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 2 장

5

 

한편 대오의 뒤쪽에 위치한 련대군의소에 약품을 얻으러 갔던 한정아는 울상을 짓고 돌아서는 련대장련락병과 마주쳤다.

면식이 있는 그는 무슨 말을 할듯말듯하며 망설이였는데 손에는 앞섶이 너덜거리는 군관복이 들려있었다.

《그건 누구거예요?》

《우리 련대장동지 군복인데 오전전투때 파편에 찢어졌습니다.》

《그랬군요.》

《당장 기워야겠는데 간호원동무들이 바삐 돌아가니 차마 말이 나가지 않아서…》

한정아는 시무룩해있는 련락병에게 손을 내밀었다.

《인 주세요.》

《기워주겠습니까?》

《네.》

《히야, 됐구나!》

좋아서 껑충껑충 뛰던 련락병은 다시 오겠다고 하고는 씽 달려갔다.

《사민구분대》로 돌아와 군복을 기우려던 한정아는 시큼한 땀내를 맡자 저도 모르게 코살을 찡그렸다.

아이참, 어쩌면 이런 군복을 그냥 입고있을가?… 가만, 제꺽 빨자.

바늘을 실패에 도로 꽂고나서 개울가로 달려갔다.

여러 마리의 백곰이 웅크리고있는것 같은 둥글둥글한 바위들을 감돌아 신나게 흐르는 개울물에 군복을 담그었다.

군복을 주물럭거리는데 불현듯 벼랑길을 통과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 아찔한 벼랑길을 겨우 통과한 한정아는 부끄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련대장동지가 어떻게 생각할가. 혹시 날 비웃지 않았을가? 아이참, 하필 그가 나타날건 뭐람.

생각할수록 표무강에 대한 고마움은 사라지고 그가 일부러 자기를 망신시킨것 같은 생각이 갈마들었다.

복잡다단한 생활은 남자들의 선심뒤에는 반드시 일정한 조건부가 뒤따른다는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당할 때면 다른 처녀들은 어떨지 몰라도 한정아만은 잔뜩 경계심을 품군 하였다.

그의 심중에 경계의 등잔불이 처음 켜진것은 사춘기시절이였다.

한뽐도 안되는 머리꽁지를 달싹거리며 뛰여다니던 시절에 아버지를 잃은 소녀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다.

마을사람들이 《임잔 여기서 두엄내나 맡으며 썩긴 아까운 인물일세.》라고 감탄할만큼 고운 용모와 착한 마음씨를 타고난 어머니는 바느질솜씨까지 뛰여나서 시샘많은 마을녀인들도 새 이불을 꾸미거나 옷을 지을 일이 있으면 군말없이 청하군 하였다.

하루는 모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삯바느질을 하고있는데 집뜨락에서 《계십니까?》 하고 찾는 소리가 났다.

어머니가 방문을 열자 몇달전 서울에서 장사를 하다가 무슨 일때문인지 고향으로 내려온 지주집아들이 점잖게 서있었다.

《아니, 도련님이 어떻게…》

소작농들한테 내주는 장리쌀마저 아까와하는 부친과 달리 인정이 있고 마을사람들의 딱한 형편을 동정도 하군 하는 그는 기름한 얼굴에 미안한 기색을 띠웠다.

《아주머니, 한가지 부탁을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

《뒤산에 올라 산책하던중 그만 넘어지면서 겨드랑이가 터졌는데 어떻게 좀 기워줄수 없겠습니까?》

《저, 댁의 아주머닌…》

《허허, 집사람이 몸을 풀려고 친정에 가고 없어서 이러질 않습니까.》

잘 생긴 얼굴에 딱한 웃음을 담고 공손히 사정하는 사람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할수 있으랴. 게다가 정아네 역시 이따금 지주집신세를 지는터인지라 어머니는 할수없이 양복을 받아들었다.

《도련님, 인차 기워서 댁에 보내드리겠어요.》

《저, 수고스러운대로 이제 기워줄수 없습니까? 이런 차림으로 마을을 돌아다니기가 좀 멋해서 그럽니다.》

잠시 망설이던 어머니는 마침내 승낙하였다.

《그럼… 들어오세요.》

방안에 들어온 도련님은 흥미진진한 눈길로 녀자들의 체취가 가득 풍기는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일감을 밀어놓은 어머니는 양복을 깁기 시작하였다.

재봉으로 누빈것처럼 뜸사이가 고르롭고 일매진 바느질솜씨를 황홀해서 지켜보던 도련님은 갑자기 목이 컬컬한 모양 《정아야, 거 우물에 가서 시원한 랭수를 떠다주겠니?》 하고 부탁하였다.

소녀는 반사적으로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얼른 부엌에 내려간 소녀는 물동이를 가지고 집을 나섰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우물터로 간 소녀는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운 다음 머리우에 이고 돌아섰다.

얼마후 부엌에 들어선 그는 방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발볌발볌 다가가 방문을 열던 소녀는 까무라칠것처럼 놀랐다.

랭수를 떠오라고 시킨 도련님이 마구 몸부림치는 어머니를 품에 끌어안으려고 하는것이 아닌가.

