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7

만  월  궁

2

 

왕후와 시녀는 배의 부엌칸에서 커다란 가마에 불을 때고있었다. 배에 싣고온 사철쑥에 인삼 몇뿌리를 넣고 그것을 달이는것이였다. 그 물을 마시면 사람들의 건강에도 좋을뿐아니라 특히 더위를 이기게 하는데 특효가 있었기때문이였다.

왕륭이네 상선단의 배군들은 낯설은 열대의 무더위에 시달리면서도 더위도 먹지 않고 이국의 기후가 가져오는 병에도 걸리지 않은것이 왕후의 지성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러면서 출항을 준비할 때 왕후가 직접 나와 아무데도 쓸데없는것 같은 쑥단들을 창고에 채워넣도록 하는것을 보고도 저런것은 왜 실을가 하는 의문조차 돌리지 않았던 자기들을 질책하지 않을수 없었다.

바로 그것이 자신들의 건강을 담보해주는 뚜렷한 현실은 그 누구나 왕후에 대한 존경심을 더더욱 높여주었다.

예닐곱살씩 나보이는 아라비아의 세 소녀는 온종일 왕후의 옆에서 그림자처럼 어른거렸으며 보약을 달이는 더운 불앞에조차 쪼그리고앉아있었다. 그들은 어머니, 아버지를 잃고 쇠사슬에 감겨 떨어진 지옥에서 다시는 벗어날 길이 없다는 절망에 잠겨 아예 헤여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던 애들이였다.

그러나 뜻밖에 믿을수 없는 행운이 찾아들어 희망이 열리였으니 부모들이 기도문을 배워줄 때 숭상하고 우러르던 그 알라신의 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애들은 알라신에게 열심히 기도를 하였으며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알라신이 펼친 세계라고 생각할수밖에 없었던것이였다.

배는 어느덧 말라까해협에 들어서고있었다.

왕후가 조용한 기회에 태자 왕륭에게 말하였다.

《신사인이 양아버지에게 들리지 않고 곧장 아라비아로 가자고 한다는데 사실이냐?》

왕륭이 웃음을 띠고 대답하였다.

《사인은 왕후마마를 생각해서라도 시간을 지체할수 없다고 하나이다. 그러나 제가 생각을 고치라고 말했나이다. 인륜을 위해 가는 길이기에 인륜을 어길수 없다고 했나이다.》

왕후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졌다.

《태자가 옳은 생각을 하였다.

어머니, 아버지가 가슴을 태우는 아라비아의 소녀들도 반드시 그 품에 데려다 안겨주어야 한다.

이제는 우리의 길이 우리만의것이 아닌것만큼 그 무게는 곱으로 중해졌다.

몇배로 중하여진것이 의리를 위한것이거늘 수십년간 헤여졌던 아버지, 어머니를 곁에 두고 지나친다면 의리를 버리는것이니 의리를 버리면서 어떻게 의리를 이루겠느냐?》

왕후의 뜨거운 마음은 왕륭의 가슴에 그대로 흘러들었다.

《왕후마마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겠나이다. 의리를 위한 길은 의리로 가야 한다는 진리를 자나깨나 잊지 않겠나이다.》

망망대해밖에 보이는것이 없던 항로의 좌우에 멀리로 륙지가 나타나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달려오는 앞길과 멀어지는 뒤쪽만이 대해인듯 아득하였다.

신사인이 왕륭의 곁에 서서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들이 들어선 곳은 말라까해협의 배길이옵나이다. 이 해협의 길이는 이천리고 너비는 제일 좁은 곳이 백리옵나이다.》

사인은 배를 해안가까이로 몰았다.

해변의 열대림속으로는 원숭이무리들이 떼를 지어 사라질 때도 있고 코끼리무리가 밀려오기도 하였으며 갑자기 범이 뛰여나와 짐승들을 따르며 요란한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다.

호기심에 넘친 박장룡이 신사인에게 물었다.

《여보게, 저 호랑이가 산처럼 큰 코끼리를 따르다가 멈추어서는것은 왜서인가?》

신사인이 씩 웃으며 대답하였다.

《호랑이도 큰 코끼리는 마음대로 다칠념을 못하오이다.》

이들은 적도의 뜨거운 태양아래에 펼쳐진 열대수림과 거기에서 벌어지는 맹수들의 신비세계를 그림처럼 바라보며 파도를 헤쳐갔다.

