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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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학원은 햇솜처럼 부풀어오른 흰눈이 가지마다 내려쌓여 이채로운 풍경을 펼친 정원속에 파묻혀있었다.

옥정국은 회벽에 해빛이 아롱지는 긴 복도를 지나 토양학연구소 미생물연구실 실장방에 들어섰다.

그는 콤퓨터탁앞에 앉아 자료작업을 하고있는 40대 후반기의 중년나이실장에게 자기 소개를 하고나서 정성희박사선생을 좀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실장은 눈을 간잔지런히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오늘 장기출장을 떠나기때문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알려주었다.

옥정국은 그 말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어데로 장기출장을 떠나는가고 물을 경황도 없이 집주소만 알아가지고 황급히 밖으로 나오고말았다.

한시바삐 그 선생을 따라잡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것이다.

사람들이 붐비는 무궤도전차와 지하전동차를 번갈아타며 옥류교를 건너 평양산원앞정류소에 내렸을 때였다. 조급성에 사로잡힌 정국이 걸음을 재촉하고있는데 누군가 김만유병원이 어딘가고 묻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순간 정국은 전류에 감전된 사람처럼 흠칫 몸을 떨며 우뚝 서버렸다.

길가던 사람 하나가 손을 들어 어느 한 건물을 가리켜보이는 모습이 보인다.

현대적인 고층건물이였다.

지금 저 병원의 어느 호실엔가 안해가 입원해있을거라고 생각하니 별안간 마음이 이상해졌다.

리당비서가 이번 출장길에 꼭 시간을 내여 들려보라던 목소리가 귀전에 들리는것만 같았다.

《여보, 나를 용서해주오. 정말 지금은 어쩔수 없구려.…》

정국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바쁜 길을 재촉했다. 드디여 실장이 알려준 과학자려관이 눈앞에 나타났다.

과학자려관뒤에 있는 고층살림집 9층까지 단숨에 밟아오른 정국은 성급히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실장이 알려준 렬차시간까지는 아직 한시간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혹시 아직도 박사선생이 떠나지 않았을수도 있다.

정국은 손수건으로 땀방울이 내배인 이마를 닦아내며 막연한 기대를 안고 9층 2호집 문패를 찾았다.

벙싯 열린 9층 2호집 문짬으로 웬 젊은이의 목소리가 새여나왔다.

《정말 또 가시겠어요? 어머니도 참, 고지식하기란… 이젠 일흔고개를 넘어섰다고 몇번이나 더 말해야 알아들으시겠어요. 이젠 집에 들어와 편안히 쉬시면서 아들과 며느리의 효도를 보실 때가 되고도 남았단 말이예요.》

《그래 넌 봐둔 처녀라도 있느냐?》

그의 어머니인듯 한 녀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 그거야… 며느리감은 어머니가 고르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어머니, 나도 이젠 가정을 이루고 늙으신 어머니를 남부럽지 않게 모시고싶단 말이예요.》

《녀석두, 그럼 됐다. 며느리감을 고르기 위해서라도 오늘 떠나야겠다.》

《그럼 어머닌?! 참, 어머니두. 평양에도 인물 잘나고 맘씨고운 처녀들이 많은데 하필…》

《그저 해보는 소리다. 가다가 열쇠를 잊어먹어서 다시 들어왔댔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매일 때식을 번지지 말아야 한다. 알겠니?》

옥정국은 녀인이 문손잡이를 잡는것이 느껴지는 순간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방안에 들어서자바람으로 다짜고짜 나들이차림을 한 지성미가 느껴지는 녀인에게 어디로 출장가는 길인가부터 물었다.

깜짝 놀라는 두쌍의 눈길이 그에게 쏠리는 가운데 훤칠한 청년이 피아노앞에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며 누군가고 쌀쌀하게 되물었다.

그제야 자기 실수를 깨달은 정국은 미안하다고 량해를 구하고나서 명암농장에서 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인사를 받는 두사람의 표정은 각이했다.

비록 나이는 들었어도 의젓함과 지성이 느껴지는 정성희박사의 얼굴에는 반가움의 미소가 어리였고 아들인듯싶은 청년의 희멀건 얼굴에는 시답지 않아하는 표정이 력력히 비껴있었다.

