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 1 장

5

 

《정아야!》

남쪽의 이름모를 산속에서, 그것도 군인들중에 자기 이름을 그렇듯 스스럼없이 부를 사람이 있으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한정아는 서너발자국앞에 서있는 고급군관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날 모르겠니?》

얼굴에 반가운 표정을 띠운 고급군관은 서둘러 군모를 벗더니 한발자국 다가왔다.

《나다. 성익이야. 아, 오빠라는데.》

그때에야 상대방을 알아본 한정아는 고무공처럼 몸을 탄력있게 솟구더니 앞으로 달려갔다.

《아이, 오빠!》

한달음에 뛰여간 한정아는 로성익의 두손을 부둥켜잡고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오빠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로성익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됐다.》

《정말 뜻밖이예요.》

고운 눈을 반짝이며 그의 어깨우에 달려있는 대좌견장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던 한정아는 갑자기 뾰로통해졌다.

《오빤 뭐예요?》

성을 내는 그 모습이 귀여운듯 로성익은 희미하게 웃었다.

《허, 아직도 성났니?… 내가 잘못했다.》

《흥!》

《자, 그럼 이렇게 빈다.》

로성익이 중들처럼 두손을 합장하는 시늉을 하자 한정아는 짐짓 성난척 하던 기색을 지워버리고 방긋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어릴적부터 함께 자란 외사촌남매간이였다.

로성익은 왕잠자리를 잡아달라고 사내애들의 뒤를 우르르 따라다니는 처녀애들과 달리 산속에 곱게 피여난 꽃들을 찾아 나비처럼 팔랑팔랑 뛰여다니는 누이동생을 무척 고와하였다.

한정아도 그와 7년이라는 나이차이가 있고 가끔 신경질을 부리기는 해도 성정이 대바른 외사촌오빠를 몹시 따랐다. 무남독녀인 그에게 있어서 로성익은 하나밖에 없는 오빠였으며 장난꾸러기들이 제비꽁지같은 머리를 다치려고 할 때면 번개같이 달려와 막아주군 하는 듬직한 보호자였다.

소녀는 늘 오빠곁을 맴돌았고 학교면 학교, 강이면 강 할것없이 강아지마냥 졸졸 따라다녔다.

하루는 마을뒤산으로 오르던 오빠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수풀속으로 쑥 들어갔다.

아무 눈치도 차리지 못한 소녀가 그냥 따라서는데 수풀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튀여나왔다.

《오지 말아!》

《왜?》

《글쎄 오지 말라는데.》

소녀는 와슬렁거리는 수풀속을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오빠, 거기서 뭘 하나?》

잠시후 수풀속에서 오빠가 바지괴춤을 춰올리며 뛰쳐나왔는데 얼굴이 수수떡처럼 빨갛게 상기되여있었다.

《이건 곱다곱다 하니까 아무데나 따라오면서…》

전혀 딴 사람처럼 변한 오빠를 보자 소녀는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또 그랬단 봐라.》

큰 감자알같은 주먹을 내흔드는 오빠를 피해 뒤걸음치던 소녀는 그만 돌부리에 발을 걸채여 폴싹 주저앉았다. 그러자 목구멍까지 꼴깍 차올랐던 설음이 터져나왔다.

《엄마!-》

치마에 흙이 가득 묻는것도 모르고 발버둥치는 소녀를 보자 오빠는 어쩔줄을 몰라하다가 허겁지겁 주저앉았다.

《정아야, 울지 말아. 울지 말라는데.》

그럴수록 소녀의 울음소리는 더욱 높아졌는데 어찌나 슬피 우는지 자기가 흘린 눈물호수에 풍덩 빠져버릴것 같았다.

바빠난 오빠는 마을에 시주받으러 오군 하는 까까머리중처럼 두손을 합장하였다.

《내가 잘못했어. 자, 이렇게 빌게.》

울음소리가 딱 그쳤다.

《오빠, 나 아직두 밉나?》

소녀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지만 목소리는 또랑또랑하였다.

