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회)

제 1 장

5

 

해저무는 저녁거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북적거리고있었다.

구두를 닦으라고 소리치는 로인, 담배통을 메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사달라고 애걸하는 소년들, 껌파는 소녀, 행인들의 다리사이를 빠져다니며 담배꽁초를 열심히 줏는 꼬마들, 길가녁에 쭈그리고 앉아 보잘것없는 물건따위들을 펴놓고 한숨을 푹푹 내쉬는 로파들…

하루종일 고된 로동에 시달리고 주린 창자를 부여안고 맥없이 터벌터벌 걸음을 옮기는 젊은이들, 체소한 몸집에 묵직한 짐을 져나르며 땀을 뻘뻘 흘리는 짐군들, 그들을 야유라도 하듯 번쩍이는 네온싸인들…

절망과 타락이 마구 뒤엉켜버린 도시의 밤이 흐르고있었다.

그밤은 고역에 시달린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고역의 시작으로, 방탕에 쪄든 무리들에게는 그들대로 새로운 환락의 시작으로 다가오는듯 싶었다.

조금전 길 한가녁에 천천히 멎어선 검은색승용차에서 포석우로 내려선 한 로신사는 자기앞에서 걸어가는 서양풍의 괴이한 옷차림과 머리모양을 한 한쌍의 남녀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녀자는 사나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이고 공상에 잠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사나이는 그의 머리채를 쓰다듬으며 사랑의 시구절을 읊조리고있었다.

(행복한 시절이로다.)

로신사는 중얼거리였다. 외투깃을 추켜세우며 그냥 걸음을 옮기는데 불쑥 뻘건 손 하나가 다가든다.

거지소년이 이밤을 보낼 밥 한덩이 값을 얻자고 손을 내밀어오고있었다.

무춤 걸음을 멈춘 로신사는 키가 자기 배허벅에나 겨우 닿을 소년의 때오른 얼굴을 처절한 심경에 싸여 굽어보았다. 로신사는 한숨을 푸 내쉬고나서 석쉼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에민 뭘 하느뇨?》

거지소년은 대답대신 눈물이 글썽해서 훌쩍거리였다. 로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측은한듯 소년에게 말을 던졌다.

《배가 고프지? 에미가 없으니 그럴수밖에… 사람은 몸기댈 곳이 있어야 하느니라.》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돈을 몇장 꺼내여 소년앞에 내밀었다.

《가서 뭐든 사먹거라.》

두손으로 돈을 받아든 거지소년은 꾸벅 인사를 하고나서 저희 동료들에게로 달려갔다. 로신사는 거지소년의 뒤모습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면 이밤에 제일 괴로운것이 동냥군의 밤인듯싶었다.

푼돈을 얻어 주린 창자는 어떻게든 달랠수 있겠지만 한몸뚱이 누울 오막살이도 없이 한지에서 기나긴 겨울밤을 새운다는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수도 있었다.

혀를 끌끌 차며 걸어가던 로신사는 울긋불긋한 빛발이 발광하는 나이트클럽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창문으로 광적인 열정에 싸여 춤추는 남녀들의 모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두사람이 한몸으로 어우러지며 정신없이 입을 맞추는 모양이 눈에 뜨이자 몇년전에 세상을 떠난 마누라의 얼굴이 언뜻 눈앞을 스쳐갔다. 동냥거지의 밤이 괴롭다지만 홀아비의 밤도 그에 못지 않은듯싶었다.

그안에서 나오던 미인 하나가 그를 보더니 발쭉 웃음지어보였다.

그리고는 함께 들어가자며 손을 꼭 붙든다. 속이 비치는 엷은 옷을 걸친 녀자의 말긋말긋한 살이 와닿자 흥분이 살아올랐다.

하지만 그는 빙긋 웃어보이며 머리를 저었다.

섭섭하다는듯이 몸을 비틀며 돌아서는 녀자의 뒤모습을 쓸쓸히 바라보는데 검은색승용차가 뒤로부터 소리없이 다가와 멎어섰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승용차는 또 그의 뒤를 따랐다. 그가 서면 승용차도 서고 그가 걸으면 승용차도 따라 움직인다. 애써 그 존재를 잊어보려 하지만 그림자마냥 지꿎게 따라온다.

