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4 장

 35

 

의식의 광야에서 되찾은 지각이 가느다란 바람이 되여 솔솔 불기 시작했다. 망막은 자주빛노을속에 잠긴듯싶었다. 시력은 뇌수의 지령으로 무엇인가를 보려고 하지만 눈앞은 온통 보라빛점과 선들 그리고 형체를 알아볼수 없는 어떤 도형체와도 같은것들이 벌떼처럼 무수히 날아다니고있다. 색갈도 무질서하게 뒤바뀐다. 보라빛이 적황색으로, 감색으로 변색되더니 검은 장막이 금시 뒤덮이고. 그러자 의식은 다시금 수면의 파도속으로 잠겨버렸다. 어데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불러준다.

《혜림아!…》

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를 찾는 소리다.

《할아버지, 나 여기 있어요.》

대답하고싶지만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러는것일가. 할아버지가 찾는데…

이런 생각이 들자 금시 서러워나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애써 눈을 뜨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곁에 있는것 같은데 보이지는 않는다.

혜림은 비로소 자기의 망각되였던 지각을 찾았다.

내가 지금 어디에 와있는가. 왜 움직일수 없는가. 뇌리를 찍는듯 한 아픔과 함께 무서운 광경이 덮쳐들었다.

살기어린 눈동자들, 무지한 발길질, 야수와도 같은 울부짖음…

《이 쌍년! 일본땅 한가운데서 감히 센징노래를 질러?!》

《야! 이 센징년을 죽여라! 신성한 센다이에서 감히…》

그러니 내가 아직도 그 길바닥우에 누워있단 말인가. 아, 로베르또가 아직 정신잃고 나를 덮었기에 움직일수 없을거야.

몸서리치는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고개를 흔들어댄 혜림은 흐릿한 눈으로 자기옆에 세워놓은 점적대를 보았다.

내가 병원에 와있구나. 그런데 우리 동료들은 어디 있을가. 그들은 무사할가. …

혜림은 자기를 그러안은채 모진 매를 맞던 로베르또가 눈앞에서 얼른거렸다. 그가 제일 걱정되였으나 찾아보자니 움직일수가 없었다.

혜림은 까딱않고 병실의 하얀 천정벽만을 응시했다.

얼마나 먼길을 방황하며 걸어왔는가. 그지없이 깨끗한 마음을 안고 리상향을 찾으려 했건만 그 모든 꿈이 섬나라 일본에서 끝난단 말인가.

그들이 이 땅에서 만난것은 사람이 아니라 21세기 야만들이였다. 세상을 떠돌며 청춘들의 부패와 타락을 수없이 보았건만 문명과 사치를 자랑하는 이 나라에서는 인두겁을 뒤집어쓴 맹수들을 보았다.

이들을 가리켜 진화가 아니라 퇴화되여가는 청년들이라 하던 말은 너무나 고상하고 신사적이라고 할수 있었다. 아니, 애당초 인간이라는 말자체가 성립되지 않을수도 있다.

이것들은 리스봉의 젊은 강도들이 아니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미국의 코흘리개 색마들과도 달랐다. 복수주의야망을 품은 짐승떼들이 일본천지에 널려 패륜과 타락을 초월한 인간증오의 사상을 키우고있는것이다. 지난날 조선과 세계앞에 저지른 천인공노할 죄악에 대한 사죄와 배상 같은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혜림이와 동료들이 당한 불행은 이 모든 행위들의 연장이였고 필연이였다.

아, 이 야만들의 쟝글에서 살아남는 길은 꼭같은 야수가 되는 길뿐일지도 모른다.

혜림은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가벼운 실내화소리가 들리더니 흰 위생복차림의 한 간호원이 나타났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그의 눈동자가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사라졌다. 이어 그가 의사를 데리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밀고 온 바퀴달린 밀차에는 약물병들과 소독수, 크기가 각이한 주사기 등 의료품들과 도구들이 놓여있었다.

의사가 무엇인가로 혜림의 발을 긁어댔다. 그러고나서는 맥을 짚어보고 눈까풀을 뒤집고 들여다보았다.

