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 회)

제 3 장

땅이 기다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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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옥은 삽시에 마음이 거뜬해졌다.

이동우리에서의 돼지방목은 생각처럼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였다.

풀판이 좋았다. 곽아바이는 방목공집뒤 느릅나무에 종을 매달아 놓고 때를 맞춰 종소리를 울리고는 먹이를 주군 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돼지들이 종소리만 나면 먹이를 주겠거니 하고 모여들었다.

숲속에 종소리가 메아리치면 멀리에 갔던 놈들도 여기저기에서 살같이 달려왔다.

정옥은 돼지들이 이처럼 빨리 길들여지리라고는 미처 상상할수 없었던만큼 놀랍기만 했다.

경주라도 하듯 냅다 달려오는 돼지들을 보기란 참말 재미났다.

정옥은 그것이 하도 신기해서 마지막놈이 들어올 때까지 지켜보면서 깔깔 웃음을 터치며 기뻐했다.

몸집이 제일 크고 동작이 굼뜬 《점백이》가 제일 마지막에 들어오군 했다. 딴 놈들이 다 먹은 다음에 나타난 《점백이》를 위하여 정옥은 별수없이 먹이 한초롱을 가져다가 따로 먹이군 했다.

《정옥이가 잘하는구나. 빠른 놈두 굼뜬 놈두 다 골고루 먹게 해야지.》

곽아바이가 하는 말에 정옥이도 한마디 했다.

점백이가 제일 멀리 나가는게군요? 꼴찌하는걸 보면…》

《그놈은 자유주의가 심해서 그런거야. 외토리로 삐여지거던. 자유주의자야!》

곽아바이가 《점백이》에게 《자유주의자》란 별호를 붙이는것이 우습다고 산옥이도 깔깔 웃었다.

어느날 정옥은 노루골등판으로 돼지들을 몰고갔다.

먹이풀이 좋아서 돼지들은 가까이에서 맴돌며 풀을 뜯어먹었다. 배불리 먹고나자 그것들은 더위에 못이겨 그늘로 찾아들었다.

오후 한쉴참이 지날 때까지 무난히 시간이 흘렀다.

부근의 나무숲속에서 《푸드득.》하고 까투리가 날아올랐다.

갑자기 까투리가 나는 소리에 와뜰 놀란 정옥은 무심결에 그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정옥의 눈앞에 희한한 정경이 펼쳐졌다. 까투리가 날아오른 그 주변에서 갓 까난 병아리를 방불케 하는 꿩새끼 네마리가 다급하게 우짖고있는것이 아닌가!

새끼꿩들을 잡아서 집에 가져다가 길러보고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정옥은 한동안이나 뛰여다니며 새끼 네마리를 모두 잡았다.

크기가 좀 작을뿐이지 신통히 병아리처럼 생겼다.

노르끼레한 부리며 발이며 보르르한 털이며…

정옥은 꿩새끼들을 길러 큰 꿩들로 키워낼 공상에 빠졌다.

그러다나니 퍼그나 시간이 흘렀다.

돼지들을 몰아갈 때가 되여 점검해보니 《점백이》가 없어졌다.

《똘또-똘또- 모여.》하고 안타까이 불러도 《점백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점방골쪽을 지키고있던 곽아바이가 달려왔다. 정옥의 웨침소리를 듣고 사태를 짐작했던것이다.

정옥은 꿩새끼들을 붙잡아가지고 노느라 시간을 보내다나니 《점백이》를 잃어버렸다는 자책에 량심이 찔려 그의 시선을 피하였다.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벌써 몇번째인가? 언젠가도 헛눈을 팔다가 두마리의 돼지를 잃어버리고 곽아바이의 추궁을 받았었다.

《미욱한 짐승인 소도 한번 빠졌던 구렁텅이엔 절대로 안 들어가! 무책임해두 분수가 있지.…》

짤막해도 몹시 맵짜던 곽아바이의 말이 지금도 윙 고막을 울리는듯만싶다. 그날 아저씨는 날이 캄캄할 때에야 돼지 두마리를 찾아가지고 돌아왔었다.