《아, 아니야. 고와.》

《헌데 왜 곱다곱다 하니까 아무데나 따라온다고 했나?》

누이동생의 질문에 오빠는 말문이 막혀 쩔쩔매였다.

《그, 그건… 그래서 잘못했다지 않니.》

《그럼 아무데나 따라다녀도 되나?》

수풀쪽을 힐끔 돌아본 오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 좋아!》

손벽을 짜락짜락 치던 소녀는 어째서인지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러니?》

《나 다리아파.》

《오, 오. 그럼 업혀라.》

오빠가 뒤로 돌아앉으며 잔등을 내밀자 소녀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배시시 웃다가 냉큼 뛰여올랐다.

로성익에 대한 한정아의 존경과 믿음은 사춘기시절에도 변함없었다.

당시 전문학교에 다니던 로성익은 고모네 집에 자주 찾아왔다.

한창 류행이던 《좌익소아병》에 걸린 그는 제지공장을 운영하는 고모가 외동딸을 위해 아담하게 꾸려준 방에 틀고앉아 좌익서적을 읽군 하였다.

한정아는 《국가와 혁명》이니, 《맑스주의와 폭동》이니 하는 요란한 저서를 환희에 넘쳐 읽고있는 오빠가 장해보여서 어떻게 하나 도와주려고 애면글면하였다.

하루는 외삼촌이 그의 집에 불쑥 찾아왔다.

한창 레닌의 《일보전진, 이보퇴각》을 읽고있던 로성익은 뜨락에서 들려오는 귀익은 목소리를 듣자 바빠맞았다.

《야단났구나!》

그러는 오빠의 손에서 잉어처럼 푸들거리는 책을 나꿔채여 이불짬에 밀어넣은 한정아는 아버지병을 고치려고 산삼을 구하러 떠난 착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생글생글 웃으며 옛말을 엮어나가는 누이동생을 보자 로성익은 뜀박질하던 가슴이 점차 가라앉아 아버지가 《어험!》 하고 방에 들어섰을 때에는 《그 다음은 어떻게 되였니?》 하고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지을수 있었다.

금싸래기같은 외아들이 위험한짓을 하지 않는가 하고 뒤를 밟았던 로성익의 아버지는 오누이가 사이좋게 옛말을 주고받고있는것을 보자 마음이 흐뭇해서 가지고 왔던 군고구마봉지를 통채로 쥐여주고 돌아갔다.

찌그덕- 하고 대문이 닫기자 로성익은 기쁜 나머지 누이동생의 손을 부둥켜잡았다.

《야, 네가 아니면 큰일날번 했구나!》

이불짬에서 《일보전진, 이보퇴각》을 꺼내준 소녀는 오빠한테서 처음으로 칭찬을 받은것이 기쁜듯 생긋 웃었다.

한정아는 그후에도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오빠를 슬기롭게 구원해주군 하였다.

그러던 오빠가 온다간다 소리도 없이 연기마냥 사라졌다.

죄는 천도깨비가 짓고 벼락은 고목이 맞는다더니 아무 죄없는 한정아의 머리우에 외삼촌과 어머니의 욕설이 련이어 떨어졌다.

억울한 나머지 《난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변명하고싶은 생각이 열두번도나마 들었으나 소녀는 마지막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며칠전부터 오빠가 책을 접어놓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머리를 두손으로 싸쥐고있는것을 보았지만 자기한테는 일언반구 없었던것이다. 보매 오빠에게는 자기가 총명하고 지혜로운 누이동생은 될지언정 허심하게 속을 터놓을만큼 믿음직한 벗은 못되였던 모양이였다. 하지만 그에 대하여 조금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로성익은 하나밖에 없는 오빠였던것이다.

그렇게 헤여졌던 오누이가 다시 만난것은 해방후였다.

그날 강의를 마치고 대학정문을 나서던 한정아는 행인들이 한 붉은군대군관을 눈짓하며 수군거리는것을 보았다.

웬 일인가 하고 그 군관을 바라보던 처녀는 두눈을 크게 떴다.

