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주체107(2018)년 1월 8일 《통일신보》

 

 숭고한 민족애와 동포애

태권도와 함께 영생하는 삶

 

평양의 청춘거리 체육촌에 있는 태권도전당에는 민족정통무도발전을 위하여 기울이신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로고와 심혈 그리고 전 국제태권도련맹 총재 최홍희선생에게 베푸신 숭고한 믿음과 사랑의 이야기가 뜨겁게 깃들어있다.

2002년 5월 병약한 한 로인이 평양국제비행장에 내리였다. 불치의 병으로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몸을 힘겹게 가누는 로인은 태를 묻은 고국에 묻히리라는 소망을 품고 고국땅을 찾은 최홍희선생이였다.

그는 1918년 11월 함경북도 화대군의 궁벽한 산간벽지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서예에 눈이 텄지만 그는 시골생활에서 벗어나 신학문을 닦으려고 일본에서 대학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학업도중 그는 일본군에 강제징집되여 《학도병》생활을 하게 되였고 반일학도병무장대를 뭇고 거사를 준비한탓에 검거되여 감옥생활도 하였다. 8. 15와 함께 조국에로의 그의 귀향길은 인생의 키를 잘못 잡은탓에 그해 10월 서울로 이어지였다. 남조선에서 《국군》에 들어간 그는 사단장으로 미국이 도발한 조선전쟁에 뛰여들어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내대였고 후에는 군단장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잘못된 인생궤도를 놓고 통절히 회심을 하게 된것은 5. 16군사쿠데타세력이 민족의 리익에 배치되게 일본과의 굴욕적인 《국교정상화회담》을 강행추진하고있는것을 목격하면서부터였다. 독재권력은 예비역장성들의 회담지지서명을 거부하는 그를 모해하고 암암리에 제거하려고 책동하였다. 생사운명의 갈림길에 놓인 그는 1972년에 남조선사회와 결별하고 대양건너 카나다로 이주하였다. 그는 이역땅에서 《카나다조국통일회》, 《배달민족회》 등을 뭇고 신문 《배달신보》발행인으로서 남조선독재《정권》을 반대하고 남조선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1979년 5월 12일은 그에게 있어서 지나온 생을 구획짓고 새로운 인간으로 세상에 두번다시 태여난 영원히 잊을수 없는 날이였다.

그날 나라일에 그처럼 바쁘신 위대한 일성주석님께서 조국을 방문한 최홍희선생을 만나주신것이다. 멀리 해외에서 조국을 찾아온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시며 그의 두손을 꼭 잡으시고 포옹하신 주석님께서는 그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동포애의 따뜻한 정이 차넘치는 자리에서 주석님께서는 우리의 이와 같은 상봉은 조국의 통일을 위해 같이 손잡고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는데서 대단히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남조선군사독재《정권》과 결별하고 해외에 나가 태권도로 민족의 얼을 빛내이며 조국통일에 이바지하려는 애국심을 간직하고있는데 대하여 그리고 해외에서 통일운동을 벌려온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였다. 계속하여 주석님께서는 그에게 우리 민족자체의 힘으로 조국을 통일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강조하시면서 해외의 민주인사들이 조국통일3대원칙을 고수하고 리행하는데서 지침으로 되는 교시를 하시였다. 주석님의 고귀한 가르치심은 최홍희선생에게 있어서 자자구구 인생의 라침판으로 되였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그후에도 조국을 방문한 최홍희선생을 여러차례 만나주시고 애국과 매국이 뒤엉킨 그의 인생행로에서 불미한점은 백지화하시고 곡절많은 인생의 마음속상처를 깨끗이 가시도록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베푸시였다.

그 나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 최홍희선생을 원형으로 한 속편을 창작하도록 하시여 그의 인생이 예술화폭과 함께 더욱 아름답게 빛나도록 보살펴주시였다.

절세위인들의 대해같은 믿음과 은총속에서 불우한 사나이로부터 복받은 행운아로 다시 태여난 최홍희선생은 오래동안의 정신적방황에서 벗어나 통일애국의 곧은 항로를 따라 인생의 노를 저어갈수 있었다.

