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2 장

3

 

《허 참, 그자가 벼랑쪽으로 빠져나갈줄 어떻게 알았겠소.》

표무강련대를 《포위소멸》하겠다고 흰소리를 쳤다가 놓쳐버린 최덕근은 천막안에 들어서자마자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어쩌겠습니까? 일이 그렇게 된걸.》

그를 맞아준 허정효는 짜장 동정하는척 하였지만 속으로 비웃고있었다.

각하, 그들과 그만큼 싸웠으면 그런 경우를 예견했어야지요. 어쨌든 그 두뇌를 가지고 사단을 지휘하는 담력이 부럽군요. 난 당신처럼 우둔한 방법이 아니라 아주 슬기롭게 표무강을 귀순시키겠소.

그는 아닌보살하고 미국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나오는 녀주인공의 대사를 인용하며 최덕근의 풀떡거리는 가슴에 매운 재를 슬쩍 뿌렸다.

《래일엔 또 래일의 태양이 솟아오르는 법이지요.》

자세히 들어보면 그들의 대화는 이상하였다.

《국군》장성과 소령의 직급은 하늘과 땅차이다. 그런데도 마치 동료를 대하듯 무랍없이 말을 건네는 허정효의 태도도 놀랍지만 최덕근의 공경스러운 태도는 더욱 놀랍다. 하지만 허정효가 최덕근의 륙사선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별로 놀랄것도 없다. 표무강의 의거만 아니였더라면 허정효의 어깨우에도 소장이나 중장의 계급장이 올라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최덕근은 륙사선배를, 더구나 하불의 후원을 받고있는 첩보장교를 함부로 대할수 없는것이다.

《사단장님, 그릇의 먼지는 씻어서 없애고 남자의 고민은 술로 씻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허정효의 들큰한 위로에 최덕근은 구겨졌던 얼굴을 폈다.

《거 좋은 말이요.》

또다시 코웃음을 친 허정효는 품속에서 납작한 위스키병을 꺼내여 술잔에 붓고 자못 정중한 자세로 권하였다.

《고맙소!》

독한 위스키를 단번에 비운 최덕근은 《이거 진품이 아니요?》라고 묻는듯 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허정효는 시치미를 뚝 따고 말보따리를 펼쳤다.

《어느날 조물주가 스코치위스키를 만들고 기뻐서 천사 가브리엘을 불렀답니다.

자, 한번 냄새를 맡아보게.

가브리엘은 그가 시키는대로 위스키를 손바닥에 부었습니다. 그다음 손을 마주 비볐더니 그 냄새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죽여주더라는겁니다.》

뚱딴지같이 조물주소리는 왜 꺼내는가 하고 뜨아해하던 최덕근의 입귀가 건듯 들리웠다.

《그런데 조물주가 그토록 자랑한 이 스코치위스키를 거만한 영국귀족들이 일반백성들이나 마시는 술로 천시했다니 그들의 문명수준도 알만 하지요. 게다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병합된 후로는 많은 세금이 부과되면서 위스키는 깊은 산속에서 몰래 제조되는 밀주신세가 되고말았다는겁니다. 밀주업자들은 판로가 막히자 술을 참나무통에 넣어 지하실이나 산속에 숨겨두었는데 몇해 지나 열어보니 무색이던 색갈은 아름다운 호박색으로 변하고 길금을 건조시킬 때 배인 그을음내는 더욱 세련되고 향긋한 니탄연기냄새로 바뀌였다지 않습니까? 이처럼 슬픈 력사속에서 위스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흠, 미스터 허는 대단히 유식하구만.》

흥미롭게 굴러가던 이야기의 허리를 분지르며 야전천막안에 들어선 사람은 풍채좋은 미국인이였다.

얼핏 들으면 누구나 즐거워할 귀맛좋은 칭찬이였지만 막대기를 삼킨것처럼 몸이 꼿꼿해진 허정효의 얼굴에 알릴듯말듯 경련이 일어났다.

눈앞에 붉은 신호등이 켜진것이다.

에드윈 하불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대단히》라는 부사를 람발하군 하였는데 그 단어를 환영이나 배려의 뜻으로 생각하면 큰코를 다친다. 가끔 미련한 인간들이 오판하고 어리석게 굴다가 졸경치르는 꼴을 한두번만 보아오지 않은 허정효로서는 그럴수밖에 없는것이다.

