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주체107(2018)년 3월 13일 《통일신보》

 

  민족단합의 넓은 품에 안아주시여 (4)

 

불미스러운 과거를 백지화하시고

 

과거를 불문에 붙이시고 따사로운 한품에 안아 참된 애국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절세위인의 사랑속에서 인생을 빛내인 사람들속에는 전 남조선 《국방경비대》총사령관이였던 송호성선생도 있다.

주체45(1956)년 5월 중순 송호성선생을 비롯한 재북인사들은 내각청사에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접견을 받게 되였다. 몸소 마중나오시여 그들의 손을 하나하나 따뜻이 잡아주신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시여 일일이 자리까지 권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건강은 어떠하며 생활에서 애로는 없는가를 상세히 알아보시였다. 그이께서는 이제껏 여러분들을 한번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오늘은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시며 조국통일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주석님께서는 그들과 오찬도 같이하시면서 한집안식구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시였다.

백두산호랑이로 이름높아 왜놈들을 벌벌 떨게 하신 주석님을 한자리에 모신 송호성선생은 동족에게 총부리를 돌려댔던 자기의 지난날이 돌이켜져 죄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차별없이 대해주는 어머니처럼 그의 민족적량심을 믿으시고 불미스러운 과거를 백지화하시며 뜨겁게 품어주시는 주석님의 크나큰 도량에 선생은 눈굽이 뜨겁게 젖어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선생은 해방전 장개석국민당군대의 기병사단장, 《상해림시정부 광복군》의 고급참모를 지냈었다. 어느 군대에 있건 일본군을 패망시키는 전장에서 한몸을 바쳐 싸운다면 그것이 조선독립에 기여하는 길이고 애국의 길이라고 여기였던 그였다. 그러던 그는 8. 15후 남조선 《국방경비대》사관학교의 특별훈련생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이미 장개석국민당군대에서 복무하면서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와 공존할수 없다는 관점에 젖어있던 그는 남조선에서 휘몰아치는 《반공》의 회오리바람속에 자신을 내맡기였다.

미국은 그의 반공정신과 지난 기간의 일정한 실전경험에 기대를 걸고 《국방경비대》사관학교를 졸업시켰고 련대장을 거쳐 《국방경비대》총사령관으로까지 승진시켰다. 송호성선생은 미국의 지시에 따라 《폭동군토벌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여 려수군인폭동을 진압하면서 고뇌와 번민에 시달리게 되였다. 폭동군인들속에서 울려나오는 《우리는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는 웨침소리를 듣고 《송호성은 미국의 삽살개다. 민족앞에 대죄를 짓기 전에 총을 거두라.》고 쓴 삐라들도 보면서 마음은 무거워졌다.

미국에 의해 조선에서 전쟁의 불길이 타래쳐올랐을 때 그는 자신이 결국은 미국의 값싼 《용병》, 《번견》이 되여 이제는 동족을 반대하는 싸움판에까지 나서게 되였다고 생각하니 수치감이 온몸을 엄습하였다.

하여 그는 민족의 정의가 있고 존엄이 살아숨쉬는 공화국으로 의거입북하는 용단을 내리게 되였다.

전후에 선생은 오하영, 윤기섭, 조소앙을 비롯한 여러 재북인사들과 함께 통일애국사업에 나섰다.

주체46(1957)년 10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던 선생을 비롯한 여러 재북인사들을 또다시 만나주신 위대한 일성주석님께서는 자주와 예속의 판이한 두길로 나가고있는 북과 남의 대조적인 현실을 알려주시면서 진정한 애국자가 되려면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야 한다고, 분렬된 조국을 후대들에게 넘겨줄수 없다고 교시하시였다.

애국애족의 숭고한 뜻 맥박치는 주석님의 교시를 가슴속깊이 새겨안고 선생은 통일성업의 길에서 모든 힘과 정력을 다 바치였다.

송호성선생은 1959년 3월 70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도록 배려해주시였다.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걸은 그를 먼 후날에도 잊지 않으시고 조국해방 45돐이 되는 때에는 조국통일상을 수여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이렇듯 온 겨레를 통일애국의 길에 내세워주고 이끌어주신 위대한 주석님의 대해같은 덕망에 의해 송호성선생은 오늘도 겨레가 기억하는 통일애국인사로 빛나고있다.

 

본사기자 주 일 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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