그때부터 정옥은 바싹 정신차리군 해서 비오거나 안개끼는 날을 내놓고는 돼지를 잃어버린적이 없었다.

그러나 곽아바이의 목소리는 예상외로 부드러웠다.

《정옥아! 산옥이하구 몰아가거라. 점백이는 내 찾아갈게.…》

함께 가자고 나설새도 없이 곽아바이는 벌써 구름나무숲길로 들어서는것이였다. 뒤미처 숨을 헐썩이며 올라온 산옥이가 돼지무리를 일별하고나서 정옥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도 《너 또 허튼데 정신 팔았댔구나, 점백이가 없어진걸 보니…》하고 질책하는듯싶었다.

어깨에 걸친 다래끼안에서 나는 삐용거리는 소리에 놀라운듯 산옥은 다래끼안을 기웃이 들여다본다.

《너 꿩새낄 잡았구나! 야, 고것들 곱기두 해라. 음, 그러느라구…》하고 산옥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정옥아, 까투리가 새끼들을 잃구 얼마나 슬피 울겠니?

불쌍하지두 않니? 놓아주자. 공연히 가져다 죽이지 말구. 어미품에서 크던것들을 네가 어떻게 살려내겠다구 그러니?》

정옥은 퍼그나 아쉬웠지만 산옥의 말이 옳게 생각되여 나무숲의 제자리에 새끼들을 놓아주었다.

《산옥동지, 혼자 몰구 가요. 나두 함께 찾게…》

정옥이가 간청하자 산옥은 머리를 끄덕였다.

《싸래골에 갔겠는데 뾰족벼랑은 에돌아가거라.》

정옥은 산옥이가 돼지들을 한곬으로 몰아가는것을 도와주고나서 싸래골로 향하였다. 해는 벌써 서산너머로 기울어져 방목공집은 산그림자에 가리워졌다.

잠간사이에 땅거미가 깃들것을 생각하자 초조감이 앞섰다.

뾰족벼랑을 에돌아가라던 산옥의 당부도 잊어버렸다.

당장 어둡겠는데 단 몇분도 새롭다. 지름길을 택하리라 결심한 정옥은 뾰족벼랑길을 곧추 타고내리려 하였다.

그 길은 위험하여 혼자서는 누구도 선뜻 들어서지 않는 벼랑길이였다. 그러나 곽아바이보다 먼저 《점백이》를 찾아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정옥이로 하여금 그 길을 택하게 했다.

아찔한 벼랑길을 내려다보니 머리칼이 곤두섰다. 참나물이나 고비, 병풍을 뜯으러 다니면서 동무들과 함께 톺아내릴 때는 겁을 몰랐는데 어둠이 깃든 지금은 전혀 달랐다.

강심먹고 나무가지를 휘여잡던 정옥은 제 눈을 의심했다.

꽃이 만발한 피나무가지사이로 벼랑길 중턱을 내리고있는 곽봉식의 모습이 바라보였던것이다.

(어쩌면 이 길로 접어들다니… 내가 한발 늦었구나.)

정옥은 못박힌듯 굳어졌다. 벼랑길로 미끄러져내리는 곽아바이를 주시하며 가슴을 조이였다. 제발 무사히 내려갔으면…

맨 마지막벼랑코숭이에 이르렀다. 저기가 제일 위험하다.

조마조마해서 바라보던 정옥은 그만 앗!- 하고 비명을 질렀다.

발을 헛디딘 곽아바이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모재비로 굴러떨어졌던것이다. 눈을 딱 감았다가 떠보니 쓰러졌던 곽아바이가 힘겨웁게 일어섰다. 몹시 상한듯싶다.

발목을 풀쳤는지 절뚝거리며 《점백이》를 찾아떠나는것이다.

정옥은 어떻게 벼랑길을 내렸는지 몰랐다.

그는 곽아바이와 함께 어두워서야 《점백이》를 찾아 몰고왔다.

곽아바이가 벼랑길에서 다쳤다는것은 누구도 몰랐다.

분명 발목을 풀쳤을텐데 아저씨는 용케도 고통을 감추고 태연하였다.

