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제 4 장

 38

 

카나다 H국제비행장의 상공을 선회하던 려객기가 서서히 기수를 낮추기 시작했다.

1등석에 앉은 리성원은 곁에서 안전고리들을 꿰며 부산을 피우는 손님들을 의식하지 못한채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평양국제비행장에 바래주러 나온 사람들은 누구나 석별의 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홍송미가 제일 극성이였다.

《선생님, 이걸 꼭 혜림이에게 전해주세요.》

리성원은 그가 넘겨주는 네모진 포장곽을 의아쩍게 바라보았다.

《조선치마저고리예요. 그애의 체격이 나와 비슷하다고 해서 내 몸치수에 맞추었는데 색갈이랑 마음에 들겠는지는 모르겠어요.》

리성원은 코마루가 찡해왔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송미의 손을 쓰다듬기만 했다. 이 귀엽고 갸륵한 처녀와 헤여지는것이 제일 서글퍼지는것이였다.

《네가 배워준 노래를 잊지 않고 잘 련습해서 다시 평양에 올 때는 멋진 독창프로로 너의 가족들앞에 출연하련다. 이것만은 꼭 믿어다오.》

전날 밤 홍승혁의 집에서 저녁식사가 끝날무렵에 열린 가정오락회에서 변변히 노래를 부르지 못한것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였다.

《좋아요. 선생님의 예술감각과 목청이면 얼마든지 1등은 문제없을거예요. 다음번 오락회심사는 제가 하겠으니 우리 잘 약속해서 본때를 보이자요. 피아노반주는 조금도 걱정마세요.》

야무진 송미의 말에 리성원은 눈물이 고인 눈가에 웃음을 담지 않을수 없었다.

승객들이 탑승하려고 출구로 빠지기 시작했다.

리성원은 자기에게로 다가서는 홍승혁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추워질것 같은데 속옷이랑 든든히 껴입었나?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네.》

《이젠 겨울도 무섭지 않네. 내 마음속에 봄을 안고 가는데 그까짓 추위가 대수겠나. 래년 4월에 다시 올 생각이네. 그때는 집사람도 데려올 결심이야.》

《응당 그래야지. 그래, 떠나면서 내게 뭘 부탁할것은 없나?》

홍승혁이 리성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그…》

리성원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갑자르기만 했다.

《어서 말하게. 아직도 주저되는게 있나?》

홍승혁이 가볍게 나무랐다.

리성원은 장인의 유언과 유골함을 가져와서 그의 고향에 안치하고싶은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조선사람이 죽어 자기 고향에 묻히는거야 지극히 당연지사가 아니겠나. 더구나 자네의 장인이야 외세에 의해 강요당한 민족수난의 희생자가 아닌가. 그런 공연한 걱정을 말고 래년 봄에 올 때 꼭 모셔오게. 우리 함께 성천에 가서 잘 안장해주자구.》

《승혁! 정말 고맙네. 내 자네 말대로 꼭 하겠네.》

리성원의 주름잡힌 두볼로 참고참아오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진정하게. 그리고 집안일때문에 너무 걱정말게. 이제 손녀도 며느리도 다 만나게 되고 모든 일이 다 잘될걸세. 내 말대로 될테니 두고보라니까.》

홍승혁의 목소리도 어느새 젖어들었다.

리성원은 홍승혁과 바래주러 나온 사람들을 바라보며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두팔을 벌리고 그들모두를 한아름에 그러안을듯 까딱않고 한자세로 굳어졌다. 눈물이 앞을 가리워 잘 보이지 않아도 너무도 생동하고 따스하게 안겨오는 이들이였고 이들이 사는 땅이였다.

(아, 내 삶의 뿌리를 내리고픈 자양의 터여!)

 

역사를 나오는 리성원을 안해 하의영과 회사 부사장, 서기, 친구인 서해수가 따뜻이 맞아주었다.

악수를 나누며 가벼운 문안인사를 주고받은 후 그들이 탄 두대의 승용차는 곧 시내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차창밖을 바라보는 리성원은 왜서인지 울적해지는 기분을 털어버릴수가 없었다. 열흘만에 보는 눈에 익은 모든것이 죄다 설어보이는 까닭때문이였다. 대신 눈앞에 얼른거리는것은 평양의 모습과 홍승혁이며 송미를 비롯한 잊을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들이였다.

《가셨던 일은 잘되였는가요?》

너무도 말이 없는 남편의 얼굴을 살피던 끝에 불쑥 꺼낸 하의영의 물음이였다.

