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 회)

제 3 장

14

 

촌아낙네처럼 치마를 불룩하게 입고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든 지혜는 서울역앞에서 전차를 내렸다. 몇발자국 걷던 그는 문뜩 거리를 둘러보며 잠시 우두커니 섰다.

낯익은 거리면서도 새삼스럽게 낯이 선 거리이기도 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간소하고 침착한 민족적빛갈은 어디 가고 소란스럽도록 얼룩덜룩한 미국식빛갈로 바뀐 서울거리에 요즘에는 왜풍마저 점점 범람해지고있었다.

다방에서 흘러나오는 음탕한 쟈즈, 을씨년스런 일본노래, 영화관앞에 나붙은 권총을 든 깽과 긴칼을 빼든 사무라이의 영화광고, 거리를 누비며 다니는 미국제와 일본제의 각종 자동차들, 껌을 직신직신 씹으며 다니는 미군, 《한뗑》을 입고 다니면서 값싼 로동력인 조선인부를 모집하는 《××구미》의 십장녀석들로 기형화된 거리다.

《조선이면서도 조선이 보이지 않는 거리》, 《남이 사는 내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일본은 또다시 제놈들의 압박과 착취로 해서 받은 깊은 상처를 가실길도 없이 미국놈들의 략탈과 유린에 짓눌려 빈사상태에 허덕이고있는 남조선의 도시와 농촌, 어촌들에 서서히 또는 급속히 기여들고있는것이다.

정거장앞에는 기차를 기다리거나 갈데가 없는 사람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지혜도 그들속에 보따리를 가슴에 안은채 땅에 주저앉았다.

고급승용차 한대가 소리없이 그들의 앞을 스치다싶이 지나가 저쪽에서 멎었다. 운전사가 허리를 굽신하며 문을 열자 한명의 미국인과 두 녀석의 왜인들이 차에서 내렸다. 한 왜인이 무언가 감개무량한듯이 한참이나 거리의 광경을 바라보더니 미국인에게 상냥하게 지껄인다.

《저놈들은 우리의 가슴속에 뜨거운 피가 사납게 끓고있다는것을 모르고있을거다!》

지혜는 소리나는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두 대학생이 미국인, 왜인들을 쏘아보고있었다. 대학생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전군중적항쟁이 다가오고있음을 생각하고있으리라.

신문들에는 《한일회담》에서 왜놈들의 치욕적이며 모멸적인 발언들이 보도되고있으며 미제의 지령에 충실한 《한국》대표단의 굽신거리고있는 수치스런 구걸행위들이 게재되고있다.

온 남녘의 청년학생들은 광범한 조직적련계를 가지면서 밀정들과 경찰의 집요한 감시와 미행을 박차고 결정적인 투쟁을 준비하고있는것이다. 두 대학생도 지혜도 여기 하염없이 앉아있는 류랑민들까지 지금은 서로 안면이 없으나 그날만 되면 함께 팔과 팔을 끼고 나갈 투쟁성원들인것이다.

춘천행 렬차의 개찰을 알리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왔다. 개찰구에는 형사 두 녀석이 승객들의 아래우를 훑어보고있다.

《색시, 어디 가?》

한 형사가 지혜에게 그렇게 물었다.

《본가집에 나들이가요.》

지혜는 어리숙하게 대답하였지만 그자는 놓아주지 않고 보자기를 열어보이라고 하였다. 지혜는 순순히 하라는대로 하였다. 보자기안에는 동생에게 사다준다는 연필, 어머니에게 사다준다는 인조견치마 한감, 아버지께 드린다는 털목도리 하나 그리고 지혜 자기것이라고 말하는 옷 한벌과 눅거리 분 한곽이 들어있었다. 흥미가 없어진 형사는 턱짓으로 가라고 하면서 그것을 밀어치웠다. 지혜는 군말없이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어서 다시 싸가지고 기차에 올라탔다.

피난민렬차같은 3등차칸 한구석에 지혜는 겨우 자리 하나를 얻어앉았다. 곁에는 아이를 업은 아낙네와 그의 남편인듯 한 얼굴에 검버섯이 돋고 입술이 튼 중년남자가 앉아있었다. 선반에 올려놓은 그들의 커다란 보따리에는 칼도마가 비죽이 나왔고 바가지짝이 매달려있었다. 기차만 타면 흔히 볼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류랑민이다.

아이가 배고프다고 줄곧 칭얼거리고있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부부는 한두마디 달래다가 어떻게 할수 없어 한숨을 푹 쉬였다.

