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제 2 부. 국강상의 전설

제 2 장. 국강상의 가을

 

…10년 경자년에 보병, 기병 5만명을 보내여 가서 신라를 구원하였는데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으로 가니 왜가 그안에 가득 찼다.

관군이 바야흐로 도착하니 왜적이 물러갔다. …

…백잔(백제)과 남은 왜적들이 무너지고 달아났다. 그 성을 함락시켰다. …

(광개토태왕릉비문중에서)

 

1

 

399년 12월말 신라 나물왕이 급히 보낸 청병사신단일행이 변경을 넘어 고구려의 전방성인 남거성에 도착하였다.

남거성의 태수는 즉시 전령을 영락태왕 담덕이 머물고있는 평양성으로 떠나보내는 한편 신라의 사신단을 제가 직접 호송하였다.

영락태왕이 순행중이라 먼 국내성보다 가까운 평양성으로 떠났던것이다. 신라의 사신단이 아직 로상에서 말을 달리고있을 때 한발 먼저 도착한 전령에게서 보고를 받은 영락태왕은 고구려에 볼모로 와있는 신라왕족 실성에게 령을 내려 평양성 백여리밖에까지 마중나가게 하였다. 실성은 수년째 고구려에 볼모로 와있는 처지이지만 언제한번 고국 신라를 잊어본적이 없는 몸이였다.

그런데 남거성에서부터 급히 달려온 전령의 보고는 그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아닐수 없었다.

가슴을 조이는 조급중에 미쳐버린 실성은 평양성 백리밖 검수역에서 안절부절하며 신라사신단을 기다리고있었다.

영락태왕의 령만 아니였더라면 단신으로라도 말을 타고 남거성에까지 달려갔을 실성이였다.

수년간 볼모로 지내는 실성은 비록 그동안 환대를 받은 처지라고 해도 가슴속에는 자기를 대국의 볼모로 보낸 신라왕실에 대한 반감과 울분이 가득 쌓여있었다.

볼모는 말그대로 인질인것이다. 정략의 희생물이면서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가련한 처지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성은 언제한번 나서자란 신라를 잊어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신라가 백제의 사촉을 받은 왜인들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마음은 찢어질듯 괴로왔던것이다.

실성은 한시바삐 정확한 상황을 알고싶었다.

볼모로 있는 처지여서 직접 손에 검을 잡고 전장으로 달려나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울뿐이였다.

실성이 조급한 마음에 말주위를 서성거리는데 종복이 동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사신단일행이 오고있소이다.》

실성이 손채양을 하고 바라보니 저 멀리 행길우에 먼지가 자욱히 피여오르며 수십명의 기마수가 말을 달려오는 모습이 바라보였다.

실성은 말에 뛰여올라 급히 채찍질하며 일행을 맞받아달렸다.

일행에 가까이 다가서자 말고삐를 힘껏 잡아채며 말을 급하게 멈추어세웠다. 놀란 말이 앞굽을 들고 일어서는것을 솜씨있게 제어하며 목청을 돋구어 소리쳤다.

《나는 실성이요. 여기 누가 신라의 사신이시오?》

실성을 알아본 신라사신일행이 황황히 말에서 뛰여내려 허리를 굽혀보였다.

《이것이 얼마만이오이까? 실성대인, 소인은 환구장군 관자올시다.》

실성은 말등에서 뛰여내려 신라정사의 손을 잡아쥐였다.

《관자장군, 참으로 오랜만이요. 대왕님은 무고하시오?》

《예, 이번 길에 실성대인의 힘을 빌려달라고 소장에게 거듭 신칙하셨소이다.》

《헌데 어찌된 일이요? 보잘것없는 왜구의 무리에게 도성으로 가는길을 내주다니…》

신라정사인 환구장군 관자는 삽시에 기색이 어두워졌다.

《소장들의 죄가 무겁소이다. 왜인들이 백제의 지원을 받아 침공해올줄 간파하지 못하여 변경이 무너지게 된것이오이다.》

실성은 거칠게 숨을 톺으며 안타까운듯 가슴을 두드렸다.

《설사 백제의 대군이 공격해온다 하여도 능히 막아낼수 있는 전력이 있지 않소. 여기 고구려에서 보내준 수많은 무기는 다 어디로 가고 왜인들에게 참패한단 말이요?》

관자는 물론 뒤따라온 수십명의 신라인들모두가 흡사 입이 얼어붙었는지 한마디 말도 없이 시선들을 내리깔았다.

