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3 장

5

 

손등우에 턱을 고인 한정아는 부러운 눈길로 모자를 지켜보고있었다.

부석부석한 얼굴을 소곳이 숙인 산모, 온몸에 넘치는 힘과 열정을 억제할수 없다는듯 앙증스러운 두손을 내저으며 엄마의 말랑말랑한 젖꼭지를 힘껏 빨고있는 갓난아기.

그 따끔한 촉감에 두눈을 사르르 감으며 아기의 잔등을 쓰다듬는 녀인의 얼굴에 꿀처럼 달디단 미소가 피여올랐다.

아, 세상에 아기를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행복한 모습이 어디 있으랴.

살며시 일어나 가물거리는 등잔심지를 돋구던 한정아는 속으로 놀랐다.

환해진 등잔너머로 웬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는것이 아닌가.

굵은 눈섭밑에서 불타는 부리부리한 두눈, 사내다운 배짱이 느껴지는 주먹같은 코, 믿음직하게 다물린 두툼한 입술…

상상속의 그 남자는 인차 사라졌지만 한번 두근거리기 시작한 처녀의 가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참, 내가 왜 이럴가?

속으로 자기를 나무란 한정아는 한숨을 나직이 내그었다.

사실 처녀의 망막에 비쳐든 표무강련대장은 오직 명령과 전투밖에 모르는 무쇠같은 사나이였다. 실지로 첫 상면후에 벌어진 일들은 그 짐작이 옳았다는것을 증명해주었다. 그런데 얼마전부터 처녀는 자기가 그린 인물화가 정확하지 못하다는것을 느끼고있었다.

나흘전 깊은 밤중에 있은 일이였다.

그때 한정아는 추워서 떠는 서분이한테 주려고 모닥불에 돌을 달구고있었다.

모아세운 무릎우에 뾰족해진 턱을 올려놓은채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마주하고있느라니 몸이 나른해지고 하품이 쏟아져나왔다.

자꾸만 눈시울이 아래로 내려오고 저도 모르게 몸중심이 옆으로 쏠렸다.

잠들면 안되겠는데…

처음에는 허벅다리를 꼬집고 그 다음은 화가 나서 손으로 두눈을 비비였지만 처녀의 연약한 육체는 어느결인가 사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가위에 눌리운듯 후닥닥 깨여나보니 모닥불속에 파묻었던 불돌이 없어졌다. 더 놀라운것은 자기의 어깨우에 씌여져있는 군용모포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한정아는 혹시나하고 가까운 곳에 전개된 개인천막으로 향하였다.

살그머니 천막을 들여다보니 서분이는 군용모포를 덮고 땀을 줄줄 흘리며 자고있었는데 모포속에 손을 넣어보니 뜨끈한 불돌들이 들어있었다.

누가 이렇게 했을가?

두눈을 깜빡거리며 생각을 굴렸지만 짚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의문은 다음날 아침 서분이의 감동에 젖은 이야기를 통하여 풀렸다.

그에 의하면 관하구분대들을 돌아보던 표무강련대장이 《사민구분대》에 들렸다가 사위여가던 모닥불을 다시 지피고 불돌을 데우는 한편 련락병을 시켜 자기의 군용모포를 가져다가 굳잠에 든 처녀의 어깨우에 씌워주었다고 한다.

전투와 행군밖에 모르는 엄격한 지휘관이라고, 목석같은 남자라고 여겼던 그한테 그런 인정미가 있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때문에 련대장동진 온밤 추위에 떨었겠구나!

처음은 미안한 생각이, 그 다음은 고마운 감정이 가슴속에서 솟구쳐올랐다. 그것은 벼랑길에서 떨어질번 한 자기를 구원해주었을 때 느꼈던것과 전혀 다른 감정이였다. 그러고보면 자기는 본의아니게 두번이나 그를 추위에 떨게 한셈이다. 한번은 젖은 군복을 입게 한것이고 다른 한번은 군용모포때문에.

표무강의 인물화를 잘못 그렸다는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것은 어제 있은 일이였다.

그날 표무강은 산모의 해산을 위해 련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갔었다. 사실 수천명 전사들의 운명과 갓난아기의 생명은 대비할바가 못된다. 그렇지만 그는 미구에 태여날 새 생명을 위해 련대를 불러일으켰고 그자신이 앞장에서 싸웠었다.

전투가 끝나고 련대군의소에 돌아왔을 때는 또 어떠하였던가.

산모가 무사히 해산하였다는 보고를 받자 표무강은 기쁨에 넘쳐 이렇게 웨쳤었다.

《동무들, 련대는 우리 공화국의 한부분이요. 그러니 갓난아기가 태여난 곳은 적후가 아니라 우리 공화국이고 장군님의 품이란 말이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뿜어나오는것 같은 그 토로를 들으며 한정아는 눈굽이 쩌릿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련대는 우리 공화국이고 장군님의 품! 정말 옳은 말이야. 헌데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가?

