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회)

제 1 장

6

 

보름전에 있은 일이다.

그날 방금 착륙한 수송기에서 풍채좋은 미국인이 내리고있었다.

사자갈기마냥 위엄있게 물결쳐내린 금발머리를 뒤로 쓸어넘긴 그는 감회깊은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거나해진 사무라이들이 게이샤의 앙증스러운 춤가락을 즐기며 흥청거리던 빨간 벽돌집들, 거인이 주먹으로 꾹 눌러놓은것 같은 납작한 판자집들, 삐뚤서하게 서있는 전주대들…

한해전과 달라진것이란 별로 없는 땅, 떠나고싶지 않았지만 우악스러운 호송원들에게 잔등을 떠밀리워 쫓겨가지 않으면 안되였던 구슬픈 땅이였다. 하마트면 지난 몇해동안 고심분투한 자기의 발자취가 이곳에서 영영 지워질번 하였었다. 그러나 끝끝내 좌절의 늪에서 헤염쳐나왔고 1년이 지난 오늘 개선장군인양 돌아온것이다.

별안간 그는 치근염을 앓는 사람마냥 얼굴을 찡그렸는데 하필이면 그 순간에 돌이켜볼수록 기분나쁜 지난날이 떠올랐기때문이다.

…푹신한 마호가니침대우에서 요염한 계집을 껴안고 정신없이 딩굴다가 표무강대대가 북으로 넘어갔다는 통보를 받은 에드윈 하불은 분노하였다.

륙군사관학교에 보내주었고 《국군》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으로 승진하도록 뒤에서 밀어주었던 표무강, 머지않아 막을 올리게 될 《위대한 드라마》에서 크게 한몫하리라고 믿었던 그 《사자》가 군사분계선너머로 닁큼 가버린것이다.

처음에는 배신감이, 그 다음은 자신에 대한 환멸감이 맥주거품처럼 끓어올랐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가. 교묘하게 위장한 도이췰란드간첩들을 말짱 들춰내여 미영군의 노르망디상륙작전비밀을 보장한 공로로 아이젠하워의 특별표창까지 받은 방첩장교출신의 미군고문관이 수백명의 움직임을 그렇게도 감촉하지 못했단 말인가.

자총하고싶었지만 포기하고말았다. 결코 본토에 있는 젊고 아름다운 안해가 대양건너에서 날아든 남편의 사망통지서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다른 사내와 재미보는것을 질투해서 그런것은 아니였다.

그 리유는…

자기가 총탄을 골통에 쏘아박고 뻐드러지면 동료들은 하불이야말로 천하바보라고 경멸할것이다. 어떤자는 싸늘하게 식은 시체를 발로 건드리며 음충맞게 웃을지도 모른다. 죽은 다음에야 침을 뱉든 발로 차든 상관없지만 긍지로 가득찼던 한생을 값없이 끝장내고싶지 않았다. 그렇다. 두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기는것은 나약한 인간의 몸부림이다. 진짜 사나이라면 주저앉을것이 아니라 뛰쳐일어나 존엄을 지켜야 한다!

며칠후 하불은 미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의 호출을 받았다.

방에 들어서자 노기충천한 로버트는 침방울을 마구 튕기며 조야하기 짝이 없는 쌍욕을 한바탕 퍼붓고나서 호송병들을 붙여 도꾜행비행기에 태웠다.

극동군사령부에 도착한 하불은 죄인취급을 받았다.

낡은 모포가 씌워진 딱딱한 나무침대가 놓여있는 작고 더러운 방이 차례졌고 식사질도 두눈이 감길 정도로 한심하였다.

상상도 못한 대접이였지만 앞선 수난자의 노린내가 배여있는 나무침대에 묵묵히 누웠고 위주머니가 불평을 터치는 저카로리식사에 익숙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기실 그는 도꾜에 올 때 모든것 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하였었다.

