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제 4 장

5

 

《언니, 투약시간이 돼서 가봐야겠어요.》

마가을에는 보기 드문, 제법 따스한 해빛이 비쳐드는 양지에 나란히 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주고받던 신주옥은 아쉬워하며 일어났다.

빨래터에서 알게 된 후 친자매처럼 가까와진 신주옥은 짬만 생기면 한정아를 찾아오군 하였다.

《어서 가봐요.》

바삐 뛰여가는 그를 바래우던 한정아는 조용히 한숨을 내그었다.

오빠가 어쩜 그럴수 있단 말인가. 그렇듯 훌륭한 전사를, 조국앞에 그처럼 성실한 사람을 배신자로 몰아 총살하려고 하다니. 그 전사가 혹시 눈을 감으면서 오빠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가. 아, 오빠가 정말 랭돌같은 심장을 지닌 인간이란 말인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사민구분대》쪽으로 향하던 한정아는 걸음을 멈추었다. 무성하게 자란 소나무밑에 서너명의 전사들이 앉아있었는데 뜻밖에 오빠소리가 튀여나왔던것이다.

오늘은 별스레 가는 곳마다 오빠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행여나 하고 귀를 기울이였다.

《동문 아까 왜 전선사령부 대표동지한테 혼쭐났나?》

《허 참, 모닥불을 피울 때 쓰려고 주머니에 쑤셔넣었던 적들의 삐라를 몇장 꺼냈는데 공교롭게 전선사령부 대표동지한테 걸리지 않았겠나. 한줄배기인 나 같은건 상대가 안되는지 당장 중대장을 찾아오라고 하더군. 그래서 중대장동지를 찾아왔더니 전사들이 또 삐라를 가지고 다니는걸 보면 본인은 물론이고 중대장동지까지도 군사재판에 넘기겠다고 펄펄 뛰더군.》

《쩍하면 군사재판이라니까. 에이, 난 그 사람과 만나면 얼음덩이와 마주친것 같은게…》

《이 우둔한 친구야, 그러길래 나처럼 슬기롭게 은페하란 말이야.》

얼굴이 확확 달아오른 한정아는 얼른 그곳을 떠나고말았다.

만약 얼마전에 그런 험구를 들었다면 처녀는 절대로 가만있지 않았을것이다. 련대를 위해 밤잠도 잊고 뛰여다니는 사람을 두고 함부로 말할수 있는가고 소리쳤을것이다. 그랬으나 지금은 그들을 피하고싶은 심정이였다.

전사들이 내가 전선사령부 대표의 누이동생이라는것을 안다면 어떤 눈길로 보았을가?

그 내막을 알고있는 사람은 련대장과 문화부련대장을 비롯한 몇몇 안되는 군관들뿐이라는 사실이 이 순간에는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발을 헛디디며 정신없이 걸어가던 한정아는 인기척이 나는 바람에 무춤 멈춰섰다.

배낭을 어깨에 멘 고남수가 어기적어기적 숲속으로 들어가고있었다.

보나마나 또 옥백미때문일거야. 흥, 산모는 말할것도 없고 자기마저 먹지 않고 쌀배낭을 꽉 끌어안고있는 수전노!

고개를 돌려버린 한정아는 가까이에 있는 낯익은 개인천막쪽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한동안이 지나 빨래감을 걷어가지고 천막을 나선 그는 두눈에 힘을 주었다. 좀전에 숲속으로 들어갔던 고남수가 씩씩거리며 나오더니 산릉선을 내리고있었던것이다. 얼핏 보아도 그 거동이 심상치 않았다.

《아저씨!》

피끗 이쪽을 돌아본 고남수는 쓴 오이 보듯 하더니 그냥 걸음을 내짚었다.

《무슨 일이예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고남수는 급히 뛰여온 처녀를 보자 푸들쩍거렸다.

《이건 사람을 어떻게 보구 그러는거야?》

《무슨 일인지 어서 말씀하세요. 아이참, 말씀하시라는데두요.》

한정아의 곡진한 말에 어느 정도 마음이 풀렸는지 그는 방금전에 있은 일을 털어놓았다.

…해빛이 비쳐드는 곳에 틀고앉아 쌀자루를 헤치고있던 그는 경비소대장과 맞다들었다.

경비소대장은 옥백미는 거들떠보지 않고 배낭을 좀 보자고 하였다.

그 기세등등한 태도에 주눅이 든 고남수는 부랴부랴 배낭안의것을 꺼내놓았다. 유지에 싼 성냥과 빨래비누따위들이 밸풀이라도 하듯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눈을 밝히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경비소대장은 자기가 찾는 물건이 없는지 락심한 기색이였다.

고남수는 이젠 됐느냐는듯 그를 흘겨보고나서 물건들을 배낭속에 주어담았다.

《그날 어디에 갔댔습니까?》

이젠 됐겠지 하고 배낭아구리를 조이던 고남수는 생각지 않게 옆구리를 찔리운것처럼 뜨아해났다.

《신호탄이 오른 날 말입니다. 그때 내가 어디 갔댔는가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지요?》

《저…》

《오늘은 대답하시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고남수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서 마뜩지 않게 대꾸하였다.