《미스터 최, 트럼프를 놀지 않겠소?》

허정효는 아짜아짜한 마음으로 최덕근을 주시하였다.

저 우둔한 인간이 정말 트럼프를 놀자고 접어들면 야단인데.

《각하의 청에 응하는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지만 일이 있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뚱뚱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맵시나게 거수경례를 하고 천막을 나서는 최덕근을 보자 그는 속으로 놀랐다.

최덕근은 결코 우둔한 인간이 아니였다. 혹시 스칼레트나 스코치위스키에 대해 알고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르쇠를 하였을지도 모른다.

미묘한 분위기가 맴돌고있는 천막안에 하불의 점잖은 말소리가 울렸다.

《미스터 허, 요즘 사냥이 잘되오?》

《사냥》이란 말이 나오자 허정효는 마비가 온듯 혀가 굳어졌다.

귀신의 하품소리도 듣는다는 로회한 상전이 표무강을 귀순시키는 일이 어떻게 진척되고있다는것을 몰라서 묻는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이것은 무서운 추궁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미끈한 이마에 진땀이 뿌직뿌직 돋더니 그중 한방울이 술잔에 뚤렁 떨어졌다. 그 불행한 땀방울은 유서깊은 위스키속에 희석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필경 자기도 그 땀방울처럼 하불이라는 독한 위스키에 녹아버릴것 같은 생각에 허정효는 잔등이 오싹해났다.

《으흠?!》

범상치 않은 하불의 코소리가 대답을 재촉하고있었다.

《각하, 그자가 워낙 간단치 않은자여서… 지금 방안을 연구하는중입니다.》

위풍을 돋구는데 한몫하군 하는 하불의 노란 눈알이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후에 그의 입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넬슨제독이 말했던가. 나의 생애에서 모든 성공은 일을 예정한 시간보다 늘 15분 먼저 하였기때문이다.

그것은 《사냥》을 오래 끌면 재미없다는 경고였다. …

그가 가버리자 허정효는 후유- 하고 페부속에 가득차있던 한숨을 몰아쉬였다.

신상에 날아들었던 위기는 일시 물러갔지만 그것은 목표물을 맞히지 못하면 되돌아오는 부메랑처럼 재차 들이닥칠것이다. 하불은 겉보기에는 점잖은 신사같지만 그 표정뒤엔 닐강의 악어같은 포악성이 도사리고있었다.

잔잔한 강기슭에서 태평스럽게 물을 마시는 짐승들.

눈과 코구멍을 물우에 내놓고 소리없이 접근하는 악어.

별안간 잔잔하던 수면이 왈칵 뒤집혔다. 악어가 들양을 덮친것이다.

연약한 짐승은 벗어나려고 힘껏 버둥거렸지만 악어는 드센 이발로 먹이감을 사정없이 동강낸다.

하불이라는 악어가 허정효를 덮치지 않고 고스란히 놔준 선심뒤에는 등가보상이라는 절묘한 조건이 놓여있다. 그것은 지옥같은 감옥에서 석방시킨 대가로 표무강을 《자유세계》의 편으로 돌려세우라는것이다. 그 명령을 집행하지 못하면 악어는 허정효라는 들양을 삼켜버릴것이다. 살점은 말할것도 없고 뼈다귀 하나 남기지 않고 통채로 말이다.

정말 억울한 일이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여났으면 마땅히 부귀영화를 누려야 한다. 그런데 그 문턱에 가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꺼진단 말인가. 물론 누구나 한번은 죽기마련이니 남보다 먼저 《천당》에 간다고 울고불고 할건 없다. 다만 내 앞길을 망쳐놓은 표무강을 물어뜯지 못하는것이 분하다. 아니, 이대로 꺼질순 없다.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미국이라는 《태풍》에 복종하여야 한다.

누가 말했던가. 아첨은 단 한번의 실수도 모른다고.

하기야 꿀처럼 달달한 아첨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아무리 강한 사나이라고 해도 얼굴에 상냥한 웃음을 짓고 정중히 아뢰이는 미사려구앞에서는 끝내 넘어가고야마는것이다.