《의식은 회복됐소.》

나직하나 재빨리 말한 의사가 간호원에게 무엇인가 지시하나 혜림으로선 알아들을수 없는 의학전문술어였다.

새로운 약물이 주입되였다. 의식은 서서히 진정되면서 다시 수면상태로 돌아갔다. …

혜림은 보름이 지나서야 의식을 완전히 되찾고 비교적 움직일수 있었다.

동료들에 대한 생각이 간절했지만 그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결국 자기가 공연종목으로 조선노래를 발기했고 동료들을 충동했기에 일본망나니들에게 란폭한 구타를 당하고 또 엄청난 치료비까지 물어야 하는것이였다.

화는 쌍으로 온다더니 이 처절하고 애끊는 심정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그는 알수 없었다. 어혈진 가슴에 피가 고이는듯 했다.

이때 병실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병상태가 좀 어떻습니까?》하는 카랑카랑한 억양으로 울리는 남자의 조선말소리가 들렸다.

혜림은 자기가 꿈을 꾸지 않는가 생각되였다.

《우린 도꾜에서 왔소. 조선대학교에서 이 도시에 실습을 온 사람들이요. 난 교원이고 이들은 졸업반학생들이요.》

《?!…》

《왜 그렇게 놀라오? 우린 재일조선공민들이요.》

혜림은 멀끄러미 사람들을 올려다볼뿐 아무 말도 없었다. 일본땅에 조선대학교가 있다는 말이 무슨 감투끈인지 알수 없어서였다. 실로 귀신이 곡할노릇이였다. 억하심정으로 조선노래도 허용되지 않는 이 불모의 사각지대에서 조선대학교란 무슨 말인지 리해가 되지 않았다.

혜림은 긴장한 눈빛으로 장년기에 이른 교원과 20대 초반의 학생들을 번갈아 보았다. 녀학생들도 몇명 있었는데 조선치마저고리를 입고있었다. 그걸 봐도 조선사람들인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사이에 자기를 일본땅이 아닌 타국에 옮겨다 눕힌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아!》하고 부르짖은 혜림은 몸을 일으키고싶었지만 욕망뿐이였다.

《진정하오. 아직은 움직여서는 안되오. 정말 천만다행이요.》

교원은 그를 안심시키고 자기네 학생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쓰러진 당신들을 발견하고 구원한 우리 학생들이요.》

놀라움에 겨워하는 혜림의 눈빛을 본 교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들이 어떻게 이 병원에 실려오게 되였는지 알려주었다.

…근 두주일째 지방실습을 나온 교원을 포함한 조선대학교 졸업반학생들이 탄 중형뻐스가 어느 거리 골목을 지나치는 순간이였다. 열린 차창곁에 앉아있던 한 학생이 갑자기 소리쳤다.

《선생님, 저 골목안에서 무슨 싸움이 붙은것 같은데 조선노래가 들립니다!》

《뻐스를 멈추시오!》하고 웨친 교원이 차창을 열고 귀를 기울였다.

분명 조선노래가 확실한데 무슨 일인지 가늠할수 없었다.

《차를 빨리 돌리시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보이니 가봐야겠소.》

교원이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그들이 뻐스에서 뛰여내렸을 때 피투성이가 된 여러명의 젊은이들속에서 한 동양처녀가 땅바닥에 쓰러진채로 외마디의 조선말로 무어라고 피터지게 절규하고있었다.

조선처녀가 위험하다!

《학생들! 우리 위기에 처한 동포처녀를 구원합시다!》하고 교원이 웨쳤다.

수십여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폭력에 미쳐버린 폭력배들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들중의 일부는 처녀와 그의 동료들을 부축하여 차에 싣고 즉시 병원으로 내달렸다. …

《병원에서 하는 말이 한시간만 지체되였더라면 큰일이 날번 했다고 하더군.》

교원의 얼굴에는 지금도 근심이 한가득 어려있었다.

《정말 선생님이 아니였다면… 저나 우리 동료들은 이 저주맞을 일본땅에서 가장 처참하게 생을 마칠번 했습니다. … 정말 이 신세를 어떻게 갚았으면 좋을지…》

혜림은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 말에 교원은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듯 하더니 가슴이 아픈지 이마살을 쪼프렸다.