왕륭이 해안에 펼쳐진 원시림을 이루는 나무이름을 물었다.

《저 숲은 망그로브수림이옵나이다.》

《아, 그런가요? 그런데 량옆의 해안이 점점 가까와지는듯 하구려.》

《예, 해협의 제일 좁은 곳이 백리정도인데 바로 그곳에 들어섰소이다. 이제 조금만 더 나가면 말라까항이 나타나오이다.》

《말라까? 말라까란 무슨 뜻을 담은 말이요?》

《말라까란 왼쪽의 쟈바해연안에 무성한 나무이름인데 이곳 주민들이 자기 지방에 그 이름을 붙였다고 하나이다. 아마도 옛날에 살던 사람들이 말라까나무와 무슨 깊은 인연이라도 맺었던 모양이옵나이다.》

《하기야 어느 나라, 어느 지역 사람이건간에 자기가 살아온 환경과 깊은 인연을 맺고 력사를 창조해왔으니 주위에 대하여 무심할수 없었을것이요. 말라까항은 어느 나라에 속하오?》

《우리가 가고있는 해협의 오른쪽 즉 북쪽은 큰 반도이나이다. 여기에는 한 오백년전까지 토착민들의 작은 국가가 있었는데 이삼백년전에 푸난국가가 쳐들어오고 백년전에는 다시 슈라비아자이야국가의 지배를 받았소이다. 푸난과 슈라비아자이야는 해협의 남쪽 쟈바섬과 쑤마뜨라섬에 있던 나라오이다. 그런데 수십년전에 남쪽의 그 섬들에 생겨난 케리디왕국이 해상의 수많은 섬들을 장악하면서 또 말라까에도 세력을 뻗쳤다 하오이다.

이처럼 말라까사람들의 수백년력사는 다른 종족과 국가들에 억눌린 비참한 생활로 이어졌소이다.》

사인의 이야기를 듣는 왕륭은 이 세상의 어느 종족에나 국가도 자기를 지킬 힘이 없으면 남의 지배를 받으며 예속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진리를 또다시 깨우치는듯싶었다. 저 멀리에 항구가 나타났다. 갈매기떼들이 별스레 많이 날아예는데 혹간 비둘기무리들도 날아지나갔다.

왕륭은 배를 말라까항으로 돌리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야 말라까에 사는 양부모와 상봉시키려는 왕륭의 마음을 헤아릴수 있은 사인의 가슴은 점점 후더워졌다. 분초를 다투는 길이여서 자기로서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건만 태자의 령이니 따르지 않을수도 없었다.

사인은 항의 중심이 아니라 왼쪽구석으로 키를 돌렸다.

앞에 보이는 물우에는 큰 배들은 없고 매생이같은 쪽배들만이 떠다녔다.

바다가에는 물속에 뿌리를 박은듯싶은 다락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있었다.

참대로 묶은듯싶은 떼우에도 집인지 초막인지가 수없이 널려있었다.

《태자님, 저앞에 보이는 다락집들이 양아버지가 사는 마을이오이다.

저 매생이들은 물우의 집들에 사는 사람들이 오가는 통행수단들이옵나이다.》

물우에 보이는 떼목우에 있는 초막들은 어쩐지 빈민들의 집같았다.

떼와 떼를 건너뛰는 사람들, 오가는 사람들은 하나와 같이 벌거벗다싶이하고있었다. 역시 이 세상은 귀족이나 부자가 아니라 헐벗고 못사는 백성들이 기본을 이루고있는것이였다. 때문에 력대로 나라를 다스리는자들은 민심을 귀중히 여기고 백성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며 만약 그런 경우 민심의 저주와 규탄을 받고 멸망하게 된다는 력사의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왕륭은 지금 고구려를 그리는 민심을 귀중히 여기고 그 백성들의 뜻을 높이 사주는 길이 고구려의 완전재건의 날임을 더욱 깊이 절감하게 되였다.

《태자님, 제 혼자 조용히 들어갔다가 나오겠나이다. 잘못하면 온 마을이 뛰여나올수 있는데 그러면 시간이 지체되오이다.》

《왕후께서도 그대의 마음을 잘 알고있소. 이제 매생이가 오면 박비장과 함께 타고가시오.》

벌써 박장룡이 노를 젓는 매생이가 배전으로 다가왔다. 배에는 왕후가 준비해준 물건꾸레미들이 실려있었다.

