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10

 

평양대극장뒤의 탑식아빠트에 자리잡은 한규일의 집은 배정받은지 썩 오래긴 해도 내외간이 살기에는 안성맞춤했다.

집에 들어서니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바이올린솜씨였다. 아니나다를가 산뜻한 실내복을 입은 손녀가 공동살림방의 반쯤 열린 창가를 마주한채 《사향가》를 연주하고있었다.

규일은 문지방에 뒤짐을 지고선채 선률의 바이올린연주를 감상했다. 작은 시내물 돌돌 흐르는 만경대의 꽃피는 봄이 풍만한 정서속에 안겨왔다.

선률이라는 이름처럼 손녀의 연주는 깨끗하고 세련되였다. 그 이름을 바로 자기가 지었다는것을 상기하자 마음이 흐뭇해졌다. 규일은 바이올린연주가 끝난것을 의식하며 가벼이 박수를 쳤다.

《어마나, 할아버지, 언제 오셨나요?》

얼마 안 있으면 엄마소리를 듣게 될 손녀이지만 이럴 때 보면 꼭 머리꽁지를 달싹거리며 칭얼거리는 철부지나 다름이 없었다.

《방금전에 왔다. 오랜만에 바이올린소리를 들어보았구나. 그만하면 량호하다. 시집에는 들렸댔냐?》

그 순간에 규일은 선률의 눈밑에 어두운 심경이 퍼올린 그림자가 매달리는것을 띠여보았다.

《시간이 없어서… 엊저녁에 잠간 들렸댔어요.》

《암만 그래도 하루밤이야 보냈어야지. 네 서방이랑 잘있겠지?》

한선률은 고개를 끄덕이며 해무죽이 웃었다.

안락의자에 몸을 맡긴 규일은 선률에게 바이올린소리를 다시 들어보자고 부탁했다.

선률은 기꺼이 응했다. 애틋한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있게 바이올린을 들어올렸다. 규일이 좋아하는 《고향의 봄》의 귀맛좋은 선률이 울리기 시작했다. 심내에 흘러들며 옛스러운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한규일에게는 아들자식이 두명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녀석이 다 음악가인 아버지의 뒤를 따른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길로 가버렸다. 건축을 지향하던 맏이는 소원대로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되여 가족과 함께 중동나라에 나간지 몇해째 잘 되여오고 둘째 역시 처음엔 음악공부를 좀 하는것 같더니 군대에 입대하여 군의가 되였다.

북부산악지대에서 군사복무를 하였는데 초소를 찾아주신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고는 그곳에 뿌리내렸다. 그가 선률의 아버지였다. 녀석은 늘 자기가 못다한 음악공부를 선률이가 대신한다며 할아버지의 바통을 손녀가 잇게 될것이라고 호기있게 장담했다. 하지만 애가 군복을 입는것을 보지 못하고 먼저 가버렸다. 전투임무수행중에 군인들을 구원하고 희생되였던것이다.

연주를 끝낸 손녀가 바이올린을 손에 든채로 규일의 곁에 살며시 앉았다.

《연주가 신통치 않나요?》

《아니, 차라리 성악보다는 바이올린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악기와 연주가가 하나로 통일된것도 좋고 자감에 충실한것도 마음에 든다. 유명한 연주가들은 다 자기의 감정을 중히 여겼지. 연주는 곧 넋의 울림이 되여야 한다.》

규일은 손녀에게서 바이올린을 받아 현줄을 울렸다. 칠이 벗겨지고 괘목이 반질반질한 옛스런 바이올린에서 이름못할 정회를 나르는 소리가 울렸다.

《그래, 옛것이 없이 발전한다는건 공중에 다락세우기나 같지.》

손녀에게 처음 하는 이야기가 아니였다.

