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제 4 장

 37

 

벌써 어둠이 깃들었다. 리성원은 호텔앞의 주차장에서 홍승혁이 타고온 승용차에 오르면서 섭섭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이라도 홍송미가 금시 나타날것만 같아서였다.

송미는 두시간전에 래일 비행기표예약과 출국수속때문에 자리를 떴기때문이다.

리성원은 어쩐지 속이 좋지 않았다. 이젠 래일 아침에나 만나게 될것이였다.

홍승혁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지청구를 했다.

《자, 이젠 그만 떠나자구. … 어째서 심드렁했나? 자네 안내원처녀에게 단단히 정이 든 모양이지?》

《사실 그렇네. 꼭 내 손녀를 보는것처럼…》

리성원은 홍송미를 친손녀로 생각한다는 심정까지 죄다 털어놓았다.

《처녀가 그 정도로 마음에 든다는건가?》

홍승혁이 신기하다는듯 눈을 끔뻑거린다.

《내가 오죽했으면 손녀라고 부르고싶었겠나. 이거 오늘 자네의 가정방문을 하면서 내가 큰 손해를 보는게 아닌지 모르겠네.》

《별소릴 하는군. 자네의 말대로 정말 괜찮은 처녀라면 자넨 결코 손해보지 않을걸세. 자, 가자구. 이러다간 여기서 밤을 보낼지도 몰라. 혹시 알겠나, 우리 집에 가면 자네의 그 울적한 기분도 전환이 될지?》

홍승혁은 싱글벙글 웃으며 또 재촉했다.

리성원은 할수없이 차에 오르고말았다.

가로등의 불빛들로 눈부신 환한 양각다리우로 쏜살같이 내달리던 승용차는 몇분 안 있어 화려한 고층주택지구의 어느 한 아빠트현관앞에 이르러 멈추어섰다.

《여긴 미래과학자거리가 아닌가.》

리성원이 눈이 머룩머룩해서 두리번거렸다.

《알긴 잘 아는군. 어서 내리기나 하게.》

《그러니 내가 있는 양각도호텔에서 자네 집이 보일수도 있었겠군. 정말 아쉬운걸.》

《자네 집처럼 독립가옥이 아니라서 실망하는건가?》

《대신 이런 고층주택은 어느 나라에서나 값이 비싼 법이지.》

15층에서 멎어선 승강기에서 내린 두사람은 어느 집 문앞에 이르렀다.

홍승혁이 초인종을 누르자 곧 문이 열리며 한 중년녀인이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선생님. 제가 이 집 며느립니다.》

고개를 살풋이 수그리며 인사를 하는 그 목소리가 무척 부드럽고 친절하여 리성원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러나 머리를 든 녀인을 찬찬히 바라보던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혹시 제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옥류아동병원에서 과장으로 일보시지 않던가요?》

《선생님의 기억력이 참 비상하십니다. 그날 부상당한 소년을 데리고 오셨을 때 뵈운것 같은데 잊지 않고계셨군요. 그때 인사를 못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원, 무슨 말씀을… 난 과장선생이 그때 꼬마화가의 할머니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말로 깊은 인상을 받았답니다. 그걸 어떻게 잊을수 있겠습니까!》

리성원과 며느리의 인사가 길어지자 홍승혁이 웃으며 증을 냈다.

《며늘애야, 해외에서 오신 귀한 손님을 집문앞에 장참 세워놓을 잡도리냐. 그리구 다들 어디로 갔느냐?》

《아이참, 제정신이…》하며 며느리가 리성원의 손을 잡고 집안으로 이끌며 소리를 쳤다.

《어머니! 여보! 오셨어요.》

리성원이 넓다란 응접실로 들어서는데 안방문이 열리더니 여러명의 사람들이 나오며 저마끔 인사를 했다.

《정말 반가운 손님이 오셨군요.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갑습니다.》

첫눈에 안겨오는 나많은 녀인의 모습은 더 낯이 익다.

아니, 료리연구사선생이 아닌가!

뒤따라 나서며 인사하는 중년의 사내는 큰 기업소의 지배인 홍신철?! 가만가만, 그러면 이 집이 다름아닌… 아이쿠!