로신사는 어쩔수 없다는듯 한숨을 푸 내쉬며 멈춰섰다. 저녁산보시간마저 마음놓고 보낼수 없는 자기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한 사나이가 내려 승용차 뒤문을 열어주었다. 로신사는 중절모를 벗어들고 차에 올랐다.

《국장님, 다들 모였습니다.》

곁에 앉은 사나이가 색안경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이 서울이라는데서 미인 고르기는 글렀어.》

로신사는 뜻모를 소리로 중얼거리였다.

곁에 앉은 사나이는 영문을 알수 없다는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승용차가 도로 중앙선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주위에 번개빛같은 신호등빛이 언뜻거리기 시작했다.

승용차는 교외로 뻗은 도로를 달리고있었다. 여러대의 승용차들이 그뒤를 따랐다. 차들은 잠시후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된 어느 숲속길로 들어섰다.

차칸마다에는 이 땅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령혼과 육체를 영원히 지배하고저 하는 권력의 수호자들이 앉아있었다. 두번째 차안에 앉은 로신사는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서병호였다.

숲속에서는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넋을 한바탕 비웃고 조롱하며 무참히 유린하는 악마들의 부르짖음이 삭풍을 타고 들려올듯싶었다.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서자 외등이 밝게 빛나는 넓은 공지가 나지면서 곧 장방형의 큰 건물이 다가들었다. 멎어선 승용차들마다에서 검은 안경을 끼고 양복을 입은 사나이들이 련이어 쏟아져내리였다. 서병호는 그들이 정렬해설즈음에야 차에서 내리였다.

밝은 외등불빛에 늙은 신사의 자태가 완연히 드러났다. 중키에 중절모를 눌러쓴 길쭉한 얼굴, 먼지 한점 묻지 않았을듯싶은 회색코트, 구김살이 조금도 없는 주름발선 바지…

구두코숭이는 걸음을 옮길적마다 외등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그는 마중나온자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아넘기며 출입문안으로 들어섰다. 2층계단을 오르던 사나이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돌아섰다.

《우선 영사실로!》

부하들이 1층 구석쪽에 위치한 방으로 소란스럽게 몰려갔다. 영사실 문이 열리자 천정의 촉수높은 전등들이 일제히 밝은 빛을 뿌리며 켜졌다.

영사실에 들어선 서병호는 자기앞에 주런이 늘어선 사나이들을 점검이라도 해보는듯 쭈욱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쏘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프리카물소가죽을 씌워 만들었다는 큼직한 진밤색쏘파는 룡상과도 같은 위엄을 풍기고있었다.

그 쏘파인즉 서울에 왔던 미합중국 대통령이 어느 호텔에서 사용한적 있다는 값진 물건이였다. 호텔주인이 진귀한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던것을 서병호의 별장을 꾸릴 때 그의 측근들이 여기로 옮겨다놓은것이였다.

《오늘 제군들을 부른것은 국가안보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포치할 내용이 있어서요. 방금 나는 부장님과 함께 청와대에서 돌아왔소. 각하께서는 최근 민청학련, 인혁당(인민혁명당의 략칭)사건과 관련한 우리 국의 활동에 대하여 또 한번 큰 만족을 표시하셨소.》

《모두 국장각하의 혜안이 있었기때문입니다.》

약빠른 사나이 하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종이장도 맞들면 가볍다질 않소. 당신들이 일심동체가 되여 국가안보를 위해 분투한 결과요. 자, 다들 자리를 잡고 앉으시오. 상황실장!》

서병호는 방 한구석에 공손히 서있는 사나이를 돌아보았다.

《우선 대학가, 그 다음 로동계, 다음 재야단체들, 이런 순서로 하도록!》

상황실장이 투영기를 가동시켰다. 잠시후 정면에 걸린 영사막에 서울과 지방의 대학이름들이 하나둘 현시되기 시작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동국대…

각 대학들의 사상동향과 학생조직들의 구성, 그에 기초하여 새 학기에 들어서면서 전개될 운동의 규모와 양상에 대한 자료들이 색의 농담과 수자 등으로 명료하게 표시되여나갔다. 다음 각 계층별 운동단체들의 움직임과 이들 호상간의 련대상황에 대한 예상자료들이 제시되고있었다.