얼마후 행군에 오른 전사들의 머리우로 련대장의 《특별명령》이 날아들었다.

《저녁까지 갓난아기의 이름을 지을것!》

그 명령이 하달되자 련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전사들은 허기지고 추위에 떨던 사람들 같지 않게 신이 나서 저저마다 아기이름을 짓느라고 극성을 부렸고 그 뜨거운 흐름속에서 련대는 전에 없는 행군기록을 세웠던것이다.

저녁에 열린 군인모임에서는 각 구분대에서 추천한 갓난아기의 이름들에 대한 심의가 진행되였다.

박남수, 박광일, 박철남, 박수진…

나름대로 뜻을 담아 지은 이름들이지만 그중에서 만장일치로 당선된것은 표무강련대장이 지은 이름이였다.

박영보!

너를 안아준 공화국의 품, 장군님의 품을 영원히 잊지 말고 보답하라는 깊은 뜻이 담긴 그 이름!

아기이름은 즉시 온 련대에 퍼졌고 산모에게도 전달되였다.

옆에서 사람들이 산모가 울면 젖이 안 나온다고 달랬지만 서분이는 자기와 아들의 출생을 위해 피흘리며 싸우고 이름까지 지어준 련대전사들의 진심에 감동되여 오래도록 흐느껴울었다.

《전 인제야 어째서 그이가 아이만은 공화국의 품에서 꼭 낳으라고 절절히 당부했는지 똑똑히 알겠어요.》

영보가 머루알같은 두눈을 반짝이며 엄마젖을 먹고있는 천막으로 전사들이 무리로 밀려들었다.

산모시중을 맡고있는 한정아가 찬바람을 맞으면 큰일난다고 야단하였지만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의 얼굴을 보고야 돌아섰고 밤을 새우며 혹은 행군의 쉴참에 만든 장난감들을 기어코 남겨두었다. 그속에는 고향에 돌아가면 딸에게 주려고 배낭속에 건사하였던 고운 인형아기도 있었다.

표무강은 한밤중에 슬그머니 찾아왔다.

제 말로는 지나가는 길에 들렸다고 하지만 아까부터 밖에서 오락가락하던 발자국소리를 들은 한정아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천막가운데 어색하게 서있던 총각련대장은 군복웃주머니에서 꺼낸 군공메달을 갓난아기의 눈앞에 가져갔다.

《영보야, 이걸 보렴. … 아니, 이걸 보라는데…》

터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고있던 산모가 보다못해 알려주었다.

《애기는 아직 눈을 보지 못해요.》

《예?》

표무강은 뒤머리를 긁적거리며 물러났다.

그 우습강스러운 모습을 보자 한정아는 가슴속에 따뜻한 감정이 살며시 밀려드는것을 느꼈다. …

또다시 등잔심지를 돋구던 한정아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것을 느꼈다. 어느덧 표무강의 모습은 사라지고 랭담한 표정을 지은 로성익이 나타난것이다.

아이참, 인상이 왜 저럴가?

어제 저녁 한정아는 산모의 빨래를 하러 개울가에 나갔다가 우연히 로성익을 만났었다.

《피곤하겠는데 뭘 하니?》

오빠를 보자 한정아는 생글거리며 대답하였다.

《빨래해요. 참, 우리 서분아주머니가 떡돌같은 아들을 낳았어요.》

오빠는 별로 반가와하는 기색도 없이 알고있다는듯 대충 고개를 끄덕이였다.

《오빤 아기가 태여났다는데 기쁘지 않아요?》

한정아의 가벼운 나무람에 로성익은 차거운 어조로 대답하였다.

《넌 정말 생각이 단순해서 좋겠구나.》

《그건 무슨 소리예요?》

뭔가 말할듯 하던 로성익은 손을 홱 내젓고는 가버렸었다.

등잔심지를 돋구고 제자리로 돌아온 한정아는 손등으로 턱을 받치고 행복한 모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있느라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눈앞에 두사람이 나타났다.

한사람은 영보를 품에 안고 껄껄 웃는 표무강이고 그옆에 서있는 사람은 칼칼한 표정을 지은 로성익이였다.

뚜렷하게 부조화를 이루는 두사람의 모습!

오빤 왜 그럴가? 온 련대가 영보가 태여났다고 명절처럼 기뻐하는데…

속상해서 중얼거리던 한정아는 깜짝 놀랐다.

내가 언제부터 오빠를 그런 눈으로 보기 시작했을가? 혹시 오빠에 대한 정이 식어버린게 아닐가? 아니야.

한정아는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으나 오빠에 대한 야속한 감정은 털어버릴수 없었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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