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 3 장

1

 

산발을 타고 굽이쳐가던 대오에서 한 사나이가 허겁지겁 뛰쳐나왔다.

《어구구, 저걸 어쩌나? 어구구.》

경사급한 산비탈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배낭을 보며 그는 아부재기를 쳤다.

《사민구분대》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그들의 뒤를 따라오던 구분대들이 줄줄이 멈춰섰다.

자기때문에 대오가 멎어선줄도 모르고 무릎을 철썩철썩 갈기고있던 고남수는 갑자기 산밑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가시가 뾰쪽뾰쪽한 분지나무에 얼굴을 할퀴우고 나무가지에 옷소매를 찢기우며 정신없이 달려가던 그는 불쑥 나타난 가둑나무에 발을 걸채며 공중걸이를 하고말았다.

《어구구!… 어구구!》

연방 죽는소리를 치는 그앞에 정찰소대장 리경일이 배낭을 메고 나타났다.

넘어질 때 좀 다쳤는지 허리를 부여잡고 꿍꿍거리던 고남수는 배낭을 보자 구겨졌던 얼굴을 쭉 폈다.

《고맙네. 그걸 인 주게.》

그한테 배낭을 내주려던 리경일은 도로 잔등에 멨다.

《아바이, 무겁겠는데 내가 대신 메주겠습니다.》

그 말에 남들 같으면 고맙다고 절을 열번도나마 하였겠는데 고남수는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진것처럼 펄쩍 뛰였다.

《안되네.》

리경일은 그를 의아쩍게 보다가 할수없이 배낭을 돌려주었으나 미심쩍었던지 돌아서다말고 따져물었다.

《아바이, 그게 쌀이 아닙니까?》

고남수는 흠칫 놀라더니 아니라고 도리머리를 저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산비탈을 오른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듯 태연자약해서 사민들속에 끼여들었다.

《글쎄, 이놈의 배낭끈이 늘 말썽을 부린다니까.》

련대의 행군에 지장을 주고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그를 보자 한정아는 생각이 착잡하였다.

한시간전, 휴식구령이 내리자 한정아는 《사민구분대》와 좀 떨어진 가둑나무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것을 확인한 처녀는 장작개비처럼 꽛꽛한 장딴지를 주무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한정아는 두눈을 꼭 감으며 신음소리를 토하였다.

《아이, 아파라!》

그 모습을 보면 《사민구분대》를 이끌고 험한 산길을 헤쳐가는 이악한 정치공작대원이 아니라 들놀이를 나왔다가 지쳐서 주저앉은 소심한 처녀같았다.

같이 가는 사람들은 그가 온종일 걸어도 힘든줄 모르고 하루에 한두시간밖에 잠을 못 자도 피곤한줄 모르는 단단한 처녀로 알고있지만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연약한 체질이였다.

홀어머니품에서 금지옥엽처럼 자라났고 고스란히 대학을 다니다가 정치공작대로 파견된 그가 언제 이런 험한 산길을 걸어보았고 배를 촐촐 굶어본적이 있었던가. 북으로 가는 마을사람들을 책임졌다는 높은 책임감, 그들때문에 련대가 지장을 받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이악한 각오가 없었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기는커녕 자기자신도 이겨내지 못하였을것이다. 결국 조국이 겪고있는 준엄한 시련이 유약한 처녀를 강인하고 열정적인 투사로 변모시킨것이다.

이마살을 찡그리고 살살 장딴지를 주무르던 한정아는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는 바람에 감았던 두눈을 떴다.

우거진 소나무들사이로 누군가 조심조심 접근해오고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고남수였다.

그는 사람들의 눈길을 꺼리듯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불과 대여섯발자국도 안되는 가둑나무밑에 앉아 자기를 지켜보는 처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한정아가 자기를 로출시키지 않은것은 그의 움직임에서 이상한 감촉을 받았기때문이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고남수는 해빛이 잘 비치는 풀밭우에 배낭을 내려놓고 아구리를 헤치였다.

한정아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배낭속에 들어있는것은 다름아닌 옥백미였던것이다.

