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1 장

9

 

다음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성옥은 길차비를 서둘렀다.

혜정은 서두르는 딸의 들뜬 모습을 의아쩍게 바라보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 그리 서두르는거냐?》

《경마장에 가요.》

《경마장? 갑자기 거긴 왜?》

《강선생님과 함께 가기로 약속을 했거든요.》

성옥은 어제 저녁 퇴근길에 강준호의 집에 들렸던 이야기를 하였다.

… 그의 집에서는 재야의 명망높은 인물들이 서재에 모여앉아 담소하고 있었다. 분위기로 보아 단순히 병문안을 위해 온 사람들 같지 않았다.

손님들이 돌아간 후 서재에 들어간 성옥은 강준호의 안색부터 살피였다. 몹시 들뜬 기분으로 앉아있는 그를 보니 우선 안심이 되였다.

강준호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묻는 성옥에게 재야세력들의 전반적인 통합을 위한 본격적인 운동이 시작되며 그것이 장차 《유신체제》의 종말을 가져오게 될것이라고 격정에 차서 말하였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오는가부다. 난 이미 생명의 최후시간을 선고받은 몸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길을 터놓고야말겠다.》

영채가 도는 그의 눈을 본 성옥의 얼굴은 밝게 피여났다. 우선 강준호가 또 한번 생활의 활기를 찾았다는 그것이 기뻤다. 늘 인간은 희망이 있을 때 언제나 행복하다고 말하던 강준호였다.

강준호는 이번에 어떤 인물들이 나서고있고 조건이 어떻게 성숙되고있는가를 설명하고나서 특히 재야통합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두 야당들의 합당의 가능성과 그 이후의 전망을 류창하게 내리엮었다.

합당론의는 석방이후 그가 S당과 H당 등 야당정객들을 비롯한 각이한 재야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시작된것이였다. 개헌투쟁의 새로운 타개책을 론의하는 과정에 슬슬 흘러나오던 통합론의는 최근 여당과 《유정회》(《유신정우회》의 략칭)가 《형법개정안》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킨 사건을 계기로 본격화되였다.

외국에서 《대한민국》 헌법상의 기관을 모욕, 비방하는 행위 등을 범죄로 규정하여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의 도수를 더욱 높인 《형법개정안》은 야당을 포함한 재야인사들은 물론 법조인들속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고있었다.

야당들은 여당과 《정부》의 독선과 전횡이 나날이 횡포해져 나중에는 저들의 운명까지도 위태로와질것이라는 공통적이며 현실적인 판단으로부터 새로운 타개책마련이 급선무라는 인식아래 통합론의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있었다.

이제 변이 일어날것이라는 강준호의 확신에 넘친 그 말에 성옥은 환희로운 심경에 싸이였다.

독재타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을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걸고 싸워왔던가. 하지만 정객들은 끊임없는 리해타산과 세력다툼으로 시간을 보내며 재야세력의 단합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오고있었다.

강준호는 민주주의가 최악의 계선에까지 몰린 오늘 야당들이 이제라도 정신을 바싹 차리고 필사의 각오아래 단합된 정치적력량으로 《유신》파쑈세력과 대항한다면 아무리 절대적인 권력이라 하더라도 견디여내지 못할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있던 성옥의 가슴은 흥분으로 높뛰였다.

강준호는 래일 경마장에서 야당들의 통합을 위한 첫 회합이 있게 된다며 함께 동행해달라고 하였다. 성옥은 기꺼이 응해나섰다. …

성옥은 저도 모르게 활기에 차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경마장에 야당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모인대요. 선생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몰라요. 력사적인 순간이 오고있다나요. 선생님은 일이 뜻대로 되면 한 십년은 더 살수 있을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실현될것 같다더냐?》

《선생님은 확신하고계셔요. 난 그렇게 흥분한 모습을 처음 보았어요. 이건 희망의 증거예요.》

《오히려 네가 더 들뜬것 같구나.》

《선생님이 좋아하시지 않나요.》

《그래서 거길 따라가겠다는거냐?》

《예, 제가 함께 가기로 했어요.》

혜정은 어이없는듯 웃었다.

