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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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예술선전대가 승리기계공장에서 공연을 진행한 날 저녁 류정환공무직장장은 동통을 참지 못하고 실신했다. 공장병원으로 후송되였다. 안해가 기력이 빠져 헐겁게 숨을 내쉬는 그를 흔들며 도당책임비서며 딸이 사는 부대의 정치일군들이 기쁜 소식을 가져왔다고 울음섞인 소리로 애원해서야 반쯤 눈을 떴다.

《정애 아버지, 어버이장군님께서 우리 정애를 만나주시였어요. 자신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는 군인가족이라고 높이 평가하셨대요.》

그 말을 들었는지 류정환은 한순간 눈을 반짝였다. 살이 빠져 쭈글쭈글하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얼굴이 환희로이 빛나고 량볼로 눈물이 척척히 흘러내렸다.

무엇인가 말하려고 입을 벙싯했다. 한참만에야 사람들은 그가 《우리는 빈터에서 시작하였네》의 노래를 부르고있다는것을 알았다. 모두가 울먹이며 노래를 따라불렀다.

제품이 완성되는걸 보고서야 눈을 감겠다고 고집스레 외우던 그는 얼마후 안해의 손을 꼭 잡으며 마지막웃음을 남겼다.

공장당위원회에서는 상급당조직과 토론하고 로력영웅이며 혁신자인 류정환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할것을 결정했다. 안해의 요구대로 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부대에서 온 군관들이 딸을 대신했다.

당비서가 영결사를 읽을 때 모두가 울었다.

선옥은 당비서가 고인이 부르고싶었던 《우리는 빈터에서 시작하였네》의 노래를 모두 함께 부를것을 제의했을 때 죽음이란 결코 비감만 자아내는것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았다. 모두의 얼굴에는 슬픔을 초월한 어떤 비장한것이 어려있었으며 그것으로 하여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한층 더 엄숙했다.

차선옥은 어머니와 함께 정애네 집을 도와주는데 하루품을 더 바치고서야 공장으로 나왔다.

공장은 여전히 생산전투를 벌리고있었다. 귀에 익은 절삭기와 선반이 돌아가는 동음이 체내에 삶의 박동처럼 흘러들었다. 몸에 배인 기계기름내며 쇠붙이냄새가 선옥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갖가지 모양의 강철소재덩이들이 여기저기에 무져있는 운동장처럼 넓은 작업장에서 아버지가 한창 용접을 하고있었다. 묘소를 내리는 길로 일감을 찾아쥔 아버지였다.

쇠덩이를 지지는 단내가 페장을 찔렀다. 등을 구부리고앉아 용접에 열중하는 아버지를 보느라니 어릴적 일이 생각났다.

한생을 불꽃을 다루다나니 얼굴색마저 진한 강철빛을 띠고 이마에 마마자국까지 드문한 아버지는 간혹 술 한잔 마시면 집에 아들자식이 없는것을 한탄하군 했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지청구를 못들은척 하였는데 정 말이 길어질라면 이제라도 빨리 대를 물릴 귀한 아들을 보자고 이불을 내려놓아 되려 아버지를 당황케 했다. 가끔 집에 놀러오던 정애 아버지가 어머니를 편들며 아버지를 책망했다.

선옥은 아들타령하는 아버지의 지청구를 듣기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아버지의 심정을 리해하게 되였는데 용접기술을 물려줄 자식이 없으니 그저 속만 궁글어진다는 소리에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였다. 젊은 사람들이 처음엔 신기한 용접술에 현혹되여 견습생으로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좀 배워줄라면 수자화된 공식이 까다롭고 외국어까지 알아야 한다는 요구에 얼마 못 가서 꽁무니를 빼군 한다는것이다.

아버지는 용접은 과학이며 예술이라고 입버릇처럼 외웠다. 선옥은 어떻게 되여 불찌에 구멍이 숭숭한 장갑이며 작업복들에 그런 희한한 말들이 붙는지 리해되지 않았지만 공장의 한다하는 기사들도 아버지에게 물어보는것을 보면서 점차 그 말을 긍정하게 되였다.