각 세력들사이의 공간에 검은 줄이 쭉쭉 그어져갔다. 그것은 차츰 거미줄처럼 촘촘해졌다. 장차 련대규모가 예상외로 확대되여나갈것임을 시사해주고있었다.

《그만!》

서병호의 메마른 손이 쳐들리는것과 함께 화면이 정지되였다.

그는 턱을 고이고 앉아 무엇인가를 찾아보려는듯 눈살을 잔뜩 쪼프리였다.

현시기 반《정부》운동실태에 대한 통계학적분석이나 도표작성의 치밀함은 별로 나무랄데 없는것이였다. 그런데 무엇인가 불만이 있었다.

상황실장은 국장의 얼굴을 긴장하게 지켜보고있었다. 국장으로부터 상황보고의 정확도가 높지 못하다는 추궁을 받고 밤을 밝혀가며 자료를 연구하고 화상도표를 작성한 그였다.

그러나 한참만에야 입을 연 국장은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왕청같이 도표에 제시되지 않은 문제를 화제에 올리는것이였다.

《정치의 계절》로 불리우는 3~4월을 맞으며 일장 훈계가 있을것이라 예견했던자들은 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국장을 바라보았다.서병호의 신호를 받고 다가온 한 사나이가 몇장의 종이를 앞탁우에 올려놓았다.

《며칠전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진출과 그 현장에 살포된 유인물에 대해서 다들 좀 색다르게 느끼는바가 있을거요. 숱한 불온세력들이 거의 매일 밤낮으로 무슨 축제날이나 되는것처럼 유인물을 뿌리고 가두시위를 벌리며 소란을 피우는 이때 내가 왜 특별히 이 사건을 중시하는가?》

긴장한 침묵이 흘렀다.

《이 유인물의 론조를 주의해서 살펴보시오. 보통 대학생들이 주장하는 학원의 자유보장이나 구속학생석방정도가 아니란 말이요. 더 정확히 말해서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빨갱이들의 선동과 류사하단 말이요. 그래 당신들은 무엇인가 느껴지는바가 없소? … 그럼 내가 대답해주지. 몇해전 동호네들을 체포할 때 회수한 유인물을 상기해보면 짐작되는게 있을거요.》

서병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시사하는것이 있소. 이건 그 악당의 무리들이 되살아났다는것을 말해주는거요. 그들이 움직인다고 말할수 있는 근거는 이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소. 그에 대해서는 차차 말해주겠소. 당신들은 당시 그들이 어떤 엄청난 일을 획책했는지 잘 알고있을거요.》

순간 장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것이 더 확산되기 전에 그 뿌리를 샅샅이 들어내고 다시는 머리를 쳐들지 못하게 쓸어버려야 하오. 우선 주목해야 할것은 동호라는 수배자요. 얼마전 대구교도소에서 탈옥했소. 탈옥후 한동안 지방도시들에서 활동하던 그가 여기 서울로 왔다는 정보가 들어온 이후 일부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된것은 그가 활동을 개시했다는것을 말해주고있소. 이와 관련한 대책을 론의하자고 하오.》

서병호의 눈앞에는 동호라는 사나이의 형상이 어른거리고있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고 남자를 녀자로 바꾸는것외에는 못하는 일이 없다는 중앙정보부의 국장이 한 수배자문제를 두고 직접 골을 썩여야 한다는것이 어쩌면 당치않은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서병호는 아직 과장이였을적에 그들에 대한 수사를 맡았었다.

그때 그는 이들이 대중에게 주는 영향력과 파급력에 커다란 위구를 느끼였었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미제의 식민지통치를 끝장내고 자주통일을 요구하며 자기세력을 넓은 지역에로 급속히 확대하고있었고 짧은 기간에 많은 산하조직들을 내왔었다. 실로 간과할수 없는 일이였다.

제때에 손을 쓴것이 천만다행스런 일이였다. 그런데 사전조직을 빈틈없이 하고 기습하느라 했는데 어디서 실수했는지 한 공범자가 자기를 희생하며 완강히 저항하는통에 대부분이 순식간에 잠적해버렸고 행방도 묘연해졌다. 그것때문에 항상 불안을 느끼고있는 서병호였다.

