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 회)

 제 4 장

 33

 

그들이 오른 승용차는 지금 대성산방향으로 달리고있었다. 오늘 아침식사후 호텔에 찾아온 홍승혁에게 뜻밖의 제의를 한 사람은 다름아닌 리성원이였다.

《어제는 홍소장선생의 덕분에 경기관람을 잘했는데 오늘은 나의 청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산천경개를 부감하며 유람을 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리성원이 어울리지 않는 익살조로 말을 건네자 한순간 눈을 껌벅이던 홍승혁이 화답을 했다.

《사장선생이 그동안 나도 모르는 좋은 명소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허허허.》

《제 보기엔 평양은 어딜 가나 명소라 생각되더군요.》

리성원은 곁에 서있는 홍송미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다. 간밤에 송미에게 조용하면서도 풍치가 좋은 장소를 물었더니 그가 대성산의 동천호가 좋음직하다고 말했던것이다. …

승용차는 굵직한 수삼나무들이 늘어선 도로를 따라 속력을 내여 달렸다.

리성원은 미구에 벌어질 뜻깊은 상봉의 막을 어떻게 올려야 할지 몰라 마음속으로 전전긍긍하고있었다.

추억속에서 옛친구를 찾아본다는것은 자못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아득히 멀어져간 과거의 생활을 망막우에 재생시켜본다는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다.

리성원의 잠재의식은 머리를 쳐들고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무수한 점과 선들이 뒤엉켜돌면서 알아보기 어려운 초상들을 그려냈다. 현상해낸 흑백사진같은 모습이 떠오를 때면 아니라는 부정이 뒤따르고 이어 새로운 속사가 계속된다.

내가 왜 진작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가. 벼룩의 내속까지도 꿰뚫어본다는 말을 듣는 내가 옛친구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무정하게 흘러가버린 세월탓일가. 하긴 세월을 이긴 장수는 없다는데 거의 반세기전의 모습이니 그럴만도 할테지.

의식속의 자기와 묻고 대답하며 리성원은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달리는 차창밖으로 수려한 산천의 경개가 눈뿌리 시도록 안겨왔다. 어림짐작으로도 여러개나 되는 산봉우리들이 병풍을 친듯 키돋움하며 잇달려 솟아있는것이 고구려의 도읍지다운 기개가 엿보였다. 가을날이라 하지만 온 산을 뒤덮고있는 청송으로 하여 천하가 푸르러보이고 풍치도 류다르게 안겨왔다.

평범한 날인데도 들놀이를 온 학생들이나 가정휴식차로 모여든 사람들이 많아보였고 홍송미가 가리켜준 유희장도 벌써부터 흥성거리고있었다.

《예로부터 이곳의 풍치를 두고 룡산만취라고 불렀답니다. 아, 저기 보이는것이 대성산성의 남문입니다.》

차창밖을 좌우로 번갈아 보며 설명하느라 관심하는 홍송미를 보며 리성원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차가 서서히 멈추었다. 크지 않은 호수가 펼쳐져있었다.

《여기가 동천호입니다.》하며 홍승혁이 차문을 열었다.

리성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다.

그리 넓어보이지는 않아도 높고낮은 산들을 끼고 잔잔히 틀고앉은 호수를 바라보니 마음의 깃을 펴고싶은 충동을 금할수 없었다.

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아서인지 그닥 깊어보이지 않았다. 불그스레한 빛갈이 도는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염쳐다니는것이 볼만했다. 저쯤에서 뽀트놀이를 하는 사람들 몇이 보였다.

홍송미의 말이 여기는 소문봉의 북쪽골짜기인데 저아래로는 여러개의 식당들과 오락장 등 유희시설들이 있다는것이였다.

《음- 조용한게 마음에 드는구만.》

리성원은 자기의 마음에 꼭 드는 맞춤한 장소를 선택해준 홍송미가 무척 고마왔다.

《사장선생이 모처럼 초청을 했으니 어디 한번 륭숭한 대접을 받아봅시다.》

홍승혁이 다가오며 말을 붙였다.

《물론이지요. 난 지금 홍소장선생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격세지감이라더니 사람은 늙으면 모색도 달라지듯이 추억도 망각상태에 빠져드는것이 아닌가 하구요.》

리성원은 어줍게 웃으며 엉너리를 쳤다.

《아름다운 추억이야 잊으면 안되지요. 그리고 더 중요한건 사람이 한생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될만 한 훌륭한 일을 해야 하는거구요. 그런데 사장선생이 한갖 추억에 대한 견해를 나누자고 저를 청한것은 아닐텐데요.》

홍승혁이 빙그레 웃으며 슬기롭게 리성원의 옆구리를 찔렀다.