전쟁시기도 아니고 적아가 군사분계선을 사이두고 대치되여있는 상태에서 수백명이나 되는 무장인원이 적측으로 넘어간것은 보통사건이 아니다. 따라서 그 거사를 저지시키지 못한 미고문관의 책임은 막중하다. 입만 벌리면 《박애》와 《자유》를 떠드는 상전들이라고 해도 저들의 위신을 땅바닥에 떨어뜨린 자국민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것이다. 그럴바치고는 차라리 남아답게 책임을 인정하고 군사재판도 받자. 그렇듯 당당한 최후는 관자노리에 대고 권총방아쇠를 당기는것보다 더 떳떳하며 결국 나의 인생도 무의미하지는 않으리라.

자비로운 하나님은 그가 교수대에 매달리는것을 바라지 않았으니 철직제대라는 관대한 처분을 받은 하불은 안해가 있는 죠지아주로 내려갔다.

그가 집에 도착한것은 어슬어슬한 저녁무렵이였는데 쇠울타리밖에 있는 초인종을 누르자 안해가 정신없이 달려나왔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듯싶은 그 정겨운 모습을 보자 하불은 코마루가 시큰거렸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어준 안해는 낯선 사람을 만난것처럼 깜짝 놀라는것이 아닌가.

《당신… 당신이 어떻게 왔어요?》

《?》

상봉의 기쁨으로 설레이던 가슴이, 집에 가면 상처입은 마음이 치유되리라고 믿었던 마음이 식어들었다. 그와 함께 백설처럼 하얀 살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실내옷을 대충 걸치고 곱게 화장을 한 안해가 자기가 없는 사이에 몰라보게 변하였다는것을 알아보았다.

녀자들은 남자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늙고 미워진다는데 남편과 몇해동안 떨어져있은 안해는 더욱 젊고 농염해졌다.

찜찜한 기분으로 응접실에 들어서자 두개의 술잔과 고급료리들이 차려져있는 식탁이 보였다.

《글쎄, 어제 꿈에서 당신이 보이지 않겠어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기다리던 참이예요.》

안해의 재빠른 설명을 들은 하불은 《아, 고맙소!》 하고 식탁에 앉았다.

그러는데 안해가 큰일이나 일어난것처럼 소리질렀다.

《아유, 당신은 그새 야만인이 다 되였군요. 어서 몸을 씻으세요.》

안해가 내주는 타올을 어깨에 걸치고 샤와실로 들어간 하불은 이전 첩보장교의 습관이 되살아나 문틈사이로 귀를 바싹 가져다댔다.

《아써, 큰일났어요. 글쎄 남편이 돌아왔어요. … 아이참, 너무 급해말아요. 후에…》

그가 샤와실문을 벌컥 열자 바빠맞아 송수화기를 내려놓은 안해는 품에 뛰여들더니 그동안 당신이 그리워 죽을번했노라고 아양을 떨었다.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꾹 참고 안해가 정부를 위해 성의껏 준비한 음식을 요정내기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시자 식곤이 몰려왔다.

에라, 한잠 푹 자자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는데 뒤목에 간질간질한것이 닿았다. 몸을 반쯤 일으키고보니 짧은 갈색머리칼이였다.

쌍년!

하불은 침대우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보!》

식탁을 거두고있던 안해가 버젓이 마주보았다.

《왜 그래요?》

도전적인 빛이 어려있는 새파란 눈동자!

입안에서 맴돌고있던 쌍욕을 억지로 삼켜버린 하불은 한잠 자겠으니 깨우지 말라고 일렀다.

안해를 등지고 누운 하불은 자기의 처지가 역겨워났다.

어제는 계급장을 뜯기웠는데 오늘은 안해한테서 배반을 당한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그 요사스러운 낯짝을 힘껏 후려갈기고싶었지만 우들우들 떨리는 손을 두무릎짬에 끼워놓고 잠재울수밖에 없었다. 미국남부의 농장주였던 부친의 유산을 넘겨받은 부유한 안해가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리혼소송을 제기하면 당장 이곳에서 쫓겨나야 하는것이다.