《어디까지 가시나요?》

지혜는 보자기속에 들었던 보리떡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쥐여주며 물었다. 녀인은 고마와 어쩔줄을 몰라하며 사정이야기를 하였다.

《울산에 가요. 거기 가면 일자리가 있다고 해서 가긴 갑니다만 걱정이 커요.》 하는 안해의 말에 남편이 후 한숨을 짓는다. 군사깡패들은 울산에다 기간공업지대를 만든다고 동백꽃 아름답던 산야를 마구 파헤쳐놓고있다. 실업자들이 마지막푼전을 다 써버리면서 울산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예정한 기간에 벽체도 세운 공장이 거의 없는 울산에서 일자리가 있을리 없어 모여든 실업자들은 한지에서 거적때기를 쓰고 자고 쓰레기를 주어먹으면서 간신히 연명하고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울산은 《병마의 소굴》, 《기아의 왕국》인 남조선의 가장 전형적인 축도로 되였다. 그 울산에로 이들이 찾아간다는것이였다.

《거기라고 무슨 일자리가 있겠소만 앉아서 굶을수도 없으니 떠나보는거요.》

남편은 수없이 꺼져가는 한숨을 지으면서 중얼거리였다. 지혜는 쓰린 가슴에 격한 마음을 담고 생각하였다. 이 선량한 사람들에게 한시바삐 삶의 힘을 안겨주어야 한다. 그날을 하루라도 앞당겨야 한다.

저녁무렵에 지혜는 ㄷ광산이 있는 광산마을에서 기차를 내렸다. 지혜는 아무에게도 길을 묻지 않고 이 아근에 익은 사람처럼 목적지를 향해 걸음발을 다우쳤다. 권범은 도착하는 곳까지의 길을 놀랍도록 상세히 가르쳐주었던것이다.

《…그 언덕받이에 다달으면 산중턱에 세채의 집이 보이오. 그곳에 도착할 때쯤에는 날이 아주 캄캄해질거요. 혹시 날이 흐려서 달빛이 없어도 올라가는 오솔길은 유난히 큰 느티나무곁을 지나갔으니까 찾기 쉽소. 세집중 한복판의 집에서 모두가 기다리고있을거요. 만약에 세집중에 불이 없는 집이 있으면…》

권범은 제2의 집합장소도 그렇게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비교적 헐하게 그밑에 이른 지혜는 느티나무의 시커먼 그림자를 발견하자 불현듯 몹시 가슴이 뛰였다. 서울역을 떠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혜는 임무만을 생각하자고 마음을 억누르고있었다. 그러나 강우가 있을 그집이 눈앞에 다가오자 그에 대한 그리움은 아무리 돌을 처넣고 흙을 다져넣어도 어디론가 슴새여나오는 샘물처럼 가슴속에 스며든다.

《어두운데서 뭘 하니?》

지혜는 놀고있는 아이가 보이지 않았지만 무턱대고 낮은 소리를 내였다.

산중턱에 세 초막의 어두운 륜곽이 보였다. 한채에는 불이 있지만 두채에는 불이 없다. 한 아이가 느티나무뒤에서 튀여나왔다.

《말소리가 너무 커요. 선생님은 자기가 온걸 개놈들한테 광고할 처지가 못되잖아요. 내뒤를 따르세요.》

어린아이는 작은 산짐승처럼 몸이 빨랐다. 산길에 익숙치 않은 지혜는 가까스로 따라간다.

《풀덤불을 다치지 말고 걸으셔요. 소리가 나요. 보자기를 이리 주세요. 밀정들이 얼마나 우글거리는지 아셔요?》

《얘, 좀 천천히 걷자꾸나.》

《어쨌든 좀 소리나지 않게 걸으셔요.》

귀여운 아이는 정말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걸었다. 산중턱을 타고 얼마를 돌았는지 짐작도 할수없이 한참을 걷자 이른봄의 산골밤이건만 잔등에 땀이 내밴다.

《저 굴속이예요.》

사내아이가 손을 쳐드는데로 시선을 돌렸으나 지혜에게는 어둠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흥, 꼭 리영아저씨가 처음 왔을 때 같아요.》

《리영아저씨? 》

여기서 부르는 강우의 별명이다. 지혜는 곧 그를 만날수 있다는 생각에 얻어맞은것처럼 머리가 어지럽기도 하였고 그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기도 하였다.