《일본은 겉보기와는 달리 야생화된 세계지. 극악의 극치라고 할수 있는 극우보수를 견제해야 할 제동장치가 완전히 마모되여버렸으니까. 이렇게 되면 가장 불쌍해지는게 파멸의 운명을 피할수 없는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지.》

교원의 말은 그대로 혜림에게 무서운 충격이였다.

이때 문이 빠금히 열리더니 로베르또를 비롯한 동료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우리 공주가 살아났구만! 아니… 여보게들, 여기 우리 생명의 은인들도 오셨네!》

와힘이 병실이 떠나갈듯 큰소리로 웨쳤다.

동료들과 은인들사이에 감격적인 인사들이 오갔다.

《그러니까 이 일본땅에 조선사람들의 대학이 버젓이 설립되여있단 말이지요? 중세기 야만들의 백색테로가 살판치는 이 땅에서 말입니다?!》

로베르또가 흥분에 들떠 고함치듯 물었다.

《세상에 그런 일도 있습니까?! 외국에 자기 나라 대학을 합법적으로 가지고있다는 말은 난생처음 듣는데요.》

큰 눈망울을 디룩디룩 굴리며 마리노도 가세했다.

교원과 학생들이 가볍게 웃었다.

《유일하게 우리 조선사람들만이 가지고있는 대학이고 큰 자랑이지요. 이거 아무래도 내 말이 좀 길어져야 할가보군요. 우리 대학은 지금으로부터 60년전에 주체의 해외공민조직인 총련을 떠메고나갈 자체의 민족간부양성과 동포청년들의 민족적인 고등교육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여 창립된 민주주의민족교육의 최고전당이랍니다. 도꾜 한복판에 보란듯이 일떠서있지요.》

교원의 이야기가 흐르는 동안 혜림은 입속으로 《조선대학교》, 《총련》, 《민주주의민족교육》이라는 귀엔 설어도 반갑고 따뜻한 말마디들을 골백번 외웠다.

《그런데 무서운 돈벌레들만 서식하는 이 일본사회에서 무슨 약차한 자금이 있어 대학을 운영한단 말입니까?!》

학비때문에 대학을 중퇴한 경력이 있는 로베르또가 숨가쁘게 물었다.

《해마다 조국에서 만사를 불구하고 막대한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주고있답니다. 우리 대학뿐만아니라 일본전국의 도처에 널려있는 초, 중, 고급학교들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교원의 말에 혜림의 동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혜림은 머리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통 리해할수가 없었다.

이 교원이 말하는 조국이란 북조선일것이다. 하다면 평양이 무슨 재정적여유가 있어 해외에 사는 동포자녀들의 교육에까지 관심을 돌릴수 있겠는가. 그것도 한두해도 아닌 반세기이상이나… 더구나 지금은 식량난과 경제적제재라는 악영향까지 받다나니 민생도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

눈굽을 찍으며 머리를 들던 혜림의 눈길이 녀학생들의 치마저고리에 다시 쏠렸다.

볼수록 부럽고 매혹적이였다. 집에서 더러 입어보았어도 이렇게 우아하고 이쁜줄은 느끼지 못했었다. 치마저고리를 입어서인지 그들의 모습이 더 해맑고 순결해보였다.

《조선청년들이 부럽습니다. 해외에서 사는 자기 동포들을 이렇게까지 물심량면으로 사랑해주는 고마운 조국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마리노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매일 매 시각 그것을 느끼며 애국의 열의로 가슴을 끓이군 하오. 가만, 시간이 많이도 갔군. … 안됐소, 우린 실습터로 가야 하니 치료비는 걱정말고 건강들을 빨리 회복하면 좋겠소.》

교원과 학생들은 따뜻한 인사말을 남기고는 조용히 돌아갔다.

그러자 병실은 다시 잠잠해졌다. 모두 저마끔 제 생각에 잠겨있는듯 잠자코 있었다.

《우리가 혜림이때문에 욕본것 같지만 실은 소득이 더 크다고도 할수 있네.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였나 말이야.》

로베르또의 목소리였다.

