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7(2018)년 8월 10일 《우리 민족끼리》
해방후에 울린 첫 평양종소리
해마다 8월이 오면 나는 산천초목도 감격에 설레이던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안고 목청껏 만세를 부르던 일과 해방년의 제야에 울리던 평양종소리를 들으며 감격에 울고웃던 때를 생각하군 한다.
일찌기 부모를 잃은 나는 평양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할아버지곁에서 우리 글을 배웠고 해방을 맞이하였다.
내 나이 어언 80고개에 들어섰지만 지금도 그때 환희에 넘쳐
그해 12월 31일 밤 12시, 평양시민들은 장쾌하게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아니 이게 대동문옆 종각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아니요?》
《그런가 봅니다.》
《이런 꿈같은 일이라구야 … 평양종소리를 다시는 듣지 못하는가부다 했는데…
위대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속에 모였던 사람들이 대동강쪽으로 밀려갔다.
나도 할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종소리가 울리는 대동강쪽으로 달려갔다.
대동문앞에 이르니 벌써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환희의 바다가 되여 설레였다.
위대하신
평양성사람들은 밤 10시에 28번 종이 울리면 그 종소리를 《인경》이라 하여 성문을 닫고 잠자리에 들었고 새벽 4시에 33번 종이 울리면 그 종소리를 《파루》라 하여 성문을 열고 하루일을 시작하였으며 련속 울리면 외적의 침략을 알리는 비상신호로 알고 평양성방위에 떨쳐일어났다고 한다. 《파루》와 함께 평양성사람들의 하루 새 생활이 시작되고 《인경》과 함께 평양성 사람들의 안식의 밤이 마련되였다.
그러던 평양종이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점한 후 기나긴 세월 침묵을 지켜왔다. 하기에 평양사람들은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안고 언제나 평양종소리를 그리워하였다.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아오신
뜻밖의 물음에 그는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조국해방이라는 감격과 기쁨의 파도속에서 첫 설명절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던 그 시각, 해방전까지 버림받아오던 대동문의 평양종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그의 심중을 헤아리신듯 잠시 창밖을 바라보시던
순간 그 일군은 끓어오르는 격정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그러는 그 일군을 유정한 눈길로 바라보시던
바로 이렇게 되여 그날밤 해방후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더불어 민족의 슬기와 기개를 자랑해온 평양종소리가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힘있게 울려퍼졌던것이다. 그러니 그 종소리를 어떻게 무심히 들을수 있고 감격을 금할수 있었겠는가.
해방후 처음으로 울린 평양종소리, 진정 그것은 짓밟히고 억눌렸던 우리 민족에게 자주의 길, 새 삶의 밝은 세상이 시작되였음을 알리는 민족재생의 종소리였고 민족의 래일, 창창한 앞날을 약속해주는 희망의 종소리, 인민에게 환희와 기쁨을 주시려는
그런데 평양종소리를 들으며 조국해방의 감격, 민족재생의 기쁨으로 거리와 마을, 공장과 농촌 그 어디에나 춤물결, 꽃물결로 설레이던 조국땅이 둘로 갈라져 해방의 그 기쁨이 민족분렬의 쓰라린 아픔으로 이어질줄 그 누가 꿈엔들 생각했으랴.
돌이켜보면
해방의 감격으로 들끓던 나라가 외세에 의해 장장 70여년간이나 북과 남으로 갈라져왔으니 그 기나긴 분렬과 대결의 세월속에서 우리 민족이 흘린 불행과 고통의 눈물은 그 얼마였던가.
하기에
그것을 생각하면 애석함과 함께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금할수 없다.
그러나
강철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