《혹 그까짓 탈옥한 수인 하나가 무슨 일을 치겠는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거요.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요. 그가 극단으로 나갈 여지는 충분하오. 그들이 일단 마음만 먹으면 복구는 순간에 이루어질수도 있는거요. 따라서 우선 속한 기일내에 행방을 찾아내며 그의 활동무대였던 대학가들과 로동현장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해야겠소. 만일 우리가 이 일에 철저를 기하지 못하여 이 카르보나리(19세기초 이딸리아에서 조직된 급진공화주의자들의 비밀결사조직성원을 뜻함.)들이 제멋대로 날치게 방치한다면 걷잡기 어려운 사태가 벌어질거요. 바로 저기 저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거요.》

서병호는 손가락을 송곳처럼 쳐들고 각 운동세력간 련대상황을 표시한 부호들이 어지럽게 새겨진 영사막을 가리켜보였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탁자우의 커피잔을 손에 쥐였다. 방금 풀어놓은 진한 밤빛커피가 뜨거운 김을 피워올리는 모양을 이윽히 바라보며 서병호는 사색을 거듭해갔다.

동호네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것이 이렇게 후환으로 남게 될줄 몰랐다. 사실 서병호는 숙청 그자체보다 후환을 없애는것을 더 중시하였다. 여기에는 정보계통에 투신하면서 간직해온 생활철학이 있었기때문이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옛날 포도청에서 군관을 하다가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후 골방에 들어앉아 세상을 탓하다가 돌아갔다.

아버지는 달랐다. 시세에 민감한 그는 일본에 적극 협력하는 길로 나갔다. 왜왕에게 충성을 맹약한 아버지가 경찰제복을 입고 나타난것은 큰 충격이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비참하게 죽었다. 항일독립운동자들의 뒤를 캐며 실적을 올리던 아버지가 깊은 밤 어느 비밀조직의 아지트를 발견하고 뛰여들었다가 죽어버린것이다. 별안간 뒤에 나타난 어떤 사나이가 날선 단도로 울대뼈와 동맥을 뭉청 잘라놓았다.

처참하고도 무서운 죽음이였다.

후에 알고본즉 정체모를 사나이들이 아버지를 유인해다가 처단해버린것이였다. 여기에 더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참살자가 아버지에 의해 이미 오래전에 죽은것으로 알려져있던자라는것이였다.

어느날 집에 왔던 아버지의 친구는 《서군은 죽은 적을 두려워할줄 몰랐거던.》 하고 알쏭달쏭한 말을 던지였다. 새겨보니 뜻이 깊은 말이였다.

손에 피를 묻히고 사는자가 후환을 경계하지 않았으니 피가 피를 부른 격이 된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교훈을 깊이 새기였다.

그후 그도 경찰관이 되고 고등계형사가 되였다.

해방후 자기 선택에 회의를 느낀적도 있었다. 그것도 잠간이였다.

리승만은 확실히 정치도박에서는 귀신도 찜쪄먹을 령감이였다. 미국이 일본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배자로 들어앉은 상태에서 력사의 전망을 내다보고 식민지 치안관리에 경험있는 자기들의 쓸모를 제일먼저 간파했던것이다.

서병호는 다시 새로운 지배자의 령지를 새 지배자의 법으로 다스리는 전선에 투신하였다. 법에는 옳고그른것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실증주의법론리에 따라 식민지법에 충실했고 그것을 벗어나는 행위에 분노했고 무자비했다.

헌데 그렇게 철저했던 그가 동호네 문제에서는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아무리 자신을 위안해보려 해도 신통력이 있다는 륙감은 그것이 인생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말하고있었다.

《동호!》

서병호는 영사막을 매섭게 쏘아보며 주먹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측근들은 긴장한 시선으로 상전을 바라보았다.

《각 부서 책임자들은 이제부터 력량을 총동원하여 동호의 행적을 찾아내는데 주력하며 재야를 포함하여 그가 접촉을 꾀하는자들의 일거일동을 빠짐없이 장악해야겠소. 최악의 경우 모든것을 깨끗이 끝장내야겠소.》

회의가 끝난 후 다시 차에 오른 서병호는 별장으로 떠나가며 자기가 특별히 관리하는 한 정보원을 그리로 부르도록 하였다.

차안에서도 동호에 대한 생각에 골몰해있는 그의 눈앞에 또 한사람의 형상이 우렷이 떠올랐다.