《이젠 빨리 평양성으로 가시오이다. 태왕페하께서 기다리고계실것이오이다.》

남거성 태수를 위시한 고구려사람들의 재촉에 못이겨 말등에 오르면서도 실성은 울화가 치밀어 미칠 지경이였다.

그래도 대국이라 일컫는 백제와 어깨를 겨루던 신라가 이렇게까지 취약해졌다고 생각하니 억이 막혔다.

백제와 전면전을 치르는것도 아니요 단지 왜나 가야의 렬세한 무력과 싸우면서도 련전련패하였다고 생각하니 신라조정내의 무능한 귀족들을 모조리 몰아내고싶었다.

실성이 울분을 묵새기느라 모지름을 쓰며 묵묵히 말을 몰아가고있는데 관자가 곁으로 다가섰다.

《실성대인에게 여쭐 말이 있소이다.》

관자는 앞서가는 고구려사람들의 등을 흘끔 쳐다보고는 실성의 귀에 입을 바싹 가져다댔다.

《대왕님은 이번 길에 소인에게 실성대인과 꼭 함께 돌아오라고 하셨소이다. 지금 신라는 내란과 외환을 동시에 겪고있지요. 소인의 생각에는 나물왕의 뒤를 이을분은 오직 실성대인뿐이오이다.》

실성은 소스라쳐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어세웠다.

관자노리에서 손가락만 한 피줄이 일어서서 푸들쩍 뛰였다.

《무슨 말을 하는것이요? 눈앞에 멸망의 위기가 닥쳐왔는데 합심하여 이것을 막을 대책을 강구해야지 왕위계승문제를 론한다는게 말이 되오?》

관자는 놀라서 급히 두손을 내저으며 실성의 말을 밀막았다.

《소리를 낮추어주사이다. 소인이 그래서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이렇게 찾아온것이 아니오이까. 만약에…》

관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고개를 높이 쳐들고서 실성을 향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신라가 백제에 의해 공략된다면 실성대인이 죽기로 나서서 다시 국권을 회복해야 하오이다. 고구려의 힘을 빌려서라도 신라를 구원하실분은 오직 대인어른뿐이오이다.》

실성은 관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였다.

어쩌면 관자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만일 신라조정내에서도 관자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고구려에서 수년간 볼모로 지내면서 흘려보낸 원망과 탄식의 세월이 결코 부질없는것이 아님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관자의 목소리가 계속 귀전을 간지럽혔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영락태왕을 설복하여 지원군을 내도록 하셔야 하오이다. 지금 신라는 이찬 대검의 세상이 되였소이다. 그러니 오히려 병화를 겪는것이 대인어른께는 기회가 될수 있소이다. 그러자면 소수의 지원군이 아니라 대군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보오이다. 왜군을 몰아낼뿐아니라 고구려의 힘을 빌려 대검의 무리를 쓸어내야 할줄 아오이다.》

실성은 놀라 얼결에 말을 멈추어세웠다.

평소에 안면이 두텁지 못한 관자에게서 이런 제의를 받을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것이다.

관자는 의아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실성에게 말을 이었다.

《대인어른은 볼모의 처지에 든것을 다행한 일로 여겨야 하오이다.

지나간 세월의 불미스럽던 기억은 지우시오이다. 래일이 중요하오이다. 우리 신라가 살길은 오직 고구려에 등을 기대는것뿐이지요. 이번 왜란을 겪으며 조정내의 대소무장들은 모두 실성대인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소이다. 그러니 지금 대인께서 쥐고있는 줄을 절대로 놓아서는 아니되오이다. 영락태왕의 힘을 빌린다면 천하에 두려울것이 무엇이겠소이까.》

실성은 그제야 깨도가 되는지 고개를 끄덕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으로 기웃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머나먼 도성에서 설사 그런 론의가 있어 환구장군 관자가 직접 청병사신으로 먼길을 찾아온것이겠지만 지금의 고구려의 실태로 보아 대군을 지원무력으로 파견한다는것이 몹시 힘에 부칠것이기때문이였다.

더우기 서북전선에서 후연의 수십만대군과 대치하고있는 상황에서 지원무력을 불러올데라고는 없을것이였다.