《용접이란 쇠붙이를 그저 녹이고 붙이는게 아니란다. 자기 심장을 녹이는게다. 용접을 떠난 산업건설이나 공장을 생각할수 있냐? 아마 아들녀석이 있었으면 회초리를 휘둘러서라도 기술을 배워줬을게다.》

그때부터였다. 선옥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유심히 살피게 되였고 밤마다 아버지가 들여다보는 책에도 관심하게 되였다. 하여 어느해인가는 아버지 몰래 용접집게를 들었다가 새 솜옷을 못쓰게 만들었는데 어머니는 철없는 계집때문에 집안이 망하겠다고 야단을 쳤지만 아버지는 생각깊은 눈길로 딸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사려깊은 눈빛에서 힘을 얻으며 선옥은 용접공이 될것을 결심했으나 뜻을 이를수 없었다. 로동과에서 용접은 녀자한테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면서 선반공으로 돌려놓았던것이다. 그래서 짬만 나면 아버지의 일손을 거들어주는것으로 이루지 못한 희망을 대신했다.

《선옥이 왔냐?》

허리를 두드리던 차기선이 선옥을 알아보며 용접집게를 내려놓았다.

《정애 에민 일없더냐?》

《정애언니에게 편지를 쓰더군요. 아무래도 알 일인데 언니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미리 알려주는게 옳을것 같다나봐요. 그러면서두 집에는 오지 말라구 신칙하겠대요.》

《그래, 정환이 그 사람의 요구였지. 아까운 사람이 갔다.》

차기선은 가녁이 번들번들한 양철의자에 앉으며 품에서 담배쌈지를 꺼냈다. 써래기를 두툼하게 말아 불을 붙이고는 시원스레 연기를 토했다.

《선옥아, 그 사람이 부르던 노래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 넌 어떻게 하려니?》

선옥은 아버지곁에 오금을 꺾고 앉으며 감각을 잃은 팔을 쓸어만졌다. 차기선을 쳐다보다가 량볼에 볼우물을 파며 살풋이 웃었다.

《사실… 전 당비서동지가 권고할 때까지만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아버지도 알겠지만 내가 음악을 사랑하는건 사실이지만 이 불구의 몸으로 어떻게 무대에 나서겠나요. 그러나 이번에 인민군예술선전대의 공연을 보면서 또 공무직장장아저씨의 희생을 목격하면서 생각을 달리했어요.》

《용타. 접때처럼 기타랑은 쥐지 못하겠지만 노래야 왜 못 불러주겠냐. 아마 정애 애비두 말은 못했지만 너한테 그걸 당부했을게다.

듣자니 군인가족생활을 하는 정애가 단소를 벽에 걸어놓기만 했던지 장군님께서 무척 마음쓰셨다는것 같더라. 힘든 때일수록 노래를 불러야 한다.》

선옥은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신한 기운을 뿜으며 해맑은 얼굴에 비애의 눈물을 짓던 성악지도원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의 남편이 정애의 세대주와 함께 복무한다고 했다.

헤여질 때에야 그들은 통성했고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옥은 자기가 어릴적부터 알고있는 정애의 가정에 대해, 멀리 떨어져있지만 지울수 없는 감미로운 추억을 안고있어 마음속의 거울이 되여주는 정애에 대해 설명했다.

《…정애언니에게 꼭 인사를 전해줘요. 그리고 곁에 나랑 있으니 어머니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해주세요.》

한선률이라는 매력적인 이름을 가진 성악지도원은 무척 감동된듯 했다.

《듣자니 선옥동무도 음악을 무척 사랑한다지요? 전국근로자들의 노래경연에도 참가했다면서 모두가 선옥동물 자랑하더군요. 헌데 팔을 다쳤으니 …》

선옥은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렇다고 노래마저 잃겠나요? 몸은 좀 불편해도 마음까지 상하진 않았어요. 이번에 우리 공장사람들은 예술선전대공연을 보면서 큰 힘을 보탰어요. 저도 같구요.》

아니, 그 말은 선옥이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선옥은 차기선의 어깨에 곱게 다스린 머리를 기댔다.