정옥이도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히는 죄책감때문만이 아니였다.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감정이 정옥의 가슴을 꽉 채웠다.

말이 무슨 소용있으랴!

그 고마움, 그 존경심을 가슴에 품고 살면 되는것이지…

저녁밥상을 물리고나자 곽아바이는 카바이드등의 물나사를 풀어놓는다. 눈부신 불줄기가 솨악- 뿜어나오며 방안을 대낮처럼 밝혔다.

곽아바이의 이마에 난 상처가 불빛에 드러났다. 아저씨는 상처를 감추려고 일부러 머리칼을 쓸어내려덮은듯 약간 피배인 자욱이 알릴락말락 보인다.

산옥이와 달녀는 눈치채지 못했어도 정옥의 눈은 속일수 없었다.

《정옥아, 신문이나 한제목 읽어라.》

례사롭게 올리는 곽아바이의 말에 정옥은 가슴이 더욱 뭉클해졌다.

눈물을 보일듯만싶어 신문을 펼쳐들어 얼굴을 가리웠다.

안개가 휩싸인듯 글줄이 몽롱하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옥아, 빨리 읽으렴.》

영문을 모르는 달녀가 재촉했다.

정옥은 가까스로 자신을 다잡고 신문을 읽었다.

그날 밤 정옥은 잠들수 없었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정옥은 슬그머니 일어나 카바이드불을 밝혔다. 벽에 걸린 아저씨의 작업복웃옷을 벗기였다.

오른쪽어깨부위가 한뽐이나 째졌다.

옷이 이 지경이 되였으니 오죽 심하게 다쳤으랴!

여느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활기있게 이야기를 나누던 곽아바이의 강직한 모습이 되살아올라 정옥은 잠든 그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자면서도 아저씨는 신음소리를 냈다.

(아, 내가 오늘 무슨 일을 저질렀담!)

정옥의 가슴은 칼로 저미는듯 아팠다.

이튿날 아침 곽아바이는 기워진 작업복을 보자 말없이 정옥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눈빛은 《정옥이가 수고했구나.》하고 말하는듯 하였다.

그것을 느낄수록 아바이에 대한 정옥의 존경심은 나날이 더욱 두터워졌다. 정옥은 남모르게 그를 생각해주려고 왼심을 썼다. 터밭에 심은 갖가지 남새들이 푸르싱싱 자라오르자 정옥은 달녀가 미처 여겨보지 못하는 한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아바이가 배추김치보다 갓김치를 더 좋아하고 남새중에서 쑥갓을 제일 좋아하는것이였다.

정옥은 끼니때마다 갓김치와 쑥갓을 떨구지 않고 놓아드렸다. 그런데 갓나물은 인차 종대가 서고 꽃이 피므로 만문한 잎새를 떨구지 않을 마음에서 두어평 새 땅을 일궈 갓씨를 새로 뿌려놓았다.

곽아바이는 정옥의 이 모든 소행을 기특하게 눈여겨두면서도 모른척 깊숙이 묻어두는것이였다. 정옥에 대한 그의 류다른 관심과 사랑은 더욱 은근하고 웅심깊게 나타나는것이여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정옥이가 더덕으로 만든 반찬을 남달리 좋아한다는것을 알게 된 그는 (영근이가 가져온 더덕료리를 별맛으로 먹던것을 눈여겨두었었다.) 방목하다가도 더덕순을 보기만 하면 캐군 하였다. 많이 캐든 적게 캐든 아저씨는 방목공집에 돌아오는 즉시로 더덕뿌리를 두들겨 껍질을 벗겨 찢어서는 《자, 달녀야, 어서 울궈라. 인차 먹게스리…》하며 달녀의 손에 들려준다. 그러는 곽아바이를 볼 때마다 정옥은 눈뿌리가 뜨끈해지군 하였다. 꽃을 좋아하는 정옥이를 생각해서 아저씨가 꽃밭김도 매고 물도 주군 한다는것을 산옥이나 달녀는 몰라도 정옥은 알고있었다.