고구려의 힘도 한정되여있는것이다.

후연과 대치하고 백제와 창을 겨누고있는 상태에서 신라에까지 대군을 파견할수 있겠는가.

실성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장군의 뜻은 알겠으나 그건 무리일것이요. 설사 고구려가 청병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마 해를 넘길수 있을것이기때문이요. 지금 고구려의 처지로써는 신라땅에 대군을 보낼 처지가 못되는줄 아오.》

《무슨 소리오이까? 이제 당장 고구려군이 들어오지 않으면 도성은 함락되고마오이다. 실성대인이 간청하여서라도 지원무력이 신라로 들어가야 하오이다.》

실성은 여전히 무거운 기분이였다.

정말로 고구려가 신라에까지 지원무력을 급파하겠는지 도무지 알수 없다는 생각이 지꿎게 갈마들었다.

청병사신단을 맞이하러 검수역으로 나올 때까지만 해도 고국이 병화를 겪는다는 생각에 앞뒤를 걷잡을수 없었지만 랭철한 리성으로 돌아보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어려운 고전을 겪고있는 고구려가 정녕 신라를 도와나설것인가.

실성의 생각은 복잡했다.

평양성의 행궁에서 영락태왕의 참가하에 긴급회합이 열렸다.

회합을 주도하는것은 조정의 원로대신이며 조정대신들의 우두머리인 국상 연구흠이였다. 회합에 참가한 대신들은 여라문명밖에 안되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국가와 군대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은 오랜 원로대신들이라 이들의 결정이 국사에 많은 영향을 미치였다.

영락태왕이 순행중이라 비록 조정대신들이 모두 모인것은 아니였지만 여기에 모인 대신들의 결정만으로도 얼마든지 국사를 진행할수 있었던것이다.

맨 끝자리에 죄지은자처럼 옹송그리고서있는 신라의 볼모 실성은 잔뜩 가슴을 조이며 회합을 지켜보고있었다.

이미 신라사신의 청병발언이 있었고 나물왕의 서신이 공개된것만큼 신라에 군사를 파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결정을 내리면 되였다.

조정대신들의 가부를 묻는 영락태왕의 령이 떨어졌는데도 모두가 저마끔 눈치만 보면서 서둘러 입을 열려고 하지 않고있었다.

그만큼 중대한 일이였던것이다.

한식경이 지났는데도 편전에는 바스락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신라의 청병을 받아들이자니 후연과의 전면전을 눈앞에 두고있었고 또 백제가 언제 맹약을 깨뜨리고 기습을 해올지 모를 형편이였던것이다. 이제 군대를 신라로 파병하면 그것으로 인한 빈 공간을 무슨 수로 메꿀것인가. 그렇다고 하여 이대로 앉아 신라가 멸망하는것을 보고만 있을수도 없었다.

우선 신라는 고구려에 보호를 요청한 나라였다.

이러한 신라를 백제의 부추김을 받은 가야나 왜군의 손에 점령되기만을 기다릴수는 없는것이였다.

또한 신라가 백제의 속국으로, 속령으로 된다면 백제는 더욱 강대해질것이고 나중에는 또다시 고구려에 도전할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바로 이러한것으로 하여 조정대신들은 서뿔리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고있는것이였다.

조정대신들중 그 누구도 먼저 나서서 발언하는 사람이 없는지라 년장자인 국상 연구흠이 헛기침을 깇으며 반렬에서 빠져나왔다.

연구흠은 이젠 나이가 일흔을 넘긴 로신이였다.

3대째 국상을 지내는 인물로서 사람이 침착하고 용의주도하였다.

그는 만조백관의 우에 올라선 국상으로 명망은 높았으나 고구려조정에서는 온건파의 우두머리로 알려져있었다.

그는 또한 한번 주장한것은 굽히지 않고 내미는 형의 완고하고도 고집스러운 늙은이였다.

전쟁은 국력의 고갈과 백성들의 령락을 가져오며 많은 피를 흘리기 마련이다. 아무리 이기는 전쟁이라고 해도 전쟁을 치르는 량자는 모두 피해를 입는다. 연구흠은 이렇게 피를 흘리며 싸울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고 한사코 고집하는 인물이였다.

그의 주장은 옳은것이였다. 허나 임금된자에게 있어서 나라가 평온하고 백성들이 생업에 마음껏 종사하는것이 어찌 나쁘다 하겠는가.

