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회)

제 6 장

2

 

봄비는 수집음을 타는 처녀마냥 소리없이 내리고있었다.

건설장들에서 날아오른 먼지가 뿌옇게 맴돌던 상공은 거대한 걸레로 훔친것처럼 깨끗해지고 바싹 말랐던 대지도 한결 습윤해졌다.

《야, 비온다!-》

《좋구나!》

학교에서 돌아오던 아이들이 공중을 향해 저마끔 모자를 올려던지며 깡충깡충 뛰는데 오가던 사람들은 그 귀여운 모습들을 바라보는 정신에 옷이 젖는줄도 모르고있었다.

그러나 유독 한사람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듯 터벅터벅 걷고있었다.

장령복은 흠뻑 젖었고 구두에도 흙탕물이 잔뜩 튀여올랐지만 그는 그냥 걷기만 하였다.

한시간전 그는 검찰소 부소장이라는 사람을 만났었다.

물소처럼 우람한 몸을 가죽쏘파에 잠근 그는 커피를 줄금줄금 마시면서 방안에 들어선 손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커피나무열매를 처음 발견하였다고 하는 에티오피아의 방목공을 생각하는지 아니면 커피열매를 껍질채로 끓여서 마셨다는 아라비아사람들을 그려보는지 깨알같은 두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명상에 잠겨있던 그는 한참만에야 생각난듯 《거기 앉소.》 하고 턱짓하였다.

그가 맞은켠 걸상에 앉자 부소장은 엄엄하게 따졌다.

《동문 제기된 자료를 전면 부정한다는데 사실이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나올줄 알았다는듯 쓴웃음을 지은 부소장은 위협조로 말하였다.

《그렇게 뻗친다고 만사가 해결되는건 아니요.》

표무강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호들갑스러운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여보시오. 응, 나야.》

몇마디 주고받다가 힐끔 이쪽을 넘겨다본 그는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지금 사업중인데 좀 있다 전화하지. 응, 그때 약속하자구… 아, 알겠다니까.》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방금전의 엄엄하던 태도를 헌옷처럼 벗어던지고 흥그러워진 어조로 누군가를 찾았다.

키가 훤칠한 사람이 들어오자 그는 역시 턱짓으로 표무강을 가리켰다.

《그자한테 데리고 가오.》

그렇게 되여 표무강은 간악한 원쑤 허정효를 만났다.

몇해만에 만난 그자의 몰골은 믿기 어려울만큼 초췌하였다.

녀자처럼 말쑥하던 얼굴은 때국투성이고 어깨는 앞으로 구부러들었다.

전쟁시기 련대를 《귀순》시켜보려고 악에 받쳐 날뛰던 독사같은 기상은 온데간데 없고 서리맞은 풀잎사귀처럼 후줄근하였다.

그랬으나 표무강을 알아보자 뿌옇던 두눈에서 금시 독기가 뿜어나왔다.

《표… 무… 강!》

그자앞으로 다가간 표무강은 추상같이 내쏘았다.

《허정효, 널 이렇게 만났구나.》

움쭉 몸을 일으킨 허정효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때 널 죽이지 못한게 한스럽다.》

표무강은 바위처럼 든든한 어깨를 쭉 폈다.

《네가 아무리 날뛰여도 날 어쩌지 못해!》

《뭐야?》

《허정효, 똑바로 앉아!》

옆에 있던 예심원이 호령하자 대가리를 쳐들었던 독사는 순식간에 태도가 달라졌다.

살기가 흐르던 두눈은 멍청해지고 사려물었던 입술도 헤벌어졌다.

얼핏 보면 그 몰골은 공화국의 관대정책을 바라는 가련한 인간같지만 그것은 위험을 느낀 독사가 풀숲에 몸을 숨기는 교활한 수법이였다.

《이 사람을 아는가?》

짐짓 량순해진 그는 관청을 찾아온 농부마냥 허리를 굽석굽석하였다.