붉은군대군관은 뜻밖에 젊은 조선사람이였던것이다.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그후에 일어났는데 군복상의를 활짝 열어젖히고 지나가던 붉은군대병사를 멈춰세우고 엄하게 추궁하던 군관이 《너 정아가 아니냐?》 하고 소리쳤던것이다.

오똑 굳어진 처녀앞으로 붉은군대군관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원, 이런… 나다!》

놀라움으로 커졌던 한정아의 눈에 반가운 빛이 어렸다.

그는 몇해전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진, 그때문에 자기가 졸경을 치르게 한 괘씸한 오빠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로성익은 좌익서적을 읽다말고 머리칼을 쥐여뜯던 어제날의 글방샌님이 아니라 름름한 붉은군대군관이였다.

몰라보게 변한 오빠앞에서 자신감을 잃어버린 한정아는 자기의 속을 까맣게 태운 그의 팔을 더는 꼬집을수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하여 무작정 국수집으로 잡아끄는 오빠를 따라서는것으로 오색령롱하던 사춘기시절과 순순히 작별하였다.

해방열기로 담이 커진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혼잡한 국수집에서 그들은 회포를 나누었다.

성숙한 녀대학생답게 침착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그동안에 있은 일들을 이야기하는 누이동생을 대견스레 바라보던 로성익은 뜸을 들였다가 지나온 날들을 펼쳐보였다.

그때 그는 좌익서적을 읽을수록 케케묵은 봉건사상과 왜놈세상에 대한 불만이 점점 자라나자 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붉은기가 펄펄 휘날리는 로씨야로 들어갔었다.

원동지방에서 몇해동안 로동을 하던 로성익은 쏘도전쟁이 한창이던 때 붉은군대에 입대하였고 점차 소대장, 중대장으로 승급하였다. 그후 그는 대대장으로서 와르샤와해방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들에 참가하였으며 쏘도전쟁의 마감을 빛나게 장식한 베를린함락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드디여 페허가 된 국회의사당에 붉은기가 꽂히고 수년동안 인류를 괴롭히던 전쟁이 끝났다.

베를린함락메달을 가슴에 단 그는 창문이 떨어져나간 어느 한 별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우라!-》 하고 축배를 들었고 우아한 민족옷차림을 한 금발머리처녀들과 슈트라우스의 왈쯔곡 《아름답고 푸른 두나이강가에서》를 멋지게 추었다.

어느날 원동으로 가는 군용렬차가 빼액- 기적을 울렸다.

원동제2전선군에 소속된 로성익은 하바롭쓰크서남지역을 거쳐 저항하는 사무라이들을 쓸어눕히며 조선으로 나왔었다. …

국수집에서 헤여진 후 그는 밑진 봉창을 하려는듯 누이동생을 극진히 돌봐주었다. 일요일이나 명절날이면 코가 큰 부하들에게 빵과 빠다, 꼴바싸 등을 들려가지고 대학기숙사에 찾아왔고 한정아가 미처 생각지 못하였던것들까지도 깐깐스레 챙겨주군 하였다.

영원할것 같던 그들의 재회는 붉은군대가 북조선에서 철수하는것과 함께 끝났다.

로성익은 이번에도 누이동생한테 아무런 련락도 띄우지 않고 사라졌다.

오빠의 무정한 처신이 섭섭하였지만 마음씨고운 한정아는 변함없이 그를 리해해주고싶었고 모든 일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

《한대 피워도 일없겠니?》

누이동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성익은 군복웃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물었다. 익숙한 솜씨로 담배가치에 불을 붙인 그는 녀성들앞에서 례의를 차릴줄 아는 남자들이 항용 그러하듯 한정아쪽으로 담배연기가 날려가지 않게 손을 휘젓고나서 말꼭지를 뗐다.

…철수명령이 내리자 로성익은 제대신청서를 가지고 련대장을 찾아갔다.

련대장은 그의 이야기를 채 듣지도 않고 안된다고 딱 잘랐다.

입술을 꽉 깨물고있던 로성익은 더 조르지 않고 선선히 돌아섰다.

그날 밤 굳잠에 들었던 련대장은 누군가 몸을 잡아흔드는 바람에 깨여났다.