전쟁으로 참화를 겪느니 화해를 도모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생산력을 늘여 나라의 부강을 이루어야 한다는 연구흠의 주장은 얼핏 들으면 리치에 부합되는것 같았으나 그것은 실지로 외부세력들이 사방에서 고구려를 호시탐탐 노리고있는 형편에서 전혀 타당성이 없는 궤변에 불과했다.

고구려가 건국이후 지금까지 수백년간 고토수복의 기치를 높이 들고 옛 조선의 령토를 되찾으며 강국으로 나설수 있은것은 주변나라들과의 화해나 도모한 결과가 아니였던것이다.

나라의 자주권을 침해하고 지경을 엿보고있는 침략자들을 무자비하게 때려 내쫓고 짓뭉개는 그 힘과 강의한 기질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오직 힘과 힘의 대결,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조국을 지켜 목숨을 바친 고구려사람들의 굽힐줄 모르는 정신력이 불가항력의 힘을 낳았던것이다.

건국시조 동명성왕이후로 력대 고구려태왕들은 흩어진 겨레를 하나로 통합하고 강대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싸워왔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였다. 아무리 강하고 부강한 나라라고 해도 영락태왕 담덕의 단호한 결심과 실천적인 행동이 없었더라면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과의 싸움에서 패했을것이였다.

연구흠은 영락태왕의 기색을 조심히 살피며 말하였다.

《페하, 신은 우리 고구려가 신라의 청병요구를 받아들일수 없다고 생각하오이다. 선대태왕시절부터 우리는 신라에 많은 무기와 말을 보내여 국력을 강화시켜주었소이다. 헌데 조그마한 잔적에게 놀라 청병을 요구하는것은 받아들일수 없소이다. 신라에 파병하면 수많은 고구려의 젊은이들이 타국에서 무주고혼이 되겠은즉 이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닌줄 아오이다.》

영락태왕 담덕이 날카로운 눈을 들었다.

《신라는 대대로 고구려에 보호를 요청하고있는 나라요. 신라가 도성이 위급하여 이렇듯 사신까지 보내여왔는데도 모른체를 하자는것이요?》

연구흠은 태연하게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페하께서는 신라의 위급함만 알았지 우리 고구려에 닥친 위기는 왜 보시지 않으시오이까. 세작들의 보고에 의하면 서부변경일대에 연나라의 20만대군이 집결하였다 하오이다. 그들이 언제 고구려의 지경을 넘어서겠는지 알수 없는 때에 신라에 무력을 파하면 큰 공백이 생길줄 아오이다. 더구나 남쪽의 백제에서 불온한 기운이 떠날줄 몰라 나라의 안전이 위태하오니 숙고하시기 바라오이다.》

영락태왕의 시선이 국상에게서 대당의 대모달 부연수에게로 넘어갔다.

《대모달도 국상과 같은 의견이시오?》

부연수는 국상과는 달리 큰소리로 담덕의 말을 받았다.

《페하, 국상의 의견에도 물론 일리가 있으나 지금까지 조공국으로 지내던 신라가 위급하여 청병을 하게 된것을 외면해서는 아니될줄 아오이다. 만약 신라가 멸망하게 된다면 언제든 그 화살이 우리에게 향해 질것이니 절대로 그냥 보고만 있어서는 아니될줄 아오이다.》

《그럼 얼마만한 병력을 파하면 될것 같소?》

영락태왕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서 이렇게 되물었다.

《신라변경에 배비되여있는 군사가 도합 5천이니 이만한 병력이면 과히 두려울것이 없다고 생각하오이다.》

장군 부연수는 잠시 속구구를 하는듯싶더니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신라사신단을 안내하여온 남거성의 태수도 반렬에서 빠져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페하, 남거성에는 또한 신이 동원시킬수 있는 무력이 3천은 되오이다. 군량도 1년은 족히 될수 있으니 어서 윤허하여주옵소서.》

국상이 황황히 손을 저으며 나섰다.

《아니될 말이요. 남거성으로부터 신라변경일대에 배비되여있는 무력은 금후 있을수 있는 백제와의 전쟁을 위해 키워온 정예의 군사들이요. 백제가 맹약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이 무력으로 그 배후를 기습공격하기로 되여있지 않소. 그런데 서뿔리 신라에 내려보내면 공백이 생기게 될것이요.》

대모달 부연수도 바짝 열이 올랐는지 눈을 부릅뜨고 국상과 마주섰다.