다음날부터 하불은 지금까지 한번도 쥐여본적 없는 낚시대를 들고 강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온종일 낚시대를 드리우고 멍하니 앉아있는 그 몰골은 옆에서 보기가 딱할 정도였으나 의지할 곳 없는 그로서는 머리우에 떨어진 불행을 묵묵히 감수하는수밖에 없었다.

기나긴 휴식은 고통이라는 말이 있다.

몇달이 지나자 안달이 난 안해는 로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냈고 이웃들은 비웃음이 어린 눈길로 그를 주시하였다.

그런 속에서 지긋지긋한 날들을 보내자니 군사재판을 앞두고 갇혀있던 더러운 감옥마저 그리워졌는데 어떤 날은 산송장으로 여생을 보내느니 차라리 제손으로 목을 매고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솟구치군 하였다.

그러던중 조선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처음 생각난것은 자기를 배반하고 북으로 넘어간 표무강이였다.

그자가 어떻게 되였을가?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들을 반대하여 총부리를 겨누었던 《국군》대대장을 용서해주었을가? 그래, 그들은 표무강과 그의 부하들을 환대해주었을것이다. 혹시 표무강을 승급시켜 내세워주었을지도 모른다. 공산주의자들은 관대정책을 펼치고있으니까.

부지불식간에 이런 질문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하불, 당신은 그 유다가 앞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불은 잠시 생각해보고 《용서해주겠소.》라고 대답하였다.

《리유는?》

《그가 자유세계로 돌아오면 미국이 당한 수치는 보상하고도 남기때문이요. 다시말하면 북으로 갔던 사자가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에 못 견디고 돌아왔다면 세계면전에서 북조선의 위상은 떨어지고 미국의 위신은 주물랑마봉만큼 올라가게 된다는거요. 그런즉 표무강을 쟁취하는건 한개 사단의 예비대를 얻는것과 같소.》

마지막말을 입안에서 굴려보던 하불은 제풀에 쓰거운 웃음을 짓고말았다.

부정한 안해앞에서 꿀먹은 벙어리흉내를 내고있는 주제에 미국의 위신이니, 한개 사단의 예비대이니 하는따위를 떠벌이는 나야말로 얼마나 가소로운 인간인가. 오, 하나님, 이 불쌍한 양을 구원해주옵소서. 아멘!

하루는 갑갑할 때 늘 그러하듯 낚시대를 들고 집을 나서는데 한대의 승용차가 멎어서더니 중절모를 쓴 신사가 내렸다.

《하불씨, 어쩐지 그 낚시대가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구만.》

그 어조에는 조롱기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무엇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지 알수 없었지만 하불은 현명한 사나이들이 이런 경우 곧잘 써먹는 수법인 침묵으로 넘어갔다.

그 의중을 넘겨짚은듯 신사는 멀쑥한 얼굴에 야릇한 웃음을 띠웠다.

《난 당신에게 행운의 사다리를 놔주려고 왔소.》

이것은 명백한 구조신호였다.

누가 나에게 《행운의 사다리》를 보냈는가? 이 신사일가? 아니, 그는 한갖 사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불현듯 얼마전 집에 찾아왔던 친구가 생각났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시기 유럽에서 함께 싸운 전우였는데 막강한 뒤배경의 후원으로 일개 륙군장교로부터 미국방성까지 출세의 사다리를 껑충껑충 뛰여오른 행운아였다.

그러고보면 세상은 두 부류의 인간 즉 행운아와 불행아로 갈라져있다.

행운아에는 월가의 억만장자들, 손짓 한번으로 수만의 부하들을 움직이는 고명한 장군들, 성공한 권력자들이 포함된다. 불행아는 뜻을 이루지 못한 출세주의자들, 위스키에 입술을 적시며 실패한 인생을 주절거리는 나약한 인간들인데 불행하게도 하불자신은 후자에 속한다.

