음을 거두며 홍송미가 물었다.

《네가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여 왔다. 네가 처음 안내를 맡았다는데 뭐 제대로 하나 걱정도 됐구… 그래서 생각다 못해 네가 좋아하는 약밥을 해가지고 너두 볼겸 이렇게 왔다.》

김춘조가 손녀의 볼을 쓸어주며 말했다.

《야! 우리 할머니가 제일이야.》

송미가 너무 기뻐 어린애처럼 어쩔줄 몰라하며 리성원에게 눈길을 주었다. 자기 할머니에 대한 자긍심이 큰 처녀라고 리성원은 생각했다.

그러다 피끗 안해와 손녀가 떠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눈웃음을 짓고 리성원은 입을 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였으니 오늘은 제 연구사선생과 식사를 한끼 나누려는데 반대가 없으시겠죠? 전번에 받은 훌륭한 료리강의에 대한 인사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만 그만두십시오.》

김춘조가 점잖게 사양을 했다.

《그러면 제가 인사불성이 되지 않겠습니까. … 송미양, 오늘 아침에 나와 한 약속이 있지 않소. 오늘은 휴식일이니 내가 바라는대로 일정을 조절하자고 말이요. 연구사선생, 여기 호텔의 료리수준이 괜찮답니다.》

리성원은 김춘조가 당장 자리를 뜰것 같아 저로서도 해보지 못한 노죽을 피워보았다.

《선생님도… 이 호텔의 수준있는 료리사들은 다 우리 할머니 제자들인데요 뭐.》

홍송미가 눈을 가볍게 할기며 튕겨주었다. 그러자 김춘조가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다.

《정 선생님의 마음이 그러시다면 날씨도 푸근한데 차라리 제가 준비해온 약밥이랑 음식들이 있으니 저 대동강기슭 잔디밭에 앉아 간단히 나누는게 좋지 않을가요?》

리성원은 좀 섭섭하기는 해도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돈지갑을 꺼내며 홍송미에게 무엇인가 부탁을 하려는데 김춘조가 밀막고는 손녀의 귀에 귀속말을 몇마디 했다.

송미가 생긋 웃으며 자리를 뜨자 김춘조는 리성원과 함께 주차장에서 백여메터쯤 떨어진 대동강쪽을 향했다.

김춘조가 음식들을 펼쳐놓기 시작했다. 붉은 밤색의 기름기가 찰찰 도는 먹음직스러운 약밥이며 오이김치와 쑥떡에 고추장도 있었다. 매 음식마다에 손녀를 끔찍이도 위하는 할머니의 정이 한껏 깃들어있었다.

리성원의 눈길은 음식들로부터 김춘조에게로 옮겨갔다.

하지만 녀인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채 진중한 자세로 수저며 수지물고뿌랑 꺼내여 알맞춤한 위치에 놓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 저 눈빛은 어쩌면 손녀를 위하던 의영의 눈빛과 신통히도 같을가!

손자를 위하는 이 세상 할머니들의 심정은 다 저럴가. 그러나 지금 안해는 손녀에게 저런 정을 안겨주지 못하고있다. 그건 어째서인가, 무엇때문인가?

얼마후 식탁곁에 다가온 홍송미가 사이다, 과일, 과줄 등 다과류와 함께 우유빛이 도는 유리병을 몇개 펼쳐놓았다.

김춘조가 밝게 웃으며 유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우리 송미에게서 들으니 선생님은 술을 즐겨하시지 않는다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최근에 출품한 강냉이로 만든 막걸리를 몇병 사오라고 했는데 한번 맛보시고 평가를 받았으면 합니다.》

리성원의 입이 절로 벌려졌다. 강냉이막걸리라는 말도 놀랍지만 자상하고 곡진한 이들의 성의에 감동되여서였다.

《그 다심함에 몸둘바를 모르겠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홍송미가 고뿌에 따라준 막걸리를 받아들고 단숨에 쭉 들이킨 리성원은 가슴이 탁 트이는것 같았다. 쩡하고 들큰한 낟알의 향기가 페속까지 꽉 들어차 무엇이라고 말할수 없는 쾌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막걸리는 난생처음 맛봅니다. 아마 세계알콜제품전시회에 나간다면 특등상은 문제없을겁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벌써 한잔에 취했는가. 자기의 혀가 이렇게 슬슬 굴러가는것을 일찌기 체험해본적이 없는 리성원이다.

《신심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젠 이 약밥이랑 맛을 보십시오. 만약 선생님이 집에 계셨더라면 부인님이 더 구미에 맞게 해드렸겠는데 그럴수 없는것이 아쉽군요. 다만 우리의 성의로 알고 많이 드십시오.》

김춘조가 이렇게 말하자 홍송미가 제꺽 약밥을 한술 떠서 리성원의 손에 쥐여주었다.

리성원은 가슴이 쩡- 하고 울리는것을 의식했다. 저도 모르게 눈굽이 젖어왔다. 그러나 내색할수 없어 잔말없이 그것을 받아 입에 넣었다.