《모르세요? 리영아저씨는 알고계시던데요?… 그렇지만 지금은 아저씨도 장사예요.》

《아저씨도 여기 계시니?》

《왜 물어요? 가보시면 알게 안야요. 자, 다 왔어요. 이리 들어가야해요.》

재빠른 사내아이는 한손에 보자기를 든채 다른 손으로 지혜의 손을 잡고 허리를 굽혔다. 뒤따른 지혜는 엎드리고도 돌부리에 어깨를 찧으면서 가까스로 동굴안에 들어섰다. 바깥도 어두웠지만 동굴안은 지척도 분간할수 없는 어둠이 절벽처럼 앞을 가로막는다. 사내아이는 지혜의 손을 꼭 잡고 이끌어주었다.

《여기 물웅뎅이가 있어요. 담벽에 꼭 붙으세요. 인제 굽인돌이예요. 거기 돌아서면 불빛이 보여요.》

정말 멀리 어슴푸레 불빛이 있었다. 또 한 굽인돌이를 돌아서자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지혜는 뜨겁게 뒤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캄캄하고 구질고 낯선 동굴속 길을 불빛을 향해 걸었다. 열두명의 탄부들이 지혜를 기다리고있을것이였다. 목마르게 기다릴것이였다.

사내아이가 불빛이 새여나오는 거적을 들쳤다. 몇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왔구나, 드디여 왔구나!》

기쁨에 넘치는 굵은 목소리들, 강우의것은 아니였다. 지혜는 동굴 어중간에 칸막이한 그 방에 들어섰다. 방안의 사람들모두가 반기면서 지혜에게로 다가온다.

방등불에 얼룩이 진 그들의 거치른 얼굴들, 그러나 소박하고 유순한 표정들, 지혜는 강우를 찾지 않았다. 감동에 떨리는 손으로 치마폭밑 허리에 띠고 온 또 하나의 보자기를 꺼냈다.

복희가 지혜의 두손을 그러쥐며 소리친다.

《3년이 되였어. 우리는 이렇게 만났어.》

작별은 감방에서, 상봉은 결전전야다. 그들은 손을 잡은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뿐 오래동안 말이 없었다. 주위에 서있는 사람들은 복희의 깊은 시선과 지혜의 불꽃튀는 시선에 담긴 많은 뜻을 감득하였지만 두 녀자는 가슴속에 벅차오르고있는 격한 감동을 말로 표현할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들의 표정에는 무엇보다도 상대방에 대한 찬탄과 믿음이 있었다. 험준한 투쟁의 길을 따라 떳떳한 생활의 로정을 거쳐 자랑을 가지고 만날수 있은 그들이다. 상대방에 대한 그 믿음과 경탄, 결전전야의 긴박한 정황속에서는 상봉은 터질듯 한 기쁨이 아닐수 없었다.

《지혜, 훌륭하게 싸워주었어.》

복희는 찬연한 미소를 그리고 직조공의 나긋한 손을 더 꼭 잡았다.

《복희는 나의 매 걸음에서 항상 고무자였어.》

지혜는 광부의 거칠고 마디진 손을 더 힘껏 잡았다.

《권범씨도 안녕하셔. 이걸 복희에게 주어달라고…》

지혜는 형사에게 나들이선물이라고 했던 종이에 싼 옷감을 주었다.

《별걸 다 사셨어!》

복희는 수집어서인지 성이 나서인지 알수 없는 당황한 얼굴로 지혜에게 등을 돌리더니 뒤로 물러섰다. 권범은 그 옷감을 주면서 말했었다.

《성을 낼거요. 이 준엄한 시각에 쓸데없는짓을 한다고 그러겠지. 그렇지만 사고싶었소. 사고싶어 견딜수 없었소. 성을 내거든 그렇게 전해주오.》

지혜는 복희의 등에 대고 물었다.

《연희도 어머니도 안녕하셔?》

《안녕하고말고. 인젠 숙성한 처녀요.》

한 광부가 잠자코 있는 복희를 대신해서 대답하였다. 지혜는 그 광부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역시 강우가 아니다. 걷잡을수 없는 마음으로 방안을 살폈다. 간데라불빛은 그 아근만 밝아 어슴푸레한 주위에 서있는 광부들의 얼굴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알아보지 못하는군. 형사들이 몰라본것도 응당하지.》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였다.