리성원은 차창에서 눈길을 돌려 안해를 쳐다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의영은 다소 마음이 놓이는듯 했다. 그렇게 보니 남편의 얼굴색이 퍼그나 좋아보였다. 그래 다시 물었다.

《당신이 찾아간 곳이 정녕 에덴동산이 옳긴 옳던가요?》

《당신은 믿기 어려울테지만 공상이 아닌 현실이였소. 그것도 아직 세상에 있어본적이 없는…》

《?!》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이 운전사의 옆에 앉아있던 서해수가 느닷없이 물었다.

《그러니까 형님은 이모저모로 수확이 큰셈이군요. 하긴 여기서두 형님네 집 지붕우에서 까치들이 계속 짖어대는걸 보구 짐작은 했더랬소. 정말 신통하더라니까. 그렇지 않수, 형수님?》

서해수가 말하면서 한눈을 끔쩍해보이자 하의영은 입을 가리고 소리없이 웃었다.

《거 듣기 좋은 말이군. 마찬가지로 나도 이번 기회에 자네를 새로운 눈길로 보게 되였네. 자네에 대한 나의 걱정이 불필요하고 공연한것이였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 자네가 벌려놓은 일들은 잘되여가나?》

《여부가 있겠소.》

《음-》

어느덧 집앞에 차가 이르자 리성원은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는 곁으로 다가온 부사장에게 래일 아침 회사에서 출장결과를 토의하자고 일렀다.

부사장네가 탄 차가 사라지자 리성원은 오래도록 자기 집을 둘러보았다.

불과 열흘새에 무슨 큰 변화가 있으랴 생각했다만 정작 텅 빈집에 다시 오고보니 기분이 절로 쓸쓸해졌다.

《당장 바쁜 일이 없으면 집에 들어가서 좀 앉았다가 가지. 자네에게 할 말도 있는데…》하며 리성원은 서해수에게 손짓을 했다.

《날 눈치없는 사람으로 만들려구 그러슈? 그새 형수님이 내가 오작교를 허물어서 견우직녀를 못 만나게 하는것처럼 몰아대면서 얼마나 나를 달궈댔는지 모른다우. 이제 그 집에 들어가 앉았다간 또 졸경을 치를것 같소.》

서해수가 능청스레 두팔을 휘젓자 하의영이 그에게 다가가 덥석 손목을 잡아끌었다.

《어디루 뺑소니를 치려고 해요? 이제 들어가서 나를 따돌릴 작당모의를 한것도 다 빠개놓아야 하겠는데 증인이 없으면 어떻게 한단 말이예요?》

악의없는 두사람의 싱갱이질에 리성원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새 자네가 나대신 저 사람의 성화를 받느라고 맘고생이 있었겠네. 그러니 이젠 그 고역을 나한테 넘기고 자넨 표창을 받으면 되겠네.》

《표창까지야 뭘…》 하며 서해수는 하의영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엉금엉금 현관쪽으로 향했다.

응접실에 들어온 리성원은 서해수와 함께 안락의자로 다가가 앉으며 안해더러 커피를 끓여 들여오라고 했다.

애완용개가 앞탁 맞은켠에서 긴장하게 몸을 꼬부리고 오래간만에 나타난 두사람을 유심히 살피다가 하의영이 사라진쪽으로 뽀르르 달려갔다. 그래도 자기를 고와하고 돌봐주는건 안주인이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였다.

그 모양을 띄여본 리성원이 허거프게 웃었다. 그사이 저 령리한 명물이 안해를 유일하게 동무해주었을것이였다.

리성원의 눈빛을 살피던 서해수가 한마디 했다.

《낯색은 좋아보이는데 기분은 너무 울적한것 같수다. 혜림이와 며느리가 없더라도 어쨌든 집이야 집이 아니겠소.》

《그래, 자네 말이 옳아. 집이야 집이지. 그동안 우리 집일을 돌봐주느라고 자네의 고생이 많았겠네.》

리성원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누가 그런 얘길 듣겠답디까. 자꾸 그러면 옹색해지우다.》

하의영이 커피 두잔을 가지고 들어와 탁앞에 놓아주었다.

《여보, 거 트렁크를 여오.》

《해외출장을 갔다와서 트렁크를 열라는 소리는 처음인것 같군요.》

《그래, 처음이요.》하고 리성원은 선선히 수긍해주었다.

하의영은 트렁크를 가까이 가져다 놓더니 열었다. 맨우의 포장곽을 풀었다. 조선치마저고리였다.

《아니, 이건… 금강산팔선녀의 옷을 벗겨온게 아니예요?》

《허, 당신 말을 신통하게 했소. 혜림이 오면 주기요.》

《평양에서 샀게요?》

《평양선녀에게서 받은거요. 혜림이의 자매벌이 되는… 내 전화한적 있었지, 홍혜림을 친했다구.》

리성원이 안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내밀었다. 받아들자마자 하의영이 혀를 찬다.