《신라가 멸망한다면 동부군이 무슨 필요가 있겠소? 또한 그리되면 어차피 백제군이 신라땅을 통과하여 북상할수 있으므로 증원군을 불러와야 하겠은즉 아무런 대책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있겠다는 국상의 의견은 납득이 가지 않소이다.》

《내 의견은 이렇소. 정예의 군사를 수백명 보내는것과 함께 우리 고구려의 무기를 보내여 신라군을 지원하자는거요. 신라군이 전력을 회복한다면 그깐 왜인들을 쳐몰아내는것이 무에 힘들겠소. …》

맨 말석에 서서 고구려중신들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손에 땀을 쥐고 듣고있던 실성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나섰다.

《지금 신라가 겪고있는 병화는 한갖 왜인들의 침입이 아니오이다.

왜인들의 뒤에는 백제가 있소이다. 백제의 정예군이 벌써 신라의 도성을 포위하고있소이다. 신라군은 패하여 와해되였으니 고구려군이 들어가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할수 있소이다.》

실성의 절절한 간청을 들은 고구려의 중신들이지만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있었다.

모두의 시선은 영락태왕 담덕에게 집중되였다.

과연 영락태왕 담덕은 어떤 결정을 내릴것인가?!…

담덕은 우람한 몸을 움직여 대청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담덕의 생각은 착잡했다. 그의 예측이 옳았던것이다.

백제가 지금까지 발톱을 드러내보이지 않은것은 신라를 노렸기때문이였다. 고구려에 닥쳐온 위기는 지금까지 처했던 정황들과는 전혀 달랐다. 절대로 주저앉을수가 없었다.

나라를 창업하신 동명성왕께서 창천에서 나를 굽어보고계실것이다.

옛 조선의 땅을 모두 되찾고 동명성왕의 유업을 지켜 흩어지고 갈라진 겨레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나의 의지가 절대로 여기에서 멎어서서는 아니될것이다. 조정중신들의 의견대로 신라를 소수의 무력으로만 지원하여 일시를 모면한다고 해도 백제의 야망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전쟁은 계속될것이고 동족의 피는 이 땅을 끊임없이 적실것이다.

설사 고구려의 리익을 잃는다 해도 대군을 발동하여 신라로 내려가 또다시 동족상쟁의 불을 지르려는 백제를 응징하고 온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삼국통일의 성업을 이루어야 했다. 이것은 력사가 동명성왕의 17대손인 고담덕에게 지워준 무거운 짐이였고 사명이였다.

드디여 결심을 굳힌 담덕은 고개를 들었다.

《평양성 태수 맹광이 밖에 있느냐?》

담덕의 이런 물음에 근시가 고개를 숙여보이였다.

《밖에서 기다리고있은지 이미 오래오이다.》

《어서 들어오라고 하라.》

영락태왕 담덕이 어떤 결정을 내릴것인가 가슴을 조이고있던 중신들은 뜻하지 않은 명령에 웅성거리며 서로서로 돌아보았다.

잠시후 태왕의 부름을 받은 평양성 태수 맹광이 편전으로 들어섰다.

《짐이 보내준 어의에게서 치료를 다 받았는고? 어의는 아직 몇달은 몸조리를 해야 된다고 하였는데 어떤가?》

《고구려에 위기가 닥쳐오고있는 이때에 국록을 받는 신하된 몸으로 어찌 병석에만 있을수 있겠소이까. 페하, 신은 이미 완치되였으니 념려하지 마옵소서.》

맹광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국상 연구흠이 못마땅한듯 이마살을 찌프렸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고구려에 위기가 닥쳐왔다는 그대의 말은 너무 심하오. 신라의 청병을 받아들일것인가 말것인가를 론하는 장소에서 함부로 사태를 과장하여 페하의 심기를 건드리는 평양성 태수의 본심은 무엇이요?》

맹광은 태연하게 국상의 말을 받았다.

《그건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오이다. 백제가 어찌하여 가야와 바다건너 왜를 내세워 신라를 공격하는지 그 진의도를 모르시오이까. 백제는 반드시 신라를 병탄하기 위해 전면에 나설것이오이다. 신라를 수중에 넣은 후 백제의 다음목표가 과연 어디라고 생각되오이까?》

국상 연구흠은 맹광의 명백한 론리앞에 더 할말을 찾지 못하고 물러서버렸다.