《볼일이 있어 갔댔수다.》

《볼일이란 뭡니까?》

《그건 말할수 없수다.》

《뭐요?》

경비소대장이 눈을 치뜨는데 저쯤에서 《그만하오!》 하는 메마른 말소리가 날아왔다.

그제야 고남수는 소나무옆에 서있는 고급군관을 알아보았다.

전사들이 전선사령부 대표라고 하며 어렵게 대하는 사람이다.

행여나 하고 그를 쳐다본 고남수는 차겁게 번뜩이는 두눈을 보자 속이 떨려났다.

어구구, 저 어른도 날 의심하누나. 그렇다고 버선목처럼 뒤집어 보일수도 없구. 에라, 아무래도 여기에 있으면 안되겠어.

이렇게 되여 고남수는 산을 내려가던중이였다. …

《아저씨, 그건 잘못 생각하신거예요.》

언제 봐야 무엇을 잃은것처럼 땅만 내려다보며 걷던 고남수는 오늘따라 높이 쳐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그 어른이 두눈을 딱 부릅뜨고 노려보는게 날 의심하는게 분명해.》

《아이참, 그렇다고 적구로 내려가시겠어요?》

그 물음에 고남수는 펄쩍 뛰였다.

《적구로 내려가다니?… 난 혼자서라도 북으로 가자는거네.》

《안돼요.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실려구 그러세요?》

그가 주저하는것을 본 한정아는 웃으며 달래였다.

《아저씨, 이젠 그만 성을 가라앉히고 돌아가자요.》

《…》

《어서요.》

주밋주밋하던 고남수는 한정아가 잡아끌자 뭐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따라섰다.

그의 잔등을 떠밀어보내고 돌아선 한정아는 생각이 착잡하였다.

물론 난 도중에 만난 고남수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그저 리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이라는것만 알고있다. 그렇다고 정확한 근거도 없이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는건 옳지 않다. 그건 그렇고 고남수의 입에서 또 오빠소리가 튀여나왔다.

《그 어른이 두눈을 딱 부릅뜨고 노려보는게…》

잊으려고 애쓰던 오빠생각이 고남수의 출현으로 또다시 이어졌다.

오빠는 점점 왜 그렇게 변해갈가?

지금까지 가슴속에 소중히 품고있던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깡그리 동원하여 불신의 덩어리를 녹여보려고 애썼으나 종시 한귀퉁이도 녹이지 못한 처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개울가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한정아의 얼굴에 한줄기 밝은 빛이 스쳐지나갔다. 표무강련대장의 름름한 모습이 떠올랐던것이다.

지치고 약해진 전사들의 마음을 틀어잡기 위해 적들의 포위속에서도 씨름판을 크게 벌려놓은 대담한 련대장, 녕월군습격전투를 조직하여 부족되는 식량과 피복문제를 단꺼번에 해결한 능력있는 지휘관, 군사재판에 넘기겠다는 전선사령부 대표의 경고에도 끄떡하지 않고 적군용렬차를 습격하여 북상하려는 적들의 기도를 산산이 짓부셔버린 의지가 강한 사나이, 게다가 인정미는 또 얼마나 많은가.

신주옥의 말에 의하면 전사한 홍일남도 련대장의 보증으로 총살을 면하였다고 한다. 전사를 자신처럼 믿지 않았다면, 부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지니지 못했더라면 도저히 그렇게 할수 없다. 홍일남전사의 희생을 두고 누구보다 통분해하며 가슴을 친 사람도 바로 련대장이라는것이다.

그래, 그는 숯불같은 사람이야.

비록 연기는 나지 않지만 불담이 센 그 숯불은 위험한 벼랑길에서 처녀의 생명을 지켜주었고 련대가 바로 공화국의 한 부분이라는것을 망각하였던 자기의 뺨을 후려갈겼으며 새 생명의 출생을 위해 련대를 전투에로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 숯불은 모닥불앞에서 곤하게 잠든 처녀의 가냘픈 어깨우에 군용모포를 덮어주기도 하였다. 추운줄도 모르고 달콤한 잠에 들게 해준 그 군용모포의 포근한 감촉은 아직도 한정아의 어깨우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다음순간 처녀는 속으로 놀랐다.

자기가 어떻게 된 일인지 표무강의 선의를 선선히 받아들이고있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던것이다. 더욱 알수 없는것은 자기와 그사이에 경계의 차단봉을 내리려고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것이였다. 행군중에 그를 만나면 까닭모르게 눈길을 피하게 되였고 더는 《사민구분대》를 책임진다는 말도 나가지 않았다. 이즈음에 와서는 《사민구분대》는 물론이고 그자신도 자꾸만 그에게 의지하고싶었다.

한정아는 자기의 가슴속에 자리잡고있던 표무강에 대한 존경심이 어느덧 이성이라는 신비한 세계로 넘어가고있다는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따라서 순진한 처녀는 내심에서 봄날의 새싹처럼 파릇파릇 자라나는 이상야릇한 감정을 예민하게 감수하면서도 그 정체를 알수 없어 어쩔줄을 몰라하고있었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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