그는 어찌나 정신없는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소녀가 자기 등뒤에 서있는줄도 모르고있었다.

《정아 어머니, 한번만… 한번만 사정을 봐주시오. 후에 꼭 사례를…》

소녀는 손에 들고있던 물동이를 통채로 남자의 머리우에 쏟아부었다.

《어, 차겁다!》

진저리를 치며 어머니를 놓아버린 그는 성난 꿀벌같은 소녀를 알아보자 금시 너스레를 떨었다.

《정아야, 난 너의 엄마와 이야기를…》

분해서 눈물이 가랑가랑 고인 소녀는 있는 힘껏 소리질렀다.

《당장 나가라요!》

방바닥에 널려있는 양복을 집어든 남자는 구두도 제대로 신지 못한채 황황히 토방을 내려섰다.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넘길뿐 말이 없었다.

하지만 대문이 찌쿵- 하고 닫기자 설음많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엄마!》

《정아야!》

와락 끌어안은 모녀는 오래도록 흐느껴울었다.

그날 한정아는 평시에 점잖은 티를 곧잘 내군 하였지만 가슴속에 검은 속심을 품고있던 지주집아들이 증오스러웠고 남자들에게 베푸는 녀자의 선의란 결국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는것을 똑똑히 알았다.

그후 그 남자가 기신기신 찾아왔지만 어머니는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제손으로 넘어진 울타리를 세우고 부뚜막도 쌓았다.

어느날인가는 도끼질을 하다가 발등을 다쳤지만 기어코 나무를 마저 패고말았다.

그 모습은 명주천처럼 깨끗한 처녀의 가슴속에 또렷이 새겨졌다. …

지금도 한정아의 가슴속에는 그 일이 앙금처럼 남아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표무강의 군복을 빨면서도 착잡한 감정에서 벗어날수가 없었다.

다음순간 처녀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래, 지금은 전쟁이 한창이야.

물에 흠뻑 젖은 군복을 내려다보던 한정아는 《어마나, 내 정신 봐!》 하고 다급한 소리를 질렀다.

군복주머니에 혹시 문건 같은것이 있는지 미처 확인하지 못한것이다.

서둘러 건져낸 웃주머니에 손을 밀어넣자 납작한것이 잡혔다.

꺼내보니 총잡은 인민군전사를 형상한 군공메달이였다.

우선 중요한 문건이 아니여서 안도의 숨이 나갔다. 그런데 무슨 공로로 그 메달을 받았고 또 어째서 배낭이 아니라 웃주머니에 건사하고 다니는지 알수 없었다.

군공메달의 물기를 닦아 바위우에 올려놓고 마저 뒤지는데 웃주머니와 별도로 붙어있는, 련대장자신이 서툰 바느질솜씨로 만든것이 분명한 안주머니가 나타났다.

처녀의 휘우듬한 속눈섭이 깜빡거렸다.

무엇때문에 이런 주머니를 따로 해달았을가? 혹시 중요한 문건이 여기에 들어있는게 아닐가?

아닐세라 안주머니속에서 유지로 꽁꽁 싼것이 나왔다.

아이, 다행이구나!

안도의 숨을 내그은 한정아는 그 《문건》을 군공메달옆에 올려놓았다. 그 다음은 푹 젖은 군복에 살살 비누칠을 하고 비비기 시작하였다.

보동보동한 두손의 애무를 받은 꽛꽛한 빨래감은 꿈틀꿈틀하다가 공손하게 재빛거품을 내뿜었다. 그것을 내물에 여러번 헹구고 꼭 짜서 나무가지에 걸어놓고는 마른 삭정이들을 모아 불을 지폈다.

고맙게도 모닥불은 인차 피여올랐다.

물기가 찐 군복을 펼쳐들고 모닥불과 마주하고 서있느라니 자기가 깨끗이 빨아 기워준 군복을 입고 전사들앞에 나서는 표무강의 의젓한 모습이 떠올랐다.

인차 말라야겠는데.

《련대 행군준비!》

청천벽력같은 구령소리에 한정아는 깜짝 놀랐다.

어마나, 이걸 어쩌나?

아직 마르지 않은 군복을 손에 들고 어쩔바를 몰라하는데 누군가 옆으로 뛰여가며 소리쳤다.

《뭘 하오? 불을 죽이구 떠날 차비를 하지 않구.》

정신을 차린 한정아는 군복을 나무가지에 걸어놓고 한창 타고있는 나무가지를 끄집어내여 발로 꽁꽁 밟았다.

그러는데 련대장련락병이 헐떡거리며 뛰여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군복이 어지러워서 빨았는데…》

《예에?》

련락병의 얼굴이 굳어진것을 보자 처녀는 속이 더욱 졸아들었다.

《어쨌든 수고했습니다.》

젖은 군복을 받아들고 뛰여가는 련락병을 멍하니 바라보던 한정아는 뒤늦게야 바위우에 올려놓은 군공메달과 유지를 발견하였다.

《련락병동무, 이걸 가지고 가세요!》

그러나 련락병은 이미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망연해서 서있던 한정아는 군공메달과 유지를 양복주머니에 넣고 《사민구분대》쪽으로 뛰여갔다.

 

련재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9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