《사실은 여기가 조용하고 아름답다기에 홍소장선생과 뽀트놀이를 하려고 했던거랍니다.》

친근감을 유별히 느끼며 동문서답격으로 리성원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하아, 그렇다면 내가 눈치없는 사람이 되겠는데요. 원래 뽀트놀이야 여기 이 안내원동무처럼 꽃같이 생신한 처녀와 하는것이지 우리 같은 늙은이끼리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일부러 왼새끼를 꼬는것인지 홍승혁이 송미에게 한쪽눈을 끔벅거렸다. 그러자 송미가 입을 싸쥐며 웃다가 한마디 내비쳤다.

《혹시 알겠습니까. 그 뽀트가 두분의 기가 막힌 면담석이 될는지… 호호호.》

멋해진 리성원이 재빨리 그 말을 받아넘겼다.

《앞으로 우리 안내양은 훌륭한 외교관이 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선지 난 그것을 장담하고싶습니다.》

호수의 잔잔한 물결우로 세사람의 흔쾌한 웃음소리가 퍼져갔다.

리성원과 홍승혁은 뽀트장으로 다가가 어느 한 뽀트에 올랐다. 눈치빠른 송미가 제꺽 노대를 넘겨주었다.

홍승혁이 노대를 잡고 젓기 시작하자 뽀트는 가벼이 전진했다.

《주의하세요!》

홍송미가 친절하게 손까지 살짝 흔들어주었다.

뽀트가 서서히 호심으로 미끄러 가는데 삐걱거리는 노젓는 소리가 가락맞게 울렸다.

《혹시 밤새 더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습니까?》하고 홍승혁이 넌지시 물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그저 지나간 옛 추억이 떠오르기에 거기에 심취되여있었지요.》

리성원은 이렇게 말하며 홍승혁의 얼굴을 살피는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홍승혁은 《그렇군요. 그것도 괜찮지요.》하고 대답할뿐 더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동안 고요한 침묵속에 노젓는 소리만이 울렸다. 리성원은 서로 만날것을 요구한건 자기라는 생각이 들자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어제 구경을 잘했습니다. 그런데 홍소장선생은 권투에 특별한 조예를 가지고계시는것 같더군요.》

《조예라고까지 말할것은 없고 다만 취미가 좀 있을뿐이지요.》

《홍소장선생의 발음을 보면 외국어도 류창하게 하실것 같은데 대체 몇개 나라 어종을 아시는가요?》

《서너개 나라의 말정도에 불과할뿐입니다. 이젠 배운지도 퍽 오래되였지요.》

홍승혁은 의연한 말투로 대답할뿐이였다.

《물론 도이췰란드어는 그 나라에 류학을 가서 배웠을테지요?》

리성원은 홍승혁에게로 다가들며 하는 자기의 질문이 례의를 벗어난 유도질문으로 번져지고있음을 깨닫지 못하고있었다.

《사장선생과 다를바없었지요.》하고 홍승혁이 수긍하자 드디여 리성원은 발작이나 하듯 소리를 높였다.

《그때 베를린에서 뮨헨종합대학 미국류학생과의 권투경기때 왼손곧추치기로 거꾸러뜨린적이 있었지요?!》

《그때 나를 찾아와 진심으로 축하해준 한 동포류학생도 있었지요.》

《그럼, 그때 그 사람… 자네가 바로…》하며 리성원은 말을 더듬다가 종내 굳어지고말았다.

《왜 좀더 물어보시지요. … 눈치가 곰의 발바닥같은 이 친구야. 인제야 나를 알아보았나?》

홍승혁이 드디여 참고참아온 시원스런 웃음발을 통쾌하게 날렸다. 그리고는 왼손곧추치기동작을 해보였다.

《아… 그럼… 그러니 자넨 이미 나를 알아보고서도 모르는척 했단 말인가?!》

리성원은 아직도 믿을수가 없는듯 중얼거렸다.

홍승혁은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울라지보스또크전시회에서 만났던 그때 벌써 알아보았네.》

《그러니 자네가 정녕 옳단 말이지?!》

리성원은 격정을 누르지 못하고 급작스레 벌떡 일어나려 했다.

순간 뽀트가 기우뚱거리는 바람에 물에 빠질번 한 그를 홍승혁이 와락 당겨 안았다. 두사람은 한동안 벙어리가 된듯 서로 상대를 끌어안고 등만 어루쓸뿐이였다.

《에잇, 이 흥클한 친구야. 진작 알아봤으면 말을 해야지 지금까지 나를 골탕먹여왔단 말인가. 대체 나를 뭘루 만들었나 말일세.》

리성원의 눈가에 맑은것이 고였다.