《그렇게 요란한 인물들이 행차한다더냐? 강준호바람이 세기는 세구나. 하긴 늘 그랬지. 한번 분다 하면 구름밀리듯 한다니까. 이젠 너 같은 햇내기까지 말려들었는가보구나.》

《그게 뭐 나빠요? 바람이 불어야 배가 간다지 않나요.》

《왜 나쁘겠니? 헌데 그게 며칠이나 불겠는지, 또 그 배가 맞은편 기슭 끝까지 가내겠는지…》

성옥은 모를 소리라는듯 고개를 갸웃거리였다.

《그럼 어머니는 무얼 바라시나요?》

《난 네가 제 바람에 뛰는걸 한번 보고싶구나. 어디로 부는지도 모를 남의 바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기만 하다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낼가봐 그런다.》

혜정의 이 말에 성옥의 얼굴에 어렸던 미소는 가뭇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남의 바람이라고요? 하긴 어머니에게야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겠지요. 하지만 난 크든작든 내 바람을 타고 내 배를 몰아가고있어요. 앞으로도 그럴거예요. 어머니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이예요.》

혜정은 뾰로통해진 딸의 모양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하여튼 빨리 가봐라. 강선생을 잘 살펴드려라. 그 몸에 감기라도 들면 큰 야단이다.》

성옥은 어머니의 말뜻을 새겨보며 강준호의 집으로 향했다.

강준호가 벌써 길차비를 하고 기다리고있었다. 성옥은 그와 함께 택시를 타고 경마장으로 떠났다.

… 서울교외에 자리잡은 경마장은 유한족속들의 유흥장소로 리용되는 곳이였다.

이미 말은 여러번 들어왔지만 이렇게 와보기는 성옥으로서도 처음이였다.

말을 타고 주로에 들어서는 기마수들속에는 야당들과 각계의 이름있는 인사들의 모습도 보이였다.

《저 사람은 내리 3선을 한 박의원이요. 연설만 잘하는줄 알았는데 말다루는 솜씨 또한 얼마나 능란한지…》

몇몇 사람이 발목이 눈처럼 흰 갈색말을 타고 들어서는 한 사나이를 가리키며 수군거리였다.

계단우에 서있던 대머리의 한 사나이가 좌석들사이의 통로를 지나는 성옥을 향해 소리쳤다.

《이거 변호사선생이 아니요?》

《아이, 박기자이시군요.》

대머리는 출판보도계에서 그중 영향력이 있다고 하는 D일보 정치부 기자였다. 성옥은 강준호사건에 대한 재판과정에 이를 취재하던 그와 낯을 익히게 되였었다. 알고보니 언론의 자유와 본도를 고집하다가 수차례 화를 입은적도 있었다. 그러고도 머리를 굽힐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처음 만난 성옥앞에서도 그랬다. 아마 정의를 주장하는 변호사에 대한 믿음때문인지 《정부》에 대한 반감을 로골적으로 드러내는것이였다.

몇해전 여름 판문점에서 열렸던 적십자예비회담을 취재하던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그랬다.

그날도 당국이 평양과 서울을 오가는 대표단구성에서 수원수를 늘이자는 북측의 의견을 아무런 리유도 없이 무턱대고 반대하는통에 합의가 이룩될 전망은 어두웠다고 했다.