방목지의 나날은 평범하고 례사롭게 흘러갔지만 정옥의 삶의 행로에 잊지 못할 추억을 아로새긴 뜻깊은 하루하루였다. 정옥은 그 나날속에 곽아바이와 산옥이, 달녀 등 함께 일하는 동지들이 얼마나 정답고 귀중한 사람들인가를 알게 되였다.

산옥이와 영근의 사랑은 나날이 더욱 두터워갔다.

곽아바이의 말대로 가을에는 국수를 내려나보다.

인생에서 소중한 첫사랑을 놓치지 말라던 곽아바이의 교훈적인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첫사랑! 아직 이성의 사랑을 모르는 정옥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는 말인것이다. 어찌 이성에 대한 사랑만을 의미하는 말이랴!

동지들이나 일터에 대한 사랑도 념두에 둔다면 종축반은 첫 일터이고 곽아바이와 산옥이, 달녀들은 정옥의 첫 동지들이니 그들은 바로 정옥의 첫사랑인것이다!

정옥에게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일이 생기였다.

어느날 비구름이 뒤덮이고 안개가 껴서 또다시 《점백이》를 잃어버렸다. 봉식아저씨는 여느때없이 불안해했다.

그도 그럴것이 《점백이》의 새끼낳이예정일이 바로 래일이였기때문이다. 아직 《점백이》를 찾지 못했는데 곽아바이가 정옥에게 말했다.

《정옥아, 관리위원회에 가봐라! 관리위원장이 찾는구나. 아홉시까지 보내라는 기별이 왔어.》

《점백이》를 찾고 가겠다고 해도 아저씨는 《어서 가봐라, 시간을 지켜야지.》하고 엄하게 말했다.

돼지를 잃어버려 가뜩이나 불안하던 정옥은 가슴이 섬찍해졌다. 허튼데 눈을 팔아 쩍하면 돼질 잃어버리군 한다고 누가 관리위원회에 반영한것이나 아닐가? 그래서 딴 부문에 돌리려고? 그렇다면 누가? 곽아바이가 제기할수도 있지 않을가?

정옥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 불찰로 곽아바이가 고생하는것만도 몇차례인가? 뾰족벼랑길에서 굴러나 다치기까지 하고… 십분 그럴수 있다.)

이렇게 생각되니 정옥은 맥이 탁 풀렸다.

곽아바이의 엄엄한 낯빛은 정옥의 예감이 맞는다는것을 말해주고있었다.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눈앞이 흐려왔다.

저녁밥을 먹고 가라는 달녀의 말도 들은둥만둥 어떻게 방목공집을 뛰쳐나왔는지 몰랐다. 《점백이》를 잃어버린 책임감도 느끼지 못했고 카바이드등을 켜들고 밤새 산속을 헤매일 곽아바이의 수고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따금 번개가 번쩍거리고 그때마다 우뢰가 울었다.

비바람이 불어왔다. 여느때 같으면 느꼈을 무섬증도 모르고 정옥은 허겁지겁 걸었다. 마을에 당도하자 집에도 들리지 않고 곧바로 관리위원회로 갔다.

그런데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는 주성칠관리위원장의 이야기는 정옥이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정옥아, 전문학교 (당시) 시험치러 갈 준빌 해야겠다.》

전혀 예상치 않던 일을 당하면 선뜻 믿어지지 않는 법이다.

정옥은 관리위원장의 말이 꿈인가싶어 선채로 굳어졌다.

《왜? 너무 좋아 그러나?》

관리위원장은 정옥의 어깨를 잡아 눌러앉히며 말했다.

《곽동무랑 종축반동무들이 모두 정옥일 보내자구 해서 추천한거야.》

관리위원장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후 군에 가서 전문학교입학시험을 치라는 간단한 지시를 주었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정옥은 뼈저린 자책감에 몸을 떨었다.

그런걸 방금전까지도 봉식아저씨에 대하여 얼마나 옹졸하게 생각했던가? 정옥은 결코 자신을 용서할수 없었다.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있었다.