《대체로 우리가 알고있는 동포애란 개별적인 사람들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건데 이건 전혀 다른 세계란 말일세. 어때 혜림, 내 말이 그른가?》

하싼이 그 무엇을 발견한듯이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잠시나마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고맙겠어요.》

혜림이가 눈을 감고 누운채 중얼거렸다. 한숨을 토하며 하싼이 어깨를 으쓱거리다가 참지 못하고 또 한마디 내비쳤다.

《그런데 치료비걱정을 말라는건 어느 하느님의 계시요? 분명 나는 그렇게 들었는데…》

《글쎄, 설마하니 그 대학생들이 부담한다는건 아니겠지. 생명의 은인들한테 치료비까지 떠맡으라는거야 너무하지 않소.》

《리치는 그러한데 지금 우리에게 뭐가 남아있나. 그놈의 려관에선 그동안 숙식비를 물지 않았다고 우리 <밥통>들까지 죄다 <차압>을 했으니… 이제야말로 알짜 적수공권일세그려.》

중구난방으로 소리들이 높아지자 로베르또가 혜림이쪽을 바라보더니 동료들을 향해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다시 조용해졌으나 혜림은 머리가 빠개지는듯 한 아픔을 느꼈다. 무슨 마련을 봐야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누워있을수 없었다.

긴 한숨을 뽑던 혜림이가 강개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순간 그의 말을 자르듯 문기척소리가 들렸다. 다들 긴장한 눈초리들을 모았다. 벌써 치료비독촉인가 하는 눈빛들이였다.

문을 빠금히 열고 들어선 사람은 50대 초반의 이마가 훤칠한 사람이였다.

《음, <롱>악단의 인기배우들이 이제는 일어들 나셨군.》

의문어린 눈길들이 그에게로 쏠렸다.

《날 모를수 있을거요. 내가 왔을 땐 임자들이 정신들이 없었으니까. 오늘까지 세번째로 오는 이 사람으로 말하면 여기 센다이총련지부 분회장이요. 자주 와보지 못해 미안하오.》

쑬쑬해보이는 양복차림인 분회장이라는 그 사람은 들고 온 과일구럭들을 넘겨주고는 혜림에게로 다가왔다.

《혜림이라고 했던가? 이번에 불행을 당해보니 이 일본땅이라는게 어떤 곳인지 잘 알았을테지. 저놈들은 우리 조선사람들과는 한사코 해보려고 날뛰지. 하지만 우리 동포들은 끄떡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운다네. 아무렴!》

혜림은 비록 파악은 없어도 점잖으면서도 강직해보이는 이 분회장에게 믿음이 가는것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분회장은 젊은이들의 안색을 둘러보더니 아직 더 치료를 받아야 하겠다고 걱정을 하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인기배우들의 얼굴모양들이 왜 모두 울상인가? 쪽발이들한테 되게 혼쭐이 나서 그런가?》

누군가 맥살이 풀린 어조로 말했다.

《그런게 아니라 우리들의 엄청난 치료비때문에…》

《와힘!…》

로베르또의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치료비라니?!》하고 뇌이던 분회장이 박장대소를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치료비걱정을 하고있었단 말이지… 하긴 그럴수 있지. 그러나 너무 걱정일랑 말구 치료나 깨끗이 받도록 하게.》

모두 덩둘해서 마주 쳐다보았다.

《왜 걱정을 말라는가 하는것이겠지? 우리 분회 상공인들이 돈을 모아다 청산해주기로 했네. 그뿐아니라 려관에 차압당한 악기들 대신 새 악기들도 일식으로 구입해주기로 의견을 모았네. 이제 빨리 몸들을 회복하구 쪽발이족속들이 보란듯이 활개치며 거리에 나서보자구.》

분회장의 입에서는 온통 꿈같은 말들만 흘러나오고있었다.

한동안 혼돈세계에 빠져있던 동료들이 약속이나 한듯 《와!-》하고 고성을 내질렀다.