리성원이 너무 어기차서 말을 못하고있는데 옆방문이 활짝 열렸다.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셨군요. 저한테 깜짝 속았지요? 우리 할아버지가 저만큼 친절히 안내를 해주시던가요?》

《아니, 송미양이?!》

한동안 얼나간듯이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던 리성원이 드디여 이마를 탁 쳤다.

《아하! 그러니 내가 완전히 속아넘어갔군. 여보게! 어쩌면 수십년만에 만난 이 옛친구에게 그 무서운 왼손곧추치기타격을 련속 안기는건가! 마지막에는 저 송미까지도 결정적인 강타를 안기니 내가 이렇게 졸도할수밖에…》

그가 당장 졸도할듯이 눈을 감고 주저앉는 시늉을 하자 모두 왁작 웃으며 부축하여 일으켜세웠다.

《웬걸, 어서 들어나가세.》

홍승혁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한참이나 구면지기들과 웃음을 나누고난 리성원은 홍승혁이 이끄는대로 안락의자에 앉았다. 송미는 그의 손을 잡고 아예 놓아줄념을 몰랐다. 모두 아는 사람들속에 둘러앉으니 리성원은 마치 자기 집에 온 기분이였다.

숨도 돌릴겸 그는 아무 말이 없이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단출하면서도 고급해보이는 가구들이며 그우에 놓인 자그마한 조각이나 도자기, 벽에 붙인 풍경화와 현판액자 등이 가정의 품격을 시위하는듯싶었다.

《품위가 있으면서도 아늑하게 집을 참 잘 꾸렸구만.》하며 리성원은 감탄했다.

《나라에서 이렇게 좋은 집을 돈 한푼 받지 않고 배정해주었네.》

리성원은 홍승혁의 말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것이 꾸밈이 없는 진실이라는것을 그자신도 알수 있었다.

벽에 유리액자들이 많이 붙어있는것이 흥미있어 그는 몸을 일으켜 다가갔다.

《이런, 온 집안이 학위학직소유자들이구만. … 오호, 그럴줄 알았어. 료리연구사선생도 교수, 박사라… 아들, 며느리까지 석사라니…》

리성원은 자기의 손을 꼭 잡고있는 송미를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손녀와도 같은 송미에게도 앞으로 좋은 일을 기대하는 축복의 눈빛이였다.

세상에 이런 복받은 가정도 있는가?!

그는 가정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안고 생각에 잠기였다.

련애가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도 형성될수 있다면 결혼이란 그 감정에 리성이 동반되여야 하며 그의 조화로운 결합을 가리켜 바로 가정이라고 이르는것이다. 그것들 호상간의 불일치와 모순으로 하여 비극으로 막을 내린 사랑과 가정은 그 얼마나 많은것인가.

리성원자신이 일개인으로서의 의견을 말한다면 그는 감성보다 리성을 더욱 중시하는편이였다. 이 리성속에 정신적측면만으로는 메꿀수 없는 물질적측면도 내재하고있다고 그는 간주하고있었다.

리성원은 부러움이 짙은 표정으로 홍승혁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두사람은 다같이 혈혈단신이지만 오늘 이때까지 제나름으로 성공과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걸세. 전에도 말했지만 나로 말하면 장인의 결심과 후원속에 오늘과 같은 성장가도를 걸어왔다면 자네의 경우는 어떠한지 알고싶군. 혹시 나처럼 자네 역시 장인이나 처가쪽의 두터운 후광을 입은것은 아닌가?》

안해와 며느리를 번갈아 바라보던 홍승혁이 실소를 금치 못해하자 리성원의 눈이 덩둘해졌다.

며느리가 점직해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선생님은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어머님은 지난 조국해방전쟁의 초시기에 부모를 미국놈의 폭격에 다 잃고 최고사령부에서 자란 전재고아랍니다.》

《그러니 부인도 전재고아란 말이요?! 그런데 고아들이 최고사령부에서 자랐다는건 무슨 소리요?!》

리성원은 무슨 허황한 소리를 하는가 하는 눈빛으로 김춘조를 바라보았다.

김춘조가 순박해보이는 미소를 짓고 대답했다.