강준호, 해방후부터 알고지내왔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인물이였다. 그런데 4.19를 전후하여 민주화열풍이 일어번지면서부터 그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광범한 대중속에서 인망이 높은 재야의 거물로 인정되고있었다.

서병호는 해방직후 사범학교 동기생인 엄석의 집에 갔다가 거기에서 강준호를 비롯한 여러명의 인물들과 만났었다.

일제시기 형사로 근무했던 서병호는 그들앞에서 가슴을 치며 인생의 새 출발을 다짐하였었다. 그때 누구보다 자기를 리해해주고 동정해주며 믿어준 사람이 다름아닌 강준호였다.

하지만 리승만이 친일파들로 권력지반을 형성하며 적수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자 서병호는 또다시 권력에 가붙었다. 정치경찰의 기질을 발휘하여 진보세력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승진의 길에 올랐다. 5 .16이후에는 쿠데타세력들과 일제시대의 정보경찰, 특고출신들이 모여들어 조직된 중앙정보부에 투신하면서 대공수사국장이라는 요직에까지 올랐다.

그는 《정권》에 복무해온 전기간 강준호라는 인물을 경계하였다. 비록 자기에게 따뜻한 인정을 베풀어준 은인이였지만 처지가 달라진 조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극단적인 위험인물로 보지는 않았다. 고맙게도 《자유민주주의리념》에서 크게 탈선하지 않고 민주화라는 환상곡이나 읊조리면서 합법적인 정치활동의 한계에 머물러있기때문이였다. 그렇게 인생의 저물녘을 맞았다.

서병호는 일생 그에게 해되는 일밖에 해온것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그가 자기에게 절을 해야 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석방에는 서병호가 개입되여있었다. 감옥안에서 쇼크를 일으키는 등 강준호의 심장병이 몹시 심해지자 서병호는 착잡한 생각에 잠기였다.

그를 잡아들인것은 사실 《대통령》이라고 할수 있었다. 극도로 심각해진 《정권》위기에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려온 《대통령》은 강준호와 재야인사들이 주도하는 개헌운동이 심상치 않게 번져가자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그를 구속하게 한것이였다.

서병호는 강준호의 건강상태에 대한 자료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특히 생명의 한계를 밝힌 대목을 주시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그의 생존시간은 감옥과 같은 조건에서는 불과 몇개월, 여러가지 방조가 제공되는 환경속에서는 기껏 한해정도에 불과했다. 그의 생명연장선이 드디여 종착점을 가까이 하고있는것이다.

감방안에 있든 밖에 있든 그는 어차피 죽음의 계선에 이른 몸이였다.

서병호가 그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고있을 때 서울주재 미중앙정보국 지부장이 그를 불렀다.

어느 료정의 으슥한 안방에서 조용히 만난 그들은 최근 주목되고있는 사건들을 놓고 의견을 교환하였다.

서병호는 자기가 생각하던 강준호의 처리문제에 조언을 청했다.

지부장은 잠시 생각을 굴려보더니 차라리 강준호를 병보석으로 내보내고 그를 미끼로 불순세력들을 색출하는 동시에 《유신체제》에 대한 사회적불만을 완화시키는것도 괜찮을것이라고 하는것이였다.

서병호는 탄복을 금할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적지 않은 추종자들을 가지고있는 강준호에게 불순세력들이 접근할수 있다고 내심 경계해온터였다. 더우기 우려되는것은 자기가 엄중시하고있는 동호가 과거에 그와 자주 접촉했다는 사실이였다. 그의 체포당시 죽음으로 동료들을 구원한 창혁이라는 인물도 강준호가 제 피줄처럼 여겨온자라고 했다.

강준호의 가치를 잘 아는 동호가 탈옥한 오늘에 와서 다시 그에게 손을 뻗치려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수 없는 일이였다. 최근에도 강준호의 근처에서 수상한자들이 움직인다는 정보를 받은 서병호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뇌리에 동호라는 이름과 강준호라는 이름이 새겨지고 그들사이에 굵은 줄이 그어지는 환영이 나타났다.

그의 머리속에는 강준호를 병보석으로 석방시킨 후에 추진할 작전안이 벌써 떠오르고있었다. …

별장에 도착한 그는 2층의 한 방에서 정보원을 기다리며 동호네들을 일망타진할 새로운 구상을 무르익혀갔다.

