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제 1 장

7

 

행군도중 짧은 휴식구령이 내렸을 때 누군가 한정아를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가마뚜껑처럼 크고 둥그런 얼굴에 웃음을 담고 서있는 군관을 처녀는 의아해서 보았다.

《날 모르겠습니까? 벼랑에서 떨어졌던… 아, 그때 나한테 피를…》

망각의 수풀속을 헤치듯 깜빡거리던 처녀의 두눈이 반짝 빛났다.

《아이, 그렇군요.》

《예, 바로 접니다. 하하하.》

두사람은 오래동안 헤여졌다가 만난 오누이처럼 두손을 마주잡고 반가와하였다.

《사실은 첫날부터 알아보았는데 혹시 잘못 보지 않았는가 해서… 세상은 넓고도 좁다더니 생명의 은인을 이렇게 만날줄이야…》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에 한정아는 살짝 얼굴을 붉히였다.

《아이참, 헌데 몸은 어때요?》

《이젠 다 나았습니다. 한번 보겠습니까?》

정찰소대장 리경일은 격술자세를 취하더니 곧추치기와 손칼치기, 발차기를 박력있게 해댔다. 그러다가 아침이슬에 젖은 락엽을 밟는 통에 우둔한 곰처럼 쿵- 하고 넘어지고말았다.

《제길!》

속이 후끈 달아올라 뛰쳐일어나던 그는 또다시 미끄러지며 궁둥방아를 보기 좋게 찧었다.

그 모양이 어찌나 우스웠던지 한정아는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그 청신한 웃음소리는 침울한 기운이 떠도는 수림속에 신선한 활기를 가져다주었다.

…리경일은 아찔하게 솟은 벼랑밑에 쓰러져있었다.

재빛구름이 드리운 8월의 하늘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동정하듯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지더니 피칠갑을 한 그의 몸을 극성스럽게 두드리며 깨끗이 씻어주었다.

온 지구를 물바다에 잠글것처럼 극성을 부리던 소나기가 뚝 멎고 구름장들이 유유히 물러가고있을 때 그는 죽음의 나락에서 간신히 기여올라왔다.

소나기의 덕분으로 정신을 차렸지만 몽둥이에 얻어맞은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하고 팔다리도 쑤셔났다. 그속에서도 중요한 정찰자료를 한시바삐 련대에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빨리 가자. 빨리!

몸을 일으키려고 안깐힘을 썼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수 없었다. 그제서야 자기가 련대에 빨리 가려고 덤벼치다가 그만 발을 헛디디여 아찔한 벼랑우에서 굴러떨어지던 일이 기억났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몸을 축 늘어뜨린 리경일은 련대가 위치한 산너머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여름해가 소나기때문에 밑졌던 봉창을 하려는듯 뜨거운 열을 내뿜기 시작하였다.

얼굴과 가슴이 화로처럼 달아오르고 목구멍도 바싹 말라들었다.

물!… 물!…

눈앞이 깜빡깜빡 흐려지더니 비몽사몽간에 나른해진 몸이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공연이 끝난 무대막처럼 천천히 내리워지는 눈시울밑으로 캄캄한 자락이 너울너울 날아들고있었다.

어둠… 어둠…

《여보세요!… 정신차리세요!》

누군가 몸을 조심히 흔들고있었다.

《이보세요, 정신차리세요!》

눈을 뜨려고 하였지만 종이장보다 가볍던 눈시울이 어떻게 된건지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물!… 물!…》

방금전의 그 목소리가 서서히 밝아오는 의식의 언덕너머에서 아슴푸레 들려왔다.

《자, 물이예요. 어서 마셔요!》

인두처럼 화끈 달아오른 입술에 뭉툭한것이 와닿자 리경일은 눈도 뜨지 못한채 정신없이 들이빨았다.

한모금… 또 한모금…

막혔던 목구멍이 열리고 점차 몸에 힘이 생겨났다.

눈시울을 힘껏 밀어올리자 운무가 낀듯 뿌옇게 흐려졌던 눈앞이 밝아지며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비껴있는 까만 눈동자가 안겨왔다.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때까지 자기가 입에 물고있은것은 군용물통이 아니라 그 처녀의 손가락이였던것이다.

그는 처녀의 손을 힘껏 뿌려던졌다.

《어마나?》

뒤로 넘어질번 하다가 용케 몸균형을 잡은 처녀는 눈앞이 아찔한지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그를 망연히 보고있던 리경일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무슨 일을…

《이젠 정신이 좀 들어요?》

봄기운처럼 따스한 목소리를 듣자 리경일은 풀무처럼 풀떡거리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는것을 느꼈다.