《말로는 동포니 뭐니 곧잘 외우는 사람들이 그게 무슨 큰 문제라고 그러는건지 막 지겹구 못 봐주겠더라구. 헌데 북측대표가 어느날 갑자기 한마디 중대제안을 하더군. 그럼 남측의 요구대로 수원수를 줄이자고 턱 이러는거야. 북과 남이 마주앉아 조국통일3대원칙과 같은 큰 문제도 합의하고 공동성명까지 발표한터에 그게 무슨 대수냐 하고 말하더란 말야. 난 통일을 하자면 그렇게 대범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나도 모르는새 눈물이 콱 솟구치더군. 아닐세라 나만이 아니라 내외신기자들속에서도 환성이 터져나왔지. 진정한 동포애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그런 용단을 내릴수 있겠나. 북에서 그렇게 나오니 우리쪽에서 당황해하더구만. 헌데 뭐 더 비틀 명분이 있어야 어쩌지. 그래서 1년동안이나 질질 끌어오던 본회담이 마침내 성사되여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하게 된거지.》

별로 무섭지도 않은지 큰소리로 말하는 그가 걱정스러워 성옥은 그러다 또 잡혀가면 어쩌려는가고 물었다.

그는 《잡혀가면 어때서? 북의 덕택에 한번 더 유명해지는거지.》 하고 소탈하게 웃는것이였다. 성옥은 그 솔직성과 락천성이 매우 인상깊었었는데 그때문인지 여기서 그를 다시 만나니 무등 반가웠다.

《취재 나오셨는가요?》

《글쎄 뭐라 할가, 뭔가 냄새를 맡고 나왔지. 강준호선생이 여기 올거라는 말을 듣고 나왔소. 헌데 성옥씨가 함께 왔구만.》

《역시 빠르시군요.》

《그렇지 않으면 기자가 아니지. 사건이 났다 하면 벌써 현장에 서있어야 하는거요. 그러자면 이게 발달해야지.》

그는 손가락으로 뭉툭한 코끝을 두드리며 만족한듯 웃음지었다. 성옥은 사나이의 방울코를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시오.》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도와드리지요.》

성옥은 그와 인사를 나눈 후 강준호가 있는 특별석을 향해갔다.

자기의 부축을 받으며 예까지 온 강준호가 어느 정객과 나란히 앉아 담소하고있는것이 보였다.

그리로 다가가던 성옥은 무춤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관객들이 웅성거리며 몰려와 통로를 메워버렸던것이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성옥은 그들의 시선이 닿은쪽을 바라보았다.

새로 나타난 기마수가 있었다. 40대의 작달막한 사내였다. 출발을 알리는 신호가 울리는 동시에 바짝 긴장해있던 기마수들이 힘차게 박차를 가하며 내닫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금방 들어선 그 사나이는 경마에 관심이 없는듯 한자리에 멈춰서서 달리는 말들을 구경하고있었다.

그가 나타나자 사람들속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강준호가 오늘 만나게 된 사람은 바로 저 사나이였다.

성옥은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있었다. S당 당수로서 최근에 부쩍 인기가 오르기 시작한 인물이였다.

몇해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로장파들이 당권을 쥐고있던 그 당에서 《40대 기수론》을 선창하면서 정계에 회오리를 일으켰던 사람이였다. 정당과 의회란것이 생겨 어언 수십년이 흐른 이 땅의 정치판에서 그처럼 젊은 나이에 《출사표》를 내던진다는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였다.

정계에서 좀 도드라진 인물이다싶어 그 뿌리를 파들어가다보면 첫 의장봉소리 울리던 《제헌국회》 회의장에 앉았던 어느 《거룩한 령감》의 궁둥이를 들이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일단 뿌리 박으면 숲속의 음기를 이겨내고 자라오르는 영악스러운 나무들처럼 도전자는 언제건 나타나기마련이였다. 바로 저 사나이가 그 실례라고 할수 있었다.

더우기 언제인가 있은 전당대회에서 자기를 제치고 오른 상대후보에게 보여준 그의 태도는 강준호를 매혹시키였었다. 그때 상대후보가 뜻밖의 반전으로 《대선》후보로 지명되자 사람들의 시선은 패배의 고배를 마시게 된 그에게로 쏠렸다.