번개의 섬광이 언뜻언뜻 창문에 비낀다. 우뢰소리가 더욱 잦게 우르릉거린다. 비속에서 헤매이며 《점백이》를 찾고있을 곽봉식의 모습이 창문가에 어린다.

문득 정신이 든 정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관리위원장동지, 전 좀더 일한 다음 가겠습니다. 이번엔 딴 동물 보내주십시오.》

정옥은 놀라운듯 눈섭을 치켜올리는 관리위원장에게 격한 자기 심중을 펼쳐보일수 없는것이 안타까왔다.

《가야 합니다, 방목지로…》

《방목지라니?》 하고 되묻는 관리위원장에게 정옥은 이밤으로 가야 할 사유를 설명했다.

대견한 눈빛으로 이윽토록 정옥을 지켜보던 관리위원장이 벽에 걸린 비옷을 벗겨 그의 어깨에 걸쳐주고 애용하던 만년필전지를 뽑아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전화로 종축반장을 찾았다.

정옥은 혼자 가도 무섭지 않다고 만류했으나 관리위원장은 방목지로 함께 갈 인원 두명을 보내라고 하였다.

곽아바이의 웅심깊은 모습을 생각하며 정옥은 자책감에 잠겨 묵묵히 방목지로 향하였다.

(아, 나는 아직 철부지구나. 멀고멀었어. 고무풍선마냥 둥 떠있는 인간이다. 언제면 아저씨처럼 고향땅에 깊숙이 뿌리내린 거목이 될수 있을가? 언제면 봉식아저씨처럼 고향사람들을 위해 진심을 바쳐 아글타글 일할수 있을가?)

…정옥은 이튿날 해뜰무렵에야 곽봉식을 찾았다.

메돼지골 개울가의 아름드리 황철나무밑 아늑한 곳에 새끼를 열한마리나 낳은 《점백이》가 누워있었다.

등성이를 둘씩이나 넘어 예까지 왔으리라 어찌 상상이나 할수 있었으랴. 곽아바이는 밤새 비를 맞아 형편없이 초췌해지고 눈이 쑥 들어갔다. 그를 만난 순간 정옥은 뜨거운 눈물을 쏟고야말았다.

《아저씨!》

정옥의 목은 꽉 잠기였다.

곽아바이도 정옥의 손을 꼭 잡아주며 정찬 눈매로 바라보았다.

《정옥아!》 그의 격한 목소리가 울렸다.

《왜 또 올라왔어? 학교에 갈 준빌 하지 않구…》

《방목지를 못 뜨겠어요.… 아저씨!》

정옥은 울먹이며 곽아바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정옥의 머리를 쓸어주는 아저씨의 손길이 느껴진다.

세차게 툭툭 뛰는 심장의 박동도 알리는듯싶다.

《무슨 철없는 소릴?!-》

나무럽게 울리는 아저씨의 목소리도 갈리였다.

《많이 배워가지고 와서 우리 축산을 더 잘하자구 널 보내는거다! 어서 떠나야 해!》

곽아바이는 정옥이를 당장 떠나보내려는듯 바로 일으켜세웠다.

엄하고 어렵게만 보이던 아저씨의 시커먼 두눈… 지금은 그 눈빛에 얼마나 간절한 기대와 념원이 담겨졌는가!

점백이가 메돼지발자국을 따라 싸래골등성이를 넘었거던.

여기서 새끼를 낳으려구 더 안 갔지.》

곽아바이는 례사롭게 말하였다.

집돼지와 메돼지는 서로 친하다고 하던 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밤새 내린 비에 불어난 개울물이 쏴 소리치며 흘러내렸다.

알록달록한 새끼돼지들이 옴지락거리며 쫄쫄 소리를 내면서 어미젖을 빨고있었다. 곽아바이가 《점백이》의 새끼낳이자리를 마련해주고 비를 긋도록 나무가지로 웃설미를 해주었다는것을 첫눈에 알아볼수 있었다.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정옥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옥은 뜨거운 마음으로 뇌였다.