벽면에 걸린 산촌의 저녁을 묘사한 풍경화에 눈길이 가닿았다. 지는해의 탈색된 빛을 받아 번쩍이는 강물과 그 기슭을 따라 줄지어선 휘우듬한 버드나무들, 노을빛을 받아 등색으로 물든 나무우듬지들, 소슬한 바람에 떠밀리우며 강물우에 닿을듯말듯 늘어진 긴 버들가지, 멀리 안겨오는 솔나무 우거진 산자드락, 끝간데 없이 뻗어간 오솔길

짝지다리를 뻗쳐놓은 나무지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끄덕끄덕 고개방아를 찧는 소년의 모습이 비껴온다. 헐어빠진 바이올린통을 두팔로 꼭 감싸고있는 낯익은 소년의 형상이였다. 그림속에는 없지만 규일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네 연주를 들으니 또 옛일이 생각나는구나. 동해안의 명천지방이 할아버지의 고향이였다.》

선률은 해맑은 얼굴에 진지한 빛을 띄우며 귀를 강구었다.

《…명천은 물산이 그리 흔치 않아도 사람들의 인심만은 박하지 않아 가는이, 오는이의 칭찬이 자자했지. 허지만 왜놈들이 강점하면서 그것마저 다 잃고말았다. 대신에 운동바람이 좀 세찼다고 할가… 사상운동을 한답시고 돌아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왜놈들의 탄압을 피해 거기로 왔댔거던.

그 저자거리에서 할아버지가 태여났구나. 그러나 일곱살을 못 넘겨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궁한 살림의 핍박을 받으며 겨우 목숨을 연명했단다. …》

한때 라운규의 뒤를 묻어다니며 영화창조라는 현혹스러운 바람에 정신을 팔던 소년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장티브스를 앓아 일찌기 불귀의 객이 되였고 청상과부가 된 어머니는 결핵으로 앓아누웠다. 집안의 온갖 짐이 뼈도 채 여물지 못한 소년의 어깨에 실렸다. 다행히 아버지가 물려준 낡아빠진 바이올린이 유일한 생계수단이 되였다.

소년은 낮에는 노구찌가 조선의 자원을 략탈해갈 목적으로 부설하는 좁은 철길에 나가 심부름을 해주었고 저녁이면 등디목에 앉아 아버지가 좋아하던 《황성옛터》의 곡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했다.

구슬픈 곡조는 동네사람들을 집뜨락으로 불러들였다. 겨릅등이 가물거리는 문턱에 앉아 노래를 듣던 사람들은 돌아갈 때에는 자기들의 마음을 알아준 소년을 위해 콩깨묵이라든가 때묻은 엽전을 퇴마루에 놓아주군 했다. 그것으로 소년은 굶주림을 면했고 어머니의 병구완도 했다.

그런 보잘것없는 수입도 때없이 닥쳐들며 거들거들하는 솔문짝을 걷어차는 왜놈순사의 성화에 자주 끊기군 했다.

어느날엔가 큰 극단을 운영한다는 골덴바지에 마고자를 받쳐입은 신사풍의 한 사나이가 한미하고 초라한 산자집에 찾아왔다.

신동으로 소문난 애의 소식을 들었다면서 아버지가 바라던대로 훌륭한 음악가로 키우겠다고 어머니를 성화먹였다. 어머니는 거절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애를 배불리 먹일수 있다는 소리에 귀맛이 동해 아들을 내놓게 되였다.

하여 철부지소년은 뼈가 앙상한 어깨에 헐어빠진 바이올린통을 메고 뜨락에서 어머니와 눈물겨운 작별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만주땅의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노래와 춤으로 돈벌이하는 집시무리와 다름없는 극단에서 규일은 한갖 심부름군에 지나지 않았고 행패의 대상에 불과했다. 정렬지라는 소녀가 없었더라면 아마 제 설음에 겨워 요절했을지도 모른다.

극단주인의 딸이라는 쌍태머리소녀는 극성스레 총각의 연주훈련을 도와주었다.

정렬지… 동생벌이였지만 외로운 소년에게는 살틀한 누이나 다름없었고 엄격한 스승이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 이국의 황량한 들가를 떠돌며 노래와 춤을 파는 신세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돈푼있는 놈들이 뿌려주는 엽전에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시해야 했고 왜놈들이 지정하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면 당장 벌금을 물고 쫓겨가야 하는 눈물받이 타향길이였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가는 동시에 돈만 아는 세상에 대한 거부와 항거의식이 봄비맞은 새싹처럼 소년의 가슴속에 움텄다.

신흥주식회사 주인이라는 왜인이 청하는 일본노래를 일부러 틀리게 연주하여 소동을 피운적도 있었다.