그날 친구는 심중한 낯빛으로 물었다.

《하불, 복대하겠다고 청원할 용기는 있나?》

《없는건 아니지만 그만두겠네.》

《어째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네.》

《음, 자넨 진짜 사나이야. 슬픈 일이지만 우리 미국에는 자네처럼 뼈대있는 남아들이 드물지. 다들 돈이 아니면 녀자엉덩이에 정신을 팔고있거던. 좋네. 행운의 사다리를 기다려보게.》

하불은 그가 찾아온것은 전우의 의리보다 하나님의 교리에 따른 자비심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의 귀맛좋은 이야기도 행운아가 불행아를 동정해서 혀바닥이 돌아가는대로 주어섬기는 감언리설이라고 여겨졌었다.

그런 까닭에 친구의 말을 별로 새겨듣지 않았었는데 《행운의 사다리》소리가 나오자 불쑥 그가 생각난것이다.

그의 판단은 정확하였다.

하불과 헤여진 미국방성친구는 극동군사령부에 출장을 갔다가 맥아더를 만났다.

오성장군은 무엇때문인지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일흔살 로인답지 않게 제2차 세계대전시기 련합군이 즐겨 부르던 《백개의 피리》를 휘파람으로 불고있다가 옛 부하를 반갑게 맞아주었던것이다.

맥아더는 자신에 대한 우월감이 강한 나머지 심심치 않은 일화를 많이 남긴 사나이였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에 있은 일본항복조인식때의 일이다.

어느날 해군제독 니미쯔는 오랜 적수인 맥아더에게 항복조인식장에 타고 갈 함정을 선물하였다. 그 함정은 상륙정을 개조한것인데 선체에는 붉은 색칠을 하고 선수에 오각별을 그려넣어 상어같은 위엄과 갈매기의 우아함을 골고루 갖추고있었다.

시답지 않은 눈으로 함정을 바라보던 맥아더는 부관에게 뇌까렸다.

《지내 작소. 난 저 장난감을 타고 20마일을 가지 않겠소. 나에겐 큰 함선이 요구되오. 그것도 새것으로 말이요. 내 생각엔 구축함이 적합할것 같소.》

니미쯔는 울며 겨자먹기로 구축함 《니꼴라스》호를 보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제야 맥아더는 흡족해하며 구축함에 올랐다.

그렇듯 거만하고 사나운 맥아더였지만 때로 배부른 사자로 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미국방성친구가 찾아갔을 때가 바로 그러한 상태였다.

하지만 하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미간을 찌프리더니 기분좋게 빨고있던 파이프를 원탁우에 내려놓았다. 아무리 옛 부하의 간절한 청이라고 해도 미국을 망신시킨자를 용서할수 없다는 태도였다.

친구는 그가 노르망디상륙작전에서 세운 공로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한 다음 설사 죄를 졌다고 해도 다년간 조선에서 첩보활동을 한 경험있는 장교인것만큼 그를 초야에 묻어두는것은 우리의 리익에 저촉되는 일이라고 력설하였다.

맥아더는 파이프를 도로 입에 물었다.

그것은 좋은 징조였다.

아닐세라 며칠후 그는 에드윈 하불을 미8군첩보대 장교로 복대시킨다는 문건에 수표하였다. 로회한 오성장군은 실리를 더욱 중시한것이다. …

집으로 돌아온 하불은 낚시대를 응접실구석에 집어던지고나서 안해한테 말하였다.

《여보, 난 다시 조선으로 가게 됐소.》

《네?》

안해의 눈동자에서 억제할수 없는 기쁨의 불꽃이 튕겨났다. 그렇지만 그 빛은 곧 남편과 헤여지기 힘들어하는 현숙한 안해의 표정으로 바뀌였다.