《지혜.》

바로 옆에서 낯익은 다정한 목소리가 지혜의 가슴을 흔들었다. 모든것이 꿈속의것처럼 답답해보였다. 강우는 모두와 꼭같은 검은빛작업복을 입고있었고 그의 손을 잡는 커다란 손도 딴 사람의것과 구별되지 않게 두텁고 믿음직스러웠다. 다만 덥수룩한 수염속에 두눈이 빛나고있었다.

《털보지요. 착암의 명수고…》

누군가가 그렇게 롱담을 하였다.

강우의 그 총명한 눈은 지금까지 지혜가 한번도 볼수 없었던 그렇게 격하게 빛발치고있었다. 며칠후, 광산에서 벌어질 결전전야의 결의가 그의 눈을 그렇게 빛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전에 그들이 서로의 의혹에 차서 바라보기가 괴로와 외면을 하였다가도 초조해서 다시 바라보기도 하던 그 눈이 아니다. 그래서 그때 그들은 달래도 보고 한숨도 지으면서 만나지 못할 때도, 만났을 때도 고통스럽기만 하였었다.

하건만 두사람은 헤여진 후 각기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면서 전진하여 온 그날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현재 가슴을 채우고있는 격렬한 모든 생각에 대해서도 단 한마디의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지만 지혜는 자기가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강우의 뜨겁고 훌륭한 모든 생각을 다 받아들이고있다는것을 스스로 똑똑히 느낀다.

《자 우리의 결사대, 땅속에서 진리를 찾고 승리를 위해 완강하게 힘을 기르고있는 훌륭한 광부들을 소개하지.》 하고 강우가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롱담을 하듯, 연설을 하듯 그렇게 말하자 광부들은 소리내여 웃었다. 한사람한사람 지혜의 손을 굳게 잡는 광부들의 소박한 눈길들, 자신만만한 거동들, 지하의 암흑도, 파쑈의 채찍도 이들을 짓누를수 없는것이다.

그들은 광산매도의 계약이 성립되였다는 정보를 닷새전에 권범에게서 받았다. 대기하고있던 광산조직은 마지막결전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들은 광산의 중요한 기계들이 돌아가지 못하도록 파괴할것이며 미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파업과 힘의 시위를 동시에 시작하기로 결정지었다.

략탈자들도 광부들의 반항이 없을수 없다는것을 생각하였던지 인계에 앞서 광산주변에 삼엄한 경비망을 늘여놓았다. 수백명의 무장한 경관들이 광산마을을 겹겹이 둘러싸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전투준비를 갖춘 《국군》 한개 중대까지 대기시키고있다.

그런 삼엄한 경비망을 거쳐왔건만 지혜는 자기가 어떤 보호밑에서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할수 있었는지 다 알지 못하고있다. 광부들이 정거장에서 예까지 오는 도중 곳곳에 매복하여 지혜의 안전을 보장하였다는것을 어떻게 다 알수가 있겠는가.

강우를 포함한 여기 열두명의 광부들은 10개의 파괴조를 각기 책임진 이름그대로 결사대성원들이다. 이들은 죽음을 각오한 결정적인 투쟁에 앞서 지혜를 맞이하는것에 더없는 흥분을 느끼고있었다. 지혜가 숨겨가지고온 보자기에는 그리 크지 않은 록음테프가 들어있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태양이시며 겨레가 한결같이 흠모해마지 않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조국통일과 관련하여 하신 연설내용이 들어있는것이다.

그이를 따르는 길에서 래일의 죽음도 두렵지 않은 이들이기에 록음테프를 매만지는 로동의 굳은 손들이 떨리고있다.

모두들 거친 손으로 옷깃들을 여미고 멍석우에 수굿하게들 앉았다.

록음테프가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아직은 회전축의 가벼운 소리뿐이다. 그렇듯 그리던 장군님의 친근하고 열정적인 음성을 기다리며 그들은 숨소리를 죽이고 그 매 초를 애타게 세고있다.

《동지들!》

이윽고 자애에 넘치면서도 힘찬 그이의 음성이 울렸다. 북받쳐오르는 가슴의 격동.

《총결기간에 남조선정세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감격에 두볼을 실룩거리는 광부들은 그이의 말씀의 한마디한마디를 귀로 듣는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긴다.

《남조선에서 군사독재<정권>이 선것은 조선에서 미제의 지위가 강화된것이 아니라 반대로 약화되였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며 그것은 죽음에 다달은자들의 마지막발악에 지나지 않습니다.》

광부들은 얼굴을 쳐들고 크게 숨을 쉬였다.