그날 저녁 소년은 극단주인에게서 견디기 힘든 회초리찜질을 받았고 어두운 창고에 짐짝처럼 갇힌채 물 한모금 얻어먹지 못했다. 다행히 렬지가 눈물을 함께 나누는 벗이 되여주었다.

판자틈사리로 비쳐드는 서글픈 달빛은 소년의 가슴속에 이름못할 설음을 날랐다. 달빛어린 소녀의 뺨에도 슬픈 눈물이 번들거렸다. 언젠가 어머니에게서 맡아본적이 있는 애틋한 동백기름내가 렬지의 긴 머리칼에서 풍겼다.

《렬지야, 난 돈밖에 모르는 네 아버지를 증오한다. 조선사람? 아니, 일본놈의 앞잡이야. 그런데 넌 왜 다르게 보일가?》

《아버지?… 흥, 그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야.》

소년은 놀랐다. 분명히 렬지는 극단주인이 누구보다 귀여워하고 내세우는 딸이였다. 그런데 이를 단호히 부정하는 소녀의 목소리에서는 랭기가 풍겼다.

《우리 집은 대대로 궁중음악에 종사한 천한 악사가문이야. 아버진 내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어. 궁중에 있던 우리 나라 민속악책을 왜놈들에게 빼앗기고는 분통을 이기지 못해서 숨진거야. 숨을 거두면서도 계속 그 책소리만 되뇌였대.

그뒤에 난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이 산다는 간도로 왔지 뭐. 하지만 어머니도 얼마 못살고 아버지를 따라갔어. 세상에 믿을데라곤 외삼촌밖에 없었는데 호- 그 외삼촌이 나를 극단주인에게 팔아버렸어.

양딸?… 흥, 왜놈의 발바닥이나 핥아먹고 사는 개가 울아버지야?》

소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소녀 역시 자기와 다를바없는 불쌍한 애라는 사실에 총각은 이름못할 련민의 정을 느끼였다. 이제껏 그의 남모르는 고민을 모르고 지내온것이 제 잘못이런듯 소년은 용서를 바라며 함께 울었다.

주인에 대한 원망이 증오와 함께 그들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졌다.

그무렵에 조선의 유명한 가수로 이름날리던 윤심덕이와 그의 남편인 극작가 김우진이 현해탄을 건느다 투신자살한 이야기가 극단에 들려왔는데 소문은 사춘기에 들어서는 그들의 가슴속에 희망없는 앞날에 대한 실망만을 더해주었다.

어느날 처녀는 공연을 관람하던 누구에게선가 배웠다면서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를 총각에게 불러주었다.

《리시우라는 작곡가가 지었대. 우리처럼 만주의 조선인부락을 떠돌면서 공연하는 극단의 작곡가이래. 도문에선가 반일투쟁을 하다가 왜놈들에게 남편을 빼앗긴 한 녀인의 통곡소리에서 곡상을 받았다는데 노래가 막 슬퍼.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장월성이래.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이 노래때문에 인기가 굉장하다는거야.》

노래의 가사와 선률은 이국땅에서 떠살이하는 극단사람들의 마음을 움켜잡았다.

총각은 극단주인을 찾아가 《눈물젖은 두만강》의 노래를 무대에 올리자고 요구했다.

《정신나갔어? 그 노랜 일본사람들이 못 부르게 해. 그러다간 극단이고 뭐고 다 망해.》

이마정수리가 기름을 바른것처럼 반질반질한 극단주인은 정신병자처럼 울부짖었다. 극단주인에 대한 환멸이 점점 커갔다.

극단이 상해를 가까이 한 어느 소도시에 이르렀을 때였다.

《7. 7사변》을 기점으로 일제의 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전쟁이 터진 뒤여서 중국땅은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어데 가나 눈에 띄는것이 누런 각반을 차고 등뒤에 철갑모를 밥가마처럼 매달고다니는 왜놈무리였다. 야외공연의 절반자리도 왜놈들이 차지했다.

