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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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배님, 그간 옥체만강하십니까.

저는 륙사시절 선배님이 그토록 사랑해주신 최덕근입니다. 선배님의 은공을 생각하면 골백번 절을 올리고싶지만 피차 사정이 허락치않아 편지로 문안인사를 올립니다.

지금 유엔군은 압록강에 다달았습니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는데 선배님은 어찌하여 세상에 없는 공화국을 찾아 험로를 헤치고계십니까. 자나깨나 결초보은하고싶은 저로서는 선배님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부하들을 고생시키지 말고 자유세계로 돌아오십시오. 그럼 이 후배가 일생토록 잘 모시겠습니다. 선배님, 환생의 이 순간을 부디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선배님을 존경하는 후배 최덕근 올림.》

 

그것은 련대지휘부에서 가까운 나무가지짬에 끼여있던 최덕근의 편지였다.

금방 읽고난 그 편지를 내던진 로성익은 비양조로 말하였다.

《내 알기엔 적사단장이 감히 아군련대장한테 귀순편지를 보낸 례는 쏘도전쟁시기에도 없었을거요.》

표무강은 입을 다물고있었으나 마음은 길다란 막대기로 한바탕 쑤셔놓은것처럼 뒤숭숭하였다. 정말이지 그는 최덕근이 그런 너절한 편지를 보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것이다.

《그래, 동문 짐작되는게 없소?》

처음 표무강은 전선사령부 대표의 말뜻을 알수 없어 그냥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 최덕근이라는자가 어째서 이런 편지를 보냈는가 말이요.》

무슨 단서를 잡으려는듯 집요하게 뜯어보는 로성익이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러니 문제가 아니요. 그래도 동무야 그자와 선후배관계인데 전혀 짐작이 안 간단 말이요?》

표무강은 속이 울컥하였다.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자는건가? 그래, 내가 최덕근이한테 편지를 쓰라고 부탁이라도 했단 말인가?

숨을 거칠게 톺고있는 그를 응시하던 로성익은 랭담하게 말하였다.

《그만하기요. 그리구 이 사실을 전사들이 알면 좋지 않으니 불태워 버리오.》

그가 가버리자 표무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손으로 싸쥐였다.

최덕근은 어째서 이따위 편지를 보냈을가? 내가 그런 수에 넘어갈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자야말로 얼마나 우둔한 인간인가.아니, 내가 알고있는 최덕근은 결코 편지질이나 하고있을 좀스러운 인간이 아니다. 비록 반역의 길을 걷고있지만 나름대로 지조가 있고 배짱도 있는 적수이다. 만약 결투가 벌어진다면 독침이 아니라 장검을 뽑아들고 달려들 사나이이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이런 놀음을 벌려놓았는가? 그자는 무엇을 노리고있는가?

아무리 생각을 더듬어보아도 최덕근의 속내를 짐작할수 없었다.

이러나저러나간에 귀순을 권고하는 그 편지는 가뜩이나 편치않던 마음을 더욱 헤집어놓았다.

오성국사단장이 넘겨준 식량은 이미 거덜났고 전사들은 또다시 굶주리고있었다. 어느 구분대에 가나 허기져 쓰러진 전사들이 적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하루에 한끼의 멀건 죽도 겨우 공급하고있는 형편이다. 게다가 날씨는 더욱 추워지고 여름군복을 입은 전사들은 덜덜 떨고있다. 그뿐이 아니다. 지금 련대안에는 차마 입에 올리기도 끔찍한 소문이 나돌고있다. 글쎄, 정부가 압록강을 넘어갔다는것이 아닌가.

혀는 뼈가 없어도 뼈를 부시는 법이다.

누가 꾸며냈는지 모를 그 류언비어는 전사들의 마음을 밭고랑처럼 뒤집어놓았다. 그런 판에 적사단장의 편지까지 날아든것이다. 전선사령부 대표가 우려한것처럼 전사들이 이 소식을 알면 뭐라고 하겠는가?

벌써부터 식은땀이 잔등에 돋아났다.

지금껏 자신은 의지가 강하고 무서움을 모른다고 확신해온 그였지만 저절로 마음이 나약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다음순간 그는 두눈을 끔뻑거렸다.

눈앞에 새 군복을 차려입은 자기가 나타난것이다.

심중한 기색을 지은 《그》가 물었다.

《자네 련대를 이끌고 전선을 넘어갈 자신이 있나?》

《물론.》

《솔직하지 못하구만.》

《그건 무슨 소린가?》

《그》는 동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자넨 몹시 지쳤네. 그런데두 련대를 지휘할수 있단 말인가?》

《닥쳐. 난 얼마든지 련대를 지휘할수 있단 말일세!》

하지만 그 웨침소리는 밖으로 쏟아져나오지 못하고 입안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느물느물 웃고있던 《그》는 《그럼 자네 가슴을 만져보라구.》 하고 권고하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소스라치며 상상에서 깨여난 표무강은 군복앞섶에 손을 가져갔다.