《우리 며느리의 말은 죄다 사실이랍니다. 그때 전쟁의 참화속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늘어나는 사정을 가슴아프게 여기신 우리 수령님께서는 아무리 전쟁이 가렬하다 해도 우리가 그애들의 부모가 되여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 계시는 최고사령부로 우리들을 데려오도록 하셨답니다.》

《그럼 나라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전란의 시기에 일성주석님께서 친히 고아들을 키우셨단 말인가요?!》

《그럼요. 수령님께서 매일 우리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아주시고 반찬 한가지라도 더 놓아주라고 당부도 하시고 저녁시간이면 우리들의 숙제정형을 친히 료해하셨답니다. 그리고 자정이 깊은 밤이면 우리들의 방을 찾아오시여 이불깃도 여며주시고 이마도 짚어보셨지요. 그래서 우린 수령님을 아버지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며 따랐답니다.》

이때 송미가 불쑥 이야기판에 끼여들었다.

《그때 한 외국기자가 수령님의 접견을 받으려고 최고사령부에 왔다가 이것을 목격하고 돌아가 조선은 이미 승리한 전쟁을 하고있다는 기사를 써서 유명해진적도 있어요.》

눈의 초점이 흐려진 리성원은 머리를 끄덕일뿐이였다.

김춘조가 격정을 억제하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도 잘 아실테지만 흔히 전쟁에서 숱한 희생자와 더불어 고아들이 생겨나는것은 피할수 없는 필연이라고 할수 있지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부모가 없는 단 한명의 고아도 있어서는 안되며 우리가 피를 흘리면서 원쑤들과 싸워 이기려는것도 바로 후대들을 위해서라는것이 어버이수령님의 뜻이였답니다.》

리성원은 숨이 가빠오르는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전쟁시기에 그런 꿈같은 일이 있었단 말이지요?!》

홍승혁이 대답을 대신해주었다.

《왜 전쟁시기만이겠나. 자네도 모르지 않을거네. 지난 세기 90년대 후반기에 우리가 겪은 고난의 행군, 강행군이 어떤 피눈물나는 총포성없는 대전이였는가를 말일세. 그러나 천만군민이 사생결단의 각오를 안고 적들의 극심한 군사적도발과 모진 식량난을 이겨내야 했던 그 험난한 시절에도 이 땅에선 아이들의 배움의 글소리와 행복의 노래소리가 순간도 그치지 않았지. 그때 우리 장군님께서는 한공기의 죽이나 수수한 줴기밥으로 끼니를 에우시며 준엄한 조국수호전의 최전연길에 계시면서도 수많은 저 송미네들을 위해 매일 사랑의 콩우유를 공급해주도록 하셨네.》

《그러니 김정일국방위원장님께서?》

리성원은 사뭇 울렁거리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하고 따져물었다.

《그렇네. 혹시 자네 우리 광명기술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만났던 수재가 생각나나? 거 레이자3D인쇄기설계를 짧은 기간에 완성한 청년박사 말일세.》

리성원은 눈시울을 쪼프리고 기억을 더듬다가 마침내 찾아내고야말았다.

《아, 청년박사? 이름이 영수라고 했던가본데…》

《역시 기억력이 비상하구만. 그 영수가 바로 자기 동무들과 함께 붉은 소년단넥타이를 휘날리며 야영소로 떠날 때 선군장정의 길을 이어가시던 우리 장군님의 사랑의 축복이 어린 바래움을 받은 행운아라네. 말하자면 지금도 온 나라 인민들이 눈물속에 불러보는 노래 <장군님과 아이들>의 증견자인셈이지.》

리성원은 그처럼 쾌활하고 명랑해만 보이는 청년의 심중속에 세차게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있는줄은 전혀 상상을 못했었다.

《바로 우리 공화국의 전통이고 모습이고 미래라고 할수 있지. … 가만있자, 이거 우리가 귀빈을 청해놓고 자랑만 너무 하고있지 않나?》

홍승혁이 이야기를 하다말고 화제를 돌렸다.

김춘조가 자기의 실수를 깨달은듯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정말 손님을 모셔다놓고 이런 실례가 어디 있냐. 송미 에미야. 이젠 제꺽 상을 차리자꾸나. 그리고 송미는 할아버지와 함께 선생님께 집구경을 시켜드려라.》

《알겠어요. 할머니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송미가 군대처럼 차렷자세로 대답하자 와하하 하고 웃음이 터졌다.