주인이 다음날의 공연을 위해 총각을 불렀다. 주둔지역의 일본군사령관과 렬도에서 경제리권을 획득하기 위해 넘어왔다는 한 일본인재벌이 공연관람을 신청했는데 일본노래의 공연을 준비하라는것이였다. 그리고 원래 계획하였던 《봉선화》의 노래를 곡목에서 빼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니요. 난 봉선화를 연주하겠소. 조선사람이 봉선화를 부르는게 무슨 잘못이요?》

총각은 작곡가인 홍란파를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었지만 노래에 대한 애착으로 마치 그와 오래동안 친분을 나눈듯 했고 하여 노래를 지키는것을 어떤 고상한 의무로 여기고있었다.

《우리 악단에선 금곡령 처분을 받은 노래를 부르지 못해.》

《조선사람들이 사랑하는 노래인데 왜 안된다는거요. 난 연주하겠소.》

주인의 기름기도는 얼굴이 단박 검붉어졌다. 총각을 노려보는 피발이 선 눈에 살기가 번득였다.

《그럼 이날이때껏 내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배워준 값을 내놔. 네 어미가 버린걸 내가 길러주었으니 리자만 계산해도 넌 죽을 때까지 극단에서 머슴살이를 해야 해.》

《거짓말말아요. 우린 은혜에 백배사례하고도 남을 돈을 벌어주었어요. 오빠의 어머니를 꾀인것도 당신의 더러운 돈주머니를 불구자는것이였지 오빠를 위해서였나요?》

이렇게 항변하며 총각을 두둔한 처녀가 정렬지였다.

어제날의 철부지들이 아니였다. 돈에 주리고 돈을 위해 살아야 하는 애어린 방랑예술인들이 아니라 자기의 인격과 존엄을 지킬줄 아는 젊은이들로 성장하였던것이다.

별수없이 주인은 종전의 지엄하던 기상을 줴버리고 삵의 웃음을 지으며 타협안을 제기하였다. 공연을 무난히 치르기 위해 일본노래 몇곡을 연주한 다음 소원대로 《봉선화》를 연주하겠으면 하라는것이였다. 그리고 인차 고향에 돌아갈 로자도 줄터이니 그때까지는 극단의 기둥이 되여달라고 부탁했다.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소망이 성취된것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가자, 어서 고향으로 가자, 어머니를 모시고 오랍누이가 되여 잘살아보자, 함흥에 나가 조선의 문예인들과도 손잡고 우리의 음악회를 열어보자.

그러나 총각은 모리간상배인 극단주인이 흥행업자인 일본놈과 마주앉아 매매흥정서에 도장을 누르고있는줄을 바이 알길이 없었다. 반항심이 자란 젊은것들을 헐값에라도 넘겨 돈주머니를 비우지 않겠다는 수작이였다.

《그럼 아릿답게 생긴 년만은 내가 먹어두지. 양딸이라, 이제부터 그년은 이 야마구찌의 양딸이다.》

늦은 저녁, 술기운에 거나해진 일본놈은 극단주인을 뒤꽁무니에 달고 총각의 방에 들어섰다. 놈이 끌고온 건장한 패거리들이 짐짝우에서 혼곤히 잠든 총각을 에워쌌다.

《요시, 이놈은 불온사상에 젖어 황군을 노엽힌 반도인이다. 유도패에 넘겨 제국의 맛을 보여주라. 그리고 통나무용으로 연구소에 보내주라. 렬지라는 년은 이제부터 없다. 하야꼬로 된다. 이밤부터 야마구찌의 침상에 들어야 한다. 이 야마구찌도 음악을 좋아한다.》

우악스런 손들이 총각의 목덜미를 잡아채더니 문밖으로 집어던졌다.

패거리들은 칼집을 절컥거리며 렬지의 방문을 걷어찼다. 놈팽이들이 터뜨리는 너털웃음소리가 계단밖에 쓰러진 총각의 귀가에 미쳐왔다.

바스라지는 처녀의 비명, 무엇이라 중얼거리며 씨근덕거리는 소리, 깨여지고 부서지는 소음이 잇달리는 속에 총각은 자기를 찾는 처녀의 애된 부르짖음을 가려들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총각은 방안에서 상상못할 거치른 일이 벌어진다는것을 느끼며 몸서리쳤다. 안깐힘을 내여 건물의 수채통을 타고 2층의 로대로 기여올라갔다. 젖먹은 힘까지 다하여 창유리를 부시고 안에 뛰여들었다.