딴딴한것이 만져졌다.

웃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자 때마침 비쳐드는 해빛에 번쩍 빛났다.

아, 군공메달!

별안간 눈앞이 환해지며 열렬한 박수소리가 울리는 회의장의 전경이 펼쳐졌다.

…그날 표무강은 가슴을 들먹이며 회의장에 앉아있었다.

불과 몇달전까지만 해도 《국군》대대장이였던 자기가 인민군군관으로 된것만도 꿈만 같은데 국가수훈을 받게 되였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꿈이 아닌가 하고 슬그머니 무릎을 꼬집자 뜨끔거렸다.

역시 꿈은 아니로구나!

울렁거리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궁싯거리고있는데 장내가 떠나갈듯 한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주석단에 당과 국가의 지도간부들이 나오고있었다.

그들의 앞에 서계시는 키가 후리후리한분을 알아본 표무강은 저도 모르게 몸을 솟구었다.

아, 일성장군님!

대대가 북으로 넘어온 후 의거장병들에 대한 성대한 환영행사를 조직해주시고 환영사업이 끝나면 목욕도 시키고 리발도 해주고 환자에게는 치료도 잘해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신 장군님, 의거장병들이 단행한 거사는 조국통일을 위하여 투쟁하는 북남조선인민들을 크게 고무해주는 행동으로서 마땅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시며 우리들의 생활을 따뜻이 돌봐주도록 친어버이사랑을 베풀어주신 장군님!

다른 사람들이 자리에 앉은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고있던 표무강은 옆사람이 군복자락을 잡아당겨서야 자신을 다잡고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수훈자들의 명단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씩씩하게 주석단으로 나가는 그들을 보자 표무강은 바늘방석에 앉은것 같았다. 수훈자들은 백두산에서 왜놈들과 싸운 항일투사들과 은파산전투를 비롯하여 공화국을 지키는 싸움에서 위훈을 세운 용감한 군인들이였다. 그들에 비하면 동족을 반대하여 총부리를 겨누었다가 비로소 애국의 길에 들어선 자기는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런 나머지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여기에 앉아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는데 《표무강동무!》 하는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격정으로 끓어넘치던 회의장이 물뿌린듯 조용해진것 같았다. 오직 들리는것은 금시라도 밖으로 튀여나올것처럼 쿵쿵거리는 심장의 박동소리뿐이였다.

엉거주춤 일어난 그는 《표무강동무!》 하고 사회자가 다시 찾아서야 황황히 주석단으로 나갔다.

발이 어디에 놓이는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걸어가는데 앞쪽에서 우렁우렁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표무강동무로구만!》

순간 표무강은 거대한 태양을 마주하고있는것 같았다.

어찌나 눈이 부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기가 군공메달을 수여받고 그 자리에 그냥 서있는 바람에 《혼란》이 일어났다는것도 알지 못하였다. 오직 자기의 앞가슴에 몸소 군공메달을 달아주시던 장군님의 존안만이 숭엄하게 안겨올뿐이였다.

아, 장군님, 죄많은 이놈을 받아주신것만도 과분한데 이렇게 군공메달까지 안겨주신단 말입니까. 이 표무강은 하늘땅이 열백번 변한다고 해도 장군님 한분만을 끝까지,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참으로 그 순간은 길지 않았지만 또 하나의 생명을 받아안은 행복의 순간, 그의 한생을 결정해준 뜻깊은 순간이였다. …

표무강은 자기가 지금 그 영광의 주석단에 서있는것만 같았다. 해빛같은 미소를 지으신 장군님께서 기대에 넘친 눈길로 바라보고계시는것만 같았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이쯤한 난관앞에 주저앉는단 말인가.

식어들었던 심장이 불을 지핀것처럼 달아오르고 온몸에 힘과 용기가 솟구쳐올랐다. 가슴 한복판에 고드름마냥 매달려있던 걱정과 근심이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귀중한 군공메달, 생명과도 같은 그것을 꽉 그러쥐였다.

최고사령관동지, 이 군공메달을 가슴에 품고 기어이 그 품으로 찾아가겠습니다!

결패있게 군관혁띠를 조인 표무강은 발치에 떨어져있는 편지를 집어들었다.

굳게 틀어쥔 주먹안에서 최덕근의 편지는 볼품없이 구겨졌다.

뒤에 서있던 련락병이 제꺽 성냥을 그어댔다.

표무강은 불이 달린 성냥가치에 편지를 가져갔다.

이제 최덕근의 편지는 순식간에 재로 되고말것이다.

숨을 크게 내쉰 그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편지를 전투가방속에 집어넣었다.

련대참모장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만이 아니라 김흥선도 참모들도 모두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참모장동무, 련대를 모이게 하시오!》

표무강의 단호한 명령이였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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