맹광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페하, 신은 이미 페하의 령을 받고 전쟁물자를 모두 갖추었나이다. 페하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신이 대군을 일으켜 신라로 내려가겠소이다.》

맹광의 말에 좌중이 몹시 설레였다.

웅성거리는 소음속에서 대모달 부연수의 놀란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평양성 태수는 방금 대군이라 하였소? 아니, 대군이라니… 그럼 변경의 수비는 누가 한다는거요? 이제는 그 어디에서도 병력을 끌어올데가 없소.》

맹광은 대모달 부연수에게로 돌아섰다.

《신라를 지원하는 무력에 대해서는 안심하셔도 될것이오이다.

페하께서는 이미전에 백제가 신라를 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것이라고 내다보시고 예견성있게 준비를 다 갖추어놓도록 신에게 명령을 내리시였나이다. 변경방위무력을 돌리지 않아도 빠른 시일내에 시급히 대군을 모집하여 신라를 지원할수 있소이다.》

이어 맹광은 영락태왕 담덕에게 아뢰였다.

《페하, 어서 령을 내려주소이다. 페하께서 령을 내리시면 평양성과 그 일대의 모든 청장년들이 페하의 성업을 받들어 손에 무장을 잡고 일어설것이오이다. 신이 의병을 일으켜 신라로 내려가겠소이다.》

담덕의 날카로운 두눈이 점차 무섭게 이글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백제가 맹약을 어기였다. 동족을 배신하여 검을 빼들었다. 어떤 일을 막론하고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하였다는것은 짐과 고구려를 공격한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짐은 이미 결심을 내린지 오래다. 신라에 대군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위력을 떨치고 통일성업을 이룰것이다.》

국상이 창백해진 얼굴을 들고 간신히 한걸음 나와섰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라로 대군을 내려보낼 때 연나라와 백제가 쳐들어온다면 어찌하시려오이까?》

영락태왕 담덕은 허리에 찬 장검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불을 좋아하는자는 불로 다스리는 법! 짐은 한번 검을 뽑아 민족의 숙원을 이루려고 하오. 조선의 옛 땅을 모두 찾고 겨레가 하나로 모여살 그날을 반드시 앞당겨오겠소.》

이 넓은 천하를 밟고서서 굽어보고있는 태왕의 담력과 배짱에 모두가 소스라치도록 놀랐다.

신라를 지원하여 고구려의 체면이나 세우는 정도의 싸움을 벌리려는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서 맹약을 어긴 백제를 징벌하고 침략전쟁의 불을 지르려는 후연을 들이쳐 멸망시키고 고토를 모두 수복하려는것이였다. 오직 영락태왕 담덕만이 내릴수 있는 결심이였다. …

편전회합이 끝나고 자리가 파한 다음에도 국상 연구흠은 넓은 대청안에 홀로 남아있었다. 그는 지금 착잡한 상념에 잠겨있었다.

오늘의 편전회합이 소수림태왕시절부터 3대째 고구려조정을 받들어온 오랜 로신인 연구흠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것이다.

수십여년간 조정의 백관을 이끌고 고구려를 성심성의로 받들었다고 자부해왔었는데 이제와서 보니 자신이 너무 늙었음을 새삼스레 느꼈던것이다.

젊은 태왕이 즉위하여 오늘까지 수년간 자신은 언제한번 힘이 되여주지 못하고 담덕의 모든 시책들을 하나하나 가로막아나서는 역할밖에 한것이 없었다.

하지만 연구흠이 우려하고 못마땅하게 여겼던 태왕의 시책들은 모두 훌륭한 결실을 이루었다.

나라의 국력은 비할바없이 강해졌고 령락되였던 백성들의 생업은 안정을 찾았고 다시는 고구려사람들이 이민족의 노예로 붙잡혀가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나지 않았다.

국토는 날이 갈수록 옛 조선의 령토를 되찾아 넓어만 졌고 하나로 모여살려는 민족의 숙원이 하루하루 다가오고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영락태왕 담덕이 로심초사하여 이루어놓은 업적에 도대체 연구흠 나는 무엇을 보태였는가. 조정의 오랜 중신이고 문벌귀족이라는것을 등대고 특전과 특혜만을 바라지 않았는가?!