《동생, 어서 내려와 타게나.》

박장룡의 말에 사인이 웃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얼굴은 이그러지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매생이는 앞으로 나갔다.

크고작은 떼목들과 배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물결을 가르던 매생이가 드디여 해안에 이르렀다.

포구에 기둥을 높이 세우고 새둥지처럼 떠있는 다락집으로 누군가 오르는것이 보였다. 그는 기다란 복도를 거쳐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더니 드디여 문을 열었다.

왕륭과 함께 온 고려의 배군들도 장사진을 치고 다락마을을 지켜보고있었다.

열린 문안에서 로인이 한명 나와 외랑에 선채 신사인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갑자기 그에게 매달렸다.

《어허허… 사인아… 네가 살아오다니?…》

로인의 통곡이 터졌다. 이어 문이 다시 활짝 열리며 늙은 로친이 뛰여나오더니 그도 사인의 얼굴을 감싸안고 엉엉 울었다.

이상한 일은 다음에 벌어졌다.

두 로인이 이리 끌고, 저리 끌고하는 바람에 사인은 비칠비칠하다가 쓰러지고말았다. 그러자 양아버지 무함마드로인이 사인을 올라타다싶이하더니 자기의 코를 사인의 코에 대고 한껏 비벼대는것이였다. 그리하여 사인의 얼굴은 코물, 눈물이 고이고 엉켜 범벅이 되였다. 다음은 양어머니가 령감을 밀어제끼고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였다.

그것을 올려다보던 박장룡은 너무도 놀라와 입을 하 벌리고 굳어졌다가 사연을 알게 되자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한참후에야 세사람은 정신을 차린듯 사다리를 내려 매생이로 다가왔다.

두 로인이 친절한 웃음을 띠고 뭐라고 말하였으나 박장룡은 그저 《예, 예.》 하며 어리광대처럼 안절부절을 못하였다. 저 두 늙은이가 자기도 자빠뜨려놓고 눈물, 코물의 진펄을 만들어줄가보아서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금은보화들과 인삼 다섯근은 물론 여러개의 누렇고 붉으며 푸른 보자기들로 싼 물건들을 메여날라갔다. 마지막엔 박장룡이 금빛술이 달린 커다란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금화주머니였다.

《아버님, 고려태자님께서 사인의 부모님들께 보내시는 백냥의 금화이옵나이다.》

순간 무함마드로인은 손을 내저으며 초풍을 만난듯 우들우들 떨었다.

《아니오이다, 아니오이다. 이 늙은이가 죄를 짓소이다. 이미 받은것만두 여기 말라까에서 제일 큰 부자 찜쪄먹겠는데 이렇게 많은 금화를 어디에 쓰겠소이까? 안되오이다, 안되구말구요.》

로인의 고집을 이길수 없어 박장룡은 껑충껑충 떼목을 뛰여넘어 사다리를 올랐다.

장룡이 들어간 다락집은 꽤 넓었는데 저쪽 구석에 궤짝 하나가 있을뿐 다른 세간붙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들이옷같은것이 벽에 걸려있었는데 팔소매가 다 해져있었다. 그우에 덧걸린 머리에 쓰는 두건인듯싶은것도 얼마나 꾀죄죄한지 몰랐다.

《집살림이 말이 아니오이다.》

박장룡이 이렇게 말하자 신사인이 곧 무함마드로인의 말을 통역하였다.

《악귀같은 흑상어놈이 달려들어 사인이가 도망친 값이라며 모조리 걷어가는 바람에 거지꼴이 되였소이다. 그러나 알라신께서 사인이를 꼭 구원해주시리라 믿었기에 자나깨나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망정 가난을 탓한적은 한번도 없었소이다.

이 인삼 다섯근만 가지고도 배를 둬척 마련할수 있소이다. 딸과 사위들에게 한척씩 맡겨 집안을 일떠세운 후 자식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고려국을 찾아가서 인사를 올리겠소이다. 그런데 이토록 험하고 먼길을 어떻게 오셨소이까?》

신사인으로부터 사연을 알게 된 로인이 해뜨는 나라 고려국 임금의 은총을 입은 자기가 아라비아의 배길을 잘 아는데 어찌 가만있겠느냐며 너무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어쩔수가 없게 되였다.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9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