드문 일이지만 정당안에서 일단 승패가 갈리고나면 패자의 결심이 승자의 차후 운명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다. 만일 패자가 승자에게 재차 반기를 든다거나 외면해버린다면 승자라 하더라도 영향력행사에서 제한을 받게 되며 더 큰 부담거리를 맡아안지 않으면 안되는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에게 당의 운명을 위해 상대에게 기꺼이 승복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것으로 그는 더 큰 인기를 얻었다. 그 여세를 몰아 그는 늙은 당수가 사망한 후 당대표를 선출하는 경선에서 당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둘러리야당》이라는 오명을 달고다니던 당이 투쟁방향을 대《정부》투쟁에로 돌려놓았다.

바로 이런 경력으로 하여 강준호는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있었다.

S당은 전번에 있은 《대선》때만 해도 어느 정도 위신이 있었지만 지금은 명색이 제1야당이지 실력이 너무 보잘것없는 무리로 추락된 상태였고 H당은 현재 《국회》안의 원내교섭단체구성에 필요한 수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의원수를 간신히 유지하고있었다.

이것은 독재《정권》에 어부지리를 줄뿐이였다.

강준호는 새 당수가 들어서면서 분위기를 일신한 S당이 합당에 의욕을 보일것이라고 락관하였다.

맹렬히 주로를 달리던 말들이 귀환선을 돌고있었다. 차츰 말들사이의 거리차이가 크게 벌어지고있었다. 점박이말이 선두를 달리고 갈색말이 그뒤를 바싹 따르고있었다. 갈색말은 잠시후 점박이의 후끈 단 몸을 스칠듯이 바싹 다가붙더니 쑥 앞으로 나가버렸다. 점박이는 놀란듯 앞발을 쳐들며 요란하게 울어댔다. 이 순간 점박이말우에 앉았던 기마수가 아차 실수하여 말에서 떨어졌다. 갈색말은 사정볼것 없다는듯 더 힘껏 앞으로 내달렸다. 승부는 명백해졌다. 관중은 귀가 멍해지도록 소리를 치고 박수를 쳤다.

《저런, 바보같이 딩구는군.》

《마칠인삼(경마에서는 말이 7이고 사람이 3이라는 뜻)이라구 경마에서 이기자면 뭐니뭐니해두 말이 좋아야 하는거요.》

《잘한다!》

성옥은 승부에만 정신팔린 사람들의 모습에 몹시 실망하였다.

다행히 몇사람이 말에서 떨어진 사람을 부축해주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심하게 부상을 입은듯 말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는 절룩거리며 주로밖으로 나오고말았다.

그 모양을 근심스레 바라보던 성옥은 열광하는 사람들사이를 빠져 강준호가 있는 곳으로 갔다.

강준호곁에는 《국회》의원휘장을 단 야당정객과 퀘어커파(17세기 중엽 영국에 있은 그리스도교의 한 종파)의 종교인을 비롯하여 정계와 종교계의 이름있는 인사들 몇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들은 경마보다 자기들의 이야기에 열중해있었다.

《여당 당원들조차 국민투표과정의 부정행위를 폭로하며 반발하는 형편입니다. 이후 청와대가 관용이나 베풀듯이 <긴급조치>위반죄로 구속했던 사람들을 내놓고있지만 고문행위의 실상이 밝혀지며 항의운동은 더욱 확산되고있습니다. 그러자 여당은 더이상 야당과의 대화는 없다면서 제1야당 비주류세력과의 접촉마저 중단하고 일방적으로 국회를 열었습니다.》

《새로 제정된 <형법개정안>이란것만 봐도 그들이 얼마나 리성을 잃었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지요. 워낙 날이 갈수록 무모해지고 포악무도 해지는것이 독재의 생리이니까요. 이 상태가 지속되도록 방치해둘수는 없습니다.》

《저희도 같은 의견입니다. 저들이 그럴수록 앞으로 우리에게는 더 유리해질겁니다.》

성옥이 나타나자 그들은 이야기를 중단하였다.