동호네들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을것 같았다. 한번 크게 타격을 받은자들이라 더욱 은밀해졌을것이다.

항상 뭔가 파격적인것을 만드는 재간을 가진 서병호는 이번에는 《청엽》부활설이라는것을 고안해냈다.

《청엽》은 얼마전까지 존재하였던 한 비합법신문의 명칭이였으며 어느 불온단체의 핵심들에 의해 운영되고있었다. 신문사의 발행인들은 얼마전 모두 체포되였다.

서병호는 그것을 부활시켜 거기에 동호를 유인해볼 생각이였다. 《청엽》이 한때 동호네와 련계가 있었던만큼 그가 관심을 가질것이 분명했다. 동호와 함께 관련자들을 꾀여내여 잡아들이는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부활로 열명의 참회를 받는것과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서병호는 이 작전의 명칭을 《사순절작전》이라고 달았다.

사순절(그리스도교에서 부활주일전 40일동안)기간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되살리기 위해 교인들이 단식과 속죄를 하는것과 어쩐지 상통한데가 있어보였던것이다.

그는 《청엽》의 부활을 신빙성있게 만든것이라든가 작전의 실행을 담당할 인물들, 시작과 종결 등에 대하여 구상해보았다. 그에게서 작전은 하나의 극작술과도 같은것이였다.

사건이 제시되고 인물들이 설정된 후 그들의 호상관계가 맺어지고 발전되여나가는 과정에 우여곡절도 있지만 궁극의 결과와 감동적인 진리가 도출된다. 이렇게 사람의 운명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원리가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작전에 개입되는 모든 인물들을 극작품의 주역과 단역들로 가상하며 전 과정을 엮어보군 하였다. 이렇게 하느라면 자신이 인간생명의 파괴자가 아니라 쉐익스피어와 같은 비극의 창조자처럼 여겨지며 마음의 안정을 얻군 하였다.

《작중인물》들과 사건의 흐름새를 엮어보며 《작품세계》에 빠져있던 서병호는 문두드리는 소리에 사색에서 깨여나 현실로 돌아왔다.

잠시후 눈같이 흰 와이샤쯔에 검은색넥타이를 맨 늘씬한 체구의 멋쟁이가 서병호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명구였다.

서병호가 중시하는 정보원이였는데 그자신이 직접 흡수한 인물이였다.

몇년전에 서병호는 과거 대학운동권에서 활약하던자들을 비롯하여 민주화운동과 좌익운동에 관여했던자들이 손잡고 무엇인가 일을 꾸미고있다는 통보를 받았었다.

자료를 본 서병호는 큰 위구를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주동인물들에 대한 자료들을 비롯하여 많은것이 미지수였다. 그 핵심들속에 서울대학교운동권출신들이 적지 않다는것을 안 서병호는 그와 관련한 자료를 조사해보았다. 한장한장 문건을 번져가던 그는 명구의 사진을 발견하고 탄성을 올리였다.

오래전 고등학교시절의 명구를 만났던 기억을 되살리였다.

그때 거리에서 학원의 자유를 요구하고 군의 강제징집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가 붙잡힌 어린 학생들을 취조한 일이 있었다. 바로 거기에 명구도 끌려왔었는데 겉보기와 달리 아주 속대가 약한 자식이였다. 감방에 하루 처넣었더니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했다. 시말서를 써바치게 하자 그렇게까지 깨끗이 써바치는 놈은 보다 처음이였다.

지어 다른 애들의 발언내용까지 말끔히 써바쳤다. …

그 일을 되새겨본 서병호는 대학가에서 활동하는 《청사회》라는 비밀조직을 리용하여 그에 대해 알아보았다.

4. 19이후에 생겨난 이 조직은 5.16이후 극우파들의 비밀폭력단체로, 중앙정보부의 끄나불로 리용되여왔던것이다. 배신할 때에는 생명을 바친다고 서약한자들이 서울대학교에만 하여도 수십명이나 잠복해있었다.

즉시 명구에 대한 자료가 도착하였다.

《위선적이며 허영에 들뜬 인기주의자, 정계진출의 야망을 품은 출세주의자.》라는 대목에서 서병호는 껄껄 웃었다. 명구는 역시 명구였다.