연구흠은 괴로왔다. 그는 이제라도 맹광과 같은 고구려의 젊은 인재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것을 절실하게 느꼈던것이다.

태왕의 어깨에 무겁게 짐으로 얹혀있기보다 차라리 이제라도 제때에 물러서는것이 고구려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할수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의 뇌리에 옛날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연구흠과 영무 그리고 유주자사 진 이 세사람은 서로 절친한 벗이였을뿐아니라 고구려조정을 받드는데서도 사심없이 힘과 지혜를 바쳐왔다. 연구흠은 영무와 진 두사람이 지금 곁에 없는것이 못내 가슴아팠다. 그 두사람만 곁에 있었으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깊은 상념에 골몰하고있던 연구흠은 누군가 가깝게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영락태왕이 다가서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부복하였다.

《여기 있는것을 모르고 한참이나 찾아다녔소. 신라로 내려가는 지원군의 편성과 보급에 대해 국상께서 지시할 일이 참으로 많은데도 이리 한가하시니 정말 부럽군요.》

담덕은 짐짓 이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연구흠은 굳어진 얼굴로 덤덤하게 침묵만 지키고있다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페하, 신은 오늘 있은 일을 돌이켜보며 많은것을 생각하였나이다.

신의 나이 올해 팔십을 가까이하고있소이다.

자리나 지키고앉아 페하의 위업에 장애물로 살바에는 차라리 자리를 내놓고 물러서는것이 현명한 처사라는 생각이 드오이다. …》

《아직도 짐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것이요?》

담덕이 부리부리한 두눈을 들며 이렇게 물어보자 연구흠은 황급히 두손을 내저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아니오이다, 페하. 다만 페하께서 등극하신 때로부터 지금까지 흘러간 나날들을 곰곰히 되새겨보니 이 늙은이가 단 한번도 페하께 힘이 되여드리지 못하고 무거운 짐만 되였다는것을 느꼈을뿐이오이다. …》

《국상께서 하신 말씀은 리치에 맞지 않소. 짐은 항상 국상의 조언을 거울로 삼아 나라를 이끌어왔소. 짐이 젊은 혈기에 마음의 평온을 잃을 때마다 국상이 나서서 바로잡아주지 않았다면… 선대태왕들의 뜻대로 짐을 이끌어준 국상의 그 공로가 어찌 작다 하겠소.》

담덕의 이 말에 연구흠이 말없이 허구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국상과 같은 오랜 충신이 있어 짐이 항상 의지할 기둥이 있는것이요. 생각나는지요. 부왕께서 병상에서 위급할 때 국상께서는 어떻게 하셨소. 변방지역을 순행중인 짐을 급히 부르면서 일체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셨지요. … 그때 국상이 태자가 밖에 나가있을 때 태왕의 병이 중함이 알려지면 불손한자들이 딴마음을 먹을수 있기때문에 이 사실을 그 어느 중신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한 말을 짐은 아직도 기억하고있소.

짐은 이렇듯 사심없이 고구려를 받드는 국상과 같은 오랜 충신들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을것이요.》

국상 연구흠의 눈에 어느덧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오랜 로신은 쏟아지는 눈물을 간신히 눌러참으며 입을 열었다.

《페하, 페하께서는 로신을 이렇듯 거두어주셨는데 몸이 늙고 우둔하여 잘 보필하지 못해 안타까울뿐이오이다.

옛날에는 로신과 유주자사 진, 왕당의 영무장군 이 세명이 솥발처럼 고구려를 받들었소이다. 참 좋은 시절이였지요. …우리 셋은 서로가 부족한 점을 메워가며 고구려를 성심으로 받들었나이다.

그런데 셋중에 남은건 로신뿐이오이다. 그들도 아직까지 살아서 페하를 보필한다면 로신도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할수 있으련만 늙은게 살아있는것이 참으로 부끄럽소이다.》

담덕은 국상 연구흠의 손을 뜨겁게 잡아쥐였다.

《짐을 바른길로만 인도해주시오. 짐은 국상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을것이요. 국상과 같은 오랜 로신들과 새로 나타난 젊은 인재들모두가 한마음으로 고구려를 받든다면 반드시 대고구려의 영광은 앞당겨질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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