《변호사선생이 오셨구만.》

《미안합니다. 저때문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까?》

《아니요. 강선생을 돕느라 수고가 많겠소. 요즘은 또 어떤 사건을 맡았는가요? 일하기가 힘들겠지요? 자기도 지키기 어려운 세상에서 남을 변호해준다는게 어디 헐한 일이요.》

《국회》의원휘장을 단 사나이가 말을 걸어왔다.

《나도 한땐 변호사가 되여보려고 법률공부도 좀 해보았소. 헌데 차츰 정열이 식어지더군. 그래도 전혀 무익한건 아니였소. 이런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하더란 말이요.》

그는 자기의 앞가슴에 단 휘장을 가리켜보였다.

거기에는 원래 《국》자가 새겨졌었다. 그런데 언젠가 한 의원이 옷을 바꿔입으면서 그만 휘장을 거꾸로 다는통에 《국》자를 《논》자로 만든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가뜩이나 하는 일이 없는 《국회》의원들을 《노는 의원》이라고 놀려주었다. 이 문제가 《국회》에까지 상정되자 창피스러웠던지 휘장의 글을 한자로 바꾸게 되였다.

잠시후 그들은 말을 중단하고 주로를 바라보았다. 작달막한 사나이가 말에서 내려 부상당한 기마수를 향해 다가갔다. 상태를 묻는듯 손세를 써가며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마침이로군. 함께 나가봅시다.》

《국회》의원이 옷을 털며 일어났다.

성옥은 강준호를 부축해주며 그를 따라갔다.

《크게 다쳤습니까?》

강준호는 부상자를 차에 태워주고 돌아오는 사나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머리는 상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치료받으면 일없겠습니다.》

강준호와 인사를 나눈 사나이는 그의 건강에 대해 각근하게 물어보았다.

그들은 근처의 다방으로 들어갔다. 화락한 분위기속에서 장시간 이야기가 오갔다. 그들은 합당으로 개헌운동의 돌파구를 연다는데 합의를 보았다. 실천적인 문제는 앞으로 량당지도부가 회담을 열고 론의하기로 하였다.

S당 총재는 거기에 모인 강준호를 비롯한 재야원로들을 둘러보며 자기를 믿고 찾아온데 대해 감사를 표시하고나서 절대로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강준호는 그들의 차를 타고 함께 시내로 들어왔다. 그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강준호는 기분이 좋은듯 집으로 오며 흥얼흥얼 코노래까지 불렀다.

성옥이가 말을 건넸다.

《선생님, 오늘 기분이 좋으셨습니다.》

《그래, 왜 안 그렇겠니. 시작부터 순조로운걸 보니 앞으로 일이 썩 잘될것 같구나. 민주세력에겐 더 물러설 길이 없다. 그걸 모두 잘 알고있지. 이번 합당은 야당의 세력강화에만 그 의의가 있는것이 아니다. 전반적인 재야세력의 단합으로 이어질수 있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는거다.》

《어쩌면 오늘이 선생님을 위해 기다리고있었던것 같군요.》

《허허, 그래 쉽지 않은 기회다.》

성옥은 마음이 즐거웠다. 물론 그도 정치문제를 결코 순진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정객들이란 저들의 리해관계만을 절대시하며 리합집산을 생리로 하고있다는것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강준호가 말한것처럼 오늘이야말로 그들이 자기들의 위기를 공감하고 생존과 대의를 위해 손잡을 때가 온것이라고 보았다.

강준호는 또 코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의 주름진 얼굴을 보는 순간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던 어머니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선생님!》

성옥은 저도 모르게 격정에 북받쳐 강준호를 불렀다.

《전 선생님을 믿어요.》

강준호를 집안에까지 부축해주고 나오던 성옥은 대문쪽을 예리하게 주시하는 잠바차림의 낯선 사나이와 눈길이 마주쳤다. 사나이의 눈에 얼핏 당혹감이 스쳐갔다. 이어 그는 눈길을 돌리며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지는것이였다.

성옥은 그 사나이의 독기어린 시선에 온몸이 오싹해났다. 그는 까닭모를 불안감을 안고 청량리쪽으로 걸어갔다.