《동문… 누굽니까?》

다심한 눈길로 내려다보던 처녀는 안심하라는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나가던 길손이예요. 헌데 어디로 가던 길이예요?》

리경일은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지만 또다시 눈앞에 노란 동그라미들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이, 움직이면 안돼요.》

리경일은 씨근덕거리며 입안에 고여있던 말을 툭 내뱉았다.

《난… 련대에 가야 합니다.》

처녀가 급히 물었다.

《련대는 어디 있어요?》

《저기 산너머에…》

여기까지 말한 리경일은 또다시 의식을 잃고말았다.

한참후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자기가 처녀의 잔등에 업혀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날… 내려놓소.》

대답대신 할딱거리는 처녀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못 들었소?》

잔등에서 미끄러져내리는 리경일의 몸을 암팡지게 추스른 처녀는 다기차게 응대하였다.

《동문 련대에 가야 한다고 했지요?… 그럼 가만있어요.》

처녀는 다시금 걸음을 내짚기 시작하였다.

한발자국… 세발자국…

리경일은 처녀의 목덜미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땀줄기를 보았다.

가슴속에서 불덩이 같은것이 왈칵 솟구쳐올랐다.

아, 세상에 이런 처녀도 있단 말인가?

온몸에 굽이치던 격정의 불덩어리는 마침내 눈굽에 눈물을 가득 채워놓고야말았다.

리경일은 처녀가 알아차릴가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었다.

그렇다. 그 고마움을 어찌 천만방울의 눈물로 대신할수 있으랴.

그들이 산고개를 넘어섰을 때 앞에서 전사들이 마주 달려왔다.

《정찰소대장동지!》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전사들의 잔등에 업히운채 얼마쯤 가던 리경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엉?》

그 처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생명의 은인이며 차후 련대의 전투승리에 크게 이바지한 묘령의 처녀는 이름도 남기지 않은채 사라진것이다. …

《저, 한가지 물어도 좋아요?》

벽계수처럼 맑은 목소리에 리경일은 기억의 문을 슬며시 닫았다.

《물어보십시오.》

《련대장동진 어떤 사람인가요?》

리경일은 그야 물어보나마나 아닙니까라고 하듯 히죽 웃었다.

《우리 련대장동진 정말 훌륭한 지휘관입니다. 용감하고 담이 크고… 겉보기엔 무뚝뚝해도 인정도 많습니다. 참, 련대장동지가 누군지 압니까? 작년에 각기 대대를 이끌고 북으로 의거한 두 대대장들중의 한사람입니다.》

한정아는 속으로 놀랐다.

아니, 그럼 련대장동지가 그때 세상을 들었다놓은 의거대대장이란 말인가. 글쎄, 처음부터 낯이 익다 했더니…

전쟁전 그는 대학생들과 함께 평양으로 입성하는 의거장병들을 환영하는 연도행사에 나갔었다.

그날 꽃물결이 설레이는 수도의 거리로 의거장병들을 태운 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내달렸는데 그앞에 한대의 군용찦차가 서있었다.

한정아는 차우에서 손을 열정적으로 흔들고있는 두 대대장을 보면서 수백명이 넘는 장병들을 이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은 저들이야말로 영웅남아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로부터 한해가 지난 오늘 처녀는 우연히 두 대대장가운데 한사람을 만난것이다.

정찰소대장의 말에 의하면 이름은 표무강, 나이는 25살이라고 한다. 그건 그렇고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가?

물론 리경일은 자기의 직속상관에 대하여 훌륭한 지휘관이라고 극구 칭찬하였지만 한정아의 생각은 달랐다. 표무강은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것을 강요하였던것이다. 다시말하면 자기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무작정 명령으로 련대에 배속시키려고 하였던것이다.

그 의도가 어찌하였든지간에 한정아는 자기를 마치 부하처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용납할수 없었다.

한정아는 치면 칠수록 더욱 강하게 튀여오르는 고무공같은 처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정아가 처음의 생각을 접고 련대에 배속된것은 그자신도 속으로 우려하였던, 혹시 도중에 적들과 마주치면 마을사람들을 책임질수 없다는 근심때문이였다. 이제는 련대와 같이 있게 되였으니 그들의 신변에 대해서는 한결 마음을 놓았지만 그럴수록 《사민구분대》가 련대의 행동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지금보다 더 뛰여다녀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리경일과 헤여진 처녀는 저쯤에서 행군하고있는 《사민구분대》를 향해 냅다 뛰여갔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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