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 회)

제 5 장

8

 

강의가 끝나자 표무강은 복도로 뛰여나왔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약봉투를 꺼내고는 어림짐작으로 쏟아서 입안에 쓸어넣었다. 그전에는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만 부상처가 쑤셔나군 하였는데 최근에는 어떻게 된건지 때없이 독을 쓴다.

조금 있느라니 점차 동통이 사라졌다.

이러다 혹시 공부를 끝까지 못하는게 아닐가? 제길, 무슨 나약한 생각이야. 수령님께서 더 많은 군사지식과 경험을 쌓으라고 군사학교에 보내주시였는데 끝까지 공부할 생각은 하지 않구. 표무강, 정신차렷!

뒤에서 귀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하오?》

흠칫 놀란 표무강은 약봉지를 줌안에 구겨넣고 뒤로 돌아섰다.

오성국이 의아쩍은 눈으로 보고있었다.

《교장동지, 학생 표무강…》

그러던 그는 저도 모르게 괴로운 신음소리를 씹어삼켰다.

《으음!-》

허리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올려뻗치는 그 아픔이 어찌나 지독한지 이마와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뿌직뿌직 내돋았다.

후- 하고 막혔던 숨을 내뿜은 그는 겨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의 허리를 조심히 만져보던 오성국이 걱정하였다.

《그 몸으로 강의를 받을수 있겠소?》

《있습니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친 표무강은 그를 안심시키려고 씩 웃었는데 오히려 얼굴이 더 찡그러졌다.

《일전에도 말했지만 건강해야 공부도 잘할수 있소.》

의미심장하게 말한 오성국은 화제를 돌렸다.

《참, 그 일은 어떻게 됐소?》

그 일이란 《월남도주기도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였다.

표무강은 방금전의 동통보다 몇배나 더한 아픔을 느꼈다.

《상급검사는 제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오성국의 수북한 장미가 꿈틀거렸다.

《어째서?》

《…》

《동문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로성익이 어떤 사람인가 하고 생각할 때 제일먼저 떠오르는것은 전쟁시기 홍일남을 총살해야 한다고 명령하던 무자비한 얼굴이였다. 그가 전선사령부로 올라가자 표무강은 그때의 일을 애써 지워버렸었는데 이번에 만나보니 그 랭랭한 심장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을 두고 이러니저러니 말하고싶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그 마음을 들여다본듯 오성국은 제자의 어깨를 툭 쳤다.

《너무 걱정마오. 제대로 될거요. 그건 그렇구 오전강의도 끝났는데 날 따라오우.》

표무강을 데리고 자기 방에 들어선 그는 책상서랍에서 여러장의 사진들을 꺼내더니 책상우에 주런이 펼쳐놓았다.

《자, 이중에서 마음에 드는 처녀를 골라보오.》

《이건… 뭡니까?》

《동무 장가보내자고 그래.》

오성국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자 표무강은 덴겁해서 대답하였다.

《전 조국이 통일될 때까지 장가를 가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나올줄 알았다는듯 오성국은 시뭇이 웃었다.

《그 각오는 좋소. 그렇지만 금상첨화라구 장가두 가구 통일도 되면 더 좋지.》

대답이 궁해진 표무강은 얼굴이 뻘개졌다.

《그러지 말고 한번 보오. 처녀들이 얼마나 고운가.》

이럴 때 보면 오성국은 펄펄 나는 싸움군들을 키워내는 군사학교의 책임일군이라기보다 웅심깊은 맏형같았다.

꿋꿋해서 서있는 제자의 손을 끌어당긴 그는 사진을 한장한장 가리키며 설명하였다.

《이 처년 외무성 타자수. 나이는 24살, 부모들은 전쟁시기 폭격에 잘못되였는데 생활력이 강한 처녀요. 이런 처녀를 색시로 맞으면 살림살이엔 신경쓰지 않아도 될거요. 그리고 이 처년 중학교 수학교원인데 나이는 26살, 학교측의 평을 들어보았는데 리지적이고 마음씨도 곱다고 하오. 내 좀 살아보니 녀자란 얼굴보다 마음이 고와야 해.》

정을 담아 사진속의 처녀들을 한명한명 소개해주는 그를 보자 표무강은 가슴이 뜨거워났다.