《어마, 정말 선녀같군요. 그러구보니 홍혜림이 맞겠군요. 어딘가 혜림이 비슷하기도 해요.》

리성원은 평양에 도착해서부터 떠날 때까지 자기를 안내해준 송미와 홍승혁의 가정과의 기막힌 상봉에 대해 두서없이 말해주었다.

서해수도 사진을 넘겨받아 보더니 고개를 시원히 끄덕인다.

《아니, 정말 선녀것보다 더 멋지군요.》하고 저고리를 펼쳐본 하의영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질렀다.

하의영이 자개박이함을 꺼내들자 리성원이 다가가 받아들었다.

《이건 고려청자기인데 홍형이 해수, 자네에게 기념으로 보낸걸세. 만수대창작사라는 유명한 공예품창작기관에서 만들었다는데 나도 이런 진품은 처음 보네. 그리고 원앙새를 그려넣은 향로형식의 청자기는 그의 부인이 당신한테 전해주라고 하더군.》

청자기를 넘겨받은 서해수가 탄사를 뿜어냈다.

《히야, 정말 보기에도 처음이요. 이 비취색과 모란꽃새김무늬가 얼마나 조화롭고 변화무쌍하오. 참외모양을 형상한 이 형태선들은 또 얼마나 경쾌하고 날씬한가 말이요.》

《여기에 그려진 두마리의 원앙새는 금방 뛰여나와 날아갈것만 같군요. 이건 돈으로는 계산할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가진 예술의 극치란 말이예요. … 헌데 돈과 기업밖에 모르는 당신에게서 이런 뜻깊은 기념품을 받게 될줄은 정말 몰랐는데요.》

《그게 어디 내가 마련한거요? 홍형네 량주가 나의 조국방문을 기념해서 성의껏 준비한거지.》

하의영과 서해수의 눈길이 일시 마주쳤다. 그들을 바라보던 리성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곱씹었다.

《그렇소. 나에게는 분명 조국이였소. 조국!…》

감개가 무량한듯 머리를 끄덕이던 리성원이 서해수에게 말했다.

《해수, 자네 무슨 동포조직을 내온다던 일은 어떻게 돼가나?》

《잘돼가오.》

《그 일이 참 중요하다는것을 내 이번에 깨달았네. 나같이 조국이란걸 모르고 제 기분에 살아가는 동포들이 얼마나 많은가. 조금 있으면 그들은 물론 자식들도 모두 조국을 모르는 가련한 인생으로 되고말걸세. 그들의 마음속에 조국을 심어주어야 해. 그러면 우리 집 같은 비극을 당하지 않을거네.》

리성원은 패가와도 같은 자기 가정의 현실이 가슴아픈듯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천천히 거닐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서해수가 웃음어린 얼굴로 말했다.

《참, 형님이 마침 우리 동포조직이야기를 꺼냈으니 말이지… 내 오타와에 갔다가 희경이… 바로 혜림이 에미를 만났댔소.》

《그게… 그게 정말인가?!》

리성원이 놀란 눈길로 하의영을 바라보다가 서해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언제 거짓말을 합디까. 방직회사에서 녀공으로 일하는데 우리 동포조직의 핵심으로 있습디다. 그 지부의 활동경험을 알자고 갔다가 우연히 만났수다. 시부모님께 죄를 지었다구 하면서 혜림이가 돌아올 때쯤이면 자기도 집으로 오겠다고 합디다.》

《그래? 건강은 어떻든가?》

《퍽 수척해졌는데 기분이랑 명랑한걸 봐선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더군요. 동포조직에서 많은 도움을 받는가 봅디다.》

《그렇단 말이지…》

리성원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담고 머리를 끄덕거렸다.

《아마 혜림이도 인차 돌아올거요. 난 그렇게 믿고싶소.》

《자넨 정말 나한테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야. 그렇지 않소, 여보?》

하의영이 말은 못하고 눈물이 글썽해서 고개를 까딱거리기만 했다.

《그런 실없는 소린 제발 그만두우. 차라리 우리 이악쟁이형수님한테서 술 한잔을 받는게 더 낫겠수다. 허허허!》

세사람은 즐겁게 웃었다.

이때 초인대화기가 울렸다. 하의영이 다가가 화면을 보더니 알지 못할 사람이라는듯 머리를 저으며 리성원을 쳐다보았다.

할수없이 리성원이 화면앞에 다가갔다.

《엉?!》

순간 그는 미간을 세웠다.