(아저씨, 용서해주세요, 철없이 굴었던 지난 일들을… 아바이의 진심을 몰랐던 이 못난이를…)

그후 정옥은 곽봉식아저씨의 바래움을 받으며 농업전문학교 축산과에 공부하러 떠나갔다.

진달녀가 돌아왔다. 정옥은 진국에게 들려주던 추억담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달녀의 짐을 받아주러 달려갔다.

정옥이가 종축반에서 일을 시작한 때로부터 10년도 넘는 세월이 훌렀다. 그동안 산옥이와 달녀도 가정을 이루었고 애들이 커서 소학교와 유치원에 다니고있다. 산옥의 남편 영근이는 지금도 종축반에서 양방목공으로 일하고, 달녀의 남편 역시 종축반에서 일하고있다. 산옥이도 달녀도 애들과 남편을 시부모에게 맡기고 룡암덕축산반으로 자원해왔다. 곽봉식이와 정옥이가 룡암덕에 오게 되니 그들과 함께 일하고싶은 마음에서였으리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인정의 세계란 얼마나 깊고 뜨거운것이랴.

진국은 축산반성원들이 열흘에 한번씩 교대로 휴식일마다 집에 다녀오고있는가를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안식구들과 떨어져 생활하고있으니 얼마나 그립겠는가.

진달녀와 인사를 나누고난 진국은 의논조로 말하였다.

《달녀아주머니, 정옥동무가 하던 일을 맡아주어야겠습니다.

돼지먹이주는 기계를 싣고와서 설치하는데 반장이 있어야지요. 사람들이 기다리고있습니다.》

《이런 고마울데라구야. 기사장동지가 큰일을 하는군요. 반장, 빨리 가보라구.》

진달녀는 기쁨에 넘쳐하며 정옥의 등을 떠밀었다.

꽃향기와 풀벌레들의 합창소리로 충만한 대기는 확확 열기를 뿜는듯 하였다.

진국은 묵묵히 축산반을 향해 걸으며 사색의 심연속에 빠져들었다.

정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받은 충격이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던것이다.

정옥이가 무척 대견하고 돋보였다.

곽봉식, 리산옥, 진달녀… 고결한 의리와 순결한 량심으로 맺어진 뜨거운 인정세계, 고귀한 동지적사랑속에서 살고있는 정옥이인것이다.

정옥이가 봉애를 친언니처럼 따르며 정을 주고받는 그 밑바닥에는 봉애의 아버지 주성칠관리위원장의 뜨거운 인정미가 깔려있는것이 아닐가.

비오는 밤, 잃어진 《점백이》를 찾고있을 곽봉식아저씨를 생각하며 상급학교에 갈 마음을 먹지 않고 방목지로 가겠다고 떼질하는 정옥이를 기특하게 생각하던 주성칠관리위원장.

어찌 정옥이뿐이겠는가. 창수 역시 주성칠관리위원장의 관심속에서 성장하여 오늘은 어엿한 작업반초급일군이 되였을것이다.

쌍룡작업반의 사촌누이네 집에서 누에를 올리던 날 사촌누이가 하던 말이 문득 진국의 뇌리에 떠올랐다.

《관리위원장동지가 우리 집을 극진히 돌봐주구있다네. 창실이 아버지가 계실 때두 그랬지만 돌아간 담엔 더하다네. 집에 비가 새지 않나? 쌀이나 땔감이 떨어지지 않나? 직접 알아볼 때도 많지만 석반장이나 병덕분조장한테 늘 물어본다지 않나. 창실이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어느 학교에 보냈으면 좋겠는가? 딸애전망문제까지 토론해주었다네.

봉애 어머니두 나하구는 자별한 사이야. 룡중마을에 볼일 있어 갔다가 만나기만 하면 집에 들려 식사하구 가라구 손잡아 끌거던.》

주성칠관리위원장은 농사도 잘해왔지만 인망도 높은 일군이다. 그는 룡바위골사람들의 후더운 인정세계, 깊은 인정의 바다에 푹 몸을 잠그고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를 깡그리 바치며 일해온 오랜 일군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되여 그런 훌륭한 일군과 봉애의 오해를 사게 되였는가?