우직스럽게 생긴 놈의 털이 푸시시한 가슴팍밑에서 옷이 한절반 찢겨진 처녀가 구원을 바라며 애달프게 태질하고있었다. 전등빛에 번득이는 날카로운 유리가 놈의 굵직한 목을 베여나가자 선지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극단을 나선 규일이와 렬지는 정신없이 달렸다. 어느 내가에 이르러 서로 부둥켜안고 애섧게 울었다. 상처입은 총각의 손에서 흐르는 선혈이 눈물과 함께 처녀의 얼굴을 벌거우리 물들였다.

이제껏 총각의 품에서 떨어진적이 없던 바이올린통이 산산쪼각이 났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울리는 음악은 구슬픈 민족의 신음소리였고 울분의 메아리였다. 억눌린자의 하소였고 락망한 인생의 울부짖음이였다.

그때부터 그들은 숨어사는 인생이 되였다. 마가을의 락엽처럼 구울러다니며 지붕없는 이국의 들가를 정처없이 헤매이였다.

떠나온 옛 둥지를 찾아가는것이 그들의 소원이였다. 렬지는 규일의 고향에 가서 앓는 어머니를 모시고 조선의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간난신고로 한걸음두걸음 압록강을 가까이하던 어느날 렬지가 발작적인 기침을 터뜨리며 쓰러졌다. 오랜 방황생활이 준 병마였다. 렬지는 끝내 정신을 잃었다.

별수없이 하루밤 신세지려고 발을 들여놓았던 간도땅의 한 심산마을에서 그들은 괴나리짐을 풀지 않으면 안되였다.

산전막의 주인령감 역시 조선사람이였다. 개마고원에 태를 묻고 살면서 홍범도밑에서 화승총도 쏘아보았고 독립만세도 불러보았지만 나중엔 힘이 진하여 세상을 등진채 동북의 산간오지에 묻혔다는 은둔자였다.

총각은 포수령감과 함께 초약을 달이며 정성껏 처녀를 간호했다. 수십리밖에 있는 장거리에 나가 신약도 사왔으나 처녀의 병은 조만간에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혼을 빼는 눈보라가 터져 문풍지마저 애처로이 우는 깊은 밤 렬지는 총각에게 그들이 지어부르던 《아기의 신세》라는 노래를 바이올린으로 켜달라고 간청했다. 제 아기는 굶기면서 왜놈들만 살찌게 하는 이 나라의 신세를 젖먹이엄마에 비유하여 지은 노래였다.

한규일은 산산쪼각난 바이올린을 대신하여 목갈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렬지의 눈귀로 흘러내리는 소리없는 눈물이 규일의 가슴속에 깊은 곬을 냈다.

그날 저녁 규일은 떨리는 손으로 처녀의 머리를 얹어주었다.

줄곧 기침을 달고사는 산전막포수가 움막에서 꺼내온 시큼텁텁한 감자술 한잔으로 그들의 앞날을 축복했다. 앙칼진 눈보라소리에 놀란듯 지게문짝이 덜컹거렸다. 추위에 떠는 승냥이의 울음소리는 마치 인간세상을 등진 외로운 그들을 비웃는 소리 같았다.

《아, 규일씨는 재먼지 이는 이 가슴속에 날아든 희망의 불꽃이련만 왜서 자꾸 죄스런 심정을 안게 될가요? 필부의 푸른 꿈을 버리지 말고 꼭 조선의 음악가가 되여주세요.》

《우리 함께 그 희망을 이루자구.》

《그날이 그립군요. …》

규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렬지는 나직이 노래를 불렀다.

 

    …

    우리 아기 날마다 말라가는데

    오죽하면 내 동생 내려놓고서

    부자집 막내아들 젖먹여줄가

    가엾구나 우리 신세 아기의 신세

 

다음날 한규일은 바이올린을 구해보려고 포수령감과 함께 산전막을 나섰다. 한마을, 또 한마을 지나 장대툰이라는 산골마을에 이르러 땅마지기나 좀 있다는 중국인지주의 집에서 소리통이 다 깨여지고 패마저 없어진 바이올린을 구경할수 있었다.