오성국은 군인은 상급의 명령앞에서 오직 《알았습니다!》라는 대답밖에 몰라야 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진짜배기 싸움군이 되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엄격한 스승이였고 위대한 수령님을 하늘처럼 믿고 따르는 길에서 한치도 탈선하지 말아야 한다는것을 심장속에 심어준 혁명의 선배였다. 그런 그가 지금 제자의 행복을 위해 그처럼 마음을 쓰고있는것이다.

《이 처년 어떻소?》

별스레 강조하는듯 한 그의 말소리에 이끌려 사진을 들여다보던 표무강은 속으로 놀랐으나 곧 자신을 다잡고 태연한척 하였다.

느물느물 웃고있던 오성국이 이런 말을 꺼냈다.

《이름은 한정아. 전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신문사 기자로 근무. 후퇴시기 사민구분대를 책임지고 동무네 련대에 배속되였었고. 듣자니 헤여질 때 동무한테 정성껏 만든 군공메달주머니까지 주었다면서?!… 내 말이 틀린다거나 보충할것이 있으면 말해보오.》

표무강은 말문이 막혔다. 그런즉 방금전에 열심히 설명한 사진들은 자기의 태도를 떠보기 위한 기만술이였던것이다.

당황해난 마음을 숨기려고 헛기침을 깇고난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교장동진 공연한 수고를 하셨습니다.》

이제야 옴짝 못하겠지 하고 흐뭇해하던 오성국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무슨 소리요?》

상대방의 공격이 좌절되기 시작한것을 포착한 표무강은 때를 놓치지 않고 반격을 가하였다.

《그 동문 이미 대상자가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요?》

《예.》

이쯤하면 제자한테서 다른 말을 더 기대하기 어렵다는것을 알고있는 오성국은 입을 쩝쩝 다시였다.

랑패한 표정을 짓고 오락가락하던 그는 걸음을 뚝 멈추었다.

《학생 표무강!》

표무강은 몸에 배인 동작대로 차렷자세를 취하였다.

《한달안으로 결혼하고 보고하시오.》

표무강은 우산도 없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들쓴 기분이였다.

어정쩡해 서있는데 머리우에 연거퍼 벼락이 떨어졌다.

《명령이요. 알겠소?》

상관의 명령에 다른 대답이란 없다.

《알았습니다.》

정작 대답은 하였지만 표무강은 눈앞이 캄캄하였다.

아직 약속한 처녀도 없는데 어떻게 한달안으로 결혼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상급의 명령을 받으면 《알았습니다!》라는 대답밖에 몰랐지만 이때처럼 주저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가보오.》

어깨가 축 처져서 교장방을 나선 표무강은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는것을 알았다.

검푸른 하늘가에 금모래를 한줌 쥐여뿌린것처럼 뭇별들이 반짝거리고있었다.

저 별들속에 신애도 있다면… 신애, 부디 내옆에 내려와다오. 그럼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소. 놓아주지 않겠단 말이요.

별찌 하나가 포물선을 쭈욱- 그으며 떨어져내렸다.

그것을 보자 가슴이 못견디게 쓰려났다.

한번 떨어지면 다시는 하늘에 오를수 없는 별찌!

신애도 그것처럼 내옆으로 영원히 돌아올수 없다. 어디 대답해보오. 신애, 난 어떻게 하면 좋은가 말이요.

괴로운 가슴을 부여잡은 그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있었다. …

그 시각 로성익의 방에서는 론쟁이 벌어지고있었다.

《표동무가 정말 월남하려고 하였다면 그때 벌써 그랬을겁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공화국을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흥선동무, 인간의 사상은 고정불변한게 아니요. 오늘의 충신이 래일은 역신으로 될수도 있는거요.》

《상급검사동진 표동무를 믿지 못하겠다는겁니까?》

《사람을 믿는다는게 얼마나 힘든건지 동문 알기나 하오?》

《난 상급검사동지가 심히 탈선하고있다고 봅니다.》

《탈선하고있는건 내가 아니라 바로 동무요. 언제부터 충고하고싶었는데 인정에 무르면 원칙에서 탈선하게 되오. 소꿉시절 친구라고 해서, 전쟁시기 함께 싸운 전우라고 해서 덮어놓고 비호한다면 어떻게 원칙을 지키겠소?》

《그렇다면 나도 한가지 충고하겠습니다. 상급검사동진 원칙이란 차겁고 무자비한것이라고 생각하는것 같은데 난 그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뜨거운 사랑과 믿음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믿음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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