리성원은 깊은 자감에서 깨여나지 못한채 송미에게 이끌려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방은 할아버지의 서재예요. 어서 들어가시자요.》

응접실보다는 크지 않은 방이지만 무척 정갈했다. 서가로 장식된 두 벽면은 책으로 꽉 차있었다.

기본벽면의 중심에 걸려있는 보통크기의 사진액자가 남달리 눈길을 끌었다. 리성원은 저도 모르게 그 액자의 가까이에 다가갔다.

사진속에서 어떤분이 태양의 빛발과도 같은 환한 안색으로 어린이들의 학습장을 펼쳐들고 서계시였다.

《아니?! 이분이…》

리성원은 말을 더듬으며 구원을 바라는 사람처럼 다급한 눈길로 송미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이분이 바로 우리의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이십니다.》

《알지, 알구말구. 헌데 그분의 저쪽에 어떻게 자네가…》

리성원은 놀라운 눈길을 다시 홍승혁에게 주었다.

송미가 나서며 말했다.

《예, 그이께서 새로 건설된 학습장공장을 찾으시였을 때 영광스럽게도 우리 할아버지도 수행해드리면서 찍은 사진이랍니다.》

홍승혁이 두눈을 끔벅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로서도 지금까지 믿기 어려워지는 사실이네.》

《듣고싶네. 최고령도자님을 자네가 어떻게… 그때 일을 설명해주게.》

리성원은 자기의 간청이 거부될가 심장을 조이는듯 했다.

홍승혁이 리성원을 안심시키려는듯 그의 손을 꼭 잡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허, 이거 자네가 심각해지는걸.》하고 말한 홍승혁은 송미더러 그 신문을 가져다 드리라고 일렀다. 그리고는 격동된 심정을 참아내는듯 침을 둬번 삼키더니 건너방을 향했다.

송미에게서 신문을 받아들고 선자리에서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리성원은 아! 하는 탄사와 함께 가슴이 벅차오르는것을 느꼈다. …

응접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음식상을 다 차렸는지 손녀를 부르는 김춘조의 목소리도 울렸다.

하지만 조각인양 굳어진 리성원의 머리속으로 신의 계시런가 우렁우렁한 메아리가 울려오고있었던것이다.

어린이들의 밝고 명랑한 웃음으로 최후의 승리를 이룩할것이다!

분명 이것이다. 이 명철한 계시속에 내가 북에 대해 품어왔던 온갖 의문들과 신기루처럼 느꼈던 모든것에 대한 명답이 들어있다. 아, 지금껏 나는 성서의 에덴동산이면 최후의 리상향이라고만 생각해왔었지. 하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와 악은 전부 이 락원의 꽃동산에 대한 모욕과 배반으로만 여겨왔다. 하지만 신이 창조한 그 세계에도 부러운것과 두려운것이 있어 아담과 이브는 불행을 겪어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신비로운 이 땅에서는 사람들이 비록 부족한것은 있어도 부러움을 모르고 설사 없는것이 있다 해도 두려움을 모른다. 세계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이 미래가 퇴화되고 사멸되여간다고 제아무리 아우성을 치고 비명을 울려도 이북에서는 미래가 벌써 승리하고있다. 절세위인의 축복이 이들을 지켜주고 이 진리를 확신해주고있다!

송미가 연방 팔소매를 잡아끌어서야 심회에서 깨여난 리성원은 홍승혁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돈이 많고 대기업체의 주인이며 부호라고 부르지만 자네와는 견줄수 없는 빈자이고 졸부일세. 진짜부자는 자네야. 왜냐하면 자네 집엔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훌륭한 재산들만 가득차있기때문이지. 정말 자네가 부럽네.》

그는 초롱초롱 령롱한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송미에게 친숙해진 어조로 일렀다.

《송미야. 오늘 나에게 그 노래를 좀 배워주렴. <세상에 부럼없어라>. 수십년전에 너의 할아버지에게서 듣고 참 좋은 노래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너에게서 배우게 되는구나. 이건 평양방문을 마치면서 너에게 하는 나의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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