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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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길에 선참으로 들어선 사람은 물론 한정아였다.

며칠전에 있은 강도하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위험이 나서면 자기가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왜 그렇지 않으랴.

좌상로인이랑 영남이 아버지랑 지어 임신부까지도 모두 자기를 따라 북으로 가는 사람들이였다.

낮에는 자기들과 함께 뙤약볕속에서 김을 매고 밤에는 문문 연기를 피워올리는 모기쑥화로를 마주하고 공화국북반부에서 실시한 민주주의적인 시책들을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한정아를 순박한 마을사람들은 한집안식구처럼 사랑해주고 존경하였다. 아는것이 많지만 겸손하고 생기발랄하면서도 몸가짐이 단정한 그의 모습에서 자기들이 아직 가보지 못한 북의 참모습을 그려보았던것이다.

하기에 한정아가 북행길에 오르자 마을사람들은 너도나도 따라나섰다.

《우리도 같이 가자요.》

《섭섭하구만. 그동안 한식솔처럼 지낸 우릴 두고 혼자 가겠소?》

처녀는 난감하였다.

상급의 지시에는 마을사람들을 데리고 가라는 내용이 없었다. 북으로 가는 도중 무슨 정황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인정에 못이겨 그들을 데리고 떠났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할수도 없었다.

《여러분, 이러면 안됩니다. 다들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좌상로인이 나섰다.

《임자두 알지만 우린 난생처음 제땅이라는걸 가져보았네. 기름기가 철철 도는 땅에서 농사를 마음껏 지어보니 스님들이 말하는 극락세계라는게 따로 없더군. 그런데 임자네가 가면 땅을 도로 빼앗기겠는데 세상에 그처럼 분한 일이 어디 있겠나. 북에는 지주도 없고 소작살이하는 사람도 없다는데 그런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는게 평생 소원일세. 그러니 우릴 데려가주게.》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성미가 온순한 영남이 아버지가 끼여들었다.

《우리 집사람은 숨을 거두면서 3대외독자인 영남이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살려야 한다고 당부했지요. 북에서는 여기서처럼 아이들이 총에 맞아 죽을 걱정도 없다는데 영남이를 위해서도 북으로 가야겠수다.》

마을사람들을 둘러보던 한정아는 저쯤에 얌전히 서있는 임신부를 알아보았다.

《아니, 서분아주머니도 북으로 가려고 그러세요?》

저고리고름을 입에 문 임신부는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을에서 드살이 세기로 소문난 우물집녀인이 벅적 고아댔다.

《서분이, 정신나가지 않았어? 그 몸으로 어딜 간다고 그래? 집에 남아서 아이나 곱게 낳으라구.》

다른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임신부를 만류하였다.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진 서분이는 주밋주밋하다가 품속에서 피묻은 편지를 꺼냈다.

마을사람들은 누구나 그 편지를, 보풀이 허옇게 일고 눈물에 만년필잉크가 군데군데 퍼진 그 글줄을 알고있었다.

그것은 고향마을이 해방되자 선참으로 인민군대에 입대한 서분이의 남편이 최후를 앞두고 보낸것이였다.

《여보, 이제 전투가 벌어지면 우린 다 죽을거요. 그렇지만 슬프지 않소. 왜냐하면 지난날 짐승취급을 받으며 살아오던 내가 장군님의 은덕으로 난생처음 사람다운 생활을 누려보았기때문이요. 바로 그 행복을 지키려고 난 서슴없이 결사전으로 나가는거요. 마지막으로 부탁하고싶은건 이제 태여날 우리 아이만은 공화국의 품에서 꼭 낳으라는거요. 그러면 그 아이는 내가 다 받지 못한 행복을 누리게 될거요. 여보, 부디 내 당부를 잊지 마오.》

벌써부터 눈굽이 젖어오른 서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도 집에서 해산하면 편하다는걸 왜 모르겠나요. 허지만 그이가…

그래요. 설사 길가에서 아이를 낳는 한이 있어도 북으로 가겠어요. 그러니 절 꼭 데려가주세요. 네? 부탁이예요.》

자기를 바라보는 마을사람들의 진정어린 눈길들을 읽으며 한정아는 마음이 후더워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태양의 품을 찾아가려는 뜨겁고 절절한 마음을 그 무엇으로 막으랴.

한정아는 서분이의 어깨를 꼭 그러안았다.