비로소 이상하게 여겨왔던 그의 행동이 리해되였다. 바로 그 쌀때문에 적탄이 비발치는 속으로 마구 뛰여들었고 련대의 행군에도 지장을 주었던것이다.

두손을 옷자락에 대고 썩썩 닦고난 고남수는 쌀속에 조심히 집어넣고 슬근슬근 뒤집기 시작하였다.

나무가지사이로 비쳐드는 해빛에 옥백미는 수천수만개의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늘 봐야 덤덤하던 그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발이 어렸는데 쌀을 한알도 흘리지 않고 뒤집는 능숙한 손놀림을 보면 남들 모르게 그 일을 자주 해온것이 분명하였다.

기가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저렇게 좋은 쌀을 가지고있으면서 여태 꺼내놓지 않았단 말인가? 어른들은 둘째치고 어린 영남이가 배고프다고 울고있을 때 저 사람은 못 본척 하고 먼산을 보고있었지.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옥백미가 상할가봐 해빛소독을 하고있지 않는가. 정말이지 파보아야 속내를 알수 있는 땅속같은 사람이다.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처녀는 그만에야 딱- 하고 삭정이를 밟았다.

《어구구!》

나쁜짓을 하다가 들킨것처럼 화들짝 놀란 고남수는 황급히 이쪽을 건네다보았다.

순간 자기를 쏘아보는 한쌍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는 산에서 범이라도 만난것처럼 안절부절 못하였다.

한정아의 눈에 쌀쌀한 빛이 떠올랐다.

《남수아저씨, 그게 무슨 쌀이예요?》

《저…》

《무슨 쌀인가 말이예요.》

남들이 들을가봐 그러는지 고남수는 덴겁해서 목소리를 낮추라고 손시늉을 하였다.

그 노죽스러운 태도에 분이 치밀어오른 한정아가 뭐라고 소리치려는 찰나 공교롭게도 모엿구령이 울렸다.

경멸에 찬 눈길로 그를 쏘아보던 한정아는 더 마주서고싶은 생각이 없어 뒤로 돌아섰다.

몇발자국 걸어갔는데 뒤에서 비굴한 목소리가 추근추근 좇아왔다.

《거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아달라구.》

《…》

《제발 부탁이네.》

한정아는 억이 막혔다.

어쩜 인간이 저럴수 있는가. 그런 인간인줄 모르고 대오에 받아주다니. 아이, 분해!

분노를 애써 누르고 《사민구분대》쪽으로 걸어가는데 옆으로 로성익이 지나갔다.

저도 모르게 《오빠!》 하는 소리가 터져나갔다.

《오, 정아로구나!》

《오빠, 저…》

문득 한정아는 자기가 고남수를 고발하려고 한다는것을 알았다.

아무렴, 그런 인간은 용서할수 없어!

그런데 왜서인지 다음 말이 나가지 않았다.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사정하던 고남수의 애절한 모습이 눈앞에 안겨왔던것이다.

만약 내가 그 사실을 폭로한다면 그는 아마 온 련대의 저주를 받고 당장 쫓겨날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쨌든 그도 북으로 가는 사람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망설이는데 로성익은 뭔가 눈치를 차렸는지 칼칼한 눈길로 마주보았다.

속이 뜨끔하였지만 처녀는 종시 입안에서 맴돌고있는 말을 삼켜버렸다.

《안예요. 그저 오빠를 보니 반가와서…》

이상한듯 잠시 지켜보던 로성익은 전번에 준 크림을 잊지 말고 바르라고 이르고는 걱석걱석 가버렸다.

그제서야 긴장해서 서있던 고남수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

련대는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자, 우리도 떠나자요!》

《사민구분대》를 향해 소리친 한정아가 대렬뒤에서 뚱기적거리며 따라오는 임신부를 찾아가는데 누군가 옆으로 다가섰다.

그는 고남수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치째진 갈고리눈을 한번 감았다가 다시 뜨는것이였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를 폭로하지 않은데 대한 무언의 인사였다.

두눈을 내려깐 한정아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뻔뻔스러운 인간!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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