로베르또의 부축을 받아 웃몸을 일으킨 혜림의 얼굴에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야, 우린 살았어! <롱>은 기사회생했어!》

하싼이 와힘의 잔등을 부서져라 두들기며 소리쳤다.

《자넨 내 잔등이 무슨 드람인줄 아나? 하긴 그것두 몰수당해서 더는 두드릴게 없으니 할 말이 없군.》

《조선 만세!》

《총련 만세!》

마리노가 두팔을 높이 쳐들고 만세를 복창하며 방안을 실성한 사람처럼 맴돌았다.

병실안은 순식간에 무슨 공연무대로 바뀐것 같았다.

《혜림!》하며 혈기방장한 네 젊은이들이 불쑥 졸지에 혜림의 침대로 왈칵 몰려들었다. 그리고는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다급해맞은것은 여적 흐뭇하게 웃고있던 분회장이였다. 그가 한참이나 씩씩거리며 진정시키려 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잠시 동안을 두었던 분회장이 그중 가까이에 있는 마리노의 팔을 건드리며 물었다.

《참, 내 물어보자던건데… 어떻게 돼서 자네들은 서로 다른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하나의 악단을 꾸리게 됐나? 말하자면 다민족악단이라 할수도 있고 다국적악단이라고 부를수도 있는 <롱>악단을 만들어냈는가 말일세?》

모두의 눈길이 혜림에게로 향했다.

혜림이가 좀 머밋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우린 온 세상을 방황해서라도 인간으로서의 정과 사랑과 아름다운 미래가 살아 숨쉬는 곳을 찾고싶었습니다. 설사 나라와 민족은 다를지라도 인간의 미래가 꽃피는 리상향을 기어이 찾아내고야말겠다는 그 지향이 우리를 하나로 합쳐지게 했답니다. 헌데…》

분회장의 얼굴에서 호기심어린 웃음이 차츰 의미심장한 미소로 바뀌는것을 누구도 보지 못했다.

《그건 참 어려운 길이지. 하여튼 세파속에도 진실을 보려는 청년들이 있다는게 다행이기도 하구… 그래서 이런 피눈물의 세례도 맛보게 되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주저하지 말고 끝까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되오. 다리를 저는 말도 바른길을 간다고 하지 않소. 머지않아 그대들이 갈망하는 그 세계를 꼭 찾게 되리라고 난 믿고싶소. 중요한것은 신심을 잃지 않는것이라고 생각하오.》

분회장은 호걸스럽게 웃으며 혜림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는 인차 또 만나자는 작별인사를 남기고 사라졌다.

분회장을 바래 인사를 하고난 동료들은 길길이 날뛰던 사람들 같지 않게 혜림의 주위에 앉더니 그를 말없이 주시했다.

혜림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겠으나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있을뿐이였다.

로베르또가 후닥닥 일어나 병실안을 왔다갔다했다.

《처음이 아닌가! 여기 우리 친구들중에 자기 민족에 대해 이런 자부를 느껴본이가 대체 누구요? 그래 있소, 없소?! 난 있다고 보오. 있다면 누구요? 그건 우리의 혜림이란 말이요. 우리모두 사랑하는 혜림이만이 느낄수 있는 행복이고 긍지가 아닌가 말이요!》

두말없이 다들 쌍수를 들고 호응하는데 하싼이 반기를 들고나섰다.

《난 반대요. 의견이 있단 말이요. 이게 왜 혜림이만이 느껴야 하는 긍지인가 말이요. 혜림이자 우리이고 <롱>이 아닌가. 때문에 난 우리모두의 행복이고 긍지라고 정정해야 한다는거요.》

로베르또가 눈을 흘기며 주먹을 크게 흔들었다.

《내 말은 다 끝난게 아니란 말이야. <왕세자>나리는 여기가 무슨 아랍궁중인줄 아는게지. 언제 봐야 불만투성이거던. 내 말하자는건 세상에서 조선사람들이 가장 정의롭고 아름다우며 고상한 인간들이라는 바로 이거야. 이래도 또 반박할텐가?!》

와힘과 마리노가 달라붙어 하싼에게 종주먹을 안겼다. 그의 자지러지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혜림은 오래간만에 눈물이 쑥 나올 지경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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