저 사람이 어떻게 나타났을가?! 정말 냄새를 맡는덴 귀신 한가지로군. 그의 인상이 이그러지는것을 본 서해수가 다가가며 물었다.

《누군데 그렇게 형님의 기분을 잡쳐놓는거요?》

《누구긴 누구겠나. 언제나 우리 동포들을 위해 뛰여다닌다는 그 친절한 사람이지!》

그의 말에 서해수도 상을 찡그렸다.

리성원이 대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시오, 부령사님께서 어떻게 우리 집엘 다 왕림하셨소?》

대화기안에서 귀에 익은 살가운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오래간만입니다. 먼 해외려행길을 즐겁게 다녀오셨습니까?… 그런데 손님을 이렇게 밖에 그냥 세워둘 작정이십니까?》

대답을 하기조차 역겨워진 리성원은 안해에게 눈짓을 했다.

하의영이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며 머리를 끄덕이고 나갔다.

《이건 꼭 궂은 장마비가 내리는 날 바지가랭이에 감겨돌아가는 개와 같다니까. 으음-》

서해수가 투덜거렸다. 그러더니 급히 앞탁우에 놓여있는 기념품들을 한아름 안아들고 옆방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잠시후 무테안경을 낀 한시명이 하의영의 안내를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아, 서사장님께서도 와계셨군요. 이거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좀 섭섭한데요. 그 좋은 길을 떠나시면서 저한테 한마디 말씀도 안하시다니요. 저도 동포로서 사장님들의 가까운 친구가 될수 있다고 자부해왔었는데 정말 유감천만입니다.》

《같은 동포라고 해서 다 친구가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소. 또 아들벌이 되는 사람과 아버지의 나이벌 되는 사람끼리 친구가 될수야 없지. 안그렇소, 부령사어른? 자, 어서 앉으시오.》하며 리성원이 점잖게 안락의자쪽을 가리켰다.

《흐음, 그래요? 감사합니다.》

안락의자에 앉은 한시명이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웃턱을 별스레 씰룩거렸다.

《손녀와 며느리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군요. 아무쪼록 집밖을 나다녀도 살아가는 재미는 괜찮은것 같습니다. … 뭐, 달리 생각지는 말아주십시오. 이래저래 축하드릴 일이 생겨 들렸습니다.》

《뭔가 삭갈린건 아니요?》

《천만에요. 너무 긴장하실 필요는 없을것 같습니다.》

《내 집에서 긴장할거야 뭐 있소. 하물며 이렇게 친절하고 세심한 부령사나리까지 와계시는데야.》

《흐음, 역시 말할 재미가 있군요. … 우선 서사장님께서 여기 H시에 동포조직지부를 내온데 대해서와 보다 중요하게는 사장님께서 평양방문을 다녀오신데 대해 축하를 드리자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리성원과 서해수의 눈길이 마주쳤다.

《모든게 무사히 진행되였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 그래서 말입니다. 뭐라 할가. 이제 사장님의 평양방문소식이 파다하게 퍼지면 그에 대한 동포사회의 호기심이랄가, 반향이랄가 하는것이 만만치 않을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령사관에서는 사장님의 평양방문소감과 관련한 간담회 같은것을 한번 조직해볼 생각인데… 어떻습니까?》

상대방의 심중을 떠보는듯 눈망울을 이러저리 굴리며 한시명이 말을 주어섬겼다.

《고맙소. 그런건 우리가 알아 조처할테니 그런 걱정까지 안해도 되오. 가뜩이나 바쁘신 부령사어른께 그런 부담까지 줘서야 되겠소.》

리성원이 시답지 않아하는 어조로 대꾸했다.

《그렇게까지 겸손할 필요가 있을가요. 사장님, 전 진심을 터놓고있는중인데요.》

한시명이 안락의자에서 몸을 솟구며 리성원에게로 바싹 다가들었다.

《이것 보오. 부령사나리! 사실 이건 후에 말하자고 하던건데 마침 나리가 먼저 진심을 말한다니 나도 한가지 보여주고싶은게 있소. 잠간만…》

리성원은 앞탁우에 놓여있는 트렁크에서 연미색종이봉투를 꺼내들었다.

모두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그가 봉투에서 여러장의 흰종이들을 꺼내드는것을 지켜보았다.

리성원은 그중에서 어느 한장을 한시명에게 내밀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이 낯이 익지 않소? 이 사람이 누구인것 같소?》

뚫어지게 그림을 들여다보던 한시명이 꿈틀 놀랐다.

목을 잔뜩 뽑아들고 넘겨다보던 서해수가 반색을 했다.