《여보, 난 어떻게 해요? 당신이 없으면… 무서워요!》

앙큼한 안해의 말을 귀등으로 들으며 트렁크를 손에 든 하불은 문득 생각난것처럼 한마디 던졌다.

《참, 내 머리칼은 갈색이 아니라 금발이라는걸 잊지 마오.》

얼굴이 빨개진 안해를 쓰겁게 바라본 그는 두번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며 덩실한 양옥을 나섰다. …

미8군첩보대에 도착한 하불은 허정효에 대한 자료부터 뒤지기 시작하였다.

새로 부임한 그가 고급료정으로 초청하거나 하다못해 장교식당에서라도 맥주조끼를 찧자고 할줄 알았던 동료들은 그쪽에 대고 엄지손가락을 손가락들짬에 밀어넣은 주먹을 흔들어보였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로골적인 비난을 모르지 않았지만 하불은 개의치 않고 허정효의 처리문제를 두고 생각을 굴렸다.

그자는 표무강대대의 동향을 구체적으로 장악하지 못하였고 특히 사건현장에까지 따라갔으나 그들을 놓쳐버린 죄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감방에 처박혀있었다. 하기야 두개 《국군》대대의 입북으로 성이 머리끝까지 오른 늙다리 리승만이 그 분풀이로 《국군》의 주요지휘관들을 파면시킨 판에 그까짓 송사리같은 허정효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그자는 아직 쓸모있는, 미국이 짖으라고 하면 짖고 물라고 하면 무는 부르독크이다. 땅바닥에 떨어진 미국의 체면을 세우자면 어떤 일이 있어도 표무강을 귀순시켜야 하는데 그 일은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바로 오래전부터 표무강을 잘 알고있는 허정효가 적임자다. 그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자!

자료철을 소리나게 덮어버린 하불은 상관을 찾아가 허정효문제를 제기하였다.

상관은 그 문제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쾌히 승낙하였다.

그의 방에서 나온 하불은 감옥으로 향하였다.

녀자처럼 길게 기른 머리를 무릎짬에 틀어박고있던 죄수는 이전 상관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미스터 허, 잘 있었소?》라는 귀익은 목소리가 울리자 먼지오른 유리마냥 뿌옇게 흐려있던 두눈이 번쩍 빛났다.

《고, 고문관각하!》

용수철마냥 튕겨난 그는 무작정 하불의 발목에 매달렸다.

무덤속같은 감방에서 비참하게 썩어가다가 오랜만에 사람구경을 하게 되여 있는지 없는지 몰랐던 심장이 화들짝 놀란데다가 그 반가운 손님이 다름아닌 하불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앞에서 정신이 반쯤 나간 허정효였다.

주인을 만난 개처럼 반가와서 눈물까지 찔끔 쏟는 그의 잔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준 하불은 간수에게 점잖게 일렀다.

《이 사람을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고 새옷도 갈아입히시오.》

얼마후 허정효가 씻은 무우마냥 멀쑥해가지고 나타나자 하불은 고급료정으로 데리고 갔다.

위스키와 맛좋은 료리를 보자 허정효의 배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지만 하불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행운의 사다리》가 와닿지 않았더라면 그자신도 허정효와 조금도 다를바없었을 지난날이 생각난것이다. 동병상련이라고 《자유세계》에서 버림받은 외로운 사나이를 위로해주고 용기도 북돋아주고싶었다.

불행한 사나이에게 필요한것은 동정의 말이 아니라 바카스(술의 신)라는것을 알고있는 하불은 그의 잔에 위스키를 부어주었다.

《고생이 많았겠는데 쭉 내오.》

그 한마디에 맺혔던 설음이 왈칵 터진 허정효의 두볼로 눈물이 개울물처럼 흘러내렸다.