얼굴색이 헐끔한 아편쟁이와 한겻동안의 말씨름을 하고서야 바이올린을 겨우 손에 넣게 되였다. 한주일잡이로 송아지만한 노루 두마리를 가져다준다는 든든한 약조가 문서장으로 꾸며졌다.

바이올린통을 메고 가벼운 걸음으로 심산벽촌에 다달았을 때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것은 전혀 낯선, 뜻밖의 스산한 광경이였다. 몇채 안되는 귀틀집이며 초가마가리들이 삼단같은 불길에 싸인채 재먼지를 날리고있었고 뜨거운 화염에 눈녹은 물이 랑자히 흐르고있었다. 검붉은 피에 눈더미들이 시뻘겋게 물들어있었다. 여기저기에 널린 시체들속에는 아직은 숨이 붙어있어 단말마적인 울부짖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규일은 정신없이 렬지를 찾아 뜨거운 재무지를 헤쳤다. 없었다. 타다남은 노전밑에서 바이올린의 현줄만이 발견되였다.

앞채였다고 짐작되는 재무지앞에서 옛 량반들처럼 상투를 틀어올린 령감이 채머리를 흔들며 꺼이꺼이 통곡하고있었다.

《찾지 말게. 왜놈들이 부녀자들을 다 끌어갔네. 우리 딸년도 끌려갔다우. 으흐흐, 백주에 난탕을 겪는 불쌍한 민족아!》

규일은 목놓아 통곡했다. 식지 않은 재먼지를 허공에 휘뿌리며 렬지를 찾아 고함을 질렀다.

그후 규일은 만주땅의 술집들을 찾아다니며 구슬픈 노래를 팔아 근근히 목숨을 연명해갔다.

조국이 해방되여 남먼저 압록강을 건넌 그는 렬지의 소망대로 바이올린을 다시 손에 잡고 건국의 열파에 몸을 던졌다. 그곳에서 김원균이며 리면상을 만나게 되였는데 그들도 규일의 이야기를 듣고는 하나의 구슬픈 운명교향악이라고 했다.

《…그때는 네 증조할머니가 이 불효자식을 기다리다못해 앓는 가슴을 쥐여뜯다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지. 이 바이올린이 그때의것이다.

선률아, 좋은 세월을 많이 노래해야 한다.》

《할아버지, 그후에 정렬지라는분을 못 만났나요?》

규일은 호기심어린 손녀의 눈을 마주보다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정이란 참으로 끈덕진것이여서 그가 세상에 없는 몸이라는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게 되더구나. 그러다가 전쟁시기 야전군의소에서 만난 녀자가 바로 네 할머니이다.》

규일은 길쭉한 손으로 선률의 손을 잡았다.

《할머닌 언젠가는 그가 꼭 나타날터이니 맥을 놓지 말고 함께 찾아보자고 도리여 나를 위안했다. 그래서 아닌 말로 네 할머니를 볼 때마다 렬지의 혼백이 다시 살아온것이라고 생각한다.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했던 한 동포음악가에게서 그 비슷한 이름을 가진 어떤 녀자가 오세안주에서 음악활동을 한다는 소릴 듣긴 했다만… 아니야, 왜놈들에게 끌려갔으니 필경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게다.》

선률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에 들으니 향악보는 일본에 사는 애국적인 상공인들이 일본놈들에게서 끝내 찾아내여 조국에 기증했더구나. 나도 그 향악보를 보았는데 참으로 진귀한 음악유산이다. 그래서 다소 죄스런 마음을 덜수 있었지. 내가 너에게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건 우리 민족의 과거사를 잊지 말라는게다. 울분의 노래를, 님을 찾던 민족의 설음이 담겨진 노래를 잊어서는 안된다. 음악에 넋을 재우는게 중요하다.》

손녀가 자기의 말을 얼마나 알아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규일은 인생을 다 산 지난 세대로서 자기의 의무감을 지켰다는 안도감을 느낄수 있었다.

《령감님, 힘든 때이지만 오늘 한상 차렸시다. 오래간만에 우리 손녀가 왔는데 이것저것 다 긁어모았수다.》

로친이 전실에 들어서며 하는 소리였다.

《자, 그럼 어서 저녁상에 모여앉자.》

규일은 허리를 두드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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