《가자요. 우리모두 함께 가자요!》

이렇게 되여 그를 따라나선 마을사람들이였다. …

벼랑길로 접어들던 한정아는 생각난듯 뒤를 돌아보았다.

《서분아주머니, 나하고 같이 건너가자요.》

그 말에 임신부의 두눈이 양푼만큼 커졌다.

《나, 나말이예요?》

《무서워말고 내 손을 잡아요.》

서분이는 주저주저하다가 떨리는 손을 겨우 내밀었다.

그의 손을 꼭 잡은 한정아는 벼랑길우에 발을 올려놓았다.

뒤에서 서분이가 뚱기적뚱기적 따라섰다.

《침착하게… 덤비지 마세요!》

한정아는 이렇게 소리쳤지만 사실 그것은 임신부가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웨친 소리였다.

소녀시절 그는 꽃을 꺾으러 마을뒤산에 올라갔다가 산비탈에서 굴러내려 심하게 다친적 있었는데 그때부터 높은 곳에 올라가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발이 싸늘해지군 하였다.

지금도 마을사람들앞에서 나약한 꼴을 보이면 안된다고 마음을 도사려먹었지만 심장은 불안하게 뛰고있었다.

입술을 사려물고 벼랑길을 절반쯤 건너갔는데 위태로운 굽인돌이가 나타났다. 좀전에 표무강련대장이 미끄러져 떨어질번 한 곳이였다.

뒤잔등이 오싹해지더니 이마에 땀이 쫘악 돋아났다.

침착하자. 덤비지 말자!

굽인돌이를 막 돌아서는데 숨이 막히더니 눈앞이 핑그르르 돌아갔다.

아!-

벼랑턱에 비죽이 나와있는 나무뿌리인지 풀뿌리인지를 간신히 잡고있자니 두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내가 왜 이러니, 이래선 안돼!

하지만 며칠째 영남이와 서분이를 돌보느라 지쳐버린 육체는 의지를 배반하고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길이 발밑으로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집어삼킬듯 음침한 미소를 흘리고있는 아찔한 골짜기가 비껴들었다.

찰나 벼랑밑으로 떨어지던 말의 몸뚱아리가 피뜩 떠올랐다가 사라지더니 벼랑길과 골짜기가 뒤섞어지며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

앞쪽에서 다급한 웨침소리들이 들려왔지만 마치 수백마리의 꿀벌들이 웅웅거리는것 같았다.

어느결에 서분이의 손을 놓아버린 한정아는 몸중심을 잃고 비칠거렸다.

스물두해라는 처녀의 길지 않은 한생이 비참하게 끝나버릴 그 순간, 앞에서 뻗어온 손이 허우적거리는 그의 한쪽팔을 억세게 잡아당겼다.

벼랑밑으로 기울어지던 한정아는 죽음의 낭떠러지에서 기적적으로 벗어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처녀는 이글이글 불타고있는 두눈을 보았다.

그는 다름아닌 표무강련대장이였다.

《일없소?》

막혔던 숨을 호- 하고 내쉰 한정아는 이마에 돋은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네!》

그때에야 붙잡고있던 처녀의 팔을 슬그머니 놓아준 표무강은 뒤로 몸을 돌리더니 명령조로 말하였다.

《내 혁띠를 잡소!》

자석에 끌리운 쇠붙이마냥 처녀는 든든한 허리를 감고 돌아간 군관혁띠를 꽉 잡았다.

놀랍게도 불안하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고 떨리던 다리도 잠잠해졌다.

《서분아주머니도 정치공작대원동무의 손을 잡으시오.》

한정아의 뒤에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잡, 잡았어요.》

《자, 앞으로!》

만일 그 명령이 며칠전에 내렸다면 한정아는 순순히 응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꼬물만큼도 다른 생각을 할수 없었다. 한시바삐 이 벼랑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였다.

표무강이 먼저 움직이자 처녀는 보폭을 맞추며 걸음을 내짚었다.

뒤에서는 서분이가 덤벼치며 발뒤축을 콱 밟았다. 그 다음은 좌상로인이 또 그 다음은 영남이 아버지순서로 따라나섰다.

한덩어리로 뭉친 《사민구분대》는 인민군련대장 표무강을 따라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였다.

세발자국… 여섯발자국…

드디여 《사민구분대》는 위험한 벼랑길을 무사히 건너갔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가로 펑!- 하고 붉은 신호탄이 솟구쳐올랐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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