봉애의 말처럼 처음부터 룡암덕방목지개간안을 관리위원장이 자신의 사업으로 받아들이도록 열번이고 스무번이고 그를 만나 리해시켰어야 했을것이다. 제출했던 문건을 들고나올것이 아니라 관리위원장책상우에 그냥 두고 나오면서 《관리위원장동지, 아무튼 좀 생각해주십시오. 지금 온 나라 어디서나 대홍단처럼 감자농살 짓자구 끓고있는 때가 아닙니까!》하고 절절하고 겸손한 말로 한마디 하고 나왔으면 문제가 달라졌을수도 있지 않는가?! 혹시 며칠후 관리위원장이 그 문건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을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나는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진국은 그날 있었던 일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그만큼 알아듣게 말해주었는데 문건까지 만들어왔나? 진국이, 딴생각 말구 기사장일이나 착실히 배우라구.》

주성칠의 이 말에 진국은 심한 모욕감을 느끼고 문건을 거두어쥔채 즉시에 문을 열고 나와버렸다. 밤에 잠도 오지 않았고 관리위원장에 대한 번거로운 생각으로 머리가 무거웠다. 그때 나자신은 관리위원장의 립장에 서서 생각을 가다듬어보았던가?

오랜 기간 풀판을 조성하여 버림받던 룡암덕을 소방목지로 꾸려온 관리위원장의 고심어린 노력에 대하여 꼬물만치나 생각해보았던가. 관리위원장이 무엇때문에 각 작업반들에서의 돌림식소이동방목을 반대하고 농장적으로 룡암덕방목지에서 소들을 모아 방목하도록 하였겠는가를 가늠이라도 해보았는가.

창수와 같이 소를 벼랑에서 굴려 죽이는것과 같은 불상사가 더는 없도록 하기 위해 이동방목을 반대했을수도 있지 않는가.

나는 왜 관리위원장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가. 참으로 내가 리당에 직접 문건을 제출할 생각이 없었다면 어째 그 문건을 들고 갔겠는가.

관리위원장과 기사장이 합의를 이루고 단위책임자가 리당에 문건을 제출하는것이 분명 옳은 사업절차가 아니겠는가.

나는 관리위원장을 무시하고 그의 사업권위를 떨어뜨렸다.

그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안목이 좁아졌다고 제멋대로 규정해놓고 저 혼자 농장을 위하는것처럼 뛰여다녔다.

그래 이것이 소총명과 자고자대, 공명심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량심도 의리도 없는 덜돼먹은 인간이다.

그러니 관리위원장이나 봉애,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나를 좋게 생각할수 있으며 용서할수 있겠는가!

봉애가 갑자기 집을 떠나 친척집에 간것도 내탓이다.

그는 나를 두고두고 원망하며 모진 마음을 먹고 갔을것이다.

진국은 자신에 대한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남에게 훈시하기는 쉽다. 정옥에게 나는 뭐라고 말했던가.

이제는 축산반장이라는 신임을 받았으니 곽봉식아바이를 책임지고 아바이한테서 일을 배운 은혜를 생각해서도 그가 인생말년을 빛나게 살도록, 인생마무리를 잘하도록 적극 도와주고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그래야 초급일군자격이 있다고 신칙하지 않았던가.

사촌누이가 전해주던 말이 윙 고막을 울리였다.

《진국이 그 사람이 이젠… 변한것 같아요.》

봉애 어머니의 불만도, 사촌누이의 일깨움도, 정남의 당부도 내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백번 지당한 비판들이다.

사람들의 인정세계를 존중하고 그 깊은 인정의 바다에 몸을 푹 잠그고 살며 일해야 할 일군인 내가 그 인정세계를 무시하고 얼마나 몰인정하고 유치하게 일하며 사람들을 대해왔는가.

나는 일군의 자격은커녕 사람의 초보적인 인격마저 갖추지 못한 저렬한 인간이다.

진국은 자신을 타매하며 뼈저린 반성감에 휩싸였다.

후회란 언제나 때늦은 법이다.

진국은 착잡한 마음으로 정옥이와 함께 축산반에 들어섰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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