《아버지, 나 이제 당비서동지를 만날가 해요. 당비서동지의 권고를 따르는게 옳을것 같애요.》

차기선이 긍정하는 눈빛으로 선옥을 건너다보았다.

《아버지도 네 마음이 상할가봐 더 다른 소린 못했다만 네가 그렇게 결심했다니 됐다.》

뒤쪽에서 인기척소리가 났다. 뜻밖에도 전수백로인이 지팽이에 몸을 싣고 휘우뚱휘우뚱 걸어오고있었다.

《아이, 큰아버지, 오래간만이예요.》

차선옥이 얼른 일어서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전수백은 선옥의 팔에 얼핏 눈길을 주며 차기선의 곁에 힘들게 앉았다. 왜서인지 광대뼈가 두드러진 얼굴에 불만이 가득 비껴있었다.

《이보게, 이젠 성쌓구 남은 돌이라구 이 나가자령감을 아예 잊어버렸나?》

전수백의 서운한 소리에 선옥은 문득 깨쳐지는 생각이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이제껏 아바이를 잊고있은것이다. 차기선이 허거픈 웃음을 지으며 전수백의 마디가 불거진 손을 움켜잡았다.

《미처… 형님, 미안하웨다. 난 그저 형님이 있는줄 알았지 없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수다.》

《제미랄, 내 방금 정애 에밀 만나구 오는 길이네. 후, 이 새빠진 령감은 신수 펀펀해서 다니는데 한창 일할 사람이 가다니… 정애 애비가 앓는다는 소식을 듣구 내 염소젖을 한 둬리터 주었는데 그것마저 다 정양소에 보냈더구만. 강짜루 입을 봉했다는 말을 듣구 내 울었네.》

《우리가 그 사람이 바라던것을 꼭 해야지요. 육체가 갔다고 넋마저 갔겠습니까.》

전수백은 옳은 말이라고 응대하며 차기선의 담배쌈지를 끌어당겼다.

《선옥이 퇴원했다는것두 방금전에야 알았네. 이보게 동생, 선옥일 우리 부업지에 한 둬달 보내게. 조용한데 있으문 안정될거네.》

《당위원회에서 중요한 과업을 받은가본데 그럴 짬이 있겠습니까? 이번에 정환동무의 희생을 보면서 충격이 좀 큰것 같습니다.》

전수백이 그 말이 리해된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선옥을 넘보며 차기선에게 평양총각과 갈라진다는 말이 돌던데 그게 웬 소리인가고 물었다. 선옥은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에 귀를 강구는것 같아 얼른 일어나 저쯤으로 옮겨앉으며 아버지가 다루던 용접선을 보기 좋게 가리였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수백의 삼거웃처럼 잔주름이 얽힌 얼굴이 검붉어졌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가보이. 흐음- 어쨌든 예술단체이니 얼굴이 밴밴한 처녀들이 오죽 많겠나? 그러니 촌처녀가 실뚱해났겠지. 차라리 먼저 그만두는게 옳겠어. 공장에두 눈이 바루 배긴 총각들이 있는데 그게 진짜 배필이지.》

전수백이 짐작으로 넘기는 말에 선옥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니라고 부인하고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잊어버리기로 결심은 했으나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마음속에 고이 간직된 첫사랑이 사람들의 오해를 받는것이 싫었다. 자기로서도 다잡을수 없는 모순된 생각에 선옥은 안타까이 한숨지었다.

선옥은 당위원회에 가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뒤로 전수백의 동정어린 눈길을 느끼며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작업현장의 머리꼭대기에 매단 확성기에서 공훈합창단음악이 울리고있었다. 《혁명의 수뇌부 결사옹위하리라》의 노래였다.

(깨끗이 잊어버리자. 언제 그런 애잡짤한 생각이나 쫓을 때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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