그 불가사의한 아첨에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의 생사여탈권을 쥐고있는자에게 덮어놓고 굽신거리는 체질형아첨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목적을 위해 굽신거리는척 하는 지향형아첨이다. 대체로 현명한 사나이들, 적어도 자기의 생을 함부로 포기할수 없는 초연한 사나이들은 후자를 선택하고 복종이라는 고배를 억지로 마시면서 명성과 출세를 완강하게 추구하였다. 내가 하불앞에서 코흘리개처럼 목놓아울며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맹세한것도 실은 부귀영화의 문고리를 잡게 될 그 순간때문이 아닌가.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군복웃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낸 허정효는 타다남은 양초에 불을 붙였다.

잠시후 초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는데 그 모양은 흡사 이승에서의 고달픈 생을 슬퍼하는 사나이를 방불케 하였다.

가물거리는 초불을 노려보던 그의 눈시울이 경련을 일으킨듯 파르르 떨었다.

꺼지지 않으려고 모지름을 쓰는 초불, 어둠과 필사적으로 싸우고있지만 어차피 종말을 고하고야말 그 모습에서 자신의 래일을 보았던것이다.

《난 당신을 영원히 석방시키지 않았단 말이요.》

심장을 싸늘하게 얼구는 그 목소리.

진저리를 치고난 그는 맥이 진한듯 가물거리는 초불을 노려보다가 후- 하고 바람을 내뿜었다.

연약한 초불은 이렇다할 반항도 못해보고 꺼져버렸다.

허정효의 두눈에 파란 섬광이 번뜩이였다.

난 초불이 아니다!

불현듯 륙사시절 밤을 패우며 읽었던 《손자병법》의 한구절이 생각났다.

《적이 제발로 끌려나올수 있은것은 미끼를 던져 적을 유인했기때문이고 원래 기여나오려고 생각하던 적이 끌려나오지 않은것은 위구를 느꼈기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것은 《적이 제발로 끌려나올수 있은것은 미끼를 던져 적을 유인했기때문》이라는 문구다. 하다면 표무강을 유인할수 있는 미끼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자의 에미를 리용해볼가? 혈육을 인질로 삼고 적수를 굴복시키는 방법은 고대로부터 써오는 상투적인 수법인데 오늘에 와서도 그 효과는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표무강한테는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 난 이미 쓴맛을 보았다. 그가 대대를 이끌고 의거할 때 신애라는 처녀를 인질로 삼고 돌려세우려고 하였지만 실패하고말았다. 표무강의 에미도 다를바없을것이다. 아들이 대대를 이끌고 북으로 넘어가도록 뒤에서 힘과 용기를 안겨주었다는 그 녀자가 제 목숨을 건지겠다고 귀순하라고 설복할리 만무하다. 더우기 인민군련대장인 그가 부하들의 운명과 제 에미의 목숨을 바꾸자고 하지 않을것이다. 오히려 그자의 복수심을 가증시킬뿐이다. 목적을 이루자면 고단수의 암계가 필요하다. 고단수의 암계라…

어디선가 스르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정효는 제꺽 바지주머니에서 손전지를 끄집어냈다.

환한 전지불에 천막안으로 들어서는 녀자의 자태가 드러났다.

다리아처럼 환한 얼굴, 군복을 뚫고 나올것 같은 불룩한 젖가슴, 미츨한 몸매…

숨이 막히도록 꽉 안아주고싶은 육감적인 자태를 보자 머리속에서 무르익어가던 고단수의 암계가 홀연 사라져버렸다.

수집은듯 고개를 살풋이 숙인 녀자를 걸탐스럽게 노려보던 허정효는 전지불로 천막구석에 놓여있는 침대를 비쳤다.

《어머, 남들이 들어오면 어쩔려구…》

자리에서 일어난 허정효는 가쁘게 오르내리는 녀자의 젖가슴을 슬쩍 그러쥐였다.

《어머!》

바스러지는 비명소리가 터지더니 꼿꼿하던 녀자의 머리가 사나이의 앞가슴에 쿡 박혔다.