1980년 9월 최홍희선생이 인솔한 태권도시범단은 조국에서 성황리에 시범출연을 하였다. 어느날 그를 만나시고 태권도시범출연에 대한 조국인민들의 열렬한 절찬을 들려주신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선생이 총재로 있으면서 국제태권도련맹을 세계적의의가 있는 조직으로 발전시킨것은 우리 민족의 커다란 자랑이라고 하시면서 그의 공로를 높이 치하하시였다.

민족의 슬기와 기상이 담긴 태권도에 깃든 최홍희선생의 재능과 애국심을 귀중히 여기시고 민족의 재사로 높이 내세워주신 위대한 주석님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후 그가 집필한 전 15권으로 된 《태권도백과사전》을 조국에서 출판하도록 조처하시여 최홍희선생이 평생소원을 풀도록 배려해주시였다.

태권도에 대한 최홍희선생의 꿈을 실현시켜주고 우리 나라를 태권도모국으로 존엄떨치도록 하시려는 위대한 주석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관심과 보살피심은 끝이 없었다.

주체79(1990)년 1월 한 일군을 만나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최홍희선생이 조국에서 태권도관을 지어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내비친데 대하여 상기하시면서 아빠트 한두채를 짓지 못하더라도 태권도관을 꼭 짓도록 할데 대하여 이르시였다. 그후 태권도관을 세울 위치도 정해주시고 건물형성안도 일일이 지도하신 그이께서는 《태권도전당》이라고 현판글까지 손수 써주시였다.

그이의 세심한 지도와 보살피심속에 1992년 9월 태권도전당이 건설되였다. 태권도에 평생의 뜻을 품었던 최홍희선생은 절세위인들의 한량없는 믿음과 사랑속에 자기의 념원을 성취하게 되였다. 당사자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던 태권도를 대중화, 생활화하는 문제들도 환히 밝혀주시고 온갖 조치들을 다 취하여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깊은 관심과 보살핌속에서 우리 나라에 정연한 태권도보급체계가 세워지고 학생소년들과 근로자들속에서 태권도운동이 활발해지고 태권도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게 되였다. 짧은 기간에 세계의 5대륙과 많은 나라들에 널리 파급되여 세계적인 무도로 위력떨치게 되였다.

《태권도때문에 나의 인생은 싸워야 할 파란과 무릅써야 할 모험도 많았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살벌한 타향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기구한 운명에 있었지만 위대한 주석님과 장군님이 계시기에 영세속에 발자국을 남기려던 나의 꿈은 이루어졌다. 한 인간으로서 이 이상 흐뭇함과 즐거움을 다 표현할수 없는것이 유감이다. 주석님과 장군님이 계시여 오늘의 최홍희가 있고 태권도가 있는것이다.》

생전에 최홍희선생이 태권도인들에게 한 말이다.

그가 토로한것처럼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최홍희선생에게 베푸신 은총은 이루 다 헤아릴수 없다. 최홍희선생이 배짱이 있고 립장이 있다고, 씨원씨원하고 한다면 하고 안한다면 안하는 결단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의 인간됨을 높이 평가도 하시고 언제인가 그가 병상에 몸져누워있을 때에는 최선의 치료대책을 강구하도록 하시고 귀한 약재도 보내주시였다.

인간의 참모습은 생의 마지막순간에 비낀다고 하였다.

2002년 6월 운명을 앞두고 최홍희선생은 태권도련맹의 관계자들에게 마지막말을 남기였다. 자신이 다 받들지 못한 위대한 주석님과 장군님의 뜻을 태권도인들이 끝까지 실천해달라는 당부였다.

애국충신, 애국적무도인의 참모습을 그대로 보여준 최홍희선생이다. 자기 인생에 한때 파란곡절은 많았지만 그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믿음과 은총속에 인생의 옳은 길을 걸으며 애국지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무도인으로 생의 흔적을 남기였다.

하기에 국제태권도련맹 부총재는 정통태권도인들은 위대한 일성주석님과 위대한 김정일각하께서 최홍희선생과 국제태권도련맹에 돌려주신 사랑과 은정을 언제나 잊지 않을것이라고 말하였다.

민족정통무도발전에 크나큰 로고와 심혈을 기울이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원수님의 정력적인 령도와 세심한 보살피심속에 태권도전당이 보다 현대적으로 개건되였고 지난해 9월에는 제20차 태권도세계선수권대회가 성황리에 진행되여 정통무도의 우수성과 위력을 힘있게 과시하였다.

 

본사기자 리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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