겨울해는 차가운 달빛에 쫓기우듯 불깃한 옷자락을 끌며 서산너머로 바삐 사라져가고있었다. 시장곁을 지나 집으로 가던 성옥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선아가 노을빛속에 서있었다.

《너를 찾아가던 길이다.》

선아는 노을을 등진채 성옥을 향해 다가왔다. 일전에 자기를 완전히 남을 대하듯 랭정하게 대했던 그였다.

《나를? 나 같은걸 만나선 뭘 하자구?》

선아는 미소를 지어보이려 하였다. 그러나 성옥의 노기어린 눈동자앞에 그 미소는 그만 무색해지고말았다.

《너 성났구나. 오늘은 내가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니?》

《그만해. 왜 찾아왔는지 그거나 말해. 난 바빠.》

《우리끼리 꼭 이래야 되겠니?》

《우리사이란게 뭐길래. 이젠 친구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할수 없구나. 저쪽으로 가자.》

사람들의 눈길이 잘 미치지 않는 골목길로 들어선 그들은 찌글써하게 기울어진 경계석우에 걸터앉았다. 이따금 지나는 차들이 그들의 얼굴에 찬 기운을 확 끼얹으며 지나가군 하였다.

《넌 나에게 물었지? 왜 왔느냐고, 그에 대답을 주고싶었다. 그리고 그사이의 회포도 맘껏 나눠보고싶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럴 권리가 없었어. 너도 이런걸 리해할수 있으리라고 본다.》

《왜 리해 못하겠니? 네가 나를 믿지 못한다는걸, 내가 달라졌다고 욕을 퍼붓고싶어한다는걸 왜 몰라?!》

성옥은 여전히 잔뜩 성난 눈길로 선아를 쏘아보았다.

《나를 원망할줄 안다. 하지만 그렇게 된게 꼭 내탓이라고만 생각하니?》

《넌 내탓이라고 말하고싶겠지?》

《아니라는거냐?》

성옥은 흘러내리는 목도리를 어깨우로 홱 뿌려올리였다. 선아는 할수 없다는듯 고개를 저었다.

《됐다. 싸움은 후에 하자. 우선 할 말이 있다. 넌 나에게 어떻게 다시 왔느냐고 물었지? 난 다시 시작하기 위해 여기로 왔다. 그때 우리가 이루고저 했던 모든것을 말이다.》

《그게 정말이냐?》

《그래, 넌 내가 동호씨의 탈옥이후에 나타난것이 우연일수 없다고 했지? 네가 짐작한 그대로다. 얼마전에 그와 련계가 있었다.》

《이 모든 위험한 행위를 그 사람이 추동했단 말이지?》

《넌 동호씨와 날 모욕하고있어. 난 결코 포기했던적이 없다. 약속을 저버린적이 없었단 말이다. 그들이 내앞에 없다고, 다시 만날수 없다고 해서 귀중한 시절의 모든것을 저울질하며 살지 않았어!》

고개를 치켜올리며 반발하려던 성옥은 선아의 너무도 거칠어진 모습에 놀라 입을 다물어버리였다.

《동호씨에게 네 이야기를 했다. 너를 만나겠다고 하더라. 그걸 전하자고 왔던거다. 그래 어떻게 하겠니? 난 강요하는것이 아니다. 넌 늘 말했지. 자기 의사를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난 네가 그를 만나는것이 좋을거라고 생각했다. … 왜 대답이 없어?》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정작 만나자고보니 성미가 굳센 그 사나이의 칼날같이 예리한 눈동자가 어려오며 가슴이 쿵쿵 높뛰였다. 하지만 그를 만나 반드시 자기의 주장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다. 어서 대답해.》

깊이 생각에 잠겼던 성옥은 움쭉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지체없이 그를 만나야 한다.

《어느때든 좋으니 시간과 장소는 그쪽에서 정하라고 해라.》

그는 이 한마디를 남긴채 외투자락을 펄럭거리며 사라져갔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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