벌써부터 할딱거리는 녀자를 통채로 안아 침대에 눕혀놓은 허정효는 승리자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끄러워 못 견디겠다는듯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운 그 녀자는 한때 숙명녀고를 나온 명물인데 마치 제가 무슨 클레오파트라나 되는듯이 코대를 잔뜩 높이고 다니다가 운수사납게도 허정효의 매눈에 걸려들었다. 그래도 제 몸값을 알고있는지라 위급장교따위는 왼눈으로도 보지 않고 장성인 최덕근한테 홀딱 반해서 그가 한번 나타나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서 숨도 제대로 못 쉬군 하였다.

성미가 시원시원한 최덕근 역시 새로 온 녀방송원이 자기를 사모한다는것을 알고있었지만 체면때문인지 서둘러 꺾으려들지 않았다. 그런즉 어느 정신나간 녀석이 사단장의 눈에 든 녀자한테 감히 빨간 장미를 안겨줄수 있으랴.

허정효는 단 이틀만에 갖은 수를 다 써서 종시 그 녀자를 자기의 막사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그때까지도 녀자는 자기의 심장속에는 오직 최장군밖에 없노라고 도고하게 고개를 쳐들었는데 사나이의 손이 생고무처럼 탱탱한 젖가슴을 주무르자 살맞은 사슴처럼 몸을 바르르 떨더니 마침내 무너져내렸다.

그 다음부터 계집은 잘 길들인 애완용개처럼 공손해졌다.

검질긴 사내한테 은밀한 부분까지 점령당하자 난 이젠 최장군을 잊어버렸어요, 오직 당신밖에 없단 말이예요 하고 눈물을 똑똑 떨구는 계집의 잔등을 쓸어주며 허정효는 녀자와 고양이는 쓸어주는쪽으로 기울어진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구나 하고 생각하였었다.

아무런 저항도 없는, 아니 오히려 기꺼이 점령당하기를 원하는듯 잠잠해있는 녀자의 육체를 한입에 삼킬듯 들여다보던 허정효는 적수를 발견한 뱀처럼 목대가 꼿꼿해졌다.

부지불식간 련대를 이끌고 행군하는 표무강의 모습이 떠올랐던것이다.

순간 온몸을 불태우던 정욕의 불길이 물을 들쓴것처럼 꺼져버렸다.

절대로 안된다. 안돼!

그가 어찌나 이를 갈았는지 살랑살랑 옷을 벗고있던 계집이 소스라치며 놀랐다.

《왜 그러세요?》

《옷을 입어!》

싸늘하게 내뱉은 허정효는 절반나마 내리웠던 군복바지를 도로 올렸다.

《소령님!》

돌연 천막자락이 풀럭거리더니 부하가 사마귀처럼 껑충 뛰여들었다.

그통에 미처 옷을 입지 못한 계집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지르며 허정효의 잔등뒤에 숨었다.

그 자리에 서있어야 할지 밖으로 나가야 할지 몰라하는 부하를 향해 허정효는 재촉하였다.

《말해!》

그제야 부하는 재빨리 보고하였다.

《수색중대에서 알려왔는데 공산군탈주병 하나가 제 어미를 만나려고 산에서 내려왔답니다. 아마 표무강련대소속인것 같습니다.》

《그래?》

흥분한 허정효는 자기가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깜짝 놀란 계집이 옷자락으로 앞가슴을 가리우며 바빠하는줄도 알지 못하였다.

두뇌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자중지란! 이를테면 같은 패거리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이다. 그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 표무강련대에는 한해전까지만 해도 《국군》에서 복무하던자들이 적지 않다. 그런 인간들이 하루아침에 전신불구에 눈까지 멀었지만 완강한 의지로 문학수업을 하였다는 빠벨 꼬르챠낀으로 될리 만무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의 사상을 바꾸자면 시간이 필요하기때문이다. 지금은 그들에게 있어서 시련의 시기이다. 마을에 내려와있다는 그자를 잘 리용하면 공산군내부에서 소동을 일으킬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저희끼리 옥신각신하다가 나중에 지리멸렬될것이다. 바로 이거다!

신이 난 그는 부하의 귀에 대고 나직이 수군거렸다.

부하가 천막을 나서자 허정효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표무강, 우리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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