남산의 지하감방에 끌어다놓자 어제날의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서병호는 그에게 생명을 담보할뿐아니라 장차 정계에서 성공할수 있도록 지원해줄것을 약속하는 대신 일련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둘사이에는 모종의 계약이 이루어졌다.

이후 명구는 서병호의 지시에 따라 동호네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속을 충실히 리행하였다.

처세술에 밝은 그는 일찍부터 정치인으로 성공할 야심을 품고있었다. 학생운동의 열풍을 타고 자기의 치적을 쌓아보려던 그는 서병호의 손탁에 들자 자기의 장래를 담보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어제날의 벗들도 서슴없이 밀고해버리였다. …

《명구군, 거기 앉게.》

서병호는 자기앞의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감사합니다, 국장님!》

까치다리를 하고앉은 명구를 본 서병호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누구도 감히 자기앞에서 그런 식으로 앉아있을수 없었다.

《요즘 야당이 야단이란 말이야. 도무지 주책머리가 없거던.》

몸에 밴 동작으로 틀을 차리려던 명구는 흠칫 놀라며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그러자 서병호는 아무 일도 없다는듯 인자한 미소를 띠우며 상대를 건너다보았다.

《명구군, 요즘 일이 재미있소? 군은 정치에 애착이 강한것만큼 잘할거라고 보오. 우리가 뒤에 있는 한 바라는것을 모두 성취할수 있을거요. 그래 동호의 행방에 대해선 아직 짚이는데가 없소?》

이미 그에게 동호의 선을 찾을데 대한 지시를 주었던 서병호였다.

《아직은… 혹 그가 서울에 들어오지 못한게 아닐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도 꼭 오게 될거요.》

서병호는 명구에게 자기의 새로운 작전안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그의 말을 주의깊이 듣고있던 명구는 아연해졌다. 아무래도 황당해보였던것이다.

《쉽게 넘어가겠습니까? 산전수전을 다 겪은 동호라는것을 참작해야 하지 않을가요?》

서병호는 상체를 한껏 뒤로 제끼며 웃었다.

《황당하다? 그건 성공할수 있다는거요. 군은 확신을 가지시오. 확신이 가지 않는 일을 군에게 맡길리가 있겠소?》

서병호는 왜 《청엽》부활설을 내놓았는가를 설명해주었다.

얼마전에 체포된 《청엽》관계자들속에서 자기네가 이전부터 동호네와 련계가 있었으며 그의 패거리로 짐작되는 인물들이 신문사에 자주 나타났었다는 자료가 나왔었다. 《청엽》의 체포가 은밀히 진행된것만큼 동호네도 이들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것이다.

《명구군, 여하튼 동호가 존재한다는것은 자네에게나 나에게나 매우 불쾌한 일이 아닐수 없소. 이번 작전이 끝나면 하나도 남아있는것이 없어야 하오. 말뜻을 알겠소?》

서병호의 서슬푸른 눈빛을 본 순간 명구는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는것 같았다.

《그래 요즘 옛친구들을 좀 만나군 하오?》

명구는 서병호로부터 동호의 행방을 추적할데 대한 과업을 받은 이후에 만나본 몇몇 사람들에 대하여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가만, 성옥이라? 듣던 이름같은데… 강준호를 변호했던 녀자가 아니요? 우리가 동호네를 덮쳤을 때 그 녀자문제도 상정됐었지. 그래 다른것은 눈치채지 못했소? … 그렇다?! 그런데 그 녀자는 왜 오늘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았소? 그것도 무심히 볼게 아니요. 별치 않은것 같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수도 있소. 세상은 음과 양으로 이루어진게 아니겠소. 앞으로도 옛 동료들에게 계속 관심을 돌리시오.》

명구를 이끌고 창문가로 다가간 서병호는 그에게 앞으로 맡아야 할 역에 대해 알려주고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다. 모든 생명이 숨결조차 멈춘 공포의 밤이다. 동호며 평생토록 그가 괴롭혀온 모든 존재들이 지금도 저 어둠속 어디엔가 숨어 자기의 목숨을 노리고있을것만 같았다. 서병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였다.

《날이 밝으면 저 산너머 교회당에서 하나님나라의 종소리가 울려올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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