《예속자본가들은 미국의 상품과 자본을 끌어들이며 우리 나라의 자원을 략탈하여 자기들의 상전에게 팔아넘기며 미국고용군대에 군수품을 대주어 치부하고있습니다.》

바로 백창락이 ㄷ광산을 상전에게 넘기고 군수품을 대주며 치부하고있다.

《침략자들로 하여금 격분한 인민들의 항쟁앞에서 공포에 떨게 하며 그들이 우리 땅에 발붙일 곳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광부들은 바로 자기들을 정당하다고 고무하시는 뜨거운 손길을 후듯후듯 느낀다.

《남조선인민들은 해방후 16년동안에 걸치는 고난의 력사를 통하여 남북이 갈라져서는 결코 살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의 아픔도 고통도 념원도 모든것을 통찰하시는 그이의 뜨거운 어버이사랑으로 해서 광부들은 무덤속같은 죽음의 지하막장에서도 휘황한 래일을 볼줄 알았으며 고문과 학살의 인간도살장속에서 신음하면서도 삶과 기쁨의 미래를 확신하였던것이다.

그이의 가르치심은 그들에게 인간의 자주성을 되찾게 해주었고 참된 삶의 보람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자기자신을 위해서만 아니라 모든 겨레를 위한 투쟁의 자랑찬 광장에 꿋꿋이 서게 해주었다.

《오늘 우리는 제국주의식민지체계가 무너지고있는 시대, 민족해방혁명의 위대한 시대에 살고있습니다.》

그이의 육성은 그대로 가슴속에 흘러들고있다. 그들은 그이의 열정에 넘치신 음성에 몸도 마음도 잠겨있다.

《전민족의 단합된 힘에 의하여 미제국주의는 조선에서 쫓겨나게 될것이며 조국통일의 위업은 반드시 이룩되고야말것입니다.》

언제까지나 듣고있고싶었다. 무한한 힘의 용솟음을 느끼게 하는 그리운 그이의 음성을 언제까지나 듣고있고싶었다. 록음테프가 회전을 마치자 오래동안 침묵이 흘렀다. 숨가쁜 정적속에 어디선가 똘랑똘랑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광부들의 거친 숨소리에는 격동이 있었다.

미제의 군화밑에 짓밟힌 이 남녘땅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고 그들의 참담한 생활을 언제나 깊이 걱정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뜨거우신 육성을 결전을 앞둔 이밤에 듣는 이 감격. 이 세상의 모든 설음과 모든 아픔과 고통을 다 겪으면서도 울지 않은 완강한 광부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한 광부가 무릎우에 얹고있던 두손을 갑자기 미끄러뜨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였다.

《아들녀석에게 누데기와 굶주림밖에 아무것도 물려줄것이 없던 내가 인제는 감격을 가지고 물려줄 값나가는 자랑이 생겼소.》

그이께서는 땅밑에 묻히고 짓밟혔던 그들의 인생이 이렇듯 값비싼것임을 깨닫게 해주시였다.

다른 광부들은 아무 말도 할수가 없어 마디진 커다란 손으로 두무릎을 꽉 누르고있다. 오래동안 그렇게 앉아있었다.

김일성장군님,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들의 어질고 소박한 가슴에 열화같은 흠모의 정이 차고넘쳐 터질것만 같았다. 불현듯 한 광부가 곁의 동무의 어깨를 얼싸안고 웨쳤다.

《우리는 이겨! 반드시 이겨!》

《우리는 결사전에 나가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 미국놈을 내쫓고 조국을 통일해서 온 겨레가 모여 만복을 누릴테다.》

모두 서로 어깨를 겯고 일어선다. 누군가가 낮고 힘있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모두 격동에 넘친 목소리를 합한다. 주리고 헐벗은 그들, 학대속에서 피맺힌 원한을 품은 그들, 손에 못이 박히고 두팔, 두다리에 힘이 박힌 그들, 그들은 열두명의 광부, 그러나 그들은 폭압자 미제를 향해 증오의 홰불을 든 온 남녘의 싸우는 인민들의 모습이였다.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마음껏 큰소리를 낼수 없는 그들은 가슴속에서 더 커지는 그런 목소리로 온 마음을 담아 불렀다.

지혜는 곧 돌아가야 하였다. 광부들 매 사람과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ㄷ방직동무들에게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우리의 결전보다 ㄷ방직로동자들의 태업이 더 힘든 투쟁이라는것을 우리는 압니다.》

《ㄷ방직의 로동자들을 생각하니 이 지하에서 얼마나 마음이 든든했겠습니까.》

그들의 도도한 투지와 마주선 지혜는 파도치는 감동에 휩싸여 힘있게 답례를 한다.