순간 진하고 향긋한 꿀냄새가 입안을 진동하는듯 했다.

그러는 리성원의 얼굴을 뚫어질듯이 쳐다보던 홍송미가 바싹 다가들며 물었다.

《선생님, 약밥맛이 어떻습니까?》

얼마나 귀여운지 눈에 넣어도 아플것 같지 않는 모습이였다. 리성원은 가슴이 벅차올라 어물쩍거리며 엄지손가락을 쳐들었다.

《야, 역시 우리 할머니의 료리솜씨가 최고야! 할머니, 만일 사장선생님이 동의하시면 매일 약밥을 해다드리자요. 반대가 없죠?》

《아무렴, 누구의 령이라고 감히 거절하겠나이까.》

할머니와 손녀의 대화에 리성원도 웃지 않을수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 홍송미가 뒤거둠질을 할 때 김춘조가 리성원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아마 선생님께도 우리 송미 같은 손녀가 있는가보지요?》

《그걸 어떻게 아시는가요?!》

리성원은 이 녀인에게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재간도 있는가싶어지며 놀랐다.

《선생님의 눈빛이 그렇게 말해주더군요. … 손녀가 얼마나 보고싶겠습니까?》

김춘조가 사려깊은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있었다.

《예- 감사합니다. 하지만 우리 손녀애는 저 송미의 발꿈치에도 못 따라갈겁니다. 선생의 댁에선 정말 손녀를 잘 키웠습니다.》

《나라에서 다 키워주었답니다. 하지만 아직 철부지다보니 보답을 변변히 하지 못해 늘 안타까와한답니다. 그게 내게도 걱정이지요.》

《놀랍습니다. 나라에서 이처럼 매 가정의 자식들까지 다 맡아 저렇듯 훌륭하게 키워준다는것이 나로서는 실로 믿어지지 않습니다. 나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거든요.》

리성원은 자기가 어째서 이런 실토정을 늘어놓는지 알수 없었다. 마음을 터놓지 않고서는 못 견딜것 같았다. 무슨 최면술에라도 걸린것처럼.

《우리모두는 화목한 대가정이라고 저도 모르게 부르게 되는거죠.》

《화목한 대가정?!》

리성원은 숨이 꺽 막히는것 같았다.

《우리 대가정의 품속에 안긴 자식들은 누구나 달리될래야 될수가 없답니다. 이들에게 기울인 어머니조국의 정과 사랑을 어떻게 돈과 물건의 가치로 잴수 있겠습니까.》

김춘조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리성원의 마음속에서는 큰 진동을 일으키고있었다.

홍송미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리성원의 얼굴에 갈망과 애환의 빛이 언뜻언뜻 내비쳤다.

《선생님, 너무 념려마세요.》

《!…》

리성원은 이제 겨우 두번밖에 만나지 못한 이 녀인에게 마음이 무겁게 쏠리는 리유를 비로소 뒤늦게나마 깨닫는것 같았다.

리성원의 마음속에서는 앞에 앉아있는 김춘조와 그의 손녀가 집에 두고 온 안해 하의영과 지금도 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다니고있을 손녀 혜림의 모습으로 엇바뀌고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용기를 내여 입을 열었다.

《저한테 한가지 청이 있는데 말해도 될가요?》

김춘조는 괜찮다는듯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며 선선히 대답했다.

《어서 말씀하세요.》

《저, 연구사선생의 귀한 손녀를 제 손녀로도 생각하고싶군요.》

김춘조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송미를 손녀로 생각하듯이 우리 역시 선생님의 손녀를 우리 친손녀로 여기고싶습니다. 우리야 남도 아닌 같은 피줄을 나눈 겨레가 아닌가요. 말이 통하고 음식도 서로 같아야 하겠지만 그보다도 피가 통하고 정이 통하고 뜻이 통하기에 한동포라고 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호실에 들어온 리성원은 전화기를 들었다.

《미안하지만 카나다 H시 16번지 하의영을 부탁합시다.》

전화를 놓은지 얼마 안되여 신호음이 울렸다.

《당신이세요? 지금 어디서 전화하세요?!》

《그렇소, 나요. 지금 에덴동산에 와있소. 난 지금 현세기의 아담이 된 기분이요.》

《그래요? 그럼 축하를 받아야죠. 그러니 거기엔 다른 이브도 있겠군요?》

《하하하. 역시 당신은 총명하다니까. 이브가 없는 에덴동산이야 아담이 있을수가 없지. 하하하, 질투가 나오? 하지만 그건 순결한 사랑의 감정이니 좀 아껴두는게 좋을거요. 그럼 당신에게 고백하지. 이브는 아니지만 홍혜림이를 하나 만났소.》

《홍혜림?! 무슨 꿈같은 말이예요?!》

《내 돌아가면 다 말하지. 인차 돌아갈테니 절대로 앓지 마오, 나의 이브!》

《어쨌든 건강한 몸으로 빨리 돌아오기를 바래요. 이브가 없는 아담은 불행할거예요.》

《핫,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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