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2월 15일 《우리 민족끼리》

 

《미군에 의한 학살만행사건-로근리사건》(2)

 

남조선언론 《통일뉴스》에 남조선인민들에 대한 미제침략군의 치떨리는 야수적만행을 고발하는 로근리학살사건에 대해 상세히 서술한 글이 게재되였다.

글의 내용을 계속 소개한다.

로근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가?

 

1950년 7월 25일을 전후한 시점에서 영동일대에서는 대전을 점령하고 남진하는 인민군과 패주하는 미군사이에 치렬한 전투가 벌어지고있었다. 대전이 함락된 후 전선이 가까워지자 대전에서 김천방면으로 통하는 도로변에 위치한 영동읍 림계리와 주곡리의 주민들은 근처의 산속으로 피난을 갔다.

그런데 그때 미군이 들어왔다. 미군은 피난을 시켜준다고 하면서 모두들 산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미군은 일본인통역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주민들을 모았다. 당시 림계리는 60호정도의 마을로서 평균 4인가족으로 계산을 해도 2백여명이 넘었다. 림계리보다 큰 바로 옆동네 주곡리의 주민 3백여명도 미군의 권유로 피난길에 올랐다. 거기에 대전 등지에서 피난을 오다가 합세한 2백여명의 타지역사람들까지 합류해 대략 7백여명의 피난민대렬이 형성되였다. 이들은 미군의 재촉을 받으며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해거름에 출발한 7백여명의 피난민행렬은 미군의 재촉에도 속도를 내지 못했다. 보리쌀자루와 솥, 이불보따리를 짊어진데다가 로인과 어린아이들이 함께 섞여있었기때문이다. 얼마 가지 못해 밤이 되였다. 미군은 피난을 중지시켰다. 모두 도로밑의 강변으로 내몬뒤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강변에서 도로로 올라온 피난민행렬이 4km가량 나아가 로근리근처에 다달았을 때였다. 미군은 땅크로 도로를 차단하고 《정지》명령을 내린 다음 도로와 린접한 철로로 올라가라고 명령했다. 피난민들은 미군이 시키는대로 할수밖에 없었다. 7~8명의 미군들이 철길우로 올라온 7백여명의 피난민짐들을 앞쪽에서부터 검사하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의 짐검사를 끝낸 미군은 어딘가에 무전기로 련락을 하더니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곧 미군폭격기들이 날아와 피난민행렬을 향해 폭탄을 떨어뜨렸다. 미군폭격기들은 20여분간 폭격과 함께 무차별적인 기총사격을 가했다. 현장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상태가 되였다.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였고 여기저기서 사람과 소가 쓰러졌다. 이때 철로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수 없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최소한 백여명은 죽었을것이라고들 증언하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격을 피해 철로밑에 있는 수로용굴로 모여들었다. 굴의 폭은 2m가 될가말가 하였다. 폭격이 멎자 폭격직전 어디론가 달아났던 미군 3~4명이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이제 진짜 안전한곳으로 피난시켜주겠으니 모두 나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였다. 미군은 피난민들을 바로 100여m 떨어진 쌍굴다리로 몰아넣었다. 철로밑에 나란히 뚫린 쌍굴다리밑에 약 4백여명의 피난민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그런 상태에서 미군은 굴다리가 내려다보이는 량쪽야산에 기관총을 설치하고는 굴다리에서 한발자국만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총으로 쏘아죽였다. 한여름철인데다가 폭격에 놀라 허둥대느라 목이 말랐다. 사람들은 굴다리 바로 아래쪽 물이 좀 고여있는 웅덩이로 슬금슬금 내려가 물을 마시려 했지만 나가는 족족 미군의 총에 맞아죽었다. 미군은 밖으로 나간 사람뿐만아니라 굴다리안까지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했다.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총에 맞지 않으려고 더 안쪽으로 밀착했다.

-로근리사건현장-

하루종일 총질을 해댄 다음날 아침 미군 두세명이 굴다리안으로 들어와 상황을 살펴보기도 했다. 국민학교 처녀교사 정구임(당시 20세)이 일본어로 《제발 우리를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 남쪽으로 피난시켜 달라.》고 했더니 미군은 《여기가 안전하다.》고 말했다. 정구임은 그날 저녁 미군이 쏜 총탄에 맞고 죽었다.

굴다리에는 미군과 영어로 이야기할수 있는 사람이 한명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정구일이였다.

정구일이 굴다리근처에 온 미군에게 《왜 아무죄도 없는 우리를 아무 리유없이 죽이는지 그 리유나 알고싶다.》고 했다. 그러자 그 미군은 《피난민이라 할지라도 의심가는 사람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우리는 총은커녕 칼 한자루도 가진것 없는 량민들인데 무엇이 의심스럽기에 죽이려는가.》라고 물었더니 미군은 그냥 랭랭한 표정만 짓고 가버렸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미군이 《우리를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작전상 죽이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였다. 그날밤부터 남자들을 중심으로 필사의 탈출이 시작되였다. 하지만 탈출을 시도한 사람가운데 절반가량은 미군의 총에 맞아죽었다. 이틀이 지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속에 떨어야 했고 허기와 목마름으로 극한상황에 이르렀다.

청장년들은 대부분 탈출하거나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고 굴다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지칠대로 지친 아녀자들과 어린이, 아기들이였다. 그런데 미군은 굴다리 바로 앞에까지 와서 총을 란사했다. 인민군에게 패주하면서 마지막살륙을 한것이다. 그때까지 굴다리안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백여명정도였는데 이 총질로 절반가량이 죽었다.

그러나 로근리사건은 오래동안 력사의 그늘에 묻혀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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