《내가 만일 자기소개를 하면 자네가 챠일드회사 사장의 권위를 지켜낼상싶던가, 하하하.》

《그래두 말해줬어야지. 그러지 않아도 난 이제껏 자네한테 죄의식을 느끼고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천륜을 어긴것만 같네. 자넨 수십년만에 만난 옛친구를 꼭 이런 막바지에 몰아넣어야만 속이 시원할텐가?》

《됐네, 됐어. 그렇게 내가 원망스럽다면 용서를 빌지. 기탄없이 말한다면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자네와 헤여질 때 나의 왼주먹이 떨린건 사실이야. 하지만 나의 두번째 면담초청에 자네가 응해주었을 때 난 더 계산할것이 없다고 생각했네.》

《정말인가?… 자넨 역시 생각이 깊네그려. 하긴 도이췰란드류학시절에도 항상 자넨 나를 감동시키군 했지. 물론 지금은 더 아득히 높은 봉우리우에 자네가 서있다는 생각이 드네.》

리성원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고말았다.

《그러지 말게. 자네가 계속 그러면 내 마음이 좋을리 있나. 자네 말대로 면담장소도 이만하면 훌륭한데 우리 그새 살아온 이야기나 서로 나누자구.》

홍승혁이 설득해서야 그는 다소 진정이 되였다.

후-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쉰 리성원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불시에 도이췰란드를 떠난 후의 일을 장시간에 걸쳐 이야기했다.

다 듣고난 홍승혁은 가슴이 아픈듯 묵묵히 앉아있을뿐이였다.

《에- 나에겐 남은것이 없네. 모두 나를 떠나갔지. 아들놈도, 며느리도 그리고 마지막지탱의 명줄인 손녀까지도…》

미간살을 찌프린 리성원이 불시에 담배가 있으면 한대 달라고 청했다.

홍승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배를 꺼내주었다. 그것을 피워물기 바쁘게 냅다 기침을 깇던 리성원이 입을 열었다.

《이젠 내 이야기는 그만하고 자네의 이야기를 들어보세.》

《나말인가? 나야 자네가 보는바와 같지. 난 내 인생이 특별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네. 말하자면 소박하지.》

아마 이 친구는 나처럼 말하기 힘든 곡절을 겪었을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굳이 대답을 회피하는 친구에게 더이상 요구하는것은 무리일것이다.

리성원은 공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그었다.

《난 돈이면 만사는 오케이라고 생각해왔네. 내 개인의 어린시절의 세파와 그후의 성공이 그걸 보여주었으니까. 그게 못하는짓이 없다고 생각했지. 돈만 많으면 대통령자리도 살수 있는게 내가 사는 세상이니까. …》

홍승혁이 웃자 리성원은 말을 중둥무이했다.

《왜, 내가 거짓말을 하는것 같나?》

《아니, 그게 아니라 자네의 말이 하도 생동해서 그러네.》

《허, 솔직하지 못하구만. 생동한게 아니라 생경하게 느껴지겠지.》

《하하하!… 좋을대루 생각하게나.》

《자네 거, 이상야릇한 말버릇은 여전하네그려. 허허허.》

허나 리성원은 그야말로 이상야릇해진건 자기자신이라고 생각되였다. 돈처럼 말도 아끼는데 습관된 그답지 않게 장광설을 늘어놓고있는것이였다.

《좋아. 그럼 나도 몇마디 하지. 자네 말대로 물질적부는 중요하지. 난 그걸 부정하지는 않네. 하지만 그것에 따라 모든것이 결정된다고 보는 견해에는 난 반대일세. 왜냐면 방금 말한 자네의 가정사가 그것을 실증해주고있기때문이지.》

《자네의 말은 리해하기가 어렵구만.》

《좋도록. 자네나 내가 살아온 경위가 다른것처럼 생활방식도 같을수야 없지.》

《그럼 흉금을 터놓고 말해보게. 자네는 지금 행복한가?》

리성원은 혹여 홍승혁의 대답으로 목을 추기려는듯 바투 다가들었다.

《허허, 따분한 질문인걸. 워낙 행복이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가. 난 지금 더 큰 행복을 위해 일하고 노력하고있네.》

리성원은 더 묻지 않고 잠잠해지고말았다.

더 큰 행복을 위해 일을 하고 노력한단 말이지?! 허, 시 같은 말이군. 이 친구의 행복관이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것은 명백하다. 그럼 이번 기회에 옛친구의 행복상을 투시해보는것도 의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리성원은 오늘은 이쯤하기로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자네 가족형편에 대해 알고싶구만.》

홍승혁은 걸걸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꼽았다.

《로친이 있구 아들, 며느리, 손녀가 있지.》

리성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신통히 자기와 같았던것이다.

《내가 그들을 만나볼수 있을테지?》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그야 물론, 아무러면 옛친구의 가정방문도 하지 않고 돌아가려고 했나?》

홍승혁이 별찮다는듯 단마디로 대꾸했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리성원은 옛친구의 얼굴을 얼혼이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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