두눈을 손으로 비비며 몸을 일으킨 련대장은 침대옆에 부동자세로 서있는 로성익을 알아보자 벌컥 화를 냈다.

《이게 무슨짓이요?》

《미안합니다. 련대장동지.》

다짜고짜 제대문건을 내미는 《침범자》를 마뜩지 않게 보고있던 련대장은 하품을 요란스럽게 하고나서 황소영각하듯 소리쳤다.

《보초, 이 동무를 당장 데려가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출입문이 활짝 열리더니 씨비리곰같은 보초가 뛰여들어 로성익을 가볍게 밀어냈다.

그는 다음날 밤에도, 그 다음날 밤에도 소리없이 뛰여들어 곤하게 잠든 련대장을 깨웠다.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나흘째 련속 들이대는 《야간습격》에 련대장은 손을 들고말았다.

《내 잠을 못 자서가 아니라 동무의 열정에 탄복했소.》

며칠후 부죤느이수염을 멋지게 기른 풍채좋은 사단장이 그를 찾았다.

《동문 총명한 사람이니 우리가 철수한 후 도래할 조선반도의 정세추이에 대해 짐작할거요. 그래, 우리와 함께 가는게 어떻소? 내가 보건대 동문 인차 승급할거요. 요구한다면 내 장령복도 벗어주겠소.》

《…》

두눈을 내려깔고 서있는 로성익을 유심히 지켜보던 사단장은 말머리를 돌렸다.

《듣자니 동문 야간전에 능숙하다던데 사실이요?》

고개를 버쩍 쳐든 로성익은 그가 보낸 공을 주저없이 받아던졌다.

《그렇습니다. 원하신다면 오늘 밤에 보여드리겠습니다.》

쏘도전쟁시기 눈부신 야간전으로 파시스트침략자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사단장은 땅크가 지나가도 무너지지 않을만큼 든든한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하하하, 나한텐 그런 수법이 통하지 않소.》

부하들의 심리에 능통하다고 알려진 그는 부죤느이수염을 슬슬 만지다가 로성익의 꼿꼿한 얼굴을 보자 만년필을 꺼내 주글주글한 제대신청서에 대고 멋지게 휘갈겼다.

해당한 수속을 거쳐 조국에 떨어진 로성익은 인민군대에 편입되여 복무하다가 전쟁이 일어난 후 표무강련대에 파견되였다. …

《그래, 고모한테선 소식이 오니?》

로성익의 물음에 한정아는 마치 노래부르듯 즐거운 어조로 알려주었다.

《네, 보름전에 편지를 받았는데 전선원호사업을 하느라고 눈코뜰사이가 없대요. 참, 어머니가 오빠때문에 늘 걱정했는데 이렇게 만난것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그바람에 로성익은 입안에서 빙글빙글 굴리던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 그는 한정아를 만난김에 사민들에 대하여 알아볼 생각이였다. 일단 련대장의 명령으로 그들이 련대에 배속되였지만 마음을 놓을수 없었다. 행동이 굼뜬 사민들때문에 련대가 늦어지는것도 문제지만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그들속에 나쁜 마음을 먹은 인간이 끼워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수 있는가. 그런자들이 적들한테 아군의 행군방향을 알려준다면 련대는 걸음걸음 포위에서 벗어날수 없게 된다. 이것은 련대의 존망과 관련된 심중한 문제이다. 그렇지만 한정아앞에서 그 문제를 끄집어내자니 차마 말이 나가지 않았다. 자칫하면 누이동생이 자기와 함께 온 사람들을 의심한다고 좋지 않게 생각할수도 있었다.

래일이나 모레쯤 한정아를 다시 만나리라고 작정한 로성익은 이렇게 말을 건넸다.

《정아야, 애로되는것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말해라.》

《흥, 또 달아나면 어떻게 말하겠어요?》

코웃음을 치는 누이동생을 보며 로성익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같이 있는데 어디 달아나겠니.》

《좋아요. 이번에 또 그랬다간 혼날줄 아세요.》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한정아의 가슴은 전선사령부 대표인 오빠에 대한 존경과 믿음으로 마냥 설레이고있었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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