《아이구, 이거 부령사님이 언제 이런 모델노릇까지 하셨소? 정말 신통하우다. 참 잘 그렸군요.》

《글쎄,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형상한것만은 틀림이 없군요. 이 미술가분에게 인사를 올려야겠군요.》

한시명이 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림을 넘겨주려 했다.

《본인도 인정하는 그림이니 그러지 말구 기념으로 건사하오. 내겐 또 있으니까. 그건 내가 평양에서 만났던 류광원이라고 하는 한 미술대학 학생이 구면지기인 장목사님께 전해주는거요. 3년전의 일이라던지… 북의 인권을 비방하는 기자회견발언문을 외우지 않는다고 우산대로 사정없이 찔러 얼굴에 영원히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겨놓은 소년! 그도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했소.》

얼굴이 파리해지다 못해 새까맣게 질린 한시명이 중풍을 만난듯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도 그 대학생의 말을 듣고는 차마 믿을수가 없었소. 하지만 기억력이 사진기와도 같은 순진한 그의 머리속에 잊을수 없는 상처를 남긴 당신의 모색이야 어디 가겠소.

장목사! 그래, 그때 바람같이 자취를 감추었던 당신이 여기엔 왜 나타났소? 그리구 나를 기자간담회에 끌어내려는 진목적은 뭐요? 이 늙은걸 제2의 류광원으로 만들어볼 생각이였소?!》

리성원은 비지땀을 쏟으며 씩씩거리는 한시명을 가소로이 바라보았다.

《지금 북에서는 사람들의 인권이 최대로 중시되고 훌륭히 보장되고있소. 누구라 할것없이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지니고 근심걱정없이 살고있으며 정치적안정을 누리고있소. 다시말해서 사람을 제일로 귀중히 여기고 모든것이 근로민중을 위해 복무하며 후대들에게 만복이 차례지는 별천지가 바로 북이란 말이요. 당신같이 동족대결을 업으로 삼고있는 무리들이 외세의 추종밑에 여기 해외에까지 기여나와 정체를 위장해가며 북의 이러한 현실을 아무리 외곡하고 훼손해보려고 해도 그건 한갖 시대착오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뿐이요.》

리성원의 준렬한 론조에 한시명은 완전히 기가 꺾인듯 축 늘어진채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아마 당신은 오늘 우리 집에 온것을 두고두고 후회할거요. 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당신이 나라의 통일과 민족의 대단합이라는 대업에 역행해온 자신의 행위에 대해 더 후회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이젠 우리 집에 다시는 발길질을 마오, 부령사나으리!》

리성원은 겨우 자신을 진정하며 거칠게 숨을 톺았다.

서해수도 입을 딱 벌리고 리성원을 놀라운 눈길로 지켜보고있었다.

기진맥진한 한시명이 리성원을 노려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터벌터벌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하의영이 바래우려 움직이는데 리성원이 제지시켰다.

《개는 바래주는 법이 없소.》

서해수와 하의영이 경탄의 눈빛으로 리성원을 바라보았다.

《그새 형님은 평양에 가서 도를 닦은게 아니요? 나 같은건 쳐다보지도 못할 아득히 높은 상상봉에 거연히 서있으니 말이요. 형수님! 이거 우리가 사람을 헛갈린건 아닌지 모르겠수다.》

《나도 지금 그 생각이예요. 갑자기 젊어진것 같기도 하고 기운이 팔팔해보이는것이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분명 나의 님이 틀림없다는것밖에는…》

리성원이 방금전과는 달리 훤한 웃음을 지으며 안해의 어깨에 슬며시 손을 얹었다.

《이제야 당신이 나를 정확히 본것 같소. 아무렴. 봄의 고향을 다녀왔으니 젊어지고 팔팔해질수밖에. 그렇다고 나를 질투하진 마오. 당신도 이제 나처럼 젊어지게 될테니까.》

《그게 정말이예요?!》

하의영이 믿어지지 않는듯 깔끔한 눈으로 그의 아래우를 훑어본다.

《정말이 아니면 내가 언제 실없는 소릴 한적이 있소. 내 말만 믿으면 되오.》

리성원은 속이 후련하도록 껄껄 웃으며 안해와 서해수를 안락의자에 끌어다 앉혔다. 그리고는 량쪽에 자기 손을 내맡기고 웨치듯 말했다.

《명년 봄엔 우리 다같이 가자구.》

《어디로요, 에덴으로요?》하고 약속이나 한듯 두사람이 동시에 묻는다.

《에덴같은 소릴… 따스한 곳, 봄의 고향이지!》

리성원의 목소리는 어느새 푹 젖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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