《어디로 가는가구요? 우리 어머닌 지금 명암농장에 새 관리위원장이 왔다는 전화를 받고 쫓겨왔던 그 농장에 다시 가는 길입니다.》

비꼬는듯 한 청년의 대답에 정국은 오히려 초조감으로 얼어붙었던 마음이 봄눈녹듯 스르르 녹아내리는것 같았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됐습니다. 난 또… 이거 정말 기쁩니다. 제가 관리위원장입니다. 어서 저와 함께 가십시다.》

《그렇습니까? 가만, 좀 계십시오.》

아들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고무풍선처럼 붕 뜬 기분에 사로잡혀 떠들썩하며 박사의 불룩한 배낭을 자기 어깨에 둘러메던 그는 무슨 일인가하여 주춤거렸다.

《관리위원장동지, 한가지 약속합시다. 우리 어머니를 한주일이상 더 붙잡아두지 않겠다는걸 말입니다.》

아들은 그에게서 어머니의 배낭을 앗아메고 제먼저 씨엉씨엉 계단을 내려갔다.

《미안합니다. 외아들로 키우다보니…》

정성희박사가 면구스러운듯 대신 사과했다.

《허허, 일없습니다. 오히려 남자다운게 더 마음에 드는구만요!》

옥정국은 정성희의 들가방을 빼앗다싶이 받아들고 청년의 뒤를 쫓아갔다. 지난 기간에 어머니에게 있은 불미스러운 감정이 아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으리라는것을 잘 알고있는 정국은 그의 옹친 마음을 풀어주리라 마음먹었다. 아들의 이름은 강성민이였다.

《동무, 이거 미안하오. 내 관리위원장으로서 지난날에 있었던 일을 사과하오!》

《그만하십시오. 나도 관리위원장동무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걸 압니다. 하지만…》

청년은 얼마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자기의 심정을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전후 군사복무시절에 다리를 다친 영예군인이다. 이젠 나이가 있어 군사복무때 다친 다리때문에 밤마다 신음소리를 내며 앓는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일체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오직 과학연구사업에만 열중하고있다.

그래서 지금 고려의학과학원 연구사로 일하고있는 자기가 어머니의 병치료를 해주고있다. 그런데 이렇게 출장을 떠나기만 하면 너무 오래 있다가 들어오군 하기때문에 치료효과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더 악화되여 속을 태우군 한다.

칭년은 힘겹게 걸음을 옮겨짚는 어머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천천히 걸으실 때는 모르겠는데 저렇게 빨리 걸으실 때는 다친 다리를 저는게 알린단 말입니다.》

어머니의 건강을 극진히 념려하는 아들의 근심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후더워지는것을 느낀 옥정국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동무의 부탁을 명심하겠소! 이야기를 듣고보니 우리가 너무 제 욕심만 차린것 같구만.》

궤도전차정류소에 이른 정국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나타나야 할 정성희박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속생각을 넘겨짚은듯 강성민이 말했다.

《저기 의료기구상점에 들리셨을겁니다. 부탁해놓은 삼륜차가 어떻게 되였는지 알아보려고 말입니다.》

《삼륜차라니? 그건 뭘하려고… 집안에 혹시?…》

정국은 사뭇 놀라는듯 했다.

도리머리를 젓던 강성민이 되물었다.

《그 농장에 효정이라는 처녀가 있는가요?》

《예, 있지요.》

《영예군인인가요?》

《예.》

《그 영예군인처녀에게 삼륜차를 마련해주겠다고 농장에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저렇게 뛰여다니시지 않습니까.》

《그래요?!》

순간 옥정국은 너무나 뜻밖에 당하는 충격에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박사선생이 친혈육도 아닌 효정이를 위해 저런 마음을 쓰다니… 정말 놀라지 않을수 없고 감동을 금할수 없는 일이였다.

효정이의 아버지인 기사장은 우리 농장을 돕겠다고 불원천리 찾아온 저 박사선생을 믿지 못하겠다고 되돌려보냈는데… 어쩌면 서로 생각해주고 마음을 쓰는 품이 그렇게도 대조적일가.

생각을 깊이 해볼수록 정성희박사의 그토록 고결하고 아름다운 정신세계에 탄복을 금할수 없었다.

부지중 자신에게 물어보는 량심의 속삭임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왜 그런 생각을 못하고있었는가? 그래, 나는 아직 멀었다.)

그는 강성민이와 헤여져 정성희박사와 함께 궤도전차에 올라 나란히 앉아갈 때 가책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농장의 호주라는 이 관리위원장도 미처 생각 못하고있은 그 삼륜차를 손님이나 다름없는 박사선생이… 정말 머리가 숙어집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다…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린 영예군인들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소한 불편도 모르게 보살펴주는거야 우리 장군님의 품속에서 한식솔로 사는 사람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이지요. 더구나 꽃방석에 앉아있어도 될 영예군인이지만 농장일에 그처럼 극성인 효정이는 내가 친딸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처녀랍니다.》

《그렇습니까.》

《내가 그 농장에 가서 효정이와 함께 지낸건 불과 며칠밖에 안됩니다. 하지만 그 앤 나의 심장속에 남는 처녀가 되였지요. 그 애도 나를 무척 따른답니다.