《아, 진정하오.》

꺽꺽 흐느껴울던 허정효는 위스키잔을 단번에 비우고서야 눈물의 바다에서 겨우 헤염쳐나왔다.

하불은 빈 술잔에 또 위스키를 채웠다.

술기운이 오르자 굶주린 부르독크는 체면이라는 거치장스러운 가면을 집어던지고 정신없이 마시기 시작하였다.

석잔… 다섯잔…

바카스한테는 천상천하의 힘장수 헤라클레스라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하물며 만성적인 기아와 정신적압박에 시달려온 허정효의 경우에야 더 말해 무엇하랴.

주정이 높은 위스키가 몸안에 들어가자 인차 혀가 꼬부라지고 갈대처럼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그속에서도 귀인에게 경의를 표하는것만은 잊지 않은 그였다.

《각, 각하의 은혜… 백, 백골난망입니다.》

이만하면 부르독크의 목에 사슬을 든든히 채웠다고 생각한 하불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난 당신이 이 지경에 이를줄은 몰랐소.》

순간 취기로 뻘개졌던 허정효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몸도 막대기처럼 꼿꼿해졌다.

《내가 이렇게 된건 표무강, 그자때문입니다. 그자가 북으로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난 지금쯤 장성이 되였을겁니다.》

속으로 쓰거운 웃음이 새여나왔지만 하불은 짜장 아쉬운것처럼 맞장구쳤다.

《그렇소. 당신은 장성이 되였을거요.》

《각하, 믿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불의 내심을 알리 없는 허정효는 음식상우에 머리가 닿도록 연방 허리를 굽석거렸다.

《미스터 허, 이젠 내 말을 듣소.》

부르독크한테 먹이감을 던져줄 때가 되였다고 단정한 하불은 표무강이 인민군련대장으로 되였으며 경상북도 ××계선에 진출하였다고 알려주었다.

허정효는 부드득- 이를 갈았는데 어떻게나 세게 갈았던지 신경이 든든한 하불도 잔등에 소름이 돋았다.

《각하, 내 그자를 죽여버리겠습니다.》

하불은 위스키잔을 비우고나서 천천히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럼 각하는?!…》

역시 허정효는 촉기빠른 인간이였다. 비릿한 피냄새와 시큼시큼한 땀내가 진동하는 감방에서 육체는 미이라처럼 말라버렸지만 두뇌는 주인의 의중을 간파하려고 재빨리 회전하고있었다.

《미스터 허, 표무강을 귀순시키시오.》

허정효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튕겨나는것을 알아본 하불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생각해보오. 그가 자유세계로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것 같소? 그래, 이걸 눅거리복수에 비기겠소?》

그 말은 허정효의 마른가슴에 흘러든 한모금의 생신한 《피》였다.

《각하, 어떤 일이 있어도 그자를 귀순시키겠습니다.》

입술을 꽉 사려문 허정효의 눈빛은 야심으로 번뜩이였다.

그러한 그에게 하불은 또 한모금의 《피》를 주었으니 《국군》소령의 계급장을 내준것이다. 결국 부르독크에게 날개까지 달아준셈이다.

《고문관님, 이 몸이 진토되여도 결초보은하겠습니다.》

만족한 눈길로 허정효를 쓰다듬던 하불은 자연스럽게 자기의 위신을 추켜올렸다.

《참, 난 고문관이 아니라 미8군첩보장교요.》

자기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마치 오성장군이기라도 한것처럼 벌떡 일어난 허정효는 취기에 흐려진 두눈을 크게 떴다.

모르쇠를 하고 《말보로》표담배를 피워문 하불은 자기의 출세를 축하하려고 벌써부터 몸을 들썩거리는 부하에게 일렀다.

《난 당신을 믿소.》

《감사합니다.》

드디여 허정효에게도 재생의 순간이 찾아온것이다.

며칠후 한결 멀끔해진 《국군》소령은 표무강련대와 대치하고있는 최덕근사단으로 떠나갔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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