《건투를 빕니다. 동무들!》

지혜는 거적을 헤치고 나섰다. 강우가 따라나왔다. 캄캄하고 구질은 동굴속 길을 그들은 천천히 걸었다.

《어제 아버님한테 말씀드리고 왔어요. 강우씨의 편지도 보여드렸어요.》

강우는 그저 크게 숨을 들이키였다.

《어머님도 안녕하시고 진이와 옥이도 모두 잘 있어요.》

《아버님은 머리가 더 세셨겠지? 어머님도…》

《하지만 아버님은 어머님께 말씀하셨어요. <당신은 장사요. 그런 아들을 낳았으니 말이지. > 하시면서 호탕하게 웃으셨어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있으셨지만 그래도 따라웃으셨어요.》

굽인돌이를 돌아서자 어슴푸레 어두운 하늘이 동그랗게 바라보였다. 불현듯 강우가 발걸음을 멈춘다.

《여기서 담배를 피겠소. 더 나가면 불빛이 비쳐 피지 못하오.》

지혜는 돌담에 기대섰다. 코앞에서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나더니 강우의 얼굴이 너무도 가까이에서 비쳤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일것을 잊어버린듯 불빛에 비친 지혜의 얼굴만 응시한다. 그러나 아무 말도 안한다.

얼마간 자란 구레나룻이 낯이 선것이였지만 오히려 더 미덥고 친근해보인다. 얼굴표정이 점점 더 밝아지고 말할수 없이 부드러워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우리는 지금 함께 있소. 함께 그이의 말씀을 들었소. 처음으로 함께 있었소.》

지혜는 조금도 슬프지 않은데 왜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알수가 없었다.

《저는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어요.》

《아니요. 지혜가 나의 마음을 정화시키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을 깨달았겠소. 지혜는 나를 이 정의로운 길로 인도한 길잡이였소. …》

지혜는 문뜩 북받쳐오르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하였다. 인제 며칠후면 강우는 폭동에 참가한다. 용기와 담을 가진 그는 자신의 안전을 무시할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강우와 함께 역시 폭력적인 투쟁에 참가할것이건만 강우를 생각하는 지혜는 이렇게도 가슴을 쓰리게 하는데 괴로움을 느낀다. 지혜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강우는 그런 지혜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우리 일은 조금도 위험할것이 없소. 그것때문에 걱정하지 마오. 지혜가 맡은 과업에만 온 마음을 쏟아야 하오.》

지혜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라이터불빛이 점점 가늘어진다. 강우의 얼굴도 점점 희미해졌다. 종시 보이지 않았다. 지혜는 떨리는 한숨을 지으며 용기를 내듯 발걸음을 떼였다.

입구가 점점 가까와졌다. 바깥바람과 함께 흘러드는 달빛이 두사람의 얼굴에 비낀다.

동굴밖에 벌써 사내아이가 기다리고있었다. 강우는 지혜가 동굴을 나서기 쉽도록 부축하여주었지만 자기는 나서지 않는다. 다만 허리를 굽혀 얼굴을 보이고있다. 수염에 덮인 그의 얼굴이 흘러드는 달빛에 유난히 똑똑히 보인다. 투쟁에 대한 신념과 힘 그리고 지혜에 대한 뜨거운 심정으로 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불타게 하는 그 얼굴을 지혜는 망막속에 깊이 새겨넣는다.

《지혜, 건투를! 우리는 곧 만나게 되오. 이곳 일이 끝나면 새로운 임무를 맡고 서울로 가오. 우리의 신문이 발간되오. 투쟁의 매 걸음에서 경각성을 늦추지 마오!》

《안녕히… 안녕히.》

지혜는 보자기를 가슴에 꼭 끼고 사내아이를 따라 산발을 내려왔다. 거기서 사내아이가 바가지짝이며 파묶음이며 호박이며 무우말린것들, 말하자면 시골서 서울 시집으로 돌아가는 새색시들이 흔히 가지고 가는 물건들을 싼 보자기를 주었다. 지혜는 그것을 머리에 이고 밤길이지만 기차시간에 잇대기 위해서 걸음을 다우쳤다.

광부들이 어둠속에서 지혜도 느끼지 못하게 그가 몸에 간직한 록음테프를 보호하고있다. 지혜는 예정시간대로 광산지역을 벗어났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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