내가 오늘 그 농장으로 다시 발길을 돌리게 된것도 아마 효정이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다른 사정도 있지만…》

정성희박사는 말끝을 마무리지 못하고 쓸쓸히 웃었다.

옥정국은 존경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렬차에 그와 나란히 앉아갈 때 정국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다른 사정이란 어떤건지 비밀이 아니라면 좀 말씀해주실수 없겠습니까?》

《이젠 다 지나간 일인데 비밀이야 무슨… 관리위원장동문 초면인데도 뭐나 다 말하고싶구만요. 설사 그게 비밀이라 해도 말이예요!》

정성희는 옥정국이쪽으로 돌아앉더니 차창밖으로 흘러가는 산야의 아름다운 설경을 응시하며 추억의 갈피를 번지기 시작했다.

강진군 명암리는 정성희남편의 고향이였다.

조국해방전쟁참가자인 그의 남편은 오래동안 전상자병원에 누워 병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정성희가 남편을 알게 된것은 바로 이 전상자병원에서였다. 전상자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남편은 자기의 두발로 대지를 활보할수가 없었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부모들과 일가친척모두를 한날한시에 잃어버린 그는 생전에 그렇게도 밟아보고싶어하던 고향땅에 두번다시 가보지 못하고 일찍 눈을 감았다.

어느날 농업과학원에 올라온 지방별 토양자료분석정형을 료해하던 정성희는 붉은색마지크로 《강진군 명암리》라고 쓴 흙시료봉투를 보게 되였다. 그 순간 잊을수 없는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다리만 성성하다면 원쑤들에 의해 파괴된 고향땅에 단숨에 달려가 땀과 열정을 다바쳐 세상에 보란듯이 고향을 일떠세우고싶노라고 그리도 자주 외우던 남편이였다.

하지만 지금 명암농장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하여 곡절을 겪고있었다.

토양분석결과가 보여주다싶이 해하성충적지인 이곳 토지들에 비료공급마저 제대로 되지 않는데다가 품종별 종자배치도 제대로 되여있지 못하였다. 정성희박사는 농업과학원에 자기 연구과제인 미생물비료의 현지도입을 위해 강진군 명암리에 파견해줄것을 제기하였다.

그 미생물비료로 말하면 그가 고난의 행군시기부터 농업생산을 늘이는데 적극 이바지할 결심을 품고 10년동안 꾸준히 과학연구사업을 벌려 성공시킨것이다. 그동안 황해남도와 평안남북도의 여러 협동농장들에 도입하여 정보당 0.5톤~1톤씩 증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기사장 김선영은 유감스럽게도 미생물비료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태도로 나오면서 그의 제기를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저으기 실망하여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눈이 내리는 대동강유보도를 거닐며 어떻게 할것인가 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런 그의 머리속에 눈물이 글썽하여 동구길까지 따라나왔던 효정의 모습이 어리여오는것이였다.

영예군인이면서도 그 불편한 몸으로 농장일에 발벗고나선 처녀의 고결한 모습에서 정성희박사는 일시적이나마 포기하고 돌아설번 한 자신을 다잡았다. 거기에다 새 관리위원장이 왔다는 효정이의 전화까지 받고보니 가만있을수가 없었다. 그래 농업과학원에 다시 제기하여 떠나는 참인데 마침 새로 부임된 관리위원장이 먼저 집으로 찾아올줄이야.…

그는 이야기를 마치고나서 옥정국을 고마움이 실린 눈길로 바라보며 덧붙여말했다.

《방금 집에서 내가 그 농장으로 출장떠나는 길이라는걸 알았을 때 관리위원장동무가 너무 기뻐 환성을 올리는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지내보니 자기를 알아주고 또 자기와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가 제일 기쁜것 같습니다.》

이 말에 동감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이던 옥정국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난 그때 너무 기뻐 춤을 추고싶은 심정이였습니다. 정보당 알곡수확고를 높일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있는 박사선생을 만났는데 왜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나는 우리가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뜻을 현실로 꽃피우기 위한 농업혁명의 길에서 뜻이 통하는 동지가 된것이 제일 기쁩니다.》

경쾌하게 달리는 렬차안에서는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젖어들게 하는 《사향가》의 은은한 선률이 울려퍼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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