《예, 압니다. 예심원선생님!》

《그럼 그 사람과 어떤 관계인지 말해보라.》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허정효는 표무강과 함께 륙군사관학교에 입교하던 일, 억수로 퍼붓는 비속에서 진행된 강행군에서 표무강이 제일먼저 도착하여 미군장교 하불의 칭찬을 받던 일, 륙사를 최우수로 졸업하고 《국군》소위로 임명되던 일 등을 렬거하였다. 특히 하불의 신임에 의해 표무강이 《국군》대대장으로 승급하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다음은 월남도주계획에 대해 말하라.》

한대 얻어맞고 꼬리를 사타구니에 밀어넣은 개처럼 허정효의 얼굴은 비참하게 이그러졌다.

《예심원선생님, 이미 진술한바와 같이 전 미군첩보장교의 명령대로 표무강씨를 만났습니다. 그때 대통령임명장을 받아본 표무강씨는 자기의 과거를 용서해준다면 남으로 나가겠다고…》

《닥쳐!》

표무강이 고함쳤으나 허정효는 세상사를 초탈한 스님처럼 초연하게 웃었다.

《표무강씨, 사람이야 솔직해야지요.》

표무강은 손톱이 살에 박히도록 주먹을 꽉 틀어쥐였다.

머리꼭대기로 피가 콸콸 솟구쳐오르고 온몸이 우들우들 떨렸다.

아, 이놈을 그냥 둔단 말인가? 당장 쳐죽였으면 시원하련만.

머리속에 의문이 떠오른것은 그 다음이였다.

이자가 어째서 기를 쓰고 거짓진술을 하는가? 허정효는 보통 교활한자가 아니다. 자기가 거짓진술을 하는 경우 용서받지 못한다는것쯤은 알고도 남는자이다.

별안간 목덜미에 서늘한 기운이 끼쳐왔다.

그렇다. 허정효는 내가 공화국의 버림을 받게 하려고 꾀하고있다. 그렇게 하여 나뿐만아니라 우리 의거장병들을 수령님의 품에서 떼여놓자고 발악하는것이다. 천하의 악독한 놈!

불이 펄펄 이는 눈으로 원쑤를 노려보던 표무강은 예심원쪽으로 돌아섰다.

《난 이자와 할 말이 없습니다.》

등뒤에서 상처입은 이리의 울부짖음같은 소리가 울렸다.

《으흐흐, 난 저승에 가서라도 널 물어뜯고야말테다!》

그가 부소장방으로 다시 돌아오니 방주인은 비양조로 말을 건넸다.

《륙사동창생과 회포를 나누고나니 기분이 어떻소?》

표무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을 나름대로 해석한 부소장은 점점 기를 돋구었다.

《아무리 뻗친다고 해도 소용없어. 솔직하게 자백하는게 좋을거야.》

《!》

표무강은 자기의 몸을 으스러지게 조이는 쇠사슬을 느꼈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숨이 막히고 온몸이 졸아드는것 같았다.

그 사슬을 끊어버리듯 목단추를 활 터쳐놓은 그는 맞받아 소리쳤다.

《난 자백할게 없습니다. 없단 말이요!》

그 말이 아직 허공에서 맴돌고있는데 쏘파에 박혀있던 부소장의 몸뚱이가 수면우로 솟구치는 망둥이처럼 푸들쩍 뛰여올랐다.

《좋다. 어디 법정에서도 그렇게 나오는가 보자.》

그와 더이상 마주설 필요가 없다고 여긴 표무강은 문을 차고 나와버렸다. …

그때는 배심이 든든하였지만 지금은 마음이 뒤숭숭하다. 그까짓 허정효의 《진술서》따위는 열개, 백개라도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것은 적이 아니라 바로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도무지 알수 없다. 그들은 어째서 나보다 허정효의 《진술서》를 더 믿는가. 어째서?

영차, 영차!-

고개를 들자 점차 가늘어지는 비발속으로 세차게 끓고있는 건설장이 안겨왔다.

에라, 땀이나 흠뻑 쏟고 가자!

마침 저쯤에 혼합물을 담은 맞들이가 보였는데 비옷을 쓴 처녀가 혼자 서성거리고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간 표무강은 호기있게 소리쳤다.

《동무, 같이 나르기요!》

짝패를 찾느라 여기저기 둘러보던 처녀는 반가운 모양 머리에 쓰고있던 비옷고깔을 뒤로 젖혔다.

순간 표무강은 굳어지고말았다.

《아니, 동무가?》